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후우….”
아리엘은 점점 가까워지는 타운 하우스에 긴장감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터뜨렸다.
카델리온 저택이 아닌 다른 저택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곤 얼마 가지 않아 묵직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문이 있겠습니다. 이곳을 방문하신 목적을 알려주십시오.”
마차 안에 있었던 커튼을 조금만 걷어 경비병을 슬쩍 바라본 아리엘은 자신의 상태를 다시 점검했다.
‘고동색 머리 체크.’
손을 이마 위로 올리니 챙이 넓은 모자의 촉감이 느껴졌다.
‘모자 체크.’
‘눈코입 체크.’
아. 눈코입은 당연히 있겠지.
멀쩡한 상태로 자신이 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가방을 열어 에티아 가주가 펠릭스 상단주에게 보낸 초대장을 꺼냈다.
초대장을 확인한 기사는 잠시 동안 말없이 굳어지더니 여러 번 그것을 확인하곤 비켜섰다.
“감사합니다.”
마차를 끈질기게 쳐다보는 경비원의 시선을 떨쳐내고 꽤나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니 얼마 안 가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그러자 마부가 아닌, 저택 밖으로 나와 있었던 남자 수인이 마차 문을 열었다.
“상단주님이십니까?”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싶었던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보좌관이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하하. 그렇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아무래도 상단주님께서 이 만남을 비밀로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셔서 집사가 아닌, 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와. 엄청 신경 썼네.’
별개의 직종이긴 하지만, 보좌관이 총괄 집사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직급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에티아에서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장감으로 손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감출 수 있게 해 준 드레스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저택을 향해 걸어가던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불편하시다면 다음부터는 바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많은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기 부담스러운 아리엘이 재빨리 말했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에티아의 가주, 카린 에티아 님의 전속 보좌관인 엘라더 샤리크 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비안 웨스트라고 합니다.”
그러자 시크한 표정을 한 그녀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표정과 달리 심장은 콩닥콩닥 빠르게도 뛰었다.
사실, 표정 관리를 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푸른 꽃이 만연한 정원에 입이 벌어지지 않도록 꾹 다문 채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한 번 입을 여는 순간 표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카델리온 저택보다는 덜하긴 했지만, 에티아 가(家)의 타운 하우스는 매우 컸다. 곳곳에는 고풍스러운 그림이 걸려져 있었고 푸른색 계열로 인테리어를 맞춘 저택에서는 고급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다.
그리고 다행히, 카델리온 저택에서 총괄 집사님께 저택 가치와 인테리어에 대한 강제적인 교육을 꽤나 받은 덕분이었는지 저택에 들어서고 나서는 상대적으로 덜 놀랄 수 있었다.
‘어. 도르자스 기유의 작품이다. 점을 새겨 넣는 듯한 독특한 기법으로 섬세한 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으로….’
그리곤 중간중간에 아는 사람의 작품이 보였을 때는 반갑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느덧 꽤나 많은 응접실을 지나친 보좌관이 가장 중요한 손님을 모셨을 때 사용하는 응접실을 앞에 두고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진한 남색 문을 두들겼다.
“비안 웨스트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고 응접실 문이 열리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로운 응접실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 가운데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앞에 앉은 어두운 보라색 머리를 위로 질끈 묶고 있는 미인이었다.
‘아. 그래서였구나.’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왜 에티아의 가주 성별에 대한 논쟁이 그렇게 뜨거운지 깨달았다.
뚜렷한 눈과 높게 솟은 코는 얼굴이 시원시원하게 보이게 했고 중성적인 느낌까지 나게 했다. 정말 미녀, 미남 이런 말이 다 필요 없이 두말할 것 없는 미인이었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카린 에티아가 서글서글하게 눈을 휘며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에티아의 가주, 카린 에티아라고 하네.”
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드레스에 한 번 문지르고 가볍게 그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카린 에티아 님. 펠릭스 상단주, 비안 웨스트라고 합니다.”
카린 에티아는 그 소문만 무성했던 상단주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봤다.
동서남북의 대표 중 한 명이라던지, 능구렁이를 100마리 먹은 것 같은 배불뚝이 상인이라든지, 연륜이 꽤나 쌓인 늙은 현자일 것이라는 소문들과 멀어 보였다.
오히려,
‘다람쥐…?’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것 같은 다람쥐랑 비슷했다. 다람쥐가 일부러 허리와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한 척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았다.
눈매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이 다람쥐 중에서도 새초롬한 다람쥐랑 비슷했다. 그것도 자기보다 한 8살보다 더 어릴 것으로 추정되는 다람쥐.
마치 도토리를 땅에 묻어두고, 다음 날 도토리가 어디 있는지 몰라 찾아 헤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수인이 상단을 운영한다고?’
당황스러운 기분에 카린 에티아가 입을 달싹였다.
‘앉으라고 하시겠지?’
아리엘이 티 나지는 않지만 은근히 기대 어린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장 앉고 싶은 마음을 무시하고 책에서 배운 예법에 따라 저택의 주인이 앉기 전까지 멀뚱히 서 있는 것은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에티아의 가주는 굳건히 서 있는 상태로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신경전 하시는 건가…?’
