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럼 아리테아의 머리가 하얀색인 건가.
왜 사람들은 아리테아의 머리가 하얀색이라고 생각한 걸까.
“이안, 아리테아에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 알아?”
내가 저번에 마리와 같이 읽었던 책을 생각하며 물었다.
내용을 회상하는 듯 몇 번 눈을 감았다 뜬 이안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아리테아라는 수인이 살았는데, 그 수인은 다른 수인들을 구원해 주는 삶을 살았대.”
종이 뭉치들을 뒤적거리던 그가 앞뒤가 빈 종이 한 장을 꺼내 종이에다가 간단한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래서 암암리에 성녀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더라. 신비한 외형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그렇고.”
마치 지금의 셀레스틴 시몬드가 그러는 것처럼.
“그러다가 그녀는 인간 나라의 헤시국 왕에게 붙잡혀 탑에 갇히게 돼.”
거기까지는 내가 아는 내용이랑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가 그려놓은 종이를 바라봤다.
‘…왜 쟤는 그림까지 잘 그려?’
내가 그가 그린 그림들을 쳐다볼 동안, 빠르게 펜을 움직인 그는 아리테아가 그려진 바로 옆의 그림에다가 고양이 그림을 그려 넣었다.
“저거 나야?”
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그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아리테아를 사랑했던 수인인 로워드는 아리테아를 거기서 빼낼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을 괴롭혔던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다른 수인들과 같이 모의를 짜. 그 당시는 인간들이 수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수인들을 사고팔던 시대였으니까.”
“그리고 로워드는 인간을 멸하는 데 성공하지. 그리고 로워드, 라는 수인이 초대 카델리온 가주가 되었지.”
여기는 모르는 내용.
“그렇게 인간을 멸하고 나서, 로워드는 그녀가 갇혀 있는 성이 있는 곳까지 가서 그녀를 데려오려고 해. 자신의 은인을.”
“하지만 그가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순간, 아리테아는 환한 하얀색 빛과 함께 사라졌고 로워드는 그 자리에서 오열하게 돼.”
‘굉장히 슬픈 사랑 이야기였네.’
“그게 끝이야?”
“어.”
“앨런은 아는 거 있어?”
그가 어깨를 으쓱하곤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저도 똑같은 내용만 압니다. 단지 로워드 31 골목이 그 로워드에서 따 온 것만 알 뿐. 아리테아 님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오래돼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이상했다.
이 정도 되는 이야기가 왜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거지. 누가 마치 지워 버리기라도 한 듯.
“아, 수정궁이 아리테아 님을 위해 지어진 거라고 들었습니다. 입구에 장식용처럼 있는 돌에다가 손을 올려놓고 페로몬을 불어넣으면 아리테아 님과 페로몬이 똑같은 수인에게 열린다는,”
그러자 이안이 이어 말했다.
“수정궁은 수정궁의 진실된 주인에게 문을 열어준다는 말.”
어딘가 깊은 위화감이 들었다.
‘…거의 수인이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한 신화라고 볼 수 있는데 관련된 이야기가 별로 없어.’
그 이야기는 동화만 유명했다.
‘슈엘라를 빨리 포섭해야겠어.’
본격적인 정보는 그녀를 데려오고 난 후에 수집해도 될 것이다.
‘그 전에 상단 좀 똑바로 세워 놓고.’
곧 있을 축제에서 만나야지.
그렇게 나는 복잡한 생각을 마쳤다.
***
‘…어째 이 머리는 내 원래 머리보다 더 적응이 잘 되는 것 같단 말이지.’
클로에가 아직 오지 않은 상단 사무실에는 아리엘 혼자뿐이었다. 나는 고동색 머리를 배배 꼬며 의자에 기대앉아 월세로 구한 상단 사무실을 둘러봤다.
클로에가 급하게 구한 상단 사무실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꽤 좋은 편이었다.
비록 지금은 있으나 없으나 이지만, 응접실도 있었고, 우드 톤의 사무실도 아늑하고 깔끔했다.
사무실에는 큰 나무 책상이 2개가 놓여 있었고, 그리고 같이 이야기하기 좋은 편안한 1인 소파 2개 사이에는 테이블이 위치해 있었다.
새로 구한 사무실은 나름 쾌적하고 좋았다.
물론, 지금 책상 위나 곳곳에 벌써부터 놓여 있는 저 종이 뭉치들을 빼면 말이다. 저 종이 꾸러미들은 책상을 다 지배하다 못해 바닥까지 내려와 바닥까지 잠식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리엘 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때 뒤에서 몽글몽글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꽉 껴안아 주고 싶게 만들었다.
“아니야. 내가 일찍 온 건데 뭘.”
그녀를 마구 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나는 무심한 척, 편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사무실을 둘러보며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얼굴을 보니까 더 사랑스럽다.
첫 만남 때 꼬질꼬질하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머리카락은 이제 먼지가 보이지 않았다. 클로에는 특별히 관리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귀족 영애들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아니, 귀여웠다.
‘특히 저 몽실몽실한 핑크색 머리카락이며 동그란 눈에다가 조그만 얼굴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사랑스러워.’
“편하게 앉아.”
