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일할 준비를 마친 이안은 침대 한쪽에 앉아, 옆에서 자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그 큰 이불을 끝부분까지 모두 자신의 몸에 돌돌 말아 당당하게 침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의 배 위에서 대자로 뻗어 자는 것과 어딘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게 인간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꿈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으며 자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가 그녀의 입에서 이리저리 씹히고 있는 불쌍한 머리카락들을 조심스럽게 빼내 주었다.
‘주군이, 맨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졌어?’
‘장갑도 안 끼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저 가주가?
‘…….’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다정한 이안의 행동에 질겁했을 앨런은 너무 놀라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꿈인 걸까.
자신을 안타깝게 여기신 신이 자신을 거두어 가셨나.
그가 힘껏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지만, 통증은 그대로 느껴졌다.
항상 비상하게 돌아가던 그의 뇌가 오늘 파업하기 직전이었다.
잠시 진정한 앨런은 침대와 이불을 점거하고 있는 검은 머리 여자를 한 번 보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주군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자신의 주군은 여전히 검은 머리의 여자의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떼주는데 여념이 없었다.
세상이 멸망하려나.
그는 북부 설산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지 다시 한번 체크해 보기로 했다.
‘이안 님이 낯선 여자랑 같이 주무시다니.’
‘게다가 그다음 날 그런 일이 일어나시지 않은 것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혼자 나가시려 하시고.’
자신의 주군께서는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인 것이 아니실까.
앨런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거 아니야.”
“예. 아니군요.”
이미 현장을 목격해 버린 앨런은 믿는 기색 하나 없이 성의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형식적인 목소리였다.
‘이 사건이 대륙에 드러나면 어떻게 묻어야 하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귀찮은 일이 태산이었다.
대륙 전체가 발칵 뒤집힐 것은 물보듯 뻔했다.
여자는커녕, 수인들도 싫어하시는 주군이시니.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 이야기가 대륙에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이 사건이 기사화된다면,
<충격! 카델리온 가주, 모르는 여자와……>라든지,
<속보, 미남자 이안 카델리온의 충격적인 실체!>라든지,
<특종! 천하의 카델리온 가주를 사로잡은 여자는 누구?> 이런 식으로 뜰 텐데…….’
존재하지도 않는 기사 제목들이 상상 속에서 쌓여 가고 있었다.
‘하아…….’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차라라라락, 일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렸다.
자동으로 그려지는 미래에 앨런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 이런 일을 벌이시다니…… 주군은 정녕 미치신…….’
“안 미쳤어.”
옷 시종을 두지 않는 이안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크라바트를 정리했다.
항상 입는 하얀색 셔츠와 검은 바지.
그리고 단정하게 메인 크라바트와 햇빛에 따라 반짝이는 소금처럼 다양한 각도로 빛나고 있는 하얀색 머리칼, 푸른 사파이어보다 아름다운 눈.
그리고 항상 그렇듯 최대한 피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한 옷차림은 그를 너무나도 금욕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만인의 취향인 얼굴.’
누군가 이안에 대해 한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주군은 미인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홀려 버릴 수 있는.
사교계에 등장한 초반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안에게 달려들었었다. 그리고 이안은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지키며 그들을 알차게 이용해 먹었다.
자신의 주군이 알고 보면 신이 아니냐고 하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 잘 보여 주는 외모를 가지고 계신다.
그것이 태생적으로 고귀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보여 어딘가 침범해 보고 싶은 묘한 기분까지 들게 했다.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근데 어떻게 저런 짓을…….’
앨런은 다시 침대에서 뻗어 있는 여자를 쳐다보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예. 정말 정상이십니다.”
이안이 턱짓으로 침대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그녀를 가리켰다.
“아리엘이야.”
“그렇군요. 아리엘 님이시군요.”
‘이제 되지도 않은 변명까지 하시는 건가.’
그 표정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 축약되어 있었다.
그러자 이안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아리엘이야.”
“진짜 아리엘 님…… 이시라고요?”
앨런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그의 방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까만색 고양이 사체가 주군의 방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생판 모르는 여자랑 내 방에서 같이 잘까 봐?”
“드디어 정신에 이상이 생기신 줄 알았습니다만.”
이안의 물음에 앨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아리엘 님이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손을 얼굴에서 쓸어내리자 그 잠깐 사이에 1년은 늙은 듯한 얼굴이 보였다.
이안의 방, 방문 문고리를 돌리기 전의 멀쩡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벌써부터 그의 눈에서 다크서클이 조금씩 자라났다.
앨런은 이불을 발끝까지 꽁꽁 두른 상태로 천하태평하게 떡하니 침대에서 뻗어 자는 아리엘을 바라봤다.
저렇게 행동할 수인이 아리엘 님 말고 있을까?
없다. 절대 없다.
“하긴 저렇게 이안 님의 침대를 대자로 점거하며 주무시는 생물체는 아리엘 님밖에 없긴 하죠.”
머리가 붙어 있는 수인은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리엘 님이 확실하시네요.”
그가 납득했다.
침대 위의 소녀가 아리엘이라는 것을 납득한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가만히 생각하는 그의 고동색 눈빛이 깊게 잠겼다.
안경을 낀 상태로 고민하는 그의 얼굴은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했다.
실시간으로 삭아 가는 것을 제외하면.
“……그런데 저렇게 큰 소녀가 어떻게 오랫동안 인간화를 못 하신 건가요?”
“비범한 고양이잖아.”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의 말에는 항상 의문을 갖지 않던 앨런이 고민했다.
‘인간화가 늦춰질 만한 상황이 뭐가 있지.’
그의 직감이 중요하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인간화를 늦추는 것은 실험으로도 억지로 조작하기도 힘든데.
페로몬 때문인가.
