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50/111)

49.

“아리엘, 내 팔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얄궂게 웃어대며 물어보는 그의 말에 아까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그의 팔을 만지고….

“원한다면 가져도 되는데.”

오… 가지긴 뭘 가져. 이 백호야.

야살스레 웃는 그에 서서히 귀 뒤부터 시작해서 열이 번져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팔 위에 올려져 있던 베개를 황급히 다른 자리에 올려두곤 자리를 옮겨가 얼굴을 다시 박았다.

그러자 이안이 불쌍한 척 목소리를 꾸며냈다.

“내 팔은 한 번 만져지고 이제 아리엘에게 버림받은 거야?”

“…….”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대가리 박아야 하는 일이다.

‘…죽자, 죽어.’

아니, 이렇게 쉽게 죽을 순 없지. 지금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아니, 방금의 행동은 먹고 사는 거랑 상관이 없긴 한데.

좀처럼 자괴감의 늪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었다.

“수인이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며 살면 안 되지. 고개 드는 게 귀찮아서 아무 베개나 다 가져오다니.”

“…….”

“그래서, 사용한 베개는 어땠어?”

눈을 둥글게 말아 올린 그가 아리엘 쪽으로 다가갔다.

귀 뒤부터 목 뒤까지 모조리 붉게 달아오른 아리엘을 본 이안이 작게 웃었다.

“아리엘, 성실한 고양이가 식탁 위에 먼저 올라가는 거야. 식탁 위에 먼저 올라가는 고양이가 밥을 더 많이 먹는 거고.”

그러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원래 한 번 사는 인생, 게으르게 사는 거야아….”

한참을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니 뜨거웠던 목 뒤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엄청난 용기로 눈동자만 살짝 굴려 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업무문서로 내 목 위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곱게 웃으며 나에게 잔인한 말을 건넸다.

“오늘 루이즈에게 단검을 배우는 날 아니야?”

아.

아까의 자괴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현실을 자각시켜 주는 잔혹한 말에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어.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리곤 단호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체력훈련만 하던 내가 어느덧 인간이 되고 그 훈련을 견딜 수 있게 되자, 늘어난 훈련량과 함께 단검 던지기가 훈련시간표에 추가되었다.

으. 이 뙤약볕에서 훈련이라니.

그걸 진짜 했다가는 햇빛 때문에 열사병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나는 누구처럼 강철로만 만들어진 수인이 아니라 그 살인적인 스케줄을 다 소화하지 못해서 말이야.”

베개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말해서 그런지, 발음이 웅얼거리면서 베갯속으로 먹혀들어 갔다.

“그럼 아리엘, 단검 던지기 연습 안 해?”

“내가 방금 누구처럼 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지 못한다고 했지….”

내가 얼굴을 찌푸린 상태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실력을 보니 박수가 먼저 나오고 그 뒤에는 넋을 놓고 감상하게 만들던데.”

단검이 고공비행하다가 갑자기 수직 낙하하는 기묘한 검의 궤적 떠올리곤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기술이 제법 화려하더라.”

‘쟤 분명 나 연습할 때 몰래 본 게 분명해.’

아. 전에 쟤 대놓고 웃으면서 봤지.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싸울래?”

그러곤 조금 있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내가 지겠구나. 됐다.”

그리고 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지는 싸움은 안 해. 이기는 싸움만 해서.”

또다시 베개에 발음이 뭉개졌다.

그냥 그렇다고. 이건 절대 변명이 아니라는 거지.

‘근데, 이 정도면 문서가 구겨졌다고 내 옆에 달려와서 기겁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아. 앨런 데몬트가 없구나. 어쩐지 조용하더라.

“오늘은 웬일로 앨런이 안 왔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옆에 있던 그가 삐딱한 미소를 지어냈다.

“앨런은 왜?”

“네가 문서로 부채질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겁하면서 쫓아오는 사람이 오지 않아서.”

부채질하던 이안이 어느새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너와 그 호랑이는 마치 치킨과 맥주,”

“치킨과 맥주?”

“아니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쿠키와 우유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하나?”

‘쿠키와 우유라니. 아리엘의 머릿속에서 저와 앨런은 동급인 걸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으나 아리엘은 보지 못했다.

“하나가 나오면 다른 하나도 나오는.”

그녀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물론 네가 쿠키야.”

선심 쓰듯이 말해도 쿠키라니.

이안이 아리엘에게 비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앨런이야, 나야.”

“너.”

그가 그녀에게 질문한 것이 무섭게 고민도 하지 않은 대답이 옆에서 들렸다.

“그니까 나 좀 숨겨 줘.”

이어진 요구는 덤이었다.

“아리엘 님! 아리엘 님 어디 계시나요.”

그때 뒤쪽에서 아리엘을 찾는 루이즈 보좌관의 목소리에 그가 입매를 매끄럽게 올리며 말했다.

“아리엘, 오늘 수업 없다며.”

그러자 아리엘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침대 이불에 쏙 들어갔다.

“야. 나 없다고 해. 알았지?”

그러곤 이불을 덮어 버렸다.

이안이 이불 밖으로 삐죽삐죽 빠져나와 있는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들을 이불 안으로 넣어주고 이불을 다시 덮었다.

“생각해 보고.”

어딘가 미묘한 웃음기를 삼킨 목소리였다.

“혹시 여기 아리엘 님 계십니까.”

