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아 왜 지금 외모 변형이 풀린 거야.’
나는 내 머리카락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고동색 머리카락에서 갈색빛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단지 새까만 검은색만 남았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도 못했는데.’
이 망할 페로몬.
‘분명 혼자 연습할 때는 괜찮았는데.’
나는 놀란 속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빨리 된다고 해. 빨리.’
고요하고 느긋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내 속은 지금 바싹 타들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어느새 비가 그쳤는지, 계속 세차게 내리치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하기만 한 집 안에서 아리엘과 그녀의 눈이 다시 한번 제대로 마주쳤다.
밖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내 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에워싸는 쌀쌀한 기운에 아리엘이 자신의 주먹을 한 번 말아쥐었다가 폈다.
차가운 바람에 검은색 실 같은 머리칼이 은은히 나부꼈다.
뒤의 창문을 통해 옅게 들어오는 햇빛이 흩날리고 있는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보시시 비추었다.
햇빛이 그녀의 까만색 머리칼을 비추고 있는 그 모습이 어딘가 신비로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클로에는 자신의 앞에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아리엘을 가만히 응시했다. 깨끗한 연두색 눈동자에 때 묻은 자신의 모습이 똑바로 담겨 있었다.
그 눈동자가 무엇이라도 선명히 담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맑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 소녀가 신처럼 보였다.
아니, 신이 맞았다.
그녀는 자신을 구원해 주러 와 준 신이었다.
그녀는 홀리듯이 그 계약서에 사인한 후, 아리엘에게 그것을 그대로 내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아. 지장까지 찍어야 하나.’
그러곤 아리엘에게 건네려고 했던 계약서를 다시 가져갔다.
‘기왕이면 확실한 게 좋겠지.’
그녀가 주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날카로운 파편 중 하나를 집어 과감히 자신의 엄지에 상처를 냈다.
잠시 따끔한 느낌과 함께 엄지에서 붉은 피가 몽글몽글 샘솟았다.
손가락에서 피가 올라오는 것을 본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인이 되어 있는 곳 위에다가 피가 묻어 있는 엄지손가락을 그대로 눌러 찍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어딘가 핀트가 엇나간 그녀의 행동에 나는 기겁하듯이 말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여기요.”
순식간에 지장까지 다 찍은 클로에가 여태까지의 경계심은 착각이었을까 의심될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종이를 넘겨줬다.
‘…방금 뭐가 일어난 거지.’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계약서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유독 피로 물든 엄지가 찍혀져 있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살짝 떨리는 눈으로 앞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자 뭐가 문제냐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원작 인물들은 다 어딘가 하나씩 나사가 빠진 걸까…….’
이안만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는데.
어딘가 마음 한구석으로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계약서를 다시 확인한 후, 빨간색 주머니를 품속에서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이 정도면 동부에 위치한 돌덩어리 산 정도는 사고도 남을 거야. 산의 정확한 위치는 주머니 안에 있는 쪽지에 적어 놨어. 나중에 그 산을 사러 갈 때는 그거 보면 돼.”
그녀에게 던진 주머니가 그녀의 손에 착 감겼다.
“동쪽에 있는 돌산은 상단<펠릭스> 명의로 사고, 상단은 네가 등록해.”
그리고 그녀의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곤 보석이 들어 있는 파란색 주머니를 한 번 더 던졌다.
“새로운 옷도 좀 사 입고. 저런 옷으로 상단 등록하고 땅을 사러 갈 수는 없잖아.”
묵직한 보석이 그녀의 손에 안착하는 소리와 함께, 클로에의 손에 주머니를 꽉 조여맨 줄이 휘감겼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마지막으로 녹색으로 된 주머니를 던졌다.
“돌무더기들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산을 하나 사는 건데.”
나는 잠시 벗고 있었던 우비의 모자를 올려 쓰곤 문고리를 돌렸다.
“일을 다 마쳤거나 나한테 따로 연락하고 싶은 사항이 있으면 우체국에다가 편지 맡겨 놔.”
끼이이익.
거의 다 녹이 슬어 갈색으로 갈변된 철문이 힘겹게 밀렸다.
“아. 오늘 너랑 나랑 있었던 일은 외부에 새지 않게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상단의 이름처럼 너와 행운이 함께하길 바랄게.”
“앞으로 잘 부탁해.”
탁.
그 말을 끝으로 낡고 허름한 판잣집의 문이 닫혔다.
***
‘와. 드디어 했다.’
맥이 턱, 풀리는 기분에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됐다.
‘내가 원작 여주와 계약했어.’
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믿기지 않았다.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나는 슬며시 올라가는 입을 가렸다.
‘아니, 근데 클로에 너무 귀여운 거 아니야?’
그런 몽글거리는 분홍색 머리에다가 동그란 눈동자라니.
보는 사람마다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게 만들잖아. 게다가 일도 잘하고.
‘원작에서의 클로에 성격이라면 반값 후려치기도 가능하겠지.’
