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저건 또 무슨 신박한 헛소리인 걸까.’
셀레스틴 시몬드가 약혼을 한다고? 그것도 연애로 이루어진 약혼을?
무슨 지나가던 참새가 날다가 동전으로 빵 사 먹는 것 같은 소리일까.
‘요즘 참새는 머리가 좋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지.’
눈이 더럽게 높아 만나자고 하는 족족 모든 남자를 뻥 차 버리면서 정녕 저에게 맞는 남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맨날 노래 부르던 셀레스틴 시몬드가 연애를 한다니.
웃기지 말라고 해라.
‘한 수장급 가문에다가 엄청 잘생기고 키 180 넘고 착하고 매너 있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남자라면 뭐……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지.’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이 대륙에 없다.
‘그런 사람을 찾는 것보다 달리기 경주에서 개미가 표범을 이기는 게 더 빠르겠다.’
“만난 지 2년 정도 되셨대요.”
“푸흡.”
결국 내 입에서 청록색 액체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왔다.
2년 전이면 셀레스틴이 남친조차도 없을 때인데. 자신에게 자신의 남친은 왜 생기지 않냐며 화풀이할 때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뭔가 이상하네.’
나는 옆에 있던 손수건으로 대충 책상을 닦은 후 다시 고상한 척 밖을 내다보았다. 따뜻한 햇빛이 창틀을 건너와 나를 반겼다. 갑자기 혼자 있고 싶어졌다.
저 앞자리의 영애들이 아리엘의 모습을 더럽다는 듯 경멸스럽게 쳐다보곤 부채로 입을 가리며 쑥덕댔다.
“저런 분이 이 카페에 있다니…….”
“그렇게 말이에요.”
“가정 교사가 누구실까요……?”
“저런 행동을 보아 귀족이 아니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희 어머니께서 저렇게 품위가 바닥난 레이디랑은 같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얘들아, 미안한데. 다 들려.’
창문을 바라보는 척하는데 저기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며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였다.
‘오늘은 날이 참 좋네.’
물이 흐르고 있는 분수 앞에서 참새들이 서로 짹짹거리며 자리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그래도 저분은 저분만의 사정이 있으시지 않을까요?”
핑크 머리 영애가 날 슬쩍 쳐다보고는 눈을 가늘게 접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영애들은 다른 주제에 대해 다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같은 자리에 있는 것조차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시선들은 여전했지만.
‘저 영애가 무리의 리더구나.’
“아! 혹시 이번 파티에서 셀레스틴 님과 녹스 님 보셨나요?”
“설마…… 약혼을 발표하시고 나서 녹스 님이 셀레스틴 님을 챙겨 테라스로 가신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셀레스틴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하…… 솔직히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천사 같은 셀레스틴 님과 녹스 히아트 님이라니.”
“저는 하얀색 은발과 연한 갈색 머리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인지 그날 알았다니까요.”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의 영애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슬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마치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소녀들의 표정이었다.
“아, 셀레스틴 님이 연애를 발표하셨던 때요?”
“네네! 바로 그때요!”
“그때 얼마나 달달하셨는지…….”
한 영애가 뺨을 붉히며 자신의 두 볼을 수줍게 맞잡았다.
“녹스 님이 셀레스틴 님께 대하는 걸 볼 때, 저는 제가 다 꿀에 절여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맞아요. 그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은 진짜였어요.”
“한 치도 의심할 필요 없는 진실한 사랑이라니까요.”
“배불뚝이 에반데 후작이 셀레스틴 영애께 집적거리니까 바로 정중하게 쳐 내고 셀레스틴 영애님 데리고 가시는 거 보셨나요?”
“정말…… 하…….”
다들 꿈에 잠긴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꿈을 여행하고 있는 소녀들의 표정이었다.
“그때 셀레스틴 님이 입으신 드레스 보셨어요?”
“당연하죠!”
패션의 유행을 따라가고 싶은 그녀들이 셀레스틴의 드레스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보석이 별빛처럼 흩뿌려진 것 같은… 정말….”
“아리테아 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면 셀레스틴 님 같지 않으실까요?”