방 문 앞에 서 있는 보좌관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죄송하지만 한 번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리스 데몬트가 숨을 고르며 가만히 서 있는 동안 이안은 꿈틀대는 이불 더미를 힐끗 바라보곤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만 있었다.

이불 속에서 튀어나온 작은 손이 그의 검지를 붙잡았다.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을 펴내어 자신의 손가 맞잡곤 조용하게 입만 움직였다.

‘5분 있다가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 나간 지 5분이 지나자, 방에 다시 들어간 리스 데몬트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심하게 침대 위를 보며 말했다.

“아리엘 님, 숙면하지 마시고 일어나시죠.”

“드르렁, 푸우.”

급하게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에 보좌관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안 자는 거 다 압니다.”

“나오십시오.”

***

“아리엘. 한 바퀴 더 돌아야지.”

바닥에 꽂힌 장검을 잡고 있는 루이즈가 고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꼿꼿이 펴져 있는 그녀의 허리처럼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의 휴식은 떠나간 지 오래였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위압적으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런 거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냥 얄미웠다.

‘도대체 이게 몇 바퀴째인데.’

이런 따사로운 햇살 밑에서 연무장을 뛴 지 벌써 열 바퀴가 넘어가고 있었다. 햇살이 너무나도 따사로워서 땅이 따뜻하다 못해 땅이 지글지글 끓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다가 계란 프라이 해 먹어도 되겠어.’

저기 너머 땅에서 아지랑이가 올라왔다.

물을 뿌리면 물에서 김이라도 날 것 같은데.

이렇게 계속 뛰다가 고양이찜이 되어버리는 거 아닐까.

“못…해… 헉… 요.”

땀방울이 뺨을 따라 어깨로 떨어졌다.

“더… 이상은… 하… 무리입니다….”

나는 그대로 연무장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옷이 자글자글 태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미 다섯 바퀴를 뛰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위를 올려다보자 청명한 푸른 하늘 대신 루이즈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그 즉시 눈을 감고 위에 있는 얼굴을 못 본 척했다.

세상 그렇게 무서워 보이는 얼굴도 따로 없었다.

“단검 던지는 법 배워야지.”

그녀가 생긋 웃었다.

‘…저건 그 미소다.’

저승사자가 지옥에 어서 오라고 짓는 미소.

‘기사들은 이것보다 더 혹독하게 훈련하겠지.’

하지만 나는 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데.

도대체 루이즈는 뭘 위해 나를 그렇게 열심히 훈련 시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수업을 째려고 시도하는 나같이 불성실한 학생보다 열심히 연습하는 모범생을 가르치는 게 더 좋을 텐데.

심지어 이 대륙에 그녀의 가르침을 원하는 수인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널리고 널렸다.

“이리 와.”

‘분명 처음에는 페로몬 수업 아니었나.’

왜 각종 호신술과 체력 훈련으로 변질된 거지.

아, 그래도 매번 페로몬에 관련된 책을 읽으라며 던져 주니 페로몬 수업이라고도 볼 수 있는 건가.

마지막에 페로몬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 교육을 받기도 하니 페로몬 수업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실히 그녀가 했던 말들이 인간으로 더욱 수월하게 변하는 데 도움을 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체력 훈련과 호신술을 배우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날로 먹을 생각이었는데.’

다 망했다.

역시 인생은 날로 먹는 게 아닌데.

“에휴.”

나는 한숨을 쉬곤 무릎을 턱턱 털며 일어났다.

‘이렇게나 연무장을 돌고 내가 멀쩡한 상태로 일어날 수 있는 게 기적인걸.’

‘심지어 연무장 돌기 전에 제자리 뛰기도 했잖아.’

이게 바로 체력훈련이 만들어낸 기적인 건가.

또 다른 체력훈련을 할 수 있게 만들어내는 기적.

나는 좀비처럼 비척비척 걸어가 루이즈에게 엎어지려고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루이즈는 내 한쪽 손을 잡곤 다른 한 손에는 무언가를 쥐여 줬다.

손에 쥔 것의 정체를 확인한 내가 눈을 스르륵 감았다.

‘…저거 던져 버릴까.’

던지자.

그냥 던져 버리자.

저 단검이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나 더 이상 못 뛰어.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해.

‘방에 가서 침대에서 뒹굴거릴 거야.’

나는 제발 저게 내 눈앞에서 사라지길 기원하며 손에 있는 단도를 힘껏 멀리 던졌다.

팍.

칼이 과녁에 박히는 소리가 제대로 났다.

“오. 잘 던지는데. 이렇게만 던지면 되겠네.”

옆에서 꽤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목소리는 쓸데없이 품위 있는 거지.’

연무장에 드러눕기 전에 다시 앞을 보니 단검이 표적에 꽂혀 있었다. 그것도 표적 정중앙에.

‘…원래 이런 적 없었잖아.’

그걸 본 아리엘의 표정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변했다.

맞추려고 하면 더럽게 맞지도 않는 것이 꼭 필요도 없을 때 그러더라.

“이렇게만 3번이라도 던질 수 있다면 귀가시켜 줄게.”

뒤에서 만족스러운 루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귀가시켜 준다는 건 저택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이곳은 카델리온 저택에 있는 연무장이었다.

‘…이거 지금 나 방으로 안 보내겠다는 소리 아니겠지?’

에이.

하지만 정말 설득력 있는 생각이었다.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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