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의 손가락이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가리켰다.
“아. 저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이 방에 그쪽 말고 누가 있을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여기 제 부하가 있을지. 어떻게 방 안에 저 혼자만 있다고 단언하실 수 있으신가요.”
과장된 몸짓으로 앞의 찻잔에 차를 따른 남자가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새까만 눈을 가진 남자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앞에 놓인 차를 쓰레기통에 부어버렸다.
“속에 능구렁이 100마리가 드글드글하게 들끓는 상태인 의심 많은 자네야 뻔하지.”
차로 가득 차 찰랑거렸던 찻잔이 텅 비어 바닥을 보였다. 찻잔의 바닥에 미처 다 비우지 못한 갈색 찻물이 얕게 고였다.
“뱀에게 능구렁이 100마리가 있다는 소리를 듣다니, 그것참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요.”
가면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앞에 있는 물건들을 바라봤다.
게임을 끝까지 하다 만 것 같은 체스판에 눈길을 준 그는 체스 말들을 잡고 움직였다.
“그리고 저는 의심이 많은 편이 아니라,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한창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체스판이 아무것도 없는 기본의 상태로 되돌려졌다.
“그게 더 정확한 말인 것 같아서요.”
말이 모두 처음 위치로 되돌아갔다.
“아깝게 좋은 재료로 만든 차는 한 입도 대지 않으시군요.”
아쉬운듯한 목소리가 들리자 상대가 비뚜름한 표정으로 답을 했다.
“그 전에 식사를 하고 와 배불러서.”
“이런. 타이밍을 잘못 맞추었나 봅니다.”
가면을 쓴 남자는 비어 있는 찻잔을 살짝 바라보다가 안타깝다는 듯이 시선을 틀었다.
“한 수장의 대표가 아닌 저희들은 이런 게 매우 아깝습니다만. 웬만한 귀족들은 사지도 못할 서부에서 자란 찻잎입니다.”
“돈은 꽤 들였겠군.”
다시 찻잔을 가만히 응시하던 서부의 수장이 둥글게 눈을 휘었다.
“아깝게 됐어.”
“그러게요. 제 불찰이었습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자, 생각보다 큰 체구의 넓은 어깨가 잠시 위로 들어 올려졌다.
그가 하나 남은 주사위를 손안에서 굴렸다. 주사위가 그의 손에서 허공으로 띄워지더니 다시 그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가 그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방 안은 아무런 대화 없이 고요한 적막으로 가득 찼다.
“그럼… 서부와 중앙 도시의 개척권은 당연히 따 오셨을 거고,”
그는 이안 카델리온을 왜 그리 싫어하냐는 아쉴라 가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 던져진 화두의 중심이 묘하게 방향이 틀어졌다.
그걸 눈치챈 아쉴라 가주가 말을 끊었다.
“그래서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 아까 질문이요.”
아쉴라 가주의 새까만 눈동자가 앞에서 턱을 괴고 있는 남자를 탐색하듯 길게 수축됐다.
회색빛이 섞인 것 같은 탁하고 붉은 눈동자가 아주 먼 과거를 떠올리듯 잠시 가라앉았다.
“이안 카델리온이 싫은 것이 아니라, 카델리온이 싫은 것인데…. 누구나 자신의 비밀 하나쯤은 안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기울이자 붉은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저도 마찬가지이니, 이해해 주시길.”
그의 붉은 입술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가면 안 속에 있는 눈동자가 한겨울의 호수보다 더 차갑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케인 아쉴라가 피식 웃었다.
“우리 같은 사이에 이런 거 하나 못 알려 주다니.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하지만 저희 같은 사이이니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안 그랬더라면 당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을 텐데.
붉은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 안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건 그렇지. 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내가 너를 죽였을지도 모르고.
새까만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하하하. 재밌는 말씀이시군요.”
반대로 아쉴라의 가주 자리가 갈아치워졌을 지도 모르는데.
방 안을 비추고 있던 촛불이 곧이라도 꺼질 것처럼 순간적으로 수그러들었다. 수그러든 촛불을 통해 방금까지만 해도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던 남자의 머리카락이 피로 물든 듯, 검붉게 보였다.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하며 무기질적인 눈으로 아쉴라 가주를 똑바르게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눈앞에 놓여 있는 체스판 쪽으로 몸을 숙였다.
조금 전 그가 말의 위치들을 모조리 처음의 상태로 되돌려 놓은 그 체스판이었다.
“서부와 중앙 도시의 개척권은 어떻게 해서든지 따 오셨을 것이리라 믿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말 하나를 집어 살짝 위로 올렸다.
“그게 없으면 계획의 큰 그림이 아예 틀어지기 마련이거든요.”
툭, 중심이 쏠린 체스 말이 실수로 옆으로 기울어지며 옆에 있던 다른 체스 말을 치고 넘어졌다. 그러자 그것도 기우뚱하며 다른 것과 닿을 듯 아슬아슬한 상태가 되었다.
체스 말들이 넘어지며 체스판의 길들을 막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그가 차갑게 웃었다.
물론 다른 방법이야 많았다.
그저 이안 카델리온에게 가장 큰 타격이 될 만한 방법이 이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마물 사냥꾼들에 의해 현재 몇 마리의 마물들이 주기적으로 중앙 도시에 밀반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물들은 철없는 귀족들의 오락거리가 되기 위해 중앙 도시 지하에 갇혀 있었다.
