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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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입에서 나오던 내 말이 채 끝마치지 못했다.

내 시선이 멍하니 그녀에게 붙박였다.

너무나 그리웠던 얼굴이 앞에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네가 궁금해했던 수인 저기 바로 앞에 서 계시네.”

마리를 바라보던 이안이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어마어마한 진화를 했지? 무려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성장했어.”

그 말에 마리가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가 쓰고 있던 은테 안경을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어딘가 묘하게 불만스러운 목소리였다.

“저택 주인도 안 찾아올 만큼 요즘 저택에서 제일 바쁘시지.”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의 산 증인이 되셨죠. 이제는 호랑이에게 디저트까지 요구하시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뻔뻔함이면 사자의 저택을 무너뜨리는 것도 순식간이겠는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안이 팬을 내려놓았다.

“고양이도 호랑잇과 중 하나잖아.”

“이안 님, 말씀이 틀리셨습니다. 호랑이도 고양잇과 중 하나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요즘은 고양이가 세상을 지배하니까요.”

벌써 반절이나 일을 마쳐 버린 앨런이 뿌듯한 표정으로 끝낸 일거리들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서 이제 호랑이 굴이 호랑이 굴이라고 안 불리고 고양이 굴이라고 불리는 건가.”

신입 보좌관들이 그 말을 들으면 또 정신이 나갈 듯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그들은 현재 출장 중이었다. 마리는 내심 신입 보좌관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이 있었다면 자신을 이런 일로 부르지 않았겠지만.

아리엘은 불만 어린 눈초리를 보내지도 못한 채 헛소리를 하는 호랑이의 말들을 흘려 버렸다.

정확히는 보낼 정신도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놀라운 수인 때문에.

몇 개월 만에 보는 얼굴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보랏빛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냥 보라색보다는 좀 더 어두운 눈동자,

무표정하지만 자세히 보면 감정이 스며 있는 얼굴.

그리고 높게 틀어 묶은 머리까지.

마리였다.

마리가 없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전속 시녀가 바뀐 것부터, 루이즈 님의 제자가 되고, 죽도록 아팠다가 인간화한 것까지…….

새삼스레 그녀가 꽤 오랫동안 없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리?”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다행히 모두가 뜯어말린 그 괴상한 사극 말투는 아니었다.

“……진짜 마리인 거야……요?”

너무 놀라운 상황에 머릿속이 뒤엉켰다.

“……진짜로?”

침이 목으로 꼴깍 넘어갔다.

“고양이님은 인간이 되셨어도 여전히 심장에 위험하네요.”

깨질 것 같지 않았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지나갔다.

아무 감흥 없이 인생 사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보니 마리가 분명했다.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할 수인은 마리밖에 없었다.

몸은 괜찮았던 건지, 다 낫긴 한 건지, 휴가가 어쩌다가 몇 개월이나 쓴 건지, 밥은 잘 먹고 살았는지, 나를 보고 싶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말은 수두룩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한마디였다.

“……마리, 보고 싶었어!”

나는 활짝 웃었다.

수개월 동안 보고 싶었던 마음과 그동안의 그리움을 담은 웃음이었다.

그러자 이안이 꽃받침을 하곤 눈꼬리를 사르르 접었다.

“나는?”

그의 고운 입매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나는 안 보고 싶었어?”

“어.”

너는 어제도 봤잖아.

너랑 나는 주기적으로 보는데.

그것도 매일.

내가 어이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하네. 널 데려온 집주인은 안 보고 싶었다니.”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긴 속눈썹이 살짝 파르르 떨리며 밑으로 내려가 유리알 같은 파란색 눈에 음영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이 퍽 애처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것을 본 앨런은 세상 불공평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일거리로 눈을 돌렸다.

물론 아리엘 눈에는 이안의 후광에 가려 앨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와. 넘어갈 뻔.’

‘순간적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할 뻔했어.’