“맞아요! 성스러운 백발에다가 하늘하늘한 푸른빛이 도는 원피스는 책에 적혀 있는 아리테아 님과 똑같았다니까요!”
“셀레스틴 님이라면 수정궁도 여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수정궁이 아리테아 님을 위해 만든 궁이니…….”
“그래서 소문만 무성하죠. 북부의 초기 가주이신 에드윌 님이 온갖 금은보화를 넣어놨다는 소문도 있고….”
“그렇지만 아무도 모르잖아요. 수정궁이 지어진 이후 그 문이 한 수인에게만 열린 적이 없으니까. 특정한 날을 제외하곤 항상 굳게 닫혀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이 나온 거죠!”
“그 문을 여는 사람이 궁의 주인이 된다는 말은 너무 로맨틱하지 않나요?”
한참을 셀레스틴 그리고 동화 속에 나와 있는 아리테아에 대해 떠들던 그녀들이 은밀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올해의 주인공은 이안 님이시죠.”
“평기일에서의 그 바구니는 파격적인 패션이었어요.”
“두고두고 회자될 차림이었죠.”
노란색 머리의 영애가 그 이야기를 하며 앙증맞은 바구니를 자신의 무릎 위에서 카페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패션 아이템으로도 상상하지 못한 그 물건이 귀족 사회에서 유행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맞아요, 니스타 영애. 밖에 나가면 요즘 모든 영식이 쓸모도 없는 바구니를 그렇게 들고 다니시죠.”
“모든 영식뿐만 아니라 저희 같은 영애들도 항상 외출할 때 꼭 챙겨가는 물건이 되었는걸요.”
“바구니 안에 소소한 물건들 챙겨 다니기도 좋아요.”
‘……그니까 그 소소한 물건을 가방에 넣으라고.’
아리엘은 짜게 식은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그때 갈색의 구불거리는 머리를 한 여자 영애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렇게 모든 영식분께 잘 어울리는지는…….”
“당연히 그런 건 이안 님이라서 잘 어울리시는 거죠. 영애.”
핑크 머리 영애는 언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냐는 듯 설레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딱 떨어지는 검은색 정장 핏과 귀여운 하얀색 바구니. 보통 사람이면 상상할 수도 없는 조합이죠.”
“부스스 새하얀 태양 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시면서 바구니를 보고 차가운 푸른 눈이 다정하게 살짝 휘어지시는데…….”
“보통 예의를 지킬 때 짓는 미소와 달랐어요.”
“맞아요. 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안 카델리온 님이 다정한 눈이라뇨.”
“상상만 해도 심장이 부서지는 것 같아요.”
“헐, 노스타 영애랑 멜라노 영애는 그 모습을 직접 보신 거예요?”
바구니를 올려 둔 노란 머리 영애는 슬쩍 자신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네. 운이 좋았죠.”
“아. 저도 한 번 그 광경을 보고 싶어요.”
“직접 뵙는데 눈이 진짜 잘생기셨더라고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이안 카델리온 님은 그 우뚝 솟은 코죠. 신이 영혼을 담아서 하나하나 조각해 놓은 것 같은.”
“당연히 입술이죠! 고우면서도 붉은 것이 볼 때마다 사람을 묘하게 만드는.”
영애들은 초반에 운운했던 품위를 다 내려놓았는지 붉어진 볼로 격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이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 같이 보였다.
하늘색 머리의 영애가 부채를 탁하고 접으며 눈을 빛냈다.
“아니요! 저희 이안 님은 눈이 제일 잘생기셨다니까요! 그 차갑고, 서릿발 같은 눈!!”
“비율이 가장 좋죠!”
“그 높은 콧대 모르시나요? 그걸 모르면 수인이 아니신데.”
그러다가 갈색 머리 영애가 수줍게 볼을 붉힌 채 자신의 양 볼을 맞잡았다.
“아. 몰라요. 그분은 다 잘생기셨거든요…. 솔직히 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으시잖아요.”
그러자 옆에 있던 영애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흡사 인기 있는 아이돌의 팬 미팅 현장을 방불케 했다.
