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46/111)

45.

인간인 상태로 이렇게나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에게서 풍겨 오는 어딘가 진득한 분위기가 나를 붙잡았다.

‘이거 뭔데…….’

나는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리엘의 눈동자가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떨렸다.

길어지는 침묵에 그의 눈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진짜 안 보고 싶었어?”

나지막한 저음과 함께 그의 붉은 입술이 바로 눈앞에서 움직였다.

여차하면 입술이 서로 닿을 것 같았다.

묵직한 저음이 손끝이 오그라들 정도로 오싹한 기분을 일으키게 했다.

그 목소리가 그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당, 당연히 보고 싶었지!”

이대로라면 위험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꾹 누르곤 일어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쓸데없이 탄탄한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쪽 손을 내 등에 올려놓은 그가 힘을 주어 나를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일어나려고 하던 것이 오히려 그의 품에 얼굴 박치기 한 꼴이 되어 버렸다.

“아니면, 도망치려고 했던 거야?”

말했잖아. 탈출은 안 된다고.

내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든 꼼지락거리자 나직하고 먹먹한 웃음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도망을 왜…….”

쳐.

생각해 보니, 전과가 화려했다. 연회장에서 술 먹겠다고 날아오르고, 의무실에서 한 번 도망쳐서 그의 시야에 안 보이게끔 숨고.

생각보다 화려한 전과에 나는 말을 정정했다.

“이번엔 도망가려는 생각 없었어.”

미래에는 모르지만.

나는 뒤이어 이어져 나오려고 하는 말을 삼켰다.

내 허리를 꽉 잡고 있던 그가 내가 답답하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까지만 더더욱 힘주어 나를 안았다.

“아리엘.”

그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깐 채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귀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곤 그는 그 각도에서 제일 처량하고 아름답게 보일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귀에다가 속살거렸다.

중저음에 목소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다가왔다.

“나 버리지 마.”

빛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가 여러 가지 푸른 빛으로 산란되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오그라지고 낯선 기분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나는 애꿎은 이불보만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나가야 해.’

마음이 몽글몽글거리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싹 트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처럼 그 위에 올라가 안겨 있다면 정말 어떻게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나는 그의 어깨를 온 힘을 다해 팍 쳤다.

‘납치범과 납치당한 수인은 이런 관계가 아니란 말이야.’

무게를 실어 내 몸을 그의 어깨와 힘껏 부딪히자 당황했던 건지 나를 붙잡고 있던 팔의 힘이 살짝 풀린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서 벗어나 벌떡 일어났다.

“나, 나 샤워하러 갔다 올게!”

아리엘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걸 본 이안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시녀는 부를 필요 없어.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그 말을 끝으로 귀 끝도 빨개진 아리엘은 목각인형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삐거덕삐거덕 걸어 다녔다.

“아리엘, 너 손과 발이 같이 나가는데.”

같이 나가는 손과 발을 바꿔서 걸었다.

“아직도 같이 나가는데.”

젠장.

정말 내 어딘가 고장 난 것이 분명하다.

“아리엘 문!”

“악!”

나는 엄청난 속도로 욕실 문을 파괴하려고 시도해 빨갛게 물든 내 이마를 문질렀다.

……욕실 한 번 가기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나는 완벽하게 욕실 문에까지 머리를 박고 나서야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안은 아리엘이 들어간 욕실 문을 계속 바라봤다.

아리엘이 외출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뜬금없이 루이즈와 호수로 같이 외출을 한 것도 이상하기도 했고, 아리엘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다 하는 수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중간에 그의 수하가 그녀를 쫓다가 놓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리엘의 흔적을 놓쳤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안은 심장이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 고양이가 자신에게서부터 도망치는 줄 알고. 그러면 자신이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첫날부터 계속 저택 안에 있는 개구멍을 찾아 헤매는 것이나, 파티 때 그의 바구니에서 탈출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다.

