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 마지막 말에 어느덧 마음속에서는 에티아 가주에 대한 작은 경계심마저도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우리 잘 맞는 편이네.”
씩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에티아 가주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원시원한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 입맛마저도 비슷한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나쁠 수 있을까.
근데 뭔가 생각하니 이상했다. 원래 에티아 가는 카온 가와 함께 은거 중인 대표적인 가문으로 꼽히지 않나? 심지어 평기일을 제외한 웬만한 연회나 파티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심지어 평기일 파티에서도 그들의 입장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들어왔다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하고 나가는 걸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맛있는 걸 많이 알 수 있는 거지.’
심지어 가나슈에서 그녀를 한두 번 본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내 눈빛이 점점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근데 에티아의 가주는….”
그러자 카린이 말을 막는 것처럼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근데 상단주도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어떨까? 나도 이런 연회장에서나 쓸 법한 말투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귀족들이 말하는 품위나 예의를 중요시하는 편은 아니거든. 하하.”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앞에 있는 카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이건 비밀이지만 비안 웨스트라서 말해 주는 거야.”
자신은 말을 편하게 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 아까보다 훨씬 편안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미 알아챘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바다를 떠나서 대륙에 자주 돌아다녀.”
대륙과 비교해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다른 상인과의 교류는 에티아 가문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수입원이었고, 그렇기에 에티아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다른 상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무척 중요했다.
몇몇 상인들은 그들이 단순히 은거하는 종족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에티아 가문을 깔보고 가격을 더 높게 부르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신비주의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대대로 에티아 가주들은 다른 가주들보다도 대륙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륙의 정세를 알아냈다.
어디에도 움직이지 않고 자신들의 땅에만 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고, 이는 에티아 가문의 쇠락을 불러올 것이었다.
“물론, 귀족들의 연회나 파티는 가지 않지만. 이래 보여도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많이 대시 받았거든.”
종족의 특성상 태어난 순간부터 신비주의 이미지를 지켜 온 카린은 처음으로 그 컨셉을 다른 종 앞에서 내던졌다.
“그렇다고 하시면.”
오. 드디어 카린 에티아의 성별이 밝혀지는 걸까.
‘실례일까 봐 차마 질문하지 못했는데.’
에티아의 가주에게 가장 궁금했던 점들 중 하나였다. 여자치곤 낮지만, 남자치곤 높은 목소리, 그리고 시원시원한 중성적인 외모, 170 후반대의 큰 키.
이 모든 게 카린 에티아가 남자 같이 보이게 만들기도 했고 여자 같이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맞아. 여자야.”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한 마디로 내 안에 있었던 궁금증이 해소됐다.
“내 성별이 뜨거운 감자라고 들어서.”
“하하….”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한 내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항상 보는 사람들마다 질문을 해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카린이 어깨를 으쓱한 후 웃었다.
“그냥 거절하고 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영애분들께는 여자라는 것을 밝힐 때가 더 많은데, 개중에는 자신의 취향을 바꿔 보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꽤 있더라.”
그가 앞에 있는 레모네이드를 한입 마시곤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동쪽에서 신비한 소식이 들리던데.”
지금부터가 본론이었다.
“새로운 광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냥 직접적으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자 그녀가 호탕한 웃음을 한 번 터뜨리더니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펠릭스라는 광물을 왜 아직 공개하지 않는 거지?”
“음….”
지금부터 본론이었다.
앞에 있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머금으며 잠시 말을 골랐다. 레모네이드가 목을 타고 내려감과 동시에 내가 입을 열었다.
“예술가가 그린 그림의 가치가 올라갈 때는 사람들이 그 그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을 때이지요.”
그러자 그녀가 눈꼬리를 휘었다.
“그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어서 가치를 올리겠다는 거군?”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광석을 알리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하려고 했던 것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에게만 광물을 보여 준 것도.
그 웃음에서 그녀는 정답이라는 것을 찾아낸 건지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충분한 것 같은데. 에티아의 장인들이 그 새로운 광석에 대해 궁금하다고 난리야.”
네. 역시 정확히 짚으셨군요.