신경전 하셔도 일단 앉은 상태에서 하셨으면 좋겠는데.
에타아 가주가 그녀의 종족이 다람쥐인지 아닌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줄 모르는 아리엘은 누구보다 빨리 자신의 다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의자의 위치를 슬며시 살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에티아 카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실례일 수도 있지만, 혹시 종족이 다람쥐인가?”
“아니요. 다람쥐는 아닙니다.”
아리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안에는 빨리 의자에 앉게 해 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
그러자 카린은 아직까지 상단주가 의자에 앉지 않은 것을 눈치채었다.
그녀가 소파에 앉자, 카린을 따라 아리엘이 자리에 앉았다.
‘다람쥐가 아니라 청설모인가?’
아까의 미소에서 다람쥐라고 한 질문에 썩 내키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하긴 오히려 비둘기나 까마귀처럼 그런 종족들이 그런 문제에 예민하긴 하지.’
다람쥐랑 청설모는 엄연히 다른 종족이긴 하니깐.
‘청설모겠군.’
상단을 운영하는 수인 사이에서 어떤 종족인지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떠올린 카린 에티아가 말을 꾹 삼켰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에티아 가주는 한결 가벼운 어조로 앞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긴장 풀어도 되네.”
그렇게 카린은 상단주를 상대로 기선제압 하려고 했던 생각들을 고이 접어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누가 보면 내가 자네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 알겠어.”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애초에 잡아먹거나 상단주를 기선제압하려고 했으면 초장부터 했을걸? 마차가 저택에 들어오기 전부터.”
사실, 카린은 굳이 귀찮게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선제압을 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나, 거치적거리게 마차가 저택에 들어올 때부터 하지 않아도 응접실 안에서만 하는 것도 충분했다.
하지만 방금의 생각들과 함께 양심을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린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앞에 앉아 있는 상단주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뭘 좀 먹여야겠어.’
새삼스레 앞에 앉은 소녀를 바라보니, 툭 치면 바로 부러질 것 같은 팔, 다리가 보였다.
‘이 정도면 말랐다라는 말한테 미안하겠는걸.’
카린이 혀를 한 번 찼다.
‘도대체 저 가문에서는 뭘 한 건지.’
도대체 애를 얼마나 안 먹였기에 이렇게 마를 수 있는 거지.
이안이 거의 뼈만 있었던 아리엘을 말랐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살을 찌워 놓은 것을 모르는 카린은 그녀의 보호자를 마음속으로 힐난했다.
카린은 어서 빨리 상단주에게 뭔가를 먹이고 싶어졌다. 저 볼에 무언가가 들어간 채 오물오물 씹히는 모습은 도토리를 까먹는 다람쥐같이 모습이지 않을까.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 레모네이드는 레시아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네.”
카린이 멀리 있던 레모네이드를 바로 앞에 내려놓자, 그제야 내 눈에 책상 위를 빼곡히 채운 디저트들이 보였다.
‘이 레모네이드는 레시아에 갔을 때 꼭 먹는 레모네이드인데.’
호화롭게만 보였던 응접실에 아는 것이 등장하니 내심 반가웠다.
카린 에티아는 앞의 영애의 두 볼이 빵빵해지는 것을 만족스럽게 보면서 접시를 잡아 내밀었다.
“이 슈는 아틀레아에서 사 온 슈고.”
어? 이것도 내 최애 메뉴인데.
익숙한 이름에 내 눈이 점점 커졌다.
아틀레아에서 사 왔을 줄이야.
긴장했던 몸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자, 긴장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역시 맛있는 음식이 가장 보약이다.
그리고 그걸 본 카린은 흐뭇한 표정으로 디저트를 몇 개 더 내밀었다.
“아, 앞에 있는 청포도 에이드와 크림 브륄레는 가나슈라는 카페에서 사 온 거라네.”
아리엘이 앞에 있는 크림 브륄레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려고 하는 그 동작 그대로 멈췄다.
가나슈를 아는 사람이 있다니.
워낙에 자리가 넓지 않고 다른 카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골목에 위치한 숨은 맛집이라 맛에 일가견이 있는 수인들만 찾는 곳이었다. 그마저도 오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데.
“어. 가나슈를 아시나요? 그곳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모르실 줄 알았는데….”
“우연히 그곳을 한 번 들린 뒤로는 그곳의 크림 브륄레가 너무 맛있어 대륙에 올 때마다 들리는 곳이라네.”
아. 카페에서 신문을 읽던 분이신가?
어렴풋이 그곳에서 보랏빛 머리칼에 항상 신문을 들고 있던 수인이 떠올랐다.
“하하. 내가 식도락에 일가견이 있어서.”
그녀가 레모네이드를 한 입 들이켰다.
“먹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해.”
카린이 씩,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한마디 했다.
“자고로 인생은 먹고 놀기 위해 사는 거 아니겠어?”
지당하신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