무료함에 지친 귀족들은 더욱 자극적인 것을 찾아 헤맸다.
칼 하나만 손에 쥐여진 수인들이 벌벌 떨며 정신 나간 듯이 칼을 휘두르다가 종국에는 그들에게 먹히는 야만적인 장면에 귀족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그것이 서부와 연결된 길로 빠르게 운송된다면?”
그는 그 점을 노렸다.
“원래의 예상 시간보다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을 거치지 않아도 됨은 물론이고요.”
체스판에 없었던 폰 한 개가 지도의 중앙 도시에서 서부로 이동했다.
커다란 그의 손안에 있는 체스 말이 유독 작게 느껴졌다.
“물론 현재 밀반입되고 있는 마물의 수는 아직은 경미한 수준이라 북부에서 신경을 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화이트 나이트가 블랙 폰을 건너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저희가 하려던 계획을 계속 진행하게 된다면.”
그 나이트가 다시 폰을 지켜볼 수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한 칸하고 대각선 뒤.
당장 폰을 잡을 수 있는 위치였다.
“곧 신경 쓰게 되겠죠.”
“그리고 이제 거기서부터 저희는 이미 마물을 모은 상태로 증거를 죽여 버리는, 아니 소각하는 과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가 체스판 위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니 시간 싸움이라는 것이고.”
안정적인 방어 형태로 있었던 처음과는 다르게 대다수의 검은색 체스 말들이 공격적인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미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아쉴라 가주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가 앞의 체스 말들을 다시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첫째, 북부의 산으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카델리온의 시선을 치울 수 있게 할 수 있나.”
그가 들고 있는 하얀색 체스 말이 서쪽과 남쪽을 바라보며 한 발자국 나아갔다.
“둘째, 그들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당장 손을 떼도 좋을 만큼의 충분한 마물을 확보하고 있는가.”
체스판 끝에 있던 폰이 퀸으로 바뀌어 돌아왔다.
“셋째, 얼마나 완벽하게 증거를 인멸했는가.”
그의 블랙 나이트가 화이트 룩에게 먹혀 죽었다. 가면을 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둥글게 휘곤 손가락을 움직였다.
블랙 룩이 화이트 룩을 잡아먹었다.
“특히 세 번째의 중요성은 전의 사건을 통해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블랙 퀸이 화이트 킹을 잡아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한 마디로, 이 세 개가 다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군.”
아쉴라의 가주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화이트 킹의 목과 몸을 반으로 분리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체스 말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성공한다면 가주 님의 계획대로 이 대륙의 역사는 아예 바뀌어 버리겠군요.”
자기가 아닌 제3자의 일을 말하듯이 무심함이 묻어났다.
“아니, 뿌리째로 다 뽑혀 버리려나요.”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톡톡 두들기더니 눈을 가늘게 접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글쎄….”
그가 검은색 눈으로 체스판을 느른하게 바라보며 팔짱을 꼬았다.
“그건 우선 계획대로 되어야지 아는 것이지.”
그러곤 자신의 외투를 챙겨서 방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재밌었네.”
“하하. 가주님의 기쁨은 저의 기쁨이기도 하죠. 저 역시도 영광인 시간이었습니다.”
까만색 가면 뒤에 자신의 모습을 숨긴 남자가 간신배같이 씨익 웃으며 한쪽 팔만 명치 앞에 위치한 채로 인사했다.
끼이익. 쾅.
그리고 그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회전문이 돌아가면서 문이 닫혔다.
그러곤 가면 속의 남자가 싸늘하게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체스판에는 화이트 킹의 목이 잘려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따로 체스판 위에서 나돌고 있었다.
“부디. 염원하시는 대로 숙원을 이루실 수 있기를.”
***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 햇빛에 동물들도 개울가로 피난을 갔는지 항상 가까이 들리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평소보다 멀리서 들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여름 햇살이 따스하게 방 안을 비추었다.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있는 이안이 저 멀리서부터 저벅저벅 걸어왔다. 투명한 보석 알갱이를 햇빛에 반사한 듯이 햇빛을 받은 이안의 머리카락 군데군데가 눈부셨다.
‘진짜 어떻게 뒤에서 효과를 넣어주는 것처럼 머리카락 어떤 부분은 반짝거리고 어떤 부분은 안 반짝거리고 이럴 수가 있지.’
그냥 이안 자체가 눈부신 건가.
앗, 빛이 걸어들어온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아리엘, 뭐 해?”
“보다시피, 최선을 다해서 게으름 피우는 중.”
급히 내 손을 바라보며 딴청 피우는 척하던 내가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상태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악. 훈련 가기 너무 귀찮아.’
얼굴을 베개에 처박은 채 옆을 보지도 않고 주섬주섬 손에 잡히는 아무 베개 가져왔다. 잘 끌려오지 않는 것에 살짝 힘을 줘 끌어왔다.
음. 굵기. 크기. 모두 좋군.
좋은 향기도 나네. 세탁이 잘 된 베개인가.
“딱 좋아….”
손으로 가져온 베개를 더듬거리다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얼굴을 묻고 있던 베개 밑에 깔았다.
가져온 베개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는데, 옆에서 풀썩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안이 옆에 누워 서류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 팔은…….
그의 팔을 따라가던 내 시선이 내가 베고 있던 베개에서 멈추었다.
오. 망할.
이안의 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