내가 그 하고 많은 초대장 중에 굳이 에티아 가문의 편지에 답장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중 첫 번째 이유가,
“영광입니다. 에티아의 장인들은 보석 세공에 굉장히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특히 푸른빛을 띠는 보석이라면 더더욱.”
에티아 가문의 장인들이었다.
에티아의 장인들은 칼을 이용하는 대신 강한 수압으로 보석을 다듬기 때문에 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들 특유의 물결이 굽이치는 듯한 고급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과장하나 하지 않고, 그들이 세공한 파란색 보석을 보면 정말 우아한 파도가 한데 굽이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한 마디로 따라 할 수 없는 그들의 고유한 기법과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고 희소한 것을 추구하는 귀족들은 그들의 손에 거친 보석을 갖지 못해 안달이었고, 은둔하는 대표적인 종족이라는 명성처럼 에티아의 장인들은 그들의 기준에 차는 것이 아니면 거의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에티아를 찾아간 두 번째 이유는,
“그래서 제안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저희 상단이 에티아의 장인들과 독점으로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대신에 하루 그레이트 홀을 빌리는 것과 앞으로의 대금까지 포함해서요.”
그레이트 홀 때문이었다.
내가 그레이트 홀을 알게 된 것은 며칠 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이안의 일 처리를 도와주고 신문을 보던 나는 우연히도 그레이트 홀이 나와 있는 신문을 봤었다.
‘이거다!’
신문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나왔던 그레이트 홀은 화려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다른 연회장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장식으로 간결하게 처리된 절제된 단아함은 그 홀이 세련되게 보이는 것이 신문에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것은 내가 앞으로 추구할 방향과 딱 맞았다.
‘저기서 보석을 공개하자!’
한참 보석을 어떻게 공개할까에 대해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던 나는 그날 벌떡 일어나 스스로 연무장 한 바퀴를 전력 질주했다.
물론, 그날 근처에 있던 루이즈에게 딱 걸려 운동에 대한 열정은 가졌을 때 키워야 하는 거라며 추가 훈련을 받긴 했지만.
그 후, 닥치는 대로 그레이트 홀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이 되거나 사진이 나와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읽었고.
그 결과가 현재의 여기, 에티아 가주와의 독대로 이끌었다.
나는 긴장으로 바싹 타들어 가는 마음을 감추곤 앞에 있는 에티아의 가주를 바라봤다.
그녀가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그러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아리엘이 가방에 들고 있던 펠릭스 보석을 꺼냈다.
그러자, 카린이 보석을 들고 꼼꼼히 살폈다.
‘이래서 펠릭스를 본 사람들마다 말이 다른 거였군.’
다이아몬드보다는 무르지만 엄청 무른 것도 아닌 것이, 장인들이 손대기에는 무척 좋아 보이는 보석이었다.
‘괴짜 같은 장인들의 취향에도 맞을 것 같고.’
“반대로 에티아의 장인들도 펠릭스 상단의 보석을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화제의 광물을 독점적으로 세공한다. 이것은 큰 자부심이 될 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희 광산은 대륙을 뒤져봐도 단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책에 그렇게 나와 있었거든.
대관절, 똑같은 광산이 대륙에 있다고 해도 광물을 발견하는 법은 펠릭스 상단만 알기 때문에 새로운 광물은 여기서밖에 취급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유능한 장인들은 여러 곳 있죠. 풍족한 지원을 받는 에티아 장인들에게는 어디로 보나 여러모로 에티아가 이득인 거래입니다.”
장인들은 보석에 대한 자부심으로 작업하니까. 그들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보석이 얼마나 역작으로 남았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컬컬한 목에 레모네이드를 수혈해주고 크림 브륄레로 영양을 보충해줬다. 크림 브륄레를 입에 넣자 입에 남아 있던 상큼함의 잔향 위에 달콤함이 몰아쳤다.
‘당 떨어졌나.’
원래도 달달했던 에클레어가 더 달게 느껴졌다. 따뜻함과 차가움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공존했다. 크림 브륄레의 유혹적인 맛에 완패한 내가 태연하게 몇 스푼 더 떠먹었다.
그렇게 몇 스푼 더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 앉아 있던 수인의 입이 열렸다.
“그레이트 홀은 왜 필요한가?”
다 왔다.
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크림 브륄레를 떠먹고 있던 스푼을 내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