내가 이렇게 얼굴에 약하다니.

‘……쟤 얼굴을 너무 잘 활용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얘는 지가 잘생겼다는 걸 아는 게 분명하다.

정말로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작정하고 홀리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저렇게 웃는 것이 여우보다 더 여우 같을 수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도 뒤에 여우 꼬리가 아홉 개나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천년 묵은 구미호가 따로 없었다.

얼굴 하나로 나라 말아먹을 상이었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네…….’

확실히 저 정도의 미인이 있으면 나라가 기울어질 만도 하다.

‘저런 얼굴로 부탁한다면 없는 별도 따다 줄 것 같은데…….’

‘나라를 달라고 하면 기꺼이 왕관까지 씌워 줄 수 있겠어.’

저런 말도 안 되는 얼굴을 보았으니 앞으로 보는 남자마다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앨런도 꽤나 잘생긴 편인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저 앞에 있는 호랑이를 매일 보며 높아진 나의 눈 때문에 앞으로 연애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앞에 있는 백호를 쳐다보았다.

아 맞다.

‘마리를 마주한 충격이 너무 커서 원래 이 집무실에 온 이유를 까먹을 뻔했네.’

“야. 호랑아. 앞으로 저 외출할래요.”

아리엘이 그에게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곤 폭탄을 터뜨렸다.

“자유롭게.”

“안 돼.”

반대할 이유가 딱히 없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내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요?”

“초코 식빵이 발이 달려 거리에서 돌아다닌다면 먹을 걸 찾아 어슬렁거리는 수인들에게 먹혀 버릴걸.”

그가 붉은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 험한 세상에서 안에서 나에겐 네가 제일 위험한 것 같은데.

아리엘이 턱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게다가 초식계 수인이든 육식계 수인이든 초코 식빵은 모두가 먹을 수 있잖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엄연히 인간화까지 성공한 수인 보고 초코 식빵이라니.

나는 순간 발끈했다.

“누가 초코 식빵이라는 거야!”

나는 그의 눈치를 슬쩍 보고 한마디 덧붙였다.

“……요.”

아무래도 수장의 가문 가주에게 편안히 말 놓기는 어딘가 눈치 보였다.

책 속에서 잔혹한 그의 모습이 가끔씩 떠오르기도 했고.

앨런은 적극적으로 내 반말 사용을 밀어주고 있었지만.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빵 중에 초코 식빵이지.

‘식빵이라니. 어감도 좀 그렇고….’

다른 예쁜 빵들도 많이 있을 텐데.

초코 식빵을 닮은 얼굴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이란 말일까.

‘내가 초코 식빵이면 너는 그 위에 올라가는 하얀색 크림치즈거든.’

마음속에서 불만 어린 생각이 꾸물꾸물 올라왔지만, 그것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나의 뒤늦은 존댓말을 신경 쓰지 않는지 그가 말을 이었다.

“털 뭉치면 수인들에게 밟혀 이리저리 굴러다닐 테고.”

“털 뭉치도 아니거든!”

그리고 똑같이 그의 얼굴을 힐끔 보고 한 마디 덧붙였다.

“……요.”

그러자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듯 그가 눈꼬리를 휘었다.

‘응.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너무하시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제는 미래에서도 안락한 내 인생을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시기였다.

더 늦으면 안 됐다.

나는 생각나는 아무 핑계나 던졌다.

“네 이종사촌의 팔촌을 거리로 향할 자유권 좀 지켜 주겠니.”

아. 여긴 자유권이 없을 수도 있나.

“아니, 거리로 향할 자유 좀 지켜 줘.”

“나도 막 거리에 나가서 이것저것 사고 싶은데…….”

아까 이안이 했던 표정을 떠올리며 아리엘이 애처롭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곳에서 있지 않아도 안락한 미래 인생을 살기 위해 나간다는 말은 쟤 앞에선 곧 죽어도 하지 못한다.