‘……성격이 빠지는데. 저 영애들은 멀리서만 봐서 모를 수도.’
그리고 나는 여기서 이안에게 부족한 부분을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도대체 카델리온 가의 사람들은 모두 성격이 이상하단 얘기는 어째서 소문으로 퍼지지 않는 걸까.
‘길을 걷는 고양이에게 갑자기 날아 차기를 시키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던데.’
고양이였던 상태로 열심히 연무장을 돌다가 날아 차기를 시킨 그가 떠올라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책 읽는 고양이한테 무슨 주먹을 몇 번 질러서 자기 볼을 밀어 보라고 하기도 하고.’
그렇게 잘생긴 그를 항상 가까이서 보는 나는 새로 받은 차를 들고 고개를 살짝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호랑이들의 악취미는 따라갈 수 없다.
이걸 모두가 알아야 하는데.
***
“이안 님 모처럼 대회의 하러 가시는데 재킷은 입어야 하지 않을까요?”
“네 개 가문의 수장이 다 모이는 날이지 않습니까.”
앨런이 들고 있던 정장 재킷을 이안에게로 내밀었다.
“어차피 굳이 입을 필요도 없잖아. 걔네가 내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입가에 오만한 미소를 걸치며 단정한 검은 색 시계를 풀러 앨런에게 건넸다.
“아니면 내가 걔네 아래 있는 것도 아니고.”
“제발 입어 주십시오. 한 번은 제대로 된 복장을 하고 나와야 할 것 아닙니까. 이안 님. 저희 이번 회의라도 격식은 차립시다.”
비록 회의장 안에서는 다 벗어던지더라도.
앨런이 뒤의 말은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로선 할 수 있는 초강수를 두었다.
“안 그러면 아리엘 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이안 님은 정장 하나도 제대로 못 입는 수인이라고요.”
그는 앨런이 그 말을 전했을 때의 그녀의 반응을 생각했다. 분명 너 내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하듯이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 재킷을 그 위에 걸쳐 입었다.
그러자 앨런이 지적했다.
“크라바트도 똑바로 매시고요. 아니면 제가 매드리는 건 어떠십니까?”
이안은 앨런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수정궁의 안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대회의실을 가기 전에 나오는 수정궁 안쪽 정원에서 나비가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정원 사이로 금발 머리의 남자가 이안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 이번에는 똑바로 입고 있네?”
그의 머리 색깔은 풍요로운 가을의 곡식 색깔 같기도 했고, 태양의 빛깔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기도 한 색깔이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아쳤다.
루카스는 그의 모습을 한 번 보고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정돈하며 그의 옆에 서서 걸어갔다.
“아. 네가 고양이를 데려왔다는 말이 있던데. 왜 데려온 거야? 잡아먹기라도 하려고?”
“그런데 네가 잡아먹을 거면 고양이 말고도 늑대 같은 동물도 잡아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을 들은 이안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그를 쳐다봤다.
“그 전에 내가 잡아 먹히는 게 더 가능성이 있을걸.”
“…….”
그러자 뒤에서 듣고 있던 스칼과 루카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앨런을 쳐다봤다. 자기가 잘 못 들은 게 아니냐는 듯이.
“이안 님을 디저트 시종으로 부려먹으시는 분이시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앨런이 진지한 표정으로 수첩을 뒤적거리며 자료를 찾아 이안에게 넘겨주었다.
“……다들 단단히 돌았네.”
“원래 산맥에 사는 호랑이들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더 이상해졌을 뿐이죠.”
루카스와 스칼이 어딘가 나사 빠진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덧 문 앞에 다다른 이안은 앨런이 건네준 종이를 받고 문 앞에 멈춰 섰다.
앨런은 시종장이 들고 있는 선반에다가 시계 및 각종 소지품을 내려놓았다.
시종장이 그들을 보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북부의 주인이자 얼음의 수호자이신 이안 카델리온 님과 그 보좌관이신 앨런 님, 넓은 남쪽 평야의 주인이신 루카스 세르디한 님과 그 보좌관이신 스칼 님 드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수정궁 안쪽, 네 가문의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의 육중하고도 거대한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