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62/111)

61.

바로 뒤에서 고막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단검을 든 그 상태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뒤에서 이안이 검을 잡고 있는 내 손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묵직하고 깊은 이안 특유의 향이 나를 감쌌다.

“그리고 검은,”

그가 내 손을 쥐곤 사십오 도보다 조금 더 큰 각도로 팔을 올린 뒤 휘둘렀다.

칼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앞에 있는 나무로 향했다.

“이렇게.”

타아앙!

그러자 혼자 때렸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큰 파열음이 났다.

그가 한 번 더 내 손을 잡고 칼을 휘둘렀다.

“방금 전보다는 왼손에는 힘을 더 빼고 오른손에 살짝 더 힘을 준 상태로,”

“이렇게 때리던가.”

타아악!

나무 인형이 큰 소리를 내면서 움푹 파였다.

자세히 보니, 여태까지 내가 나무 인형에 칼을 휘둘러서 가한 타격량보다 이안과 함께 때린 두 대의 타격량이 더 큰 것 같았다.

검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손바닥이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귓바퀴를 타고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먹먹한 목소리에 보고 있던 것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내 몸은 어느새 찌르는 동작을 할 때처럼 바뀌어 있었다.

“어느 한 손에 힘을 더 쏟지 말고 중앙에다가 힘을 방출한다고 생각하고 쏘면 돼.”

그가 그대로 내 팔을 뻗었다.

“이렇게 찔러야지, 더 깊숙이 찔러져.”

잠시 그 자세 그대로 있던 이안이 갑자기 내 한쪽 팔을 들어서 쭉 뻗었다.

“검으로 무언가를 칠 때는 이렇게 쭉 뻗어야 하고.”

퍽!

칼끝이 매끄럽고 거침없는 곡선을 그리면서 올라가던 중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나무 인형을 칠 때와는 다른 굵은 소리였다.

나무에서 날아오던 까마귀가 맥없이 떨어졌다.

이안의 발치에 힘없이 늘어진 까마귀가 움찔거렸다. 그걸 힐끗 바라본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날개를 밟으며 다가왔다.

푸드덕거리던 까마귀가 추욱 처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안은 그것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땀에 젖은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곤 뒤로 슬쩍 물러나려던 아리엘을 붙잡았다.

“그렇게 생각 없이 검 쓰다가 손목 망가진다고 루이즈가 말해 주지 않았어?”

그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그의 표정에 아리엘은 입술만 깨물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그의 손에 붙잡힌 내 팔목을 바라봤다. 팔목이 퉁퉁 부어올라 와 있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손목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쳐다봤다.

“그렇게 연습하면 안 하느니만 못해. 몸만 더 망가지고.”

생각을 비우려고 단검을 연습한다는 것이 공상을 불러왔다.

내 팔목을 감싸 쥔 그가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자, 황금빛 기운이 팔에 맴돌다가 사라졌다.

‘야!’

쟤가 페로몬을 쓰는 건 거의 살인예고나 다름없는데.

기겁한 내가 그의 손에서 팔목을 빼내기 위해 팔을 움찔거렸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반강제적인 치료는 안 해도 되는데…….’

그냥 며칠 아프면 되지 않을까.

부어 있었던 팔목이 빠르게 가라앉자, 그가 내 팔목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주먹을 쥔 내 손을 한 바퀴 돌렸다.

이안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팔목은 다 나았네.”

“고마워.”

팔목에서 시선을 떼고 밑으로 눈을 옮기니 늘어져 있는 까마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까마귀를 다시 본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가 그 특유의 재수 없는 웃음으로 돌아왔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치유 못 해. 죽었어.”

‘…네가 날개까지 밟는 거 확실히 봤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러자 그가 눈꼬리를 예쁘게 휘었다. 그늘이 져 있지만 군데군데 밝은 햇빛을 받은 하얀 머리에 가까운 은발이 사르륵 흐트러졌다.

순간적으로 그 모습이 원작이랑 겹쳐 보였다.

『“까마귀네.”

클로에 옆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그에게로 날아가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까마귀의 목을 움켜쥐었다.

마침내 까마귀가 축 늘어지자 그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클로에에게 그것을 건넸다.

“선물. 갖고 싶어 하길래. 살아 있는 것보단 죽은 게 더 좋잖아.”』

지금 내 앞에 있는 수인은 어딘가 정신 나간 면도 있지만 대개 정상적이었다.

그니까, 원작 같이 정신이 나가진 않았다.

‘정신이 나가도 다른 방면으로 정신이 나갔지. 지금은.’

하지만 방금 그 차가운 표정을 보니 순간적으로 섬뜩했다. 정말 원작 속 그를 잠시나마 엿본 것 같아서.

『한겨울의 그 날을 끝으로 참혹한 시신으로 변해버린 그들은 영원히 귀족 사회에서 사라졌다. 이안 카델리온의 짓이었다.』

바닥에 있는 까마귀와 내가 겹쳐 보였다.

정확히는 바닥에 있는 까마귀와 비슷한 꼴이 될 미래의 나와 겹쳐 보였다.

갑작스레 서늘해진 목 주위에 목이 잘 붙어 있나 내 목을 더듬거렸다.

그래. 아직은, 여름이었다. 한겨울이 아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안 죽여도 되면 되도록 죽이지는 마.”

시몬드 가 식솔들을 죽일 때, 나까지 죽일 필요는 없잖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 그를 바라봤다.

“그래.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면 죽이지 않을게.”

“약속해.”

