소설리스트

62. (63/111)

62.

당근을 다 해치우자마자, 밖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듯 시종들이 접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있는 새우를 들고 왔다. 고소한 버터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역시 세상은 아름다워.’

새우 하나를 입안에 넣으니, 버터 향이 혀를 감싸면서 탱글탱글한 새우 살이 입안에서 터졌다.

‘와, 완전 맛있어.’

도대체 주방장은 어떤 훈련을 하기에, 이렇게 요리실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좋아질 수 있는 거지.

초반에 왔을 때도 카델리온의 밥은 정말 맛있었지만,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음식의 맛이 좋아졌다.

하나 먹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정도에 이르렀으니까.

근데 이상하게 카델리온가의 음식은 질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먹으면 질릴 법도 한데.

열심히 새우를 먹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포크를 내려놨다.

인생은 길고 맛있는 것은 많이 먹어야 한다. 라는 내 지론과는 달리 어느 정도 음식이 차면 내 몸은 음식을 거부했다.

어릴 적 기억이 퍽 강렬하게 내 몸에 박혀 있는지, 일정 수준 배가 차면 무언가 먹는 것이 꺼려졌다.

새삼스럽게 이곳에 처음 와서 밥 먹을 때가 생각났다.

“고양이님, 아 해보세요.”

‘우웨에엑.’

“고양이님, 이건 먹어야 하는데…….”

‘마리, 정말 못 먹겠어. 나 좀 살려줘.’

그러니까, 디저트 같은 경우가 특별한 거지, 나머지는 잘 먹지 못했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은 채 새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먹고 싶은데, 먹기 싫다.

가슴 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치열하게 갈등했다.

“아리엘, 딱 두 개만 더 먹자.”

하지만 카델리온 가의 수인들은 나를 더 먹이기 위해 안달이었다.

“호랑이 위랑 고양이 위랑 똑같지 않아. 생각해 봐, 몸집부터 다른걸.”

나는 그만 먹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너의 식사량은 다람쥐보다도 적을걸.”

“다람쥐보다는 많을걸.”

“다람쥐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아리엘?”

“그래도 스테이크 한 접시랑 샐러드 다 먹었잖아.”

그 정도면 엄청 많이 먹은 거지.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는 샐러드도 몇 조각 못 먹고 끝났는데.

이안과 마리가 열심히 기겁한 결과물이었다.

처음의 식사량을 보고 기겁한 마리와 이안은 나에게 ‘딱 하나 또는 두 개만 더’라며 입에 넣었다.

“수인이 이 정도밖에 안 먹는 게 가능한 거니? 어떻게 이 정도만 먹을 수 있니. 아리엘.”

“호랑이들이 많이 먹는 거 같은데…….”

“네가 먹는 양은 아마 참새보다도 적을걸. 이러니 연무장을 많이 못 돌지 아리엘.”

“나름 많이 먹는,”

“이게 문제였네. 운동하는 것보다 이게 더 시급했어. 여태까지 뭐 했니, 이안?”

“누님, 놀랍게도 디저트를 제외하곤 한 입도 먹지 않은 원래의 아리엘보다 훨씬 많이 발전한 상황입니다만.”

“…한 입도 못 먹었다니?”

“지금 보십시오. 아리엘이 원래 저 정도 먹었을 것 같습니까?”

“아리엘 이거 하나만 더 먹으면 오늘 연무장 뛰는 거 한 바퀴 줄여줄게.”

“그럼 더 먹어야죠.”

루이즈도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뼈가 보일 정도로 말랐던 몸이 그냥 마른 수준으로 발전했다.

무려 스테이크 한 접시를 추가로 비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 다 한 거지. 뭐.

“손바닥 반만도 못한 스테이크랑 양상추 네 조각에 새끼손톱 크기만 한 빵 튀김 한 조각 있었던 샐러드?”

이내 이안이 내 뿌듯한 표정을 와장창창 박살 냈다.

그의 접시 위에 있는 양과 내 접시 위에 있는 양은 아예 달랐다. 애초에 접시 크기부터 비교할 수 없었으니까.

“…….”

“딱 두 개만 더 먹으면 야식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진짜로 이번만이야.”

나는 미적거리며 새우 두 개를 입에 넣고 먹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새우가 내 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본 그가 잘했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었다.

그 모습에 감격한 시종이 무려 샐러드 한 접시, 스테이크 한 접시, 새우를 세 개나 먹은 아리엘의 소식을 주방장에게 전달하자, 주방장이 감격의 눈물을 쏟는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

나뭇가지를 훑고 지나가는 선선한 바람을 타고 푸르른 나뭇잎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큰 아름드리나무의 나뭇가지들이 서로를 스치며 지나갔다.

돗자리를 펴놓고 나무 그늘 밑에서 책을 읽으니 서늘한 초여름 바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이제 그만 놓아줄 생각 없어?”

“응, 없어.”

벌써 세 번째 들려오는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나에게서 냉기가 느껴진다나 뭐라나.

나는 이제 해탈하게 웃으며 익숙하게 책을 넘기는 수준에 도달했다.

‘나도 이안에게서 받는 온기가 좋긴 한데.’

이안은 내 차가운 기운이 좋다면서 나를 죽부인 안듯이 끌어안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진짜 나를 죽부인처럼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뒤에서 몰려오는 따뜻한 기운은 퍽 포근했기에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한여름에 최저 온도로 에어컨 틀어 놓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초여름에 뜻밖의 안락함을 느끼면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현대수인사』

정확히 몇백 년 전부터 작년까지의 역사가 다 담겨 있는 작년에 개정된 개정판이었다.