클로에가 돌덩어리로 된 산 하나 구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돈덩어리들이 나에게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출구 없는 매력을 가진 사람 아닌가.’
삐죽삐죽 입꼬리에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심장이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빠르게 뛰었다.
“후우…….”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잘되지 않았다.
그때 아리엘이 쪼그려 있던 자리에 갑자기 그림자가 어둑하게 졌다.
“오늘 외출은 즐거웠어?”
위에서 낮은 저음이 울렸다.
‘외출한다는 거 이안한테 말 안 했는데.’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 말을 듣자마자 쪼그려 앉아 있던 상태에서 내 엉덩이만 바닥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찬찬히 꺾어서 올려다보니 이안이 허리를 숙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그의 하얀 머리칼에서 물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어…… 음…….”
루이즈에게 외출을 허락받은 것부터 해서 뭔가 찔리는 것이 많았던 나는 스리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기울여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게…….”
“나는.”
그와 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안이 눈꼬리를 휘곤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분위기에 위축되는 것을 느낀 내가 침을 한 번 목구멍으로 삼켰다.
꼴깍,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포식자에게 궁지로 몰리는 먹이의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그냥 조용히 하고 있을 걸…….’
분명 그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괜히 있지도 않은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치를 도르륵 보다가 슬금슬금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눈과 달리, 웃고 있지 않던 그의 입꼬리가 점점 비뚤게 올라갔다.
“고양이님도 이제 독립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자 돌아다닐 줄도 아시게끔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이안의 귓가에 어느 얄미운 보좌관의 소심한 자기주장이 맴돌았다.
“하…….”
그의 입에서 진득한 압박감이 깃들어 있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슬그머니 옆으로 몇 발자국 더 물러간 아리엘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에게 루이즈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고 루이즈에게 허락을 받다니.’
아리엘은 항상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지금이다.’
그가 생각에 잠겨 가만히 있는 동안 아리엘은 그를 주시한 상태로 한두 발자국씩 멀어졌다.
본능이었다.
최상위 포식자 앞에서 안전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본능.
내 기민한 본능이 어서 도망가라고 나에게 경고했다.
고양이가 초식 동물이 아님에도 최상위 포식자 앞에선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 피식자가 된 느낌이었다.
“외출해서 뭐 했어?”
별거 아닌 질문에도 그 물음이 위험하게 들렸다.
“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외출이랑 똑같지.”
너에게서 멀어질 때를 대비해서 노후 자금을 준비하려고 했어. 라고는 절대 말 못 하는 내가 애매하게 흐린 웃음을 입꼬리에 걸었다.
“정말 나한테 말 안 해 줄 거야?”
“다른 사람들의 외출이랑 똑같았다니까.”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술을 움직였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말과는 달리 내 발은 바삐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한두 발짝씩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곤 붉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짓말.”
한 발짝.
“거짓말쟁이 아리엘.”
두 발짝.
그가 점점 내게로 가까이 왔다.
그는 자신의 먹이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가 먹이 사슬의 최정점에 선 맹수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진짜야.”
아리엘이 태연한 목소리로 그에게 거짓을 전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알고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거. 위험하다.
왠지 모를 위기감에 나는 그대로 그에게서 뒤돌아 도망쳤다.
“왜 도망가.”
뒤에서는 그가 여유롭게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쫓아오니까.”
찔리는 것도 있고.
탁. 타닥.
내가 그에게서 빠르게 멀어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안이 자신의 머리를 뒤로 쓸었다.
은실을 짜놓은 것 같은 결 좋은 머리칼이 그의 손에서 뒤로 넘어가며 흐트러졌다.
“그렇게 도망가면 나 서운한데.”
뒤에서 즐거운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손에 잡힐 먹이를 모는 맹수의 들뜬 목소리였다.
‘도대체 저게 어딜 봐서 서운한 목소리인데!!’
나는 창백하게 얼굴을 굳힌 뒤 그에게서 멀어지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옆에 쓸데없이 넓은 침대가 보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침대처럼 사랑스러운 사물이 없었는데, 지금은 넓은 침대가 도망치기 거슬리기만 했다.
그 하얀 침대가 행동반경을 제한했다. 침대 옆으로 방향을 튼 나는 발을 바삐 움직였다.
“나는 계속 널 기다리고 있었는…….”
턱.
그때 내 발에 무언가 걸렸다.
‘아, 밑에 뭐가 있었던 거야.’
무게 중심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넘어지겠다.
나는 눈을 꽉 감고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넘어지기 위해 최대한 앞으로 손을 뻗었다.
‘안 넘어졌나……?’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부딪히는 감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내 아래에 있는 침대 이불보가 보였다.
“……데.”
밑에 깔려 있는 이안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나를 침대로 끌어당겼는지, 한쪽 팔은 내 허리를 휘감은 채였다.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방금보다도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그의 얼굴과 내 얼굴의 거리가 한 뼘도 채 안 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달뜬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아리엘.”
어딘가 집착이 얽매인 듯한 그의 눈과 내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