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54/111)

53.

“왜. 있었으면 좋겠어?”

뽀각.

그의 손에서 새로 집은 검은색 만년필이 부서졌다.

또 쟤 왜 저래.

어딘가 이상한 눈빛이다. 어딘가 맛탱이가 간.

나는 그에게서 눈을 돌려 서류를 끄적였다.

‘이안에게 연인이 있다면.’

이안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맞다.

납치범이라고는 하지만, 배 따신 곳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었으니까. 내 몸도 고쳐 주었고.

솔직히, 이제 내 몸은 웬만한 채식 수인들보다도 건강한 편이었다. 호랑이들의 기준이 유별나서 그렇지.

사실 그날 이안이 나를 카델리온 저택으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까지도 길거리를 전전하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화도 못 한 상태로.

물론 길거리나 뒷골목은 제패했을 거란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희박했다.

‘덕분에 상단도 세울 수 있었고.’

그리고 방 안에 감금하는 그의 성격과 다르게 그는 나에게 퍽 친절한 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가끔씩 이상한 말로 놀리긴 하지만.

근데 이안에게 새로운 연인이 있다면.

끄적거리던 아리엘의 펜이 잠시 멈추었다.

생각을 하자 심장 안쪽 어딘가가 약간 불편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것 같이.

“…상관없을 것 같은데.”

무언가 얹힌 듯한 느낌을 무시한 아리엘은 잠깐의 휴식을 두고 답한 내가 가벼운 어조로 물어봤다.

“그런데 만약 너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글쎄.”

그의 눈꺼풀이 팔랑거리면서 내려앉았다.

저택에 데려와 더 좋은 대접을 해주어서 밖으로 나갈 생각 자체를 못하게 만들지 않을까.

마치 이곳이 그녀의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물들이다가 눈치를 챘을 즈음에는 너무 깊게 담가져 있어 발을 빼지 못할 정도로 만들 것 같은데.

이곳 외에는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떠날 수 없도록.

자신이 스스로 이곳에 남아 있게끔.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삼켰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앨런?”

“글쎄요. 눈물과 함께 그분이 이루는 사랑을 응원하지 않을까요.”

그가 아련한 표정을 연기하며 천장을 쳐다보곤 손을 흔들었다. 누굴 생각한 건지, 어느덧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가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사무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전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사는 건… 부질없는 짓이죠.”

응. 그래.

방금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던 그의 눈동자는 건조한 상태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리 휙휙 바뀔 수 있는 걸까.’

진지함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의 행동에 이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 많은 수인 사이에서?”

전에 보니 능력 있고 예쁜 사람들 많던데. 한 명 정도한테는 마음을 빼앗길 만하지 않나.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들은 이안이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개소리.”

이안의 검은색 만년필이 그의 손에서 또 부서졌다.

‘곧 만년필을 더 주문해야겠네.’

앨런은 이안의 손에 남아나지 않는 만년필들을 보곤 혀를 차며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봐도 주군이 아리엘 님을 좋아하는 티를 내시는데. 아니, 좋아한다는 걸 동네방네 알리고 계시지.’

왜 아리엘 님은 눈치채지 못하시는 걸까. 오히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선을 지키며 거부하는 느낌.

도대체 우리 주군이 부족한 점이….

있지.

예를 들어 성격이라던가, 성격이라던가, 성격이라던가.

앨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치명적인 약점에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얼굴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신데.’

얼굴로 메꾸실 수 있지 않으실까.

앨런은 요즘처럼 많이 착해지신 주군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예전처럼 살얼음 걷듯이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주군이 아니라.

‘이안 님은 항상 웃고 계셔도 위험하셨으니까.’

마치 누구 하나 매장할 계획을 짜는 것 같은 웃음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웃음 속에는 항상 아무것도 없는 표정이 숨어있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주군은 어딘가 항상 텅 비어 있었다.

물론, 매번 누구 하나 매장할 계획을 짜나가는 것도 맞긴 했지만.

‘외모에 가려져서 주군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지 않는 거지.’

어릴 적, 별채에서 나온 후부터 시작된 치밀한 이미지 관리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웃고 다녀도 그 어떤 귀족도 그를 만만히 보지 않았다. 분위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 유들유들한 웃음이 그렇게 위험하게 보이기 쉽지 않은데.’

그래도 무표정한 것보다는 웃는 게 더 나았다.

주군이 어떤 웃음이든 웃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주군의 실체는 이미 대륙에 널리 널리 퍼졌을 것이 분명했다.

멋모르는 귀족들이 그에게 다가올 일도 없을 테고.

‘도대체 주군을 보고 투지를 활활 불태우는 아리엘 님이 아니시면 저 성질 더러운 주군을 누가 견딜 수 있을지.’

그래도 자기 잘생긴 줄 알고 최선을 다해서 꼬시려는 걸 보면 주군도 보통은 아니다.

앨런은 자기 앞에서 시큰둥하게 주군을 쳐다보고 있는 아리엘을 보았다.

날이 갈수록 잘생겨지는 것만 같은 이안의 외모에 아리엘은 항상 적응을 못 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것을 앨런이 알 방도가 없었다. 아리엘이 그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수습하는 기술이 갈수록 늘어났으므로.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개소리라니, 듣는 고양이한테 너무한데.”

