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카델리온 가주, 안녕하십니까.”
숙제 밀린 어린아이처럼 카델리온 저택에 가기 싫어하던 카린은 전날에 카델리온 저택에 방문한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녀가 인사하자, 응접실에 앉아 있던 이안이 웃으면서 일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하나 고아 먹을 것 같은 저 재수 없는 웃음은 똑같았다.
“오시는 걸 조금 더 일찍 일러주셨으면 더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요.”
뭘 하면서 뺀질뺀질 미루다가 왜 어제 보냈냐.
“카델리온이 이렇게 환대를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무 감사해서 얼굴을 날려 버리고 싶다. 이 자식아.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피차 이야기를 질질 끌고 싶지 않을 테니, 해상교역권에 대해 바로 얘기합시다.”
“뭐 저야 좋지요.”
그가 느른히 웃자 카린은 풀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먼저, 마정석 7%를 더 제공할 테니, 해양 교역권을 달라는 주장에 말씀드리자면, 그럴 수 없습니다.”
“마정석 7%를 더 주는 것은 에티아가에 굉장한 이득이 될 텐데요. 이로 인해 바뀔 바다 안의 풍경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북부 마물에서 얻을 수 있는 마정석은 바다에 있는 에티아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긴 했다.
장인들이 보석을 자를 때 수압 조절을 하기에나, 전등으로나, 마가장 큰 역할을 했다.
바다에 사는 수인들은 마정석이 없어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마정석을 사용해 환하게 불을 밝히는 것을 훨씬 선호했다.
뿐만 아니라, 가끔식 바닷속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기도 했고.
아무리 에티아 가(家)가 은둔하고 있더라도 대해의 주인인 그들과 거래하고자 찾아오는 수인들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제안하는 형식의 해상교역권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웠다.
“마구간을 고치는 대가로 말을 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카린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티아가 대륙에 진출하지 않으면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바다’를 그들의 손안에 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서 에티아는 섬들에는 대륙에서 받은 것을, 대륙에는 다른 섬들에서 받은 것을 수출했다.
이 과정에서, 에티아는 수입할 때 사들인 물건의 가격과 수출할 때 판매하는 물건의 가격의 차액을 이용해서 이득을 봤다.
눈앞에 있는 저 카델리온은 자신들이 그들의 배로 직접 수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마정석 7%를 대가로.
마정석이 엄청나게 비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손해였다.
그렇게 되면 그로 인해 보는 장기적인 손실은 둘째 치더라도 다른 상인들을 비롯한 거래처들이 몰려올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이안이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에티아 가가 수출 중개국으로 활동하시죠.”
“상품을 사고파는 것은 섬과 북쪽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에티아 가에는 상품의 이동에 따른 비용, 유통비와 중개 수수료를 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이게 목적이었군?
그리고 그걸 들은 카린은 바로 알아차렸다.
처음에 들어주기 어려운 것을 제안하고, 그 후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꺼내는 것.
그녀가 비뚜름히 미소를 지었다.
“아, 그니까 너네의 상품에 우리가 개입하지 말고 꺼져라 이건가?”
그 말에 이안은 부정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럼 다른 가문에서도 저희가 이런 협정을 맺었는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한꺼번에 중개 수수료와 유통비를 따로 지급할 테니, 자신들의 거래는 건들지 말라는 건가.
그렇게 되면 중간의 차익을 에티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매매 차액이 아니라 중개 수수료를 취한다라.’
확실히 나쁘지 않은 조건이긴 했다. 들어오는 마정석 양이 더 많고, 중계 수수료가 어느 정도 선이 되면.
그리고 저 북부의 수장은 그녀가 마정석 양을 올리려고 할 것을 미리 알고 저렇게 불렀을 확률이 매우 컸다.
‘그럼 이쪽에서 높게 부르는 수밖에.’
“그럼 마정석 지급 비율을 더 올려. 그리고 중개 수수료는 5% 밑으로 양보 못 해.”
***
훈련장에서 단도가 과녁에 꽂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다른 곳과 다르게 나무 그늘이 져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따가운 햇빛을 피해 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리엘이 단검 여러 개를 가져와 바닥에 내려놓곤 하나씩 쥐어 들곤 던지기 시작했다.
벌써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려는 듯 뙤약볕이 내리쬐는 것을 보니 곧 동부의 축제가 시작되기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도대체 이안 카델리온이나 루이즈에게 동부에 가자고 어떻게 설득하지.’
딴생각을 하며 날린 단도가 표적 정중앙에 꽂혔다.
‘아니, 동부에 가서 뭘 어떻게 하게.’
동부에 가도 문제였다. 그녀는 그 축제에서 노예 경매가 시작된다는 것만 알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도 그 노예 경매 이름이 <작은 항아리>라는 것은 알고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팍!
새로운 단검이 또 표적에 꽂혔다.
그러나 아리엘은 과녁 쪽에는 시선을 주지도 않고 이 바닥에 널브러진 단검 중 하나를 쥐었다.
