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44/111)

43.

‘지금 생각해 봤자 뭐 해.’

그녀는 얼른 상념을 떨쳐 버렸다. 그녀의 부모는 어린 그녀를 남겨 두고 죽었고, 지금의 그녀를 만든 것은 7살 때부터 같이 살던 그녀의 할머니였다.

“한……푼만 주세요…….”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 한 끼라도 먹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했다.

“제발…….”

집이 없는 사람들도 허다했고, 있는 집들마저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클로에는 구걸하는 사람들을 익숙하게 지나쳐 걸었다.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저 멀리에 있는 빨간 판잣집이 보였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커다란 납덩이라도 달아 놓은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가 살아 계실까?’

그녀는 차마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그 주변에 빙빙 맴돌았다.

혹시나 돌아가셨으면.

어떡하지.

가망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래도 할머니가 있어 불구덩이 같은 상황 속에서 버틸 수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집에 들어갔다간 싸늘한 시신이 자신을 마주할 것 같았다.

두려웠다.

그녀는 최대한 집 안으로 늦게 들어가기 위해 밖을 서성였다.

툭. 투둑.

손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한두 방울이 생생히 보였다.

하늘이 어서 집에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아.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못질이라도 당한 듯,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끌리지 않는 발걸음과 함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집 안에 들어갔다.

끼이익.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집 안은 엉망이었다.

도둑이 들어왔다 갔는지 별로 있지도 않은 물건들이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익숙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물이 지붕 위로 떨어지는 소리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녀를 반기는 고요함.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희미하게나마 들리는 숨소리.

안심한 클로에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할머니.”

할머니마저 가면 이제 진짜 혼자인데.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그러나 그녀의 부름에는 답 없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 숨소리가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내가 좀 더 돈을 벌 수 있었으면.

돈을 더 벌어 할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익숙한 자괴감이 그녀를 덮쳤다.

“하…….”

그녀가 주저앉아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옆에 있는 사람이 위급한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몸이 부서지라 일을 해도 모이는 돈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한 달 동안 모은 돈은 귀족들이 디저트 하나에 쓰는 돈보다 훨씬 모자랐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다 죽어 가고 있는데도 그녀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현실은 냉혹했다.

그 사실이 클로에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터널에서 보이지 않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

이게 맞는 걸까. 잘하고 있는 걸까.

답이 보이지 않는 물음과 함께 하는 것은 언제나 막막했다.

이 모든 것이 고난이었고 고역이었다.

툭. 투둑.

지붕이 잘 되어 있지 않아 비가 새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하나둘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물건들 위로 물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익숙하게 널려 있는 바가지 중 하나를 집어 재빨리 바닥에 놓았다.

쏴아아-

빗방울이 세게 내리쳤다.

천장에서 누가 물을 부은 것처럼 곳곳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비 떨어지는 소리와 희미한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불 밝힐 것 하나 없는 적막한 집은 먹구름으로 사방이 뒤덮인 하늘 때문에 어스름했다.

클로에는 뚝뚝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그 모습을 초점 없이 응시했다.

그때였다.

“계신가요.”

세찬 빗소리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계세요?”

‘또 구걸하러 온 사람인가…….’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내렸다.

끼이익. 쇠끼리 서로 긁히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희도 오늘은 밥이 없…….”

아니었다.

구걸하러 온 사람치고는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왜 저런 사람이 문 앞에 있는 거지?’

우비를 입은 채 비를 맞기만 하고 있는 소녀가 앞에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 날이 밝으면 밖에 있어도 되는데 지금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소녀가 하늘을 가리키곤 빙긋 웃었다.

‘도대체 저건 무슨 소리지.’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느닷없이 찾아와서 집에 들어가겠노라고 당당하게 집주인에게 말하는 경우라니.

그 당당함에 넘어가 저도 모르게 문을 열어줄 뻔했다.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그녀는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스스한 연갈색 머리에 갈색 눈.

어딜 가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수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은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특별한 곳.

그런 곳이 여기였다.

갑자기 당당하게 집에 들여보내 달라는 것부터 해서 생김새까지.

그런 의미에서 저 소녀는 이곳에서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저런 사람이 왜 온 거지.’

클로에는 문고리를 잡은 상태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경계 어린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소녀는 기다려 주었다.

네 선택대로 하라는 듯이.

비를 맞으며 기다리던 소녀가 나직이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너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일 텐데.”

‘무슨 말이야. 저게.’

그녀의 눈이 커졌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알잖아?”

“아니면 네 할머니 돌아가실걸.”

“마치, 9년 전 ‘그때’처럼 말이야. 너희 부모님이 당했듯.”

유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 생각난 그녀의 동공이 확장됐다.

‘웬만한 정보상도 그 사건은 모를 텐데.’

찍은 걸까. 아닐까.