그러자 앞에서 어이없는 음성이 들렸다.

“그런 표정 짓는 거 어디서 배웠어?”

“방금 너에게서.”

아리엘은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이래서 자식 앞에서 하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하는 건가.

저 요망한 고양이를 보며 부모들이 아이들 앞에서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리엘이 여전히 애처로운 표정을 유지하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내가 더 넓은 세상을 만나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여태까지 너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을 산 거 같아.”

내가 그 말을 끝내자마자 이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요즘 우물 안 개구리가 얼마나 현명한데. 개구리 계의 거의 모든 현자가 우물 안에 사는 거 몰라?”

“개구리 계의 현자분들은 대부분 장인이 많으시니 그러실 수도 있죠.”

옆에서 앨런이 맞장구쳤다.

한참 동안 그들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본 나는 순간 퍼뜩 기가 막힌 생각이 났다.

“아. 아니다.”

현재 나는 루이즈의 제자로 되어 있으니까 루이즈에게 허락을 받고 나가면 되겠다.

‘고용인들도 나를 루이즈의 제자라고 알고 있잖아. 그러면 이안이 말릴 명분도 없는 거 아니야?’

나름 괜찮은 생각이었다.

아리엘이 입꼬리 한쪽을 쓰윽 올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같이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어.”

멀끔히 무구한 표정으로 되돌아온 아리엘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되물었다.

“음흉한 표정이라니?”

“마치 슈를 어떻게 해야지 하나 더 먹을 수 있을까 하고 흉계를 짜는 표정이었는데.”

“슈를 훔쳐 가기 위해 눈독 들이는 그 얼굴.”

“딱 도둑고양이 같은 표정.”

도둑고양이라니.

살면서 도둑질 한 번 안 해 본 모범 고양이는 발끈했다.

“쓸데없이 잘생기기만 한 호랑…….”

망할.

나는 목을 꺾어 올려다 그를 쳐다봤다.

위에서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의 표정이 보였다.

급격히 작아진 시야에 똑같은 크기인데도 이안이 괜히 더 커 보였다.

‘수습 못 했는데.’

원래는 ‘쓸데없이 잘생기기만 한 호랑이가 세상을 지배하죠.’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진짜로.

아. 고양이 됐어.

말 다 못 끝냈는데.

장난기가 가득해 보이는 그의 눈을 보자 앞으로의 미래가 두려워졌다.

‘잡히면 죽는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오한에 나는 털을 부르르 털곤 집무실에서 뛰쳐나갔다.

괜히 보이지 않는 앞날이 걱정되었다.

***

외출을 요구하는 아리엘과 반대하는 이안이 요즘 한창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잘 돌아다니던 저택 안 까만 털 뭉치는 이안 쪽으로는 가지도 않은 채 서재에 박혀 책만 읽고 있었다.

심지어 디저트도 거르시고 밥도 서재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정도였다.

얼굴조차 그가 있는 쪽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저택의 분위기는 우울해졌다.

레아와 마리는 평소와 똑같이 자고 있으신 아기 고양이님을 깨우러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리엘 님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침대는 차게 식어 있었다.

‘외출을 원하시더니 진짜 나가셨나.’

똑같은 생각을 한 그들은 사색이 된 채 식겁해서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침대에 있는 베개도 들어 보고 소파 바닥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리엘 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마리 님, 고양이님 여기 계세요.”

바구니 뚜껑을 들어 올린 레아가 외쳤다.

바구니 안에 웬 아기 고양이가 연둣빛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나가자!’

새끼 고양이로 돌아온 아리엘이 인간으로 변했을 때 몸을 가릴 드레스까지 챙긴 채 바구니 안에 들어가 레아와 마리를 바라봤다.

‘저택 밖으로 나가자!’

열아홉의 고양이는 슬슬 독립심이 자라날 시기였다.

저택 밖 넓은 세상이 궁금한 모험심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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