손에 굳은살이 다 박힐 때까지 단검만 죽어라 던진 노력이 드러나기 시작하는지, 아리엘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현재 아리엘은 루이즈의 족집게 강의를 통해 웬만한 기사들보다 단검을 잘 던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노예 경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초대장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리고 나는 그 초대장이 없고.
<작은 항아리>는 이름과 다르게 규모부터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만한 규모답게 엄청난 양의 신기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가치 있는 척하는 물건들도 엄청 많겠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진짜 가치 있는 물건이 존재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잘 찾으면 대박이고 허탕 치면 쪽박인 곳.
그런 곳이 <작은 항아리>였다.
그리고 그중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이벤트는 암암리에서 전해져오는 노예 경매였다.
그리고 작은 항아리 중 노예 경매의 초대장은 엄청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전달되었다.
노예 경매이니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아리엘이 성의 없이 한 번 더 단검을 쥔 손을 내뻗었다.
‘아. 윈닉타가 있지.’
여주가 이용한 최고의 정보 상단.
돌이켜보면 윈닉타는 생각보다 원작에 많은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았다.
‘여주에게 호감을 가졌을 법도 한데.’
퍽!
단검이 다시 꽂혔다.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물론, 그들이 여주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정보 상단 마스터는 선을 넘지 않았다. 딱 돈을 받은 만큼 노력을 해 주었다.
‘약간 더 해 준 것 같았을 때도 있긴 했는데.’
그 정도의 돈을 받고 카델리온 가(家) 탈출을 도와주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것은 여주가 그곳을 자주 찾아서 그런 거 아닐까.
단골손님 서비스 정도.
‘거기 마스터한테 찾아가서 노예 상단 초대장 좀 구해 달라고 의뢰해야겠다.’
그녀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마지막 단검을 던졌다. 그러나 단검을 던진 지 꽤 된 것 같음에도, 달리 단검이 표적에 꽂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껴 앞을 바라보니 이안이 칼날을 잡고 서 있었다.
어느덧 바로 앞까지 온 그가 그녀에게 단검을 건넸다.
“아리엘, 앞은 보고 던져야지.”
“…아.”
그러자 아리엘이 한 박자 늦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미안해.”
평소였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실수였다. 멍하니 있던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손은?”
그러자 이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알잖아?”
그의 말 대로 그의 손은 원래부터 다치지 않았는지, 이미 살이 다시 올라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한 상태로 돌아간 이후였다.
“아, 어…….”
나는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나무로 된 단검을 받고 비척비척 걸어갔다. 그리고 나무 인형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곤 팔을 크게 들어 올렸다.
나무에 부딪혀 반동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단검을 쥐고 있는 상태 그대로 힘을 주어 잡아냈다.
오늘따라 유달리 타격감이 크게 느껴졌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에 이안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하지만 이안이 자길 바라보든 말든 아리엘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게 꼬인 거지.
그렇게 영혼 없이 그녀가 단검을 들고 기계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단검이 표적에 들어간 다음 날부터 수백 번은 한 동작이었다.
한참을 나무 인형에 단검을 치는 연습을 하고 있던 내가 문득 생각했다.
시몬드.
아예 그 인간들부터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시몬드 가문 애들은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원작 때문에 언제 죽을까, 겨울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전전긍긍하는데 도대체 원인 제공자들은 뭐 하고 사는 걸까.
타악!
전과 달리 나무의 파열음이 유독 세게 났다.
타앙!
셀레스틴도 그렇고.
‘그 부지런한 시몬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다른 수인을 데려와 나에게 한 듯이 칼을 꽂는 것처럼 성실하게 정신 나간 짓을 하면 몰라도.
‘이상해.’
시몬드 가문에 포함되지도 않은 내가 거기에 휩쓸려 죽어야 하고,
퍼억!
‘왜 이럴 때만 내가 시몬드 가문인 걸로 포함되는 거지?’
나는 그들과 똑같이 대우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그들의 시종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살았는데.
‘도대체 왜, 이럴 때만, 내가 시몬드 가문인 거지.’
타앙!
나무와 단검이 충돌한 진동 때문에 손이 얼얼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억울했다.
‘내가 그 말종들을 쓸어버리면 몰라도.’
왜, 하필 원작에서는 시몬드 가가 통째로 뿌리 뽑힌다고 해서.
식솔들까지.
“아리엘.”
뒤에서 이안이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시몬드 식솔이라기엔 너무 억울한 부분 아닌가.’
도대체 어떤 가족이 자신 식솔의 배때기를 칼로 가르고 바늘을 꽂고 그러나.
“아리엘.”
심지어 그 인간들은 날 부려 먹었으면서도 내 손이 닿은 건 다 불태워버렸지.
도대체 어딜 봐서 내가 시몬드 가인 거지?
“야. 정신 차려.”
그러자 바로 귓가에서 이안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