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52/111)

51.

수업도 없고 날도 좋아 정원에 나가서 놀기 딱 알맞은 날.

그런 좋은 날, 나는 지금 간교한 백호의 집무실로 끌려왔다.

“으음… 저기. 제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실 분?”

내가 앞에 있는 호랑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랑 눈이 마주친 저 백호가 능글맞게 살살 눈웃음치며 입매를 올렸다.

둥근 은테 안에 둥글게 휘어진 저 푸른 눈이 얄미웠다.

“나 오늘 휴가라니까. 휴무라고 휴무.”

책상에 팔을 쭉 뻗고 엎어진 나는 앞으로 펜을 데구르르 책상에 굴리면서 옆에 가득 쌓여 있는 문서를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이안이 직접 주문 제작한 당근 모양 펜이 내 앞에서 도르르르륵 굴러갔다.

펜이 문서 앞에서 정지했다.

왜 하필 멈춘 곳이 문서 앞인 거야.

‘…저걸로 종이나 접어 볼까.’

휴무를 맞은 수인에게 일을 시킨 건 엄연히 이안의 잘못이었다.

‘나 학 잘 접는데.’

학 천 마리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한 번 도전해 볼까. 저 문서들은 몇십 장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그 정도는 금방 접지는 않을까.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종이의 질감이 부드러운 것을 보니 상당히 비싼 것 같았다.

‘이 종이 구기면 그 순간, 저기 저 보좌관들 울 것 같은데.’

앞에 있는 서류로 학을 접자니 박수 치며 즐거워할 이안과 육성으로 소리를 지를 보좌관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다고 옆에 놓여 있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보자니 휴일에 과제하는 대학생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 전생에 직장인까지 되고 죽었으면 이런 삶을 살았겠지.

고양이로 있을 때 가끔씩 문서 처리를 도와주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양이었다.

‘하루에 몇십 장이 넘는 서류가 말이 되냐.’

수인 세상이 말세다. 말세야.

나는 당근 모양으로 된 펜을 데구르르 돌리면서 놀다가 힐끗 이안을 쳐다보곤 말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는 수인 부려 먹다가 너 수인 착취한다고 다른 데서 잡아가.”

“나를 잡아갈 수 있는 수인들이 있을까?”

그가 오만하게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

사실이긴 하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줄이 붙어 있는 동그란 안경을 낀 푸른 눈은 여전히 서류에 집중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긴, 수인을 착취했다는 거 하나로 북부의 수장을 잡아갈 수 있을까.

오히려 잘 보이려고 하면 몰라도.

쟤는 범죄자로 고발당해도 귀빈으로 대우받겠지.

‘역시 세상은 돈과 권력.’

할 말이 없어졌다.

갑자기 세상의 부조리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든 이안과 눈이 맞부딪혔다.

그러자 그의 벽안이 매력적으로 휘어졌다.

아. 현실에 불만이 많은 눈이었을 텐데.

‘자연스러운 척. 자연스러운 척.’

나는 경련을 일으키듯 파르르 양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누가 봐도 찔리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짙은 웃음을 지으며 내 모습을 한 번 다시 바라본 그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슈 먹을래?”

‘그거 먹으면 일해야 하잖아.’

“아….”

니.

라는 말을 다 못 맺은 찰나, 이안이 말을 이었다.

“아틀레아에서 사 왔는데.”

“주 좋죠. 네. 매우 좋습니다.”

내 입에서 즉각적으로 찬성의 말이 나왔다.

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먹어서는 안 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이안의 수작이 투명하게 보이는데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슈의 노예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야 소처럼 일하면 되지.’

우선, 그 디저트는 먹고 싶다고 다 먹을 수 있는 디저트가 아니었다.

위쪽의 최고위 귀족만 예약하고 먹을 수 있는 맛집이다.

‘각 종족의 수장 가문만 사 먹을 수 있었던가.’

그들은 지위, 부, 명예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매년 방문이 가능한 새로운 손님들을 정한다.

당연히 여기서 선정된 손님들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분? 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이고.

물론, 가격도 만만치 않게 비싸다.

‘디저트가 금보다 더 비싸지.’

그러나 그곳의 손님으로 선정된 유명인들이나 최고급 귀족들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 먹지만.

그래서 아틀레아의 디저트는 최고급 귀족들이 그들의 위치를 과시하는 의미로 파티를 열어 귀족들을 불러 모을 때 사용한다. 아니면 자신과 친한 일반 귀족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려고 할 때나 은근히 생색내기 위해 쓰기도 하고.

너네를 위해서 이런 걸 준비했어. 이런 느낌으로.

‘그런 곳에서 슈를 사 오다니. 너는 정말 사랑이야. 이안.’

앞을 바라보았더니 꽤나 많은 수의 슈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생의 행복감이 급격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기분이라면 내 가방에 풍선을 잔뜩 매달아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슈를 몇 개 집어먹은 나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상태로 포만감에 차 옆에 있는 서류들을 하나씩 손에 집어 들었다.

아리엘의 눈이 꽤나 빠르게 서류들을 훑어 내려가며 문서들을 신속하게 분류했다.

‘얘는 델리온 상단 관련 서류고.’

‘얘는 기사단.’

‘얘는 고용인 관련.’

탁탁. 중간에 나누어 놓은 서류들을 한 번 정리했다.

어느덧 반절이 넘는 서류들이 깔끔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힐끗 쳐다보니 인간의 모습으로 일하는 내가 적응되지 않는 건지, 보좌관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거참 민망하네.’