무엇이 되었던 부디 주군께 피해가 안 가길 그는 빌었다.
주군을 위해서든,
아리엘 님을 위해서든.
앨런은 머릿속 생각을 저 너머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래서 인간화도 범상치 않은 시기에 하신 거군요.”
“어딘가 이상한 고양이이니까.”
“그렇군요.”
“근데 옷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루이즈 님께서 입으시는 옷들은 너무 커서 사이즈가 맞지 않을 텐데요.”
북부에서 마물을 처리하는 루이즈는 일반 남자들보다 조금 더 큰 키로, 여자들보다 압도적으로 컸다.
“이미 사 놨어.”
“아리엘 님이 원래 고양이 수인이셨던걸 알고 계신 겁니까?”
이안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휘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주군 그럼 몇 개월 동안 같은 방에서…… 다 알고도…….”
세상 금욕적인 사람 다 죽었다.
앨런의 표정이 마치 ‘야. 이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쓰레기…….”
언제 일어났는지 아리엘이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침대에서 꼬물거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침대에서 가만히 앉은 아리엘은 이안을 바라보면서 멍때리더니 담담히 한마디 했다.
“……아. 맞다.”
“소인 아리엘, 폐하께 문안 인사 올리옵나이다.”
그런 예법을 때려치우기로 한 것은 잊어버린 것인지, 그녀가 팔을 뻗은 채 기지개를 켜면서 문안 인사를 올렸다. 문안 인사를 올리는 목소리가 비몽사몽 잠에 취해 있었다.
전날과는 다르게 과감히 절을 삭제한 모습이었다.
많은 발전이었다.
착실히 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꼬이고 엉켜 있었다.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이안의 변명 따위는 신뢰하지 않던 앨런은 아리엘의 그 한 마디만으로도 서로 이렇고 그런 일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이안이 방 안에 있는 드레스룸들 중 하나에 들어가 드레스를 꺼내 왔다.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하늘거리는 파란색 드레스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여자 수인인 건 또 어떻게?’
그러자 그녀가 그를 천하의 파렴치한을 보듯 쳐다보았다.
거의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아리엘이 누구와 싸운 듯 머리가 엉킨 머리와 함께 맨몸인 상태로 이불을 꽁꽁 둘러싼 채 그를 째려보았다.
이안은 아리엘의 엉킨 머리를 풀어주기 위해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달칵-
“고양이님.”
그때 문을 열고 레아가 들어왔다.
파렴치한을 보듯 머리카락이 엉망이 된 채로 카델리온의 가주를 쳐다보는 가녀린 여인 한 명과 매끄러운 미소로 그 여인의 머리카락을 붙잡으려는 가주.
그리고 착잡한 눈으로 그 둘을 쳐다보는 전속 보좌관님.
그녀는 발을 멈칫하곤 썩어 가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방을 잘못 찾은 것 같군요.”
탁.
그 상황은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기 충분했다.
최소 그들이 문안 인사를 올리고 받을 사이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만인의 이상이었던 북부의 수장이자 카델리온의 가주는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었다.
“……하.”
앨런은 다시 한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동작에 직장인의 슬픈 애환이 담겨 있었다.
“우선, 이안 님의 이종사촌의 팔촌 정도 되는 친척이나 루이즈 님의 제자로 연결되어서 오신 걸로 해 두겠습니다.”
역시나 그는 유능한 보좌관이었다.
혼란스러운 이 상황 속에서 그는 수습할 방법을 금방 생각해 냈다.
“또한 아리엘 님 전속 시녀인 레아 님과 마리 님께는 이 사실을 알려 두도록 하겠습니다.”
앨런이 이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안은 여전히 복잡하게 뒤엉킨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중이었다.
“……레아 님이 오해하시지 않으시게끔.”
“이미 단단히 오해하신 것 같기는 하지만.”
앨런이 한 마디 내뱉었다.
“근데, 주군 아리엘 님이 여자인 건 어떻게…….”
“의원이 알려 줬어. 성별이 여자라고.”
“아.”
그 말에 아리엘이 그를 파렴치한으로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곤 그를 잠시 그렇게 쳐다보았던 자신을 반성하며 자괴감에 빠졌다.
‘……나는 뇌가 썩었나 봐.’
‘뇌가 썩은 것이 분명해.’
황당하게 이안과 아리엘을 번갈아 보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근데 아리엘 님의 괴상한 말투는 어느 지역의 예법입니까.”
이안이 열었다.
“업다.”
어? 거긴 어디 지역인 거야.
‘원작에서도 안 나오고, 들어 본 적도 없는데.’
“거기는 없는 지역 아닙니까.”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없는 지역 맞는데. 그래서 말했잖아. 없다. 라고.”
나는 눈을 내려 깐 상태로 그를 째려보았다.
‘야. 깜짝 놀랐잖아.’
“소인, 폐하의 의중을 읽지 못하여 난처했사옵나이다. 다음부터는 자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너네 언제 가냐…….’
“그리고 폐하와 보좌관님께서는 언제 가냐?”
아. 또 실수.
이번에는 생각과 말이 합쳐서 나왔네.
그러자 욕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들은 것 같기도 한 기묘한 기분을 느낀 앨런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편하게 쓰십시오. 아리엘 님이라면 이안 님께 냉수 한 바가지를 부어도 죽이시진 않을 겁니다.”
내가 그를 못 미더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가 한마디 더 보탰다.
“똑같이 냉수 한 바가지로 샤워를 할 수는 있겠지만요. 전속 보좌관만의 직감이랄까요.”
……미안한데 나 쟤랑 만났던 첫 만남에서 죽을 뻔했거든?
그 보좌관만의 직감이란 게 참 형편없는 것 같은데.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앨런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