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43/111)

42.

그 정도 생각까지 하고 나는 근처 나무 그늘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자 그 뒤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던 수인들이 바로 옆에서 분주하게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준비했다.

도대체 언제 왔는지,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혼자 고즈넉하게 여유를 즐기던 앨런까지 다 있었다.

앨런이 원작에 나왔었나.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루이즈는 나온 게 확실한데.

하긴, 앨런이 나오더라도 이안의 보좌관으로 서술되었겠지. 앨런은 원작에서 뭘 했으려나.

‘근데 원작 사건들은 어차피 아직 안 일어난 일이니까 바꿔도 상관없는 거 아니야?’

벌러덩 누운 아리엘은 나뭇잎 사이로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푸르른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팔을 뻗으니, 뭉뚝한 발이 하늘을 가렸다.

이게 바로 원작을 기억하게 해 준 신의 큰 뜻일 거야.

아리엘은 그녀 마음대로 신의 뜻을 곡해하며 뛰어난 그 뜻에 감탄했다.

원작에는 유능한 인물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아직 고생하고 있거나 밝혀지지 않은 인물들을 줍줍해서 데려올 거다.

그 친구들은 진흙탕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일찍 벗어나고, 나는 인재들을 얻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석이조이다.

‘그래. 우선 여주인공만 데려오면 어느 정도 해결은 돼’

그녀는 뛰어난 실무자였으니까.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훨씬 좋았다.

그녀가 있으면 일단 발등에 떨어지고 있는 급한 불 정도는 꺼진다.

‘그러면 처음에 여주인공이 있던 곳이…….’

에드윌 로워드 31 뒤쪽 빈민가.

그래. 클로에는 거기에서 할머니가 죽고 나서부터 그 유산을 가지고 사업을 하기 시작한다.

그 할머니가 돈이 있다면 간단하게 고쳐질 병으로 돌아가신 걸로 아는데.

‘그럼 할머니가 죽기 전에 할머니 병을 고치고, 내가 클로에를 데려오면…….’

완벽했다.

시원한 바람이 내 배를 스치고 지나갔다.

클로에의 할머니가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를 받을 수 없어 죽는 것이라는 것만 빼면.

‘시간이 얼마 없어.’

인간화 적응 기간만 끝나면 바로 달려가야지.

생각을 마치고 하늘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는데 루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엘, 여기 위로 올라오렴.”

나는 일어서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가 털을 한 번 부르르 털었다.

그러자 몸에 묻은 잔디가 우수수 떨어졌다. 몸을 어느 정도 털고 난 후,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 잔디에 아리엘이 만족스럽게 돗자리 위로 올라갔다.

“아리엘, 이리 와.”

그래 갈게.

별생각이 없었던 아리엘은 이안의 부름에 앞에 가서 누웠다. 그러자 이안이 세심하게 아리엘의 털에 묻은 잔디를 하나하나 다 걸러 냈다.

‘아, 좋다.’

아리엘이 갸르릉 거리며 그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이 햇빛. 이 온도. 이 습도. 이 잔디. 모든 게 완벽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슈까지도.’

루이즈가 아리엘 앞으로 슈를 가져다 놨다.

“아리엘, 네가 좋아하는 거라서 특별히 구해 왔단다.”

앞으로 내밀어진 슈를 이안이 포크로 먹기 좋게 잘라 아리엘의 입 앞에 가져다줬다.

‘혼자 먹을 수 있다니까.’

나는 그를 가느다란 눈으로 쳐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내가 인간인 상태로 있다가 새끼 고양이로 변했을 때 생각보다 큰 포크의 크기에 팔짝 뛰며 놀란 이후, 포크는 아주 위험한 살상 무기가 될 수 있다며 자기가 직접 떠서 먹여 줬다.

‘이러다 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고양이가 될 것 같아 걱정이야.’

입을 꾹 닫고 가늘어진 눈으로 노려보자 이안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눈꼬리를 휘었다.

아무리 봐도 놀리는 게 확실했다.

‘나 혼자서도 먹을 수 있는데.’

누군가 음식을 나에게 떠먹여 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슈가 들어 올려진 포크가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졌다.’

그 슈를 열심히 노려보던 내가 결국 한숨을 내쉬곤 포크에 올려진 슈를 한 입 먹었다.

그러자 내 털을 쓰다듬는 이안의 손길이 느껴졌다.

‘……쓸데없이 따뜻한 기운만 안 느껴졌으면 못 쓰다듬게 했을 텐데.’

서늘한 몸에 들어오는 따스한 기운에 나는 그냥 이안의 앞에 그대로 누웠다. 그러자 이안이 자신의 다리 위로 나를 들어 올려 편하게 앉혔다.

그걸 본 루이즈의 보좌관은 그 상태로 굳었다.

“앨런 데모트, 혹시 지금 내가 보는 분이 이안 카델리온 님 맞지?”

“그니까, 내가 아는 이안 카델리온 님.”

북부의 냉혹한 지배자이자, 족히 4미터 정도 되는 마물을 찢어버리는…….

한마디로 지금 이안이 미쳤냐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앨런이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가볍게 한 마디 내뱉었다.

“아마 네가 아는 내 주군은 아닐걸.”

저렇게 리스 데모트가 당황하는 건 흔치 않은데.

앨런은 콧노래를 부르며 레모네이드를 한 입 더 빨아먹었다.

저 벙찐 리스 데모트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가. 유독 레모네이드의 맛이 상큼하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상큼함이었다.