“이안, 근데 내가 이런 걸 봐도 되는 거 맞아?”

옛날부터 들던 생각이었다.

보통 이런 건 가주의 부인이 하지 않나.

엄연히 따지고 보면 나는 납치당한 사람인데.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몇몇 수인들은 나를 이안의 보좌관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다른 몇몇은 나를 루이즈의 제자로 생각하고 몇몇은 그냥 길고양이가 사람이 되었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던데.

도대체 이 저택에서 나의 위치는 무엇이지.

생각해 볼수록 모호한 위치였다.

‘그래도 납치당한 사람 말고 루이즈의 제자로 해서 장기 투숙객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이 길어질 때쯤, 대수롭지 않아 하는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관없을 겁니다.”

“상관없어.”

이안이 턱을 괸 상태로 눈웃음을 흘렸다.

‘너 아니면 다른 사람 만나지도 않을 건데.’

만나지 않는다가 아니라 만나지 못 한다가 더 맞으려나.

아리엘이 주는 황홀감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중독된 것 같이.

‘중독되었다면 옛날 옛적에 되었겠지.’

그리고 가만히 앉아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것도 어찌나 재밌는지.

어떨 때는 무섭게 집중하는 표정을 짓다가 어떨 때는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녀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표정을 못 숨기는 것도 그렇고.’

어딘가 계속 눈길이 가게 만들었다.

아리엘을 생각하던 이안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중증이시군. 주치의를 불러와도…….’

오히려 이안 님의 병이 더 커지기를 응원하시겠지.

그것을 본 앨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에 사람 열댓 명 죽여 놓고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주군과 동일인물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앨런이 슈를 한입 콕 찍어서 먹는 아리엘을 힐끗 쳐다보았다. 벌써 서류를 반이나 처리해 놓은 아리엘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슈를 바라보았다.

“이안 님,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는 많지만 이안 님의 외모라면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마친 앨런이 옆에서 대놓고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턱을 괴고 있는 그의 손을 타고 안경 줄이 흘러내리며 목 뒤로 이어졌다.

턱을 괸 것 때문에 그의 새하얀 새끼손가락이 입술 주위에 위치하자 유독 붉은 입술이 도드라져 보였다.

보통 영애들이나 영식들이었다면 진작에 넘어갔을 모습이었다.

분명 외모로 꼬시라는 말이었는데 필요 없는 말인 것 같았다. 이미 자기가 잘생긴 거 알고 여우처럼 살살 눈웃음을 치는 자신의 주군을 보니 저게 백호인지 여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원래 여우로 태어나셨어야 했는데 백호로 태어나신 게 아닐까.’

여우였어도 그냥 여우가 아니라 이야기 속으로만 전해지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로 태어나셨을 것이다.

앨런은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일주일도 안 남은 월급날을 보고 다시 기분이 좋아져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주군은 만인의 이상형이지 않습니까.”

‘쟤는 또 무슨 헛소리야.’

하긴 앨런이 뜬구름 잡는 소리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시선을 밑으로 내리니 빼곡하게 쓰여진 글자들이 자신을 봐달라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근데 아까 이안이 한 말처럼 내가 이 서류들을 처리해도 상관없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서류를 처리하는 일은 가주의 부인이 하는 일이 분명했다.

카델리온 가의 일에 너무 깊게 들어온 것 같은데.

‘이안이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뭐랄까, 덫에 걸려든 토끼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설마 저 백호가 그걸 노리고 나한테 일을 시켰을 리가 있을까.’

‘저 얼굴이면 더 예쁘고 능력 좋은 사람들을 많이 볼 텐데.’

나는 슈를 먹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서류 분류를 마저 진행했다.

[4대 가문에서 나온 회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특집- 회의 내용 미리 알아보기.]

[서부의 주인, 무슨 수를 썼나.]

‘어. 얘는 요즘 대륙의 정세나 동향 관련된 소식이다.’

대륙 관련된 소식에는 셀레스틴과 히아트 가문의 녹스가 약혼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녹스 히아트와 셀레스틴 시몬드 신이 만들어낸 것 같은 아름다운 한쌍!]

[지금 수도는 바구니 열풍… 왜?]

[상단 윈닉타. 서쪽의 문과 중앙에 대한 길을 개척하다!]

‘새로운 길이 완성되면서부터 원작이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벌써 본격적인 원작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걸까. 아마 내가 여주를 빨리 빼 왔기 때문에 원작이 더 빨리 시작할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우리 여주님은 잘하고 있을까.’

나는 펄럭펄럭 종이들을 넘기며 대륙에 관련된 많은 양의 정보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편지에 따로 뭔가 특정한 행동을 하라는 별도의 말을 써 놓지는 않았는데.’

과연 내가 원작에 변화를 줘도 이곳은 이야기대로 흘러갈까.

책에서의 여주는 광산 안에서 실수로 등불을 깨트려 새로운 광물이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쯤 새로운 광물이 발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겠지.’

원작대로 이 세상이 진행된다면 말이다.

그것이 궁금해서 편지에 등불을 깨트리라고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고.

원작에 강제성이 있는지는 내가 앞으로 살아가든 뭘 하든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무심하게 서류들을 분류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 이안 님 그 소식 보셨습니까?”

한참을 일하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무슨 소식?”

“동쪽 돌무더기 산에서 새로운 광물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 역시나.

그리고, 앨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서류를 정리하던 내 손이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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