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40/111)

39.

탁. 타닥.

저택 저 너머에서부터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밤을 옮겨 놓은 듯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두 손에 소중히 지도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리엘 님!”

“오랜만이에요!”

저택의 고용인에게 인사를 하는 소녀의 하늘거리는 파란색 드레스가 나풀거렸다.

앗.

달칵.

탁.

“세이프.”

완벽했군.

방에 들어간 나는 문을 닫았다.

그때 사방이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 어?

내 손에 들고 있던 지도가 펄럭거리며 떨어졌다.

아 놔.

‘왜 하필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인간화가 풀리는 거야.’

나는 내 손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손이 있던 자리는 손이 아닌 고양이 앞발이 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풀린 인간화에 망연자실했다.

‘그래도 며칠만 참으면 돼.’

인간화를 하고 난 후 일주일에서 이 주일은 특정한 이유 없이 인간으로 변했다가 동물로 변했다가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기간을 ‘인간화 적응 기간’이라고 부른다.

말이 좋아 ‘인간화 적응 기간’이지, 그냥 순 멋대로였다.

며칠 남지도 않은 인간화 적응 기간은 제멋대로 인간으로 만들었다가 고양이로 돌려놓았다가 하는 게 퍽 성가셨다.

‘지도에 적으면서 하려고 했는데.’

그냥 다 기억해 버리면 되지 뭐.

생각해 보니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나는 고양이인 상태로 앞발을 사용해 옆에 있는 체스 말들을 지도 위에 올렸다.

그 폼이 퍽 전문적이었다.

북부, 남부, 서부, 동부.

중앙.

그리고 바다.

그 길디긴 소설에서는 배경 설명에 대해서 쓸데없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필요한 과거사를 제외한 불필요한 과거사들까지 다.

그때는 정말 쓸데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정독했던 게 다행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유용한 정보였다.

‘그 재미없는 소설에 대해 감사할 날이 올 줄이야…….’

원작에서는 바다를 제외한 대륙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바다의 에티아를 무시해선 안 됐다.

뭍으로 올라오지 않아도 그들의 이야기가 대륙에서 나돈다는 것은 그들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했으니까.

물론 그것이 에티아 가주가 남자냐 여자냐 와 같은 모두 근거 없는 헛소리라고 하더라도.

웬만한 영향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어느 누가, 영향력도 없는 사람의 성별을 궁금해할까.

‘나도 에티아 가주 한 번 만나 보고 싶다. 특히 에티아에서는 푸른색을 띠는 보석들의 세공술이 그렇게 뛰어나다 하던데.’

후에 카델리온 저택에 남아 있지 않더라도 친분만으로 좋은 뒷배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지만.

나는 체스 말을 옮겼다.

‘북부.’

현재 내가 있는 곳이다.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더 춥다.

그렇기에 추위가 무서운 여름이 겨울을 피해 다른 곳보다 늦게 찾아온다.

일명 마물의 산맥이라고 불리는 곳이 추위를 막아 준다지만, 여전히 춥다.

마물들은 그 추운 곳에서 어떻게 버티는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오는 마물이 인간들이 자신들을 멸종시킨 수인들에 대한 저주 때문이라는데. 글쎄. 전생에 인간이었던 나로서는 딱히 믿음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옛날에 인간들이 많이 살았던 남부는 북부의 동맹 지역이었다.

널따란 곡창 지대가 있는.

사자와 호랑이들은 서로를 보면 그렇게 으르렁대면서도 위급한 상황이 오면 서로를 도와줬다.

그리고 그 기간만큼이나 서로 깊은 교류를 하기도 했다.

초대 가주 때부터 맺어온 동맹이니까.

나는 동쪽에 룩을 올려두었다.

‘동부.’

늑대들의 땅이다. 현재는.

숲이 울창하고 신비롭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인물, 여주의 조력자가 여기서 나온다.

파랑새를 다루는 수인.

그녀는 여주를 도와줬던 윈닉타와 비등비등할 정도의 크기의 정보상을 홀로 키워 낸다.

‘여주가 미리 채가기 전에 내가 먼저 빼 와야지.’

샥샥.

내 앞발이 빠르고 정확하게 체스 말을 옮겼다.

‘중앙.’

수인들이 바삐 오가는 것을 증명해 주듯 마차 소리와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

중앙은 상인들의 도시이다.

특정한 어느 한 곳이 통치하지 않아서인지, 물건들의 거래량도 다른 곳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웬만큼 큰 상단들이다 하면, 지부중의 한 곳은 무조건 중앙에 두고 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정보도 많이 돌아서인지, 특히 여주를 도와줬던 정보 상단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정보 상단 <윈닉타>.

대륙의 정보들은 거의 그들의 손아귀 안에 있다.

나는 내 앞발로 옆에 있는 체스 말 중 잡히는 아무 체스 말을 들어 내려놓았다. 까만색 퀸이 중앙을 차지했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별다른 정보는 나와 있지 않았어.’

원작에서의 그는 딱 돈을 받은 만큼만 도와줬던 수인이었다. 게다가 윈닉타 마스터에 대한 얼굴도 이름도 어떠한 정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중앙에 까만색 퀸과 하얀색 퀸이 같이 서 있는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중앙이라는 기회의 땅도.

중앙은 기회의 땅인 만큼 많은 수인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사업에 뛰어들며 새로운 시작을 맞이 한다.

나는 슬쩍 내가 모아 둔 보석들을 쳐다보았다.

이안이 사 준 그냥 보석도 아닌 장인들이 만든 제일 비싼 보석들을.