이제 인간화도 했으니 그녀가 이 저택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고 살 수도 있었다.

그 보고를 받은 이안은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가 차갑게 식고 수인이 미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하필 인간화한 모습도 그렇게 예뻐선.’

아리엘이 인간화한 모습은 또 아름다웠다. 찰랑거리는 검은색 머리칼과 또렷한 연둣빛 눈동자는 어딘가 한 번쯤은 그 신비로움을 범해 보고 싶은 기분이 들게 했고, 청량한 페로몬 향은 가까이 다가가서 취하게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아리엘이 도망간 줄 알고 제 방으로 왔을 때, 방에는 조그만 인영이 쭈그려 실실 웃어 대고 있었다.

그녀였다.

도망간 줄 알았던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다시 돌아왔던 것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그는 당장 그녀에게 다가가 아무 곳도 가지 못하게끔 자신의 품에 가두어 버리고 싶었다.

자신의 방에 가두어버려도 되지 않을까.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끔.

마음만 같아선 온전히 자신만 보게끔 다른 사람의 시선은 다 차단해 버리고 싶었다.

‘…상성 페로몬을 향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더니.’

원래부터 감정을 느끼는 대신 수인들의 생각을 잘 읽는 그는 아리엘이 하고 있는 생각들을 거의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기분이 좋은지, 방 안에는 평소보다 들떠있는 더욱 청량한 느낌이 강한 페로몬이 남아 있었다.

‘…하아.’

자신의 머리를 맑게 개어주는 페로몬은 맡을수록 매력적이었다.

그녀를 뼛속까지 집어삼켜 먹어 버리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한 방울의 체액마저도 남김없이 게걸스럽게 핥아먹고 싶었다.

‘그마저도 달 것 같은데.’

이안은 혼자 이 기분에 대해 곰곰이 고민하곤 결론을 내렸다.

이건 소유욕이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안이 얼마나 깊은지 모를 소유욕과 집착으로 물든 눈을 느릿하게 감아 떴다.

이런 그의 상태를 그녀에게 들키면 안 됐다.

어떤 수인보다 예민한 그녀는 그에게서 무언가 조금만 이상함을 느껴도 바로 멀리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리엘.”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그녀의 이름이 속삭이듯 내뱉어졌다.

쿠당탕!

그때 그의 속삭임에 대답하듯 욕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아리엘, 괜찮아?”

이안은 계속되는 생각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

욕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리엘?”

이안이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다가갔다.

“괜찮아!”

저 문 뒤에서 절대 안 들어와도 된다는 뜻이 숨은 필사적인 외침이 들렸다.

“으아…….”

나는 망연자실하게 욕실 안의 광경을 바라봤다.

텅 빈 욕실 안에 제대로 쭉 뻗어 엎어져 있는 나.

누가 봐도 지금 내 모습은 ‘나 미끄러져 넘어졌어요.’를 강력하게 주장 중이었다.

정말 이안이 그 상태 그대로 들어왔다면 쪽팔려 죽을 수도 있었다.

……내 인생은 조용하게 넘어가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어쩐지 오늘은 외출하고 이안이 어딘가 이상했던 것 빼고는 조용하게 넘어가나 했다.’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는데.

나는 무릎을 탁탁 턴 후, 주섬주섬 잠옷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 호랑이가 내 무릎을 보곤 한 소리 하는 건 아니겠지.’

잔소리가 걱정되었던 나는 은근슬쩍 슈미즈 드레스를 무릎까지 끌어내렸다.

***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이 내 머리칼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머리칼은 방금까지 있었던 고동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편지를 찾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고동색 머리칼도 나쁘지 않았는데.’

이러다 페로몬 없이 살아가는 걸까, 하는 나의 우려와는 달리 내 페로몬은 무사히 잘 발현되었다.

단지 모습을 동물인 상태에서는 다른 동물로 바꾸지 못하지만, 사람인 상태에서는 자유롭게 바꿀 수 있었다.