나는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옆에서 서 있던 클로에가 어딘가 고장 난 듯이 삐걱삐걱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리엘 님, 보고 싶었어요.”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클로에의 볼에는 홍조가 띠어있었다.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별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그녀의 눈빛에 나는 어딘가 멋쩍어져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 오나 항상 손꼽아 기다렸는데! 편지도 엄청 길게 보내도 항상 짧게 사무적인 내용만 보내시고!”
“음…. 그래도 편지로 연락했잖아.”
“그래도, 편지랑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거랑은 다르죠!”
“그래서 지금 왔고.”
자연스럽게 그녀가 페로몬을 사용해서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주위로 몽실몽실, 기분 좋은 향이 올라왔다.
“급하게 구한 건데도 나쁘지 않네.”
나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닫혀 있던 창을 열었다.
창을 열자 창밖에 앉아 있던 새가 푸드덕하고 날아갔다.
“클로에.”
“네?”
창을 열면 햇살이 쏟아지는 것부터 해서 딱 마음에 드는 분위기였다.
나는 마음에 쏙 드는 분위기에 날아가는 새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만약 상단 안이나 상단 근처에 새들이 있으면 무조건 다 쫓아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내 기억 속으로는 <윈닉타>의 정보 길드 마스터가 새를 부릴 줄 아는 능력이었던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해서는 새가 보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에 가깝지만.
‘그걸 통해서 클로에가 카델리온 저택에서 탈출하는 걸 도와줬었지.’
그래서 그가 대륙의 모든 정보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가문의 포크와 나이프의 수가 몇 개인지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농담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는 어디든 있을 수 있으니까.
분명 원작에서의 슈엘라가 그러듯이 그도 어느 특정한 종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것까지는 책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무실 근처에 있는 모든 새를 쫓아내라고 한 것이고.
야박해 보일 수는 있지만. 상단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근데 왜 새를 쫓아내라고 말했는지를 어떻게 설명해 줘야 되지?’
클로에가 의아해하지 않으려나.
다른 정보 상단의 상단주가 새를 통해 우리가 하는 걸 볼 수 있어. 라고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
갑자기 없던 새 알레르기라도 생겼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예전에 새들이 부리로 나를 향해 쪼아서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졌다고 할까.
무슨 핑계를 댈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입을 뗐다.
“음… 그게.”
“네!”
그러자 내 말과 앞에 있는 클로에의 대답에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음…?’
“네! 그니까 상단 사무실 주변에 있는 새들을 못 오게 막으면 되는 거죠?”
“맞아.”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뭐.
‘근데 쟤는 내가 왜 이런 해괴망측한 부탁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나?’
처음에는 이상한 돌무더기 산을 사라고 하질 않나, 그다음에는 돌무더기 산을 채굴하라고 하질 않나, 그다음 부탁은 새를 다 쫓아내라니.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는 내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안 궁금해?”
“네!”
“왜?”
그녀는 내가 별 해괴한 부탁을 다 해도 아무 의문도 가지지 않고 그 부탁들을 다 잘 들어줬다. 나는 이런 맹목적인 그녀의 믿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음… 계약서를 들고 오실 때부터 구원자로 보였어요. 솔직히 처음에 돌산을 구입하라고 하실 때까지는 왜 저 귀한 보석들 가지고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산을 사라고 하시지, 싶었는데.”
그녀가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 돌무더기 산이 새로운 광물의 광산으로 찬란하게 탈바꿈하는 순간, 제 평생의 주님은 아리엘 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혹시 몸을 빙그르르 돌 때, 머리도 같이 돈 게 아닐까.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니까, 내가 네 주님이라고…?”
“네. 첫 번째는 상단주님. 두 번째는 물주님. 세 번째는 제가 모시는 주인님.”
클로에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그래서 이것들을 모두 줄여서 공통적으로 주님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앞에 펴져 있는 손가락을 한 번 쳐다보곤 해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한 번 쳐다봤다.
저 아이도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된 걸까. 나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한 번 느꼈다.
‘…원작에서 이런 애 아니었는데.’
아. 도대체 전개가 왜 이렇게 된 걸까.
‘…일 처리가 확실하고 좋다고 나와 있긴 해도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생각하는 사고가 거의 한국인급이었다.
내가 캐릭터 해석을 잘못한 것일까.
‘일단 잘못된 거부터 고치자.’
답답해진 생각에 고동색 머리를 위로 한번 넘겼다. 페로몬을 써서 겉모습을 바꿔도 머릿결은 그대로인지,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에서 뒤로 넘어갔다.
“첫 번째 두 번째 거는 그렇다 쳐도, 내가 왜 네 주인인데? 네 주인은 너지. 누구도 너를 물건으로 대하진 못해. 누가 펠릭스 상단의 부상단주를 함부로 대하겠어.”
아.
작은 감탄사를 터뜨린 그녀가 감명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곧 맹목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상단주님은 괜찮을 것 같아요. 아름다우시고 누구보다 돈도 많아질 예정이시고 사려 깊으시잖아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피로 물든 자기 엄지손가락을 계약서에 찍고 만족스럽게 바라볼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어딘가 아득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 근데 저기 쌓여 있는 종이 뭉치들은 다 뭐야?”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저 종이 뭉치, 정확히 말하면 종이 탑들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 상단주님께 온 편지들이랑 초대장들이요.”
‘아. 내 팔자.’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 한마디에 나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