‘저 정도면 뭘 하려고 해도 충분하겠지.’

과장 조금 보태서 섬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니.

순간적으로 그가 사 준 보석들을 파는 것이 있지도 않은 양심에 찔렸다.

‘내가 많이 벌어서 더 좋은 걸로 사 주면 되지 않을까……?’

나는 나름대로 자기합리화를 마쳤다.

영 앤 리치.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행복은 돈이 많은 순이 아니더라도 돈은 중요하다.

만약 똑같이 슬퍼해도, 길거리에 나앉아 슬퍼하는 것보다 람보르x니에 앉아서 슬퍼하는 게 더 나은 것처럼.

딱딱한 곰팡이 슨 빵을 먹으며 우는 것보다 스테이크 썰면서 우는 게 더 낫다.

돈으로 행복은 살 수는 없지만, 행복해질 수있는 기회는 살 수 있다.

나는 슬슬 인간이 될 낌새가 보이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드레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차츰차츰 준비할 때가 되었다.

언제 버려져도 불안해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

동그란 은테 안경을 쓰고 있는 이안은 평소처럼 기계적으로 사인을 휙휙 휘갈겼다.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들이 가득했지만.

‘신났어, 아주.’

최근 몇 달 동안 그의 이종사촌의 팔촌이자 루이즈의 제자로 소개받고 들어온 아리엘은 저택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고 있다. 여태까지의 설움을 모두 해소하듯이.

‘그 와중에 나는 안 보러 오고.’

아리엘은 서재를 갈 때 나오는 장소를 여러 곳 둘러보았던 것일 뿐이었다.

정말로.

가는 중간에 피크닉 가방을 들고 들리긴 했지만.

그건 서재를 들렸다가 책을 빌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안의 집무실은 서재와 정반대인 곳에 위치해 있어서 아리엘이 들리지 않는 것이고.

그녀가 있는 곳이면 어느새 표정이 헤실헤실 풀린 저택 고용인들을 볼 수 있다.

‘그렇게 고용인들이 줏대 없으면 쓰나.’

자신을 찾아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은 이안은 엉뚱한 곳에다가 책임을 돌렸다.

“원래 인기 많은 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힘든 법입니다. 이안 님.”

앨런이 옆에서 그를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용기 있는 자가 쟁취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서류들을 탁탁 정리했다.

“힘내십시오.”

이안이 앨런의 입에 만년필을 골인시키려는 찰나,

똑똑.

둘뿐인 방에 기가 막히게 노크 소리가 울렸다.

***

“들어와.”

방문이 열리고 수인이 들어왔다.

각 잡힌 걸음걸이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에인트의 마리 엔젤러스 복귀했습니다.”

마리의 귀환이었다.

이안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사무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고.”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관련자들의 시체는 각 지역 경계에 누구인지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참혹하게 살해된 채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해 놓은 것 같습니다. 마치 저희가 조사할 것을 미리 예상했듯이.”

“또한 동서남북 모두 별다른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한 템포 쉬었다.

“……오히려 너무 평화로워서 이상해 보일 정도로.”

“얼핏 보면 두 지역 모두 수장의 가문이 바뀐 지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경례하느라 바닥에 내려 둔 여행 가방 정도 크기가 되는 가방을 들었다.

“아. 그리고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던 가방을 그에게 건넸다.

“이걸 준비하느라 늦었습니다.”

달칵.

이안이 그 가방을 열어 봤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누군가의 머리였다.

진짜 수인의 머리.

그가 무미건조하게 그 잘려 있는 머리를 내다봤다.

“쥐새끼가 있었나 보네.”

“첩자의 머리랄까요.”

“에티아에서 가주와 꽤 가까운 직업에 근무하는 사람이 첩자였습니다.”

“아쉽게도 생포에는 실패했습니다. 말하기도 전에 독이 퍼져 죽어서.”

이 정도 짓을 할 수 있는 세력은 <윈닉타>나 각 지역의 수장들 정도밖에 없는데.

“보고 사항은 이것이 끝입니다.”

‘굳이 바닷속 상어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첩자를 심을 필요가 있던가.’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갔다.

그가 입꼬리를 한쪽만 유려히 올리면서 편지를 집어 편지지에 글씨를 금방 휘갈겨 썼다.

『바다의 지배자. 에티아 가주님께.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아. 해양 교역권에 관해서는 북쪽과 바다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하나 만들면 편할 것 같습니다.

……

마지막으로, 아직 해충 정리를 안 하셨는지, 벌레 새끼가 있는 것 같더군요.

답례로 벌레 새끼의 머리와 금난초 꽃다발을 보냅니다.

부디 유용하게 쓰시기를.』

그가 편지를 깔끔히 접었다.

‘과연 상어의 가주가 이것을 받으면 어떤 반응을 내보일까.’

그가 입꼬리를 비뚜름히 비틀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가 가방을 닫고는 편지와 함께 앨런에게 건넸다.

“거기 냅둬.”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던 마리가 입을 열었다.

“참. 아리엘 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셨습니까.”

“절하고, 머리카락 먹고, 열심히 높이 뛰기하고…….”

이안은 턱을 괴곤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 내용이 참 이상했다.

‘도대체 무엇을 시키셨길래 아리엘 님이 절까지…….’

“이안 님께 문안 인사도 올리시던데요.”

앨런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문안 인사도 시키셨습니까?’

그러자 이안을 쳐다보는 마리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마치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똑. 또독. 똑.

그때 경쾌한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집무실 문이 열렸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아리엘이 당당하게 말했다.

“호랑이님, 저 할 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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