‘뭔가 반쪽짜리인 느낌.’

주로 카멜레온 종족에서 나타나는 페로몬이 왜 나에게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카멜레온 족과 접점이 하나도 없는데.

마침 필요한 능력이라 좋긴 했지만, 어딘가 찜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 능력이 유용하긴 기가 막히게 유용했다.

‘게다가 아무도 없을 때 몰래 페로몬 연습해서 아무도 모르고.’

사기 치고 다니기 딱 좋은 페로몬이었다.

물론, 내가 사기 친다는 것은 아니다.

‘……사기가 뭐죠?’

나는 선량한 소시민이기 때문에 사기 같은 거 못 친다.

아리엘은 턱을 괸 채 기분 좋게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 맛있는 크림 브륄레가 나오는 날.’

여기 카페 <가나슈>는 날마다 나오는 디저트가 매일 달랐다.

어떨 때는 엄청 부드러워 입 안에서 살살 녹는 푸딩이 나오기도 했고, 어떨 때는 달달한 마카롱이, 어떨 때는 적절한 온도로 딱 구워 겉은 빠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이 나오기도 했다.

‘왜 이곳을 모르는 거지.’

나야 좋긴 하지만.

가게를 둘러보니 가게에는 두 테이블밖에 차지 않았다. 색색의 머리칼을 가진 4명의 영애들이 있는 한 테이블 있었고, 다른 한 테이블에서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수인이 신문을 읽으며 크림 브륄레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여기가 정보 길드가 운영하는 곳이라지만 카페 메뉴가 너무 맛있단 말이지.’

소규모 정보 길드였던 이곳은 원작이 끝날 때 즈음, 슈엘라가 있는 곳과 합쳐져 엄청 성장하는 곳이 된다.

“크림 브륄레입니다. 그리고 이 푸딩은 단골손님 서비스입니다.”

친절하게 생긴 남자 종업원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크림 브륄레와 푸딩을 내려놓았다.

그 종업원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렇게 기다리던 크림 브륄레를 한입 맛보면서 편지를 뜯었다.

차갑고 따뜻한 크림 브륄레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혀끝에 달달한 맛이 맴돌았다.

『비안 웨스트님.

말씀해 주신 돌산은 구입했습니다. 가격은 총 950골드가 들었습니다…….』

비안 웨스트는 내 가명이다. 이안의 이름 첫 글자를 변형시킨 것과 동서남북 적어 놓고 한 군데 눈 감고. 찍은 것이 합쳐져서 저런 이름이 되었다.

만약 동쪽이 나왔다면 비안 이스트가 되었겠지.

‘원래 값에서 반보다 더 후려치기 했네.’

산 하나를 사는데 950골드라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생각하면 손이 덜덜 떨리는 금액이지만, 엄청나게 싼 건 맞아.’

그럼에도 입안이 씁쓸했다.

반값을 후려치기 했더라도 내가 그녀에게 준 돈이 거의 다 날아간 것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가지고 있던 돈이 번지점프 하듯이 훅 빠져나가는 기분은 언제나 좋지 않았다.

‘빨리 주머니 채워 넣어야지.’

반짝이는 금은보화들로.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며 나는 달콤한 크림 브륄레를 입안에 다시 넣었다.

‘곧 다시 돌아올 거야.’

달달한 것을 먹으니 인생의 쓴맛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보고 싶습니다. 언제 보나 손에 꼽으며 기다리고 있어요!

-클로에-』

“영애분들. 그거 아세요?”

그때 뒤에서 쑥덕거리고 있던 영애들의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어 왔다.

“시몬드 가문의 셀레스틴 님과 히아트 가문의 녹스 님이 약혼하신대요!”

낭랑한 목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졌다.

‘뭐? ……누가 누구랑 약혼을 한다고?’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마시고 있던 에이드를 그대로 뿜어 버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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