‘우와. 무슨 똑같은 책이 뭐 이리 많아.’

카델리온 서재에서는 현대수인사의 초판본부터, 작년에 개정된 개정판까지 다 있었는데, 개정을 할 때 내용을 추가하고 빼지는 않는지, 책이 점점 두꺼워지기만 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가장 최신에 나온 책으로 한 권 집어온 것도 있었다.

‘이러다가 이 책이 백과사전보다 두꺼워지는 게 아닐까.’

한국이었다면 진작에 라면 받침대로 이용되었겠는걸.

나는 그 책을 빤히 쳐다보며 라면 받침대가 되어버린 내 전공 서적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읽어야지.’

무릇 수인이라면 역사는 다 알아야 하지 않을까.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다.’

나는 전생 어딘가에서 주워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읽다 만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자잘한 전쟁들을 제외하면 대륙은 평온했다. 그 작은 전쟁들마저도 평화조약에 의한 동, 서, 남, 북 지역의 연합군에 의해서 빠르게 종전됐다.

그렇게 최근 몇십 년은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맞았다.』

나는 빠르게 몰입해서 글을 읽어나갔다.

어딜 가나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제일 재밌었다. 그리고 역사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의 모음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전생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역사이기도 했다. 이야기의 흐름만 알고 세부적인 것들만 외우면, 공부하는 데 문제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5년 전 동부에서 작은 전쟁이 발발했다. 처음에는 몇백 명이 채 되지 않는 군대로 시작했으나 그것은 각국의 지원으로 점차 부피를 키웠다. 처음에는 비둘기와 까마귀의 대치로 시작된 전쟁은 오히려 연합군 때문에 더 확산되었다.』

5년 전이면, 열넷일 때네.

아직 생일이 안 지났으니까.

‘그때 이안은 뭐 하고 있었으려나.’

그도 이 전쟁에 있었을까.

책에서는 그의 과거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문득 궁금해졌다. 책에서 그를 언급하는 시기는 그가 가주가 된 이후부터였다.

『늑대의 마르코스가 비둘기에게 붙고, 여우의 히아트가 까마귀에게 붙었다.

거기에는 종족 간의 커다란 이해득실이 얽혀 있었다.』

머리칼에서 그의 손이 얽혀 오는 느낌이 났다.

쉼 없이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의 호랑이와 남쪽의 사자가 늑대에게 붙고 표범이 까마귀에게 붙었다.』

‘북쪽의 호랑이면 카델리온이라는 건데.’

5년 전이면 이안이 14살 때인 건가.

‘어릴 때의 기억에 대해 묻는 건 실례겠지.’

썩 좋지 않은 기억들로 채워졌을 수도 있으니까.

“왜, 아리엘 혹시 물어볼 거 있어?”

“아직은. 그냥, 네 얼굴 보고 싶어서 봤는데.”

얼굴을 올려 이안을 쳐다보니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생글생글 웃었다.

“이안 님. 올해는 동쪽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쟤는 도대체 언제 왔을까.’

분명, 혼자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인원이 한 명 한 명 늘어나는 느낌은 뭐지.

소리소문없이 곳에 앨런은 나무 그늘 밑에 테이블과 의자 세 개까지 펴놓고 느긋하게 냉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를 쳐다보자 손으로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아리엘 님, 여기 의자에 앉으시는 건 어떤가요?”

“나는 그냥 누울래.”

저 의자에 앉아서 앨런에게 놀림 받을 바엔 차라리 이안의 죽부인이 되는 게 나은 것 같은데.

내가 이안의 품으로 더 파고들곤 책으로 시선을 돌리자 뭐가 만족스러운지, 그가 나를 더 세게 껴안았다.

그 모습을 본 앨런이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이안 님에 이어서 아리엘 님까지도 거절하시다니. 두 분께 매정히 거절당한 제 마음이 아려옵니다.”

방금 앨런이 했던 얘기 때문인지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글자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슈엘라를 보려면 나도 동부 한 번 정도는 가야 하는데.’

“아리엘은?”

‘날 데려가게?’

진짜 나 운 왜 이렇게 좋지.

안 그래도 동부에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했던 나는 깜짝 놀라 이안을 쳐다봤다.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방금까지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했던 앨런은 어느새 멀쩡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동쪽은 굳이 왜 가야 하는데. 동쪽에서 하는 축제 때문에?”

“그것도 있고, 중앙 회의에서 나온 길을 새로 만드는 것도 얘기를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동부의 마르코스와 카온 가(家) 쪽에서 초대장을 보냈더라고요.”

이안은 몇 년 전 무엇이든 은혜를 꼭 갚을 테니 급하게 자기 아들을 찾는 데 도와달라고 했던 서신을 떠올렸다.

누가 봐도 절박함이 느껴지는 필체였는데.

“카온 가(家)도 동쪽에 있었지.”

“네. 동쪽 숲속에 있습니다.”

카온 가에서 보낸 서신에는 여러 번 생각한 듯, 잉크를 꾹꾹 눌러 쓴 자국이 여러 곳 있었다.

아직 초대장을 아직 전달하지 않고 들고 있던 앨런이 이안에게 카멜레온에서 보내온 초대장을 전달했다.

이안이 무심하게 초대장을 받자, 잠시 뜸을 들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없어졌다고 했던 카온 가문의 자제 기억나십니까.”

“아. 그 후계자 말하는 건가?”

앨런이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고 눈두덩이를 꾹꾹 문질렀다.

“네. 실종되었던 카멜레온 수장의 자제가 돌아왔다고 하니까요.”

그 말에 아리엘이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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