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53/111)

52.

‘원작대로 흘러가나 보네.’

원작 속의 강제성을 지금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럼 내 목숨은?’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흠칫했다.

‘원작대로 진행이 되었다면 나는 이미 옛날 옛적에 죽은 목숨인데.’

아니면 이안에게 죽어야 할 목숨이던가.

생각해 보니 내가 죽는 것은 이안의 과거사에서 한 줄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몇 살에 죽인다는 것조차.

단지 시몬드 가가 한겨울에 모조리 쓸렸다는 것만 나와 있을 뿐.

‘근데 시몬드 가문이 털렸잖…’

잠시만. 시몬드 가문의 식솔들은 죽지 않았다. 단지 고용인들만 죽었을 뿐.

‘걔네 튀었었잖아.’

책에 따르면 시몬드 가문의 구성원들은 다 이안의 손에 잔인하게 죽게 된다.

그것도 한겨울에.

‘그래 죽는 것도 한겨울이라고만 나와 있지 정확히 언제라고 나와 있었던 적이 없었어.’

그럼, 나는 앞에 있는 저 백호한테 죽어야 할 운명인 건가.

‘이안이 시몬드 가문을 왜 도륙했지.’

원작이 한 줄 정도로라도 더 설명해줬을 수 있잖아.

생각해 내. 생각해 내야 해.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책을 떠올리려고 했다.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책 내용을 복기한 나는 깨달았다.

없다.

이안이 시몬드 가문을 죽이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가문을 도륙하는 이유 따위는 책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시몬드 가문의 수인들을 참혹한 상태의 시신으로 만들었고, 그날을 끝으로 그들은 영원히 귀족 사회에서 사라졌다.』

단지 그 한 문장으로 그 가문의 사람들이 죽는 것만 나와 있을 뿐.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귀족 사회에서 사라졌다고?’

그건 식솔들이 다 죽었다는 말인데.

아직 시몬드가 식솔들은 죽지 않았잖아.

팔에 있는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원작이 전생을 기억한 나에게만 한정된 상태로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존재할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내가 미래에 이안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보다 훨씬.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단단해져야 해. 아리엘.’

종이를 잡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거 이미 봤어.”

“참,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 평범한 돌산이 그렇게 좋은 노다지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만약,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이미 사 놓는 건데.”

“헛소리.”

너무나 충격적인 생각에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작은 개미들이 중얼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작게 들렸다.

‘그래. 아직 여름이잖아.’

그러니까 괜찮다. 괜찮을 거다.

되뇌는 말과는 다르게, 펜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안 그래도 하얬던 아리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아리엘,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점점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아직은 여름이야. 겨울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어.’

어느 겨울에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올해 겨울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심장 부근부터 퍼지는 찬 기운에 살이 에이는 것 같았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손끝을 다른 손으로 감싸고 티 나지 않게 심장을 꾹 눌렀다.

‘어딘가 기대고 싶은데.’

평소 허리를 펴고 생활하는 습관 때문에 등받이 없는 의자를 선호한 것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뒤에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과 함께 따뜻한 기운이 손끝부터 감싸기 시작했다.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심호흡해, 아리엘.”

“어. 어….”

나는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곤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가 멈춘 후 이안을 올려다봤다.

안경 뒤에 있는 저 푸른 눈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얼굴이 갑자기 너무 안 좋아서.”

“아니야. 괜찮은데.”

하지만 좀처럼 이안의 시선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이안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아리엘이 다시 한번 내뱉었다.

저렇게 걱정스럽게 물어봐 주는 수인이 싹 달라져 앞으로 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 상상되지도 않았다.

‘그래. 언제든 튈 수 있게끔, 상단을 키워놔야 해.’

나는 절대 죽지 않을 거야.

바퀴벌레보다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

종이가 손의 힘 때문에 살짝 구겨졌다.

‘그래도 올해 겨울이면 브랜드를 만들고 최소한 그 광물을 팔 수 있을 때는 되겠어.’

찬찬히 생각하자 내 혈색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엘의 혈색이 어느 정도 돌아오는 것을 본 앨런이 마저 하던 말을 이었다.

“그 광산은 펠릭스의 소속이라고 합니다.”

“펠릭스?”

이안이 아리엘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아리엘이 많이 진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떨고 있는 그녀를 품에 가둔 체였다.

‘펠릭스면 행운이라는 말인데, 누구에게 행운을 가져 준다는 건지.’

별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단주가 자신의 노후를 위해 자기에게 행운이 오길 바라면서 지은 이름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네. 새로운 상단인데, 세워진 지 얼마 안 됐더군요. 만들어진 지 이 주 정도 되었나.”

나는 천천히 문서를 정리하는 것을 마저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클로에는 잘하고 있나 보네.’

지금부터 시작이다.

지금부터 잘하면 내게 아직 남아 있는 데드 플래그를 뽑을 수 있다.

‘클로에는 언제 보러 가야 하지.’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빨리 만나러 가야 하는데.

이제 상단 부지도 세우고 상단을 운영하는 데 주의할 점도 알려 주고 해야 할 게 산더미였다.

위에서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펠릭스 상단주 접촉 한 번 시도해 봐.”