***

‘이러려고 루이즈가 높이뛰기를 그렇게 많이 시킨 거였나……?’

루이즈는 정말 이 모든 걸 다 예상했던 걸까.

‘도대체 어디까지 큰 그림을 그렸던 거야.’

혼자만의 외출 허락이 떨어진 나는 저택 밖으로 나가면서 루이즈가 한 말을 다시 상기했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외출하는 것을 허락했다.

“혹시라도 몰상식한 누군가가 너를 강제로 데려가려 하거나 네 몸을 더듬거리려고 한다던가 너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낸다면.”

“날아 차기로 차 버리렴. 거기를.”

“그게 귀족이라도, 꼭.”

당시 그 말을 들은 나는 꽤나 과격한 언사에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그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때 루이즈는 고상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고양이 상태라도 문제없잖아. 연습한 덕에 이제 그 정도 높이까지는 뛸 수 있으니까.”

“어지간한 가문은 그곳이 불구가 되어도 내가 수습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힘차게 날아가서 차 버려.”

“아. 몰상식한 남자에는 이안도 포함이야.”

“걔는 개념을 밥 말아 먹었잖아.”

‘이안이 개념을 밥 말아 먹긴 했지.’

나는 보석을 잔뜩 담은 주머니와 종이와 펜을 가방에 소중히 넣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세리안 부티크네.’

그 옆에는 바빌로 부티크 등 여러 부티크가 줄 서 있었다.

나는 휘황찬란한 부티크들과 보석점들에 눈을 떼곤 갈 길을 바삐 걸어갔다.

척 봐도 고급스러운 길에 사람들이 한껏 차려입은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하얀색 작은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다니는 걸까.

‘도대체 실용성도 없는 작은 하얀색 바구니를 왜 들고 다니는 거지.’

바구니 말고 가방이 더 편할 텐데.

‘무슨 날이라도 되나.’

기묘한 현상이었다.

나는 그들을 한참 동안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옆에 있는 작은 골목길로 향했다.

골목길은 자세히 보지도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를 것 같이 정말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 몸을 돌려 좁은 골목길 안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처음 그 고급스러웠던 에드윌 로워드 거리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좁고 초라한 골목이 보인다.

머리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어쩐지 오늘 무릎 관절이 쑤시더라니.’

아리엘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우비를 꺼내 입었다.

‘분명 이 근처라고 나와 있었는데…….’

아직 여주인공의 할머니가 죽을 때가 되지 않았으니 그녀가 에드윌 로워드 뒷골목 빈민가에 사는 것은 확실했다.

‘분명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거나 했을 리는 없고…….’

에드윌 로워드 빈민가에는 그녀가 떠나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까.

‘어……? 쟨가?’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는데 빈민가에 어울리지 않는 솜사탕 같은 연분홍색 머리가 보였다

***

클로에는 자신의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이 온통 새까만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대륙에서 제일 발달한 길거리, 에드윌 로워드 31.

그 뒤에는 9년 전 당시 원인 모를 화재 이후 완전히 빈민가로 변해 버린 지역이 있었다.

‘9년 전에는 이 거리만큼 평화로운 거리도 없었는데.’

그녀는 후회에 잠긴 채 하늘을 보며 터덜터덜 걸었다.

옛날과 달리 먼지를 뒤집어쓴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 길거리에선 숨바꼭질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했는데.’

그녀는 항상 돌아올 때 이 길거리를 다니며 과거와 현실을 연결시켜 이곳을 바라보았다.

이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골목대장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던 모습이 눈앞에서 선연히 그려졌다.

오후에 집에 오면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시는 부모님도.

옆집 친구네에서 먹었던 맛있는 저녁밥도.

지금은 그저 덧없는 공상일 뿐이다.

불길은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렸으니까.

가족, 친구, 집.

그리고 자신의 행복까지도.

그날은 여느 때보다 더 평화로웠다.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평소와 똑같이 점심 식재료를 사러 할머니를 따라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길거리에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양손 가득히 식재료를 사 들고 할머니와 돌아왔을 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거대한 붉은 노을이었다.

정확히, 그 노을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무엇보다 잔인한 핏빛의 노을이.

그것을 마주한 그 순간 울음이 터지지도 않았다.

딸꾹질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봤다.

노을이 자아내는 그 광경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그 거대한 괴물은 사람들의 외침마저 집어삼키며 크기를 부풀렸다.

그녀는 마른 눈으로 거대한 불길에 맥없이 쓰러지는 집들과 불에 타 죽어 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툭.

손에 쥐고 있던 식료품을 담은 봉투가 떨어졌다.

야채 볶음을 먹기 위해 샀던 채소들이 나동그라졌다.

버섯들이 이리저리 떨어졌고, 양파들은 데구르르 바닥에서 굴러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기…… 양파 떨어뜨리셨어요.”

우습게도 이 한마디가 그녀가 보고 있었던 광경이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시켜 줬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할머니. 이거 진짜야?”

그녀는 멍하니 입술만 달싹였다.

“……아니, 현실이야?”

“……이제 엄마 아빠 못 봐?”

그리고 그때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했다.

“……정말로?”

대답 대신, 조용히 종이를 클로에의 손에 쥐여 줬다.

부모님의 유서였다.

언제 써 놨는지 모를,

그녀의 부모님이 언제 죽을지 몰라 미리 써 둔 그 유서.

그 유서를 할머니는 매일 같이 가지고 다녔고, 그것은 그날 저에게 전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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