문을 열고 문고리를 잡은 상태로 앞에 있는 수인을 두고 잠시 갈등하던 그녀가 등을 돌리려고 했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담담히 그 사실을 말하는 소녀의 눈은 그런 눈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

앞으로의 미래까지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또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할 거야?”

“후회만 하면서?”

전지한 사람의 눈 같았다.

소녀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집 안으로 소녀를 들였다.

바닥에 깔린 나무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게 들렸다.

군데군데 썩은 나무판자들이 괜히 눈에 띄었다.

바가지에 물이 떨어지는 것을 익숙하게 잠시 바라보던 소녀가 입술을 열었다.

“너 페로몬 있지.”

“……남들의 귀에 안 들리게 소리를 차단하는 정도면 이능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눈치 빠르게 페로몬을 사용했다.

사용자 간격은 그녀와 그 소녀.

딱 두 사람에 한해서.

“어떻게 아신 거죠? 정보 길드에서도 안 알려 줬을 텐데.”

의도치 않게 날카로운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고급스러운 원단도 아닌 평범한 옷차림.

정보 길드가 이런 소녀에게 그 정보를 팔 리가 없었다.

“글쎄…”

소녀가 말끝을 흐렸다.

“일급 비밀.”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우비를 벗었다.

“하지만 이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내가 장담할게. 내 이름을 걸고.”

그녀가 담백하게 말했다.

그러곤 옷 안을 뒤적여 종이와 펜을 꺼냈다.

“아. 여기 있다.”

“한 번 읽어 봐.”

클로에는 떨떠름히 잘 접혀 있는 계약서를 받았다.

『…3. 갑은 을을 포함한 그녀의 가족이 병에 걸렸을 시, 치료를 위한 금액을 모두 지불한다. 이때, 약값은 치료를 위한 금액에 포함된다.

4. 을은 상단<펠릭스>의 부단주로서 그 역할의 책임을 성실히 이행한다….』

계약서를 읽는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몇 번을 다시 읽어 봐도 이상한 곳이 없었다. 오히려 이것을 읽고 있는 그녀 자신에게 더 좋은 조건을 내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너무나 좋은 조건에 저절로 경계 어린 눈초리가 만들어졌다.

“저를 어떻게 알고 이런 걸 제시하시는 거죠?”

부단주라니. 자신은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다.

자신은 다른 집에 가서 잡일거리만 할 그릇이었다. 애초에 이 계약이 사기라는 게 더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그러자 우비에 모자까지 쓴 소녀가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방 안이 어둑어둑했지만, 그 소녀의 눈동자는 똑바로 보였다.

아주 선명히.

“할머니 안 고칠 거야? 이대로 내버려 두게?”

끊어질 듯 말 듯 한 희미한 할머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능력이 있는 많은 사람을 내버려 두고 나를 왜 쓰는 걸까.

“저를 왜…….”

이런 좋은 자리에.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의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말도 되지 않는 조건에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의 네 쓸모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내가 정하는 거야. 너가 할 일은 두 가지 선택 중에 하나를 고르는 거고.”

소녀가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말했다.

그 평범한 눈동자가 빠져들 것같이 영롱했다.

“이걸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평범해 보이는 외향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썩은 판자와 젖은 곰팡이들이 있는 이 낡은 집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소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무판자가 삐걱댔다.

“그리고 넌 나에게 필요한 존재고.”

자신조차도 모르는 자신의 가능성에 그 소녀가 거는 맹목적인 기대가 보였다.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저렇게 말하는 당당함이 그녀를 빛나 보이게 만들었을까.

자신과 키가 비슷한데 자신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이 정도 이유면 충분하지 않아?”

작은 거인.

정말 작은 거인 같았다.

그 말이 끝나자 집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툭. 토독.

비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유리창이 다 깨진 창문에서 지붕으로부터 내려온 물방울이 도르륵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계약하자.”

소녀가 볼우물을 패며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소녀의 모습이 원래 모습으로 바뀌었다.

튀지 않고 적당한 연갈색 머리가 아름다운 밤하늘을 수놓을 고운 실로 만든 검은색 머리카락으로 달라졌고, 갈색 눈동자는 티 없이 맑은 연두색 눈동자로 변했다.

검은색 머리카락의 암흑과 연두색 눈동자의 오묘한 조화에 그녀의 눈동자가 그 소녀에게 붙잡혔다.

“잘해 줄게.”

어느새 비가 그쳤는지 고개만 내밀은 해가 부스스하게 그녀를 비췄다.

그것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의 눈엔 바닥에 나동그라진 물건들도, 산산이 조각나 버려 깨진 조각만 남은 것들도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그녀의 소중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소한 내가 손해 보지는 않을 거야.’

그녀의 직감이 말해줬다.

그니까, 이것은 인생 일대의 기회였다.

“어때?”

그녀는 홀린 듯이 소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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