분명 그 상단은 대륙의 판도를 뒤집을 것이다.

그 상단을 북부의 편에 끌어들이든가, 그러지 못하더라도 북부에 우호적이라는 것만 확인하면 뭐가 되었든, 후에 강력한 도움이 될 거다.

어쩌면 새로운 거래를 틀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아니라면 일찍 밟아놔야겠지. 일어설 수 없도록.

“최대한 빨리.”

“예.”

“이안 님이 직접 만나 보시는 겁니까?”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한 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 상단주 여기 있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문서를 처리하는 척 서류를 읽으며 그들의 대화를 계속 들었다.

‘펠릭스 상단주한테 쟤가 뭘 요구할까.’

한 번 마음 먹은 건 끝까지 가져가거나 상대를 악랄하게 뜯어내는 이안인데 쟤가 왜 만나자고 하는 건지.

‘도대체 얼마나 뽑아먹으려고.’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만나지 말아야지.’

아리엘이 속으로 강한 다짐을 하며 느릿느릿 문서들을 분류했다.

“아리엘, 오늘은 안 자?”

그녀의 어깨에 키위 담요를 둘러준 이안이 자리로 돌아가며 물었다.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아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안이 아리엘의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졸린 거 아니었어? 서류 반대로 보고 있는데.”

서류를 다시 한번 제대로 쳐다보니 글씨의 위아래가 반대로 되어 있었다.

아. 어쩐지 글자 읽기가 힘들더라.

문서가 빨리빨리 분류되지 않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

나는 황급히 거꾸로 되어 있던 문서를 바르게 돌렸다.

그러곤 반대로 된 서류를 읽은 적이 없는 척 서류 안에 파묻힐 정도로 열심히 분류했다.

수치심 때문인지 여태껏 보지 못한 속도로 종이 뭉텅이가 빠르게 사라졌다.

“주군, 근데 아리엘 님께서는 거꾸로 읽으시면서도 잘 분류하고 계시고 있었습니다만.”

앨런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눈빛만으로도 서류에 구멍을 뚫어 버릴 듯이 서류를 읽는 아리엘의 모습에 이안은 작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륙을 뒤집어 놓으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사자 소리 하지 마.”

아리엘이 문서에 고개를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문자 거꾸로 읽어서 대륙을 뒤집어 놓을 수 있으면, 대륙 두 번 더 뒤집어 놓으면 망하겠어.’

아니지. 애초에 그냥 이 대륙은 가망이 없는 게 아닐까.

“사자 소리라니, 이건 뛰어난 관찰과 분석으로 입증된 사례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내가 서류에서 고개를 들고 이안을 째려봤다.

어느새 서류를 처리하던 나머지 신입 보좌관을 포함한 다른 보좌관까지 흥미진진하게 그들 앞에 있는 사탕을 까먹으면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두 명의 보좌관들이 서로의 젤리를 바꿔먹기도 하였다.

“검 던지는 것도 봐, 수인이라면 불가능한 각도로 잘 던지잖아.”

이안이 쓰고 있던 만년필을 아리엘이 던지는 폼과 똑같이 던졌다.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긴, 그렇죠. 아리엘 님처럼 독특하게 검을 던지는 사람도 없긴 합니다.”

퍽. 자연스럽게 날아가던 펜이 앨런의 앞에서 수직 하강을 했다.

앨런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수습했다.

“아, 그래서 문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처리하실 수 있으신 걸까요.”

그가 경망스럽게 자신의 서류를 뒤집어 보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그치. 그냥 타고나길 천재인 거야.”

이안이 아까 날린 만년필과 똑같이 생긴 새로운 만년필을 꺼냈다.

“아하. 남들과는 다른 비범함. 그게 포인트군요.”

“원래 천재들은 비범하잖아.”

이안과 앨런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서로 쿵짝쿵짝 잘도 하고 있었다.

그때, 아리엘이 차게 식은 눈과 함께 뜬금없이 이상한 질문을 했다.

“여기 남부야?”

그녀의 난데없는 질문에 이안이 아리엘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중앙 도시지. 갑자기 왜.”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 호랑이가 계속 사자 소리 해서.”

순간적으로 크와아아앙, 사자가 울부짖었다. 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치. 헛소리로 울부짖으면 세상이 멸망할 만도.

“무슨 말이야.”

“칭찬.”

헛소리를 잘한다는 뜻으로 사용한, 아리엘이 전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뭔가를 잘한다는 뜻이니 칭찬이긴 했다.

“칭찬 아닌 것 같은데.”

“사자를 닮았다는 게 칭찬이 되다니.”

남부의 흉포하지 않은 사자를 깔보는 이안이 말했다.

그러자 아리엘이 황급히 대화 주제를 틀었다.

“아, 이안 연회는 어땠어? 재밌었어?”

연회에서 젊은 남녀가 많이 눈이 맞는다는데.

저번 연회에서 영애들이 이안에게 접근한 거 보면 이안도 핑크 핑크한 연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여기서 탈출하고.’

나는 은근한 기대를 걸고 앨런에게 물어봤다.

“앨런, 혹시 연회나 파티에서 이안이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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