그러자 이안이 곧바로 받아쳤다.

“아까 고양이가 한 말은 듣는 호랑이한테 더 너무한 것 같은데.”

나는 그 눈빛을 무시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볼 때마다 다양하게 빛나는 저 푸른 눈동자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어.”

“이안 요즘 연회 많이 갔잖아.”

물론 나는 못 가지만.

나는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연회의 귀족들이 떠드는 일들에는 글자로 전해지는 정보들과 결이 다른 경우가 왕왕 있었다.

“아니면 재밌는 일이라도.”

그러자 이안이 자신의 입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셀레스틴 시몬드가 약혼한다던데.”

나는 카페에서 영애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녹스 히아트랑 셀레스틴 시몬드?”

“어.”

“아, 그 연애 감정으로 시작해서 발전하게 되어 진행됐다는 그 약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녹스 히아트와 셀레스틴 시몬드의 약혼이라.’

그 만인에게 친절하고 잘생기기까지 해서 귀족 영애들의 이상형 중 하나인 녹스 히아트가 약혼한단 말이지.

연애로 이루어진 약혼일 수도 있는데,

“글쎄. 근데 그게 과연 연애로 이루어진 약혼일까.”

그런 사람들은 항상 뒤가 구린 데가 있던데.

흘려 지나가듯이 말한 말에 이안이 물었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 약혼은 아닐 것 같아서.”

“…정치적 목적이라면 모를까.”

“히아트는 더 좋은 가문이랑 약혼할 수 있잖아. 가령 늑대라던가.”

“아니면 동급인 가문도 있고.”

내가 골똘히 고민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타다닥 하고 두드렸다.

“굳이 시몬드를 선택할 이유가….”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나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있지. 있구나.

그 실험.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실험실에서 눈 감기 전 찰나의 순간에 보았던 히아트 가주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파티장에서의 그 찜찜한 모습까지도.

‘…근데 그 실험 하나만으로 결혼까지 한다고?’

그 둘만의 동맹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말이 안 되는데.

…이 사이에 낀 가문이 몇 가문 더 있다면 모를까.

‘아직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랑 나밖에 없잖아.’

그리고 그들은 둘이서 동시에 공동으로 참여했으니 굳이 결혼으로 서로를 묶지 않아도 되었다.

한 명이 입을 털게 된다면 그 끝은 어차피 모두의 파멸이니.

둘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인데.

뭘까.

촉이 그 이면의 찝찝함을 향해 가리키고 있다.

분명 뭔가 있다고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리테아 님이 다시 태어나신다면 셀레스틴 님 같으시지 않으실까요.”

“맞아요. 저도 순간적으로 책 속에 나왔던 아리테아 님이신 줄 알았어요.”

카페 안에서 영애들이 단체로 입을 모아 아리테아를 닮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한다고?’

나쁘지 않은 추측이긴 하다.

영애들의 말을 들어 보면 현재의 셀레스틴의 위치는 성녀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아리테아의 환생 같은.

“성녀 같은 이미지를 챙겨가려고 한 건가……. 이미지가 중요하긴 하니까.”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와 전혀 자신과 연관이 없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듯한 말.

이안은 곰곰이 생각하는 아리엘의 모습을 눈길로 좇았다.

어떻게 자신을 학대하고, 십몇 년 동안 붙어 있던 사람을 저렇게 사감 없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저런 태도는 애초에 정을 주지 않아도 불가능한 태도였다.

“이안은 어떻게 생각해?”

“셀레스틴 시몬드와 녹스 히아트가 정말로 연애하다가 약혼을 했다고 생각해?”

“아니.”

그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꿀 떨어지는 눈빛부터 시작해서 녹스 히아트가 매너 있게 셀레스틴을 챙겨준 것, 연회 안에서의 스킨십까지 그들의 행보는 연회에 있던 사람들을 화끈하게 데우긴 했다.

‘사람들의 주둥이를 데웠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가 보아 왔던 녹스 히아트는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이 계산된 행동이라면 모를까.

‘셀레스틴 시몬드도 비슷한 것 같던데.’

그는 잠시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보석이 뿌려진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셀레스틴과 그에 아리테아와 똑같다며 감탄하는 사람들까지 떠올리곤 싸늘하게 웃었다.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도. 하지만 그게 본 목적은 아니겠지.”

이 약혼은 그에게로 하여금 더 높은 위치로 올려보내는 수단일 것이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야망을 보면 적어도 동부의 수장 자리를 다시 찾거나 그 이상일 가능성이 컸다.

‘꼬리가 너무 길면 밟힐 텐데.’

하지만 아직까지 상황을 보아 꼬리가 밖으로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꼬리까지 잘 숨기는 건지 무엇을 하는 건지.

아리엘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아리테아에 관한 것을 다시 생각했다.

“셀레스틴 님의 하얀색 찰랑거리는 머릿결 보셨어요?”

“네. 그 책에서만 보았던 아리테아 님의 머리랑 똑같으셨어요.”

“그 눈부시도록 하얀 색깔을 말씀하시는 거죠.”

‘…근데 내가 봤던 책에서는 아리테아의 머리가 하얀색이라고 나와 있지 않았었는데.’

빛에 비친 머리가 하얀색으로 빛났다였는데.

도대체 뭐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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