내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자 그가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여름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밑에 널브러져 있던 까마귀의 깃털이 여름 바람을 타고 허공에 잠시 떠올랐다.

“아리엘, 네 머리 위에 있는 나뭇잎도 관상용으로 저녁에 올려 달라고 할까? 두 개가 올라와 있으니까 하나씩 올리자.”

이안이 장난스럽게 내 머리에 있는 나뭇잎을 떼서 빙글빙글 회전시켰다. 어느덧 그 서늘한 분위기는 씻은 듯이 사라진 뒤였다.

그 소리에 잠시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던 내가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

“그리고 오늘 저녁 디저트는 초코 식빵이래.”

그 말에 이어지던 내 말이 끊겼다.

초코 식빵이 저녁 디저트 메뉴로 자리 잡은 지는 꽤 됐다.

단 것도 좋아하지 않는 애가 매번 초코 식빵을 간식으로 먹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저녁 디저트 메뉴로 올려놓았다.

생각해 보면 이안의 초코 식빵을 향한 집착은 내가 외출하겠다고 한 순간부터가 시작인 것 같았다.

단 걸 싫어해 디저트를 잘 먹지 않던 이안은 어느 날 초코 식빵을 먹기 시작했고, 급기야 초코 식빵을 만드는 전문 파티시에까지 고용했으니까.

그러니, 카델리온의 초코 식빵은 너무 환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주방장과 카델리온의 파티시에가 직접 개발해 낸 초코 식빵을 팔면 백 미터 밖까지 사람들이 줄 서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2의 아틀레아가 될 수도.’

이건 쓸데없이 훌륭한 인재를 쓰고 있는 탓이었다.

“크림치즈도 준비해 달라고 부탁드려야겠다.”

게다가 일부러 크림치즈와 어울리게 만든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크림치즈와 초코 식빵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근데 초코 식빵이 다른 초코 식빵을 먹으면 그건 동족 학살 아닐까?”

“아니거든. 그리고 내가 동족 학살하는 거면 이안도 동족 학살하는 거지. 너도 초코 식빵 위에 크림치즈 올려 먹잖아.”

아리엘이 고개를 올려서 이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말했잖아. 내가 초코 식빵이면 넌 그 위에 올라가는 크림치즈라고.”

그러자 그가 입가에 슬며시 웃음기를 띤 채로 말했다.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 않긴 뭐가 나쁘지 않아. 이제 무생물로 진화하려고 하는 거니.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네가 초코 식빵 하면 난 크림치즈 할게.”

그런 한심한 생각을 못 박듯이 그가 말했다.

‘왜 저 얘기를 행복한 표정으로 하는 거지.’

무생물이 되고 싶지 않았던 엄연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무생물이 아니야. 그리고, 식빵치곤 엄청 크잖아.”

이렇게 큰 식빵 봤어? 봤냐고.

그러자 이안이 푸흡, 하고 웃었다.

그걸 본 내 눈초리가 새초롬해졌다.

“야. 웃냐.”

“아니, 우리 아리엘 엄청 크지.”

그가 아리엘의 머리 위치를 가늠하면서 말했다. 얄궂게도 내 키를 가늠하며 뻗은 그의 손이 위치한 곳은 그의 명치 부분이었다.

내가 네 명치까지 밖에 오지 않는다니. 저 정도면 땅콩이지. 내가 땅콩은 아닌데.

‘네 눈엔 내가 땅콩만 하게 보이는구나.’

그걸 보고 있었던 내가 발끈해서 키를 재기 위해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내 머리는 정확히 그의 명치보다 조금 위였다. 젠장.

나는 땅콩이었다.

…세상 키 작은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태어난 지 19년, 키 작은 편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자괴감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벌써 한 걸음 뒤에 저 남자주인공이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인생.’

그걸 보고 허탈함을 느낀 난, 빠른 걸음을 포기하고 평소의 속도대로 걸었다.

‘불공평한 세상.’

새삼스레 알고 있던 사실이 원망스러워졌다.

***

빵 튀김이 들어 있는 시저샐러드를 한 접시 해치운 나는 앞에 있는 음식을 쳐다봤다.

스테이크.

그것도 미디엄 레어로 구운 스테이크였다. 고기 안에서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꽉 잡고 있는 스테이크. 하지만 문제는 그 옆에 완두콩과 당근구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안이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은근슬쩍 완두콩을 소스 안에 숨겼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히 스테이크를 먼저 잘라서 입에 넣었다.

그러자 앞에 있는 이안이 싱긋 웃었다.

“아리엘, 완두콩 숨겨 놓지 말고 먹어야지.”

얄짤없이 걸려 버렸다.

나를 그의 방에 데려온 후부터 이안은 내 균형 잡힌 식생활을 위해서인지 뭔지 내가 편식하는 것들을 조금씩 먹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할당된 완두콩들을 다 먹은 후, 스테이크에 다시 입을 댔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버리는 스테이크 맛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먹고 어느 정도 배가 찬 나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아리엘, 다 먹었어?”

“어.”

“당근은?”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내 접시에는 구운 당근만 올려져 있었다.

“그건 좀…….”

당근 하나 정도는 봐주라. 응? 한 번만 봐줘.

나는 간절한 눈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루이즈가 있었다면 당근은 안 먹어도 된다고 옹호해 줬을 텐데.

내심 여기 없는 루이즈가 보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면 안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강경한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먹으면 이따가 야식 없어.”

야식은 못 참는데.

그 말에 하는 수 없이 포크를 들고 당근을 찍어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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