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참혹한 피투성이인 상태로 잠든 백호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더니 경계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경계 어린 얼굴이 낯설었다.
꿀럭꿀럭 끊임없이도 흘러나오는 피에 눈보다도 새하얀 털이 동백꽃보다도 붉게 물들어갔다.
꽃들이 활짝 피던 봄은 지나가고 여름이 다 되어 가는 데도, 바깥에서는 아직도 봄의 향기가 밀려들어 왔다.
여름을 나기 위해 어디선가 흐르는 시냇물을 찾기라도 하는 듯 동물들과 곤충들의 소리로 바깥은 시끌벅적했다.
그와 반대로 방 안은 고요했지만.
새들이 평화롭게 짹짹거리면서 날아다니며 놀고 있는 밝은 바깥과 달리 심해처럼 새파란 그의 눈이 혼탁한 빛을 띠며 어둡게 침전했다.
고통에 전 그의 신음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에게 비치는 포슬포슬한 햇살에 그의 벌어진 상처가 더더욱 잘 보였다.
‘야, 괜찮…….’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데.
괜찮냐고 걱정하는 게 맞는 걸까.
나는 하던 생각을 잠시 멈추곤 그를 바라보자, 그는 눈을 찌푸렸다.
나를 못 알아보듯이.
평소와 다른 차가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눈동자 안에는 경멸하는듯한 눈빛도 서려 있었다.
‘날 못 알아봐……?’
아니면 원래 나를 싫어했던 건가.
내 눈이 심각하게 떨렸다.
다른 사람이 내 모습만 본다면 마그네슘을 손에 쥐여줄 법한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칼로 썰릴 뻔하고, 두 번째는 암살자들한테 죽을 뻔하고 세 번째는 병으로 죽을 뻔하고 이번에는 잡아먹히는 건가……?’
와…… 대박.
너무나 아름다운 내 인생이었다.
살면서 살해 위협을 참 다양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에 털이 비쭉 솟았다.
겨우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더니 다시 죽는다니.
내가 뭔 세계를 구할 영웅도 아닌데 죽을 고비를 뭐 이리 많이 넘기는지.
‘야, 나야. 나!’
나는 내 앞발로 가슴을 탕탕 쳤다.
제발 알아봐라.
‘나라고!’
알아보라고.
못 알아보면 바로 저승행 기차에 탑승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마음을 졸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 하루건너 하루마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 같았다.
참 다이내믹한 이 묘생.
너무 좋다.
나는 조마조마하게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심장이 콩닥콩닥 작고도 빠르게 뛰었다.
흐릿하던 동공의 초점이 나에게 맞추어졌다.
나의 연두색 눈과 그의 벽안이 허공에서 똑바로 마주쳤다.
나인 것을 확인한 이안은 안심한 듯 팩하고 힘없이 누웠다.
차갑고 날 선 시선이 다정한 빛을 띠며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그에게서 경계가 풀린 것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나를 인식한 그의 모습에 한결 안도감이 들었다.
힘없이 쓰러질 듯한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안 아프다가 아픈 사람이 더 걱정된다고, 항상 여유로워야 하는 저 호랑이가 이렇게 심각하게 아프니 가슴에 묵직한 돌이라도 얹힌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그는 마물이 있는 북부 설산에 던져놓더라도 마물 머리들을 끌고 오며 멀쩡히 돌아올 수인이었다.
‘뭘 해야 하지. 아니, 뭘 할 수 있지.’
날 알아봤으니까 죽이진 않겠지.
나는 고양잇과 맹수답게 용감하게 실눈을 뜨고 그의 눈을 피한 채 백호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내가 맹수라고 해도 눈을 크게 뜬 상태로 저 호랑이의 얼굴과 아이 콘택트를 하면서 뚜벅뚜벅 나아가기는 무서웠다.
맹수여도 가능한 것이 있고, 불가능한 것이 있는 거지.
지금 내가 하는 행동도 충분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가만히 좇아갔다.
가까이서 그의 눈을 바라보자 탁하게 가라앉은 보석 같은 그의 눈이 보였다.
햇빛에 의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다양한 푸른 빛이 그의 눈에서 보였다.
개중에는 연한 하늘색도, 모든 것을 삼키다 못해 어둠까지 포식한 듯한 짙은 남색도 있었다.
신비로웠다.
그리고 홀릴 것만 같았다.
심해처럼 혼탁한 빛을 띠고 있는 그의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안심하곤 몸을 뒤로 쭉 뺀 상태로 그의 코에 손을 얹었다.
사실 나는 겁 많은 맹수기 때문에 죽을 확률이 덜한 배 쪽으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꽤나 큰 그의 상처들 때문에 멀쩡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배 쪽으로 내려가면 꼬리에 맞아 죽으려나.’
물론 지금은 얌전히 축 처져 있지만, 저 꼬리로 나를 훅 치면 한 방에 훅 갈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털들이 위를 바라보고 싶다고 강렬한 자기주장을 하는 것 같이 내 털들이 천장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여기가 나을 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나는 가만히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그는 뭐하냐는 듯한 눈초리를 나에게 보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데 순간적으로 상성 페로몬에 대한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 페로몬의 열이 맞으면 상성 페로몬이라고 한다……. 페로몬 과잉증이 아닌 수인들은 그냥 있으면 좋은….』
그러나 상성 페로몬인 수인의 페로몬을 전달하는 것은 페로몬 과잉증인 수인들에게는 유일한 치료책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안이 나를 치료해 주었을 때 유독 그의 페로몬이 따뜻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안과 같이 있을 때만 주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다른 수인들이랑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심장에 낀 서리가 갑자기 사르륵 녹는 느낌.
『상성 페로몬일 경우 몸이 갑자기 따뜻해지거나 시원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책에 따르면 이건 상성 페로몬이라는 증거였다.
‘페로몬을 전달하려면 접촉…을 해야 하나?’
최근 상대에게 페로몬을 사용하는 법에 대한 연습하던 중에, 페로몬을 전달하기 위해선 접촉을 통해 하는 것이 가장 쉽다던 루이즈의 말이 생각났다.
손을 대지 않고 페로몬을 전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고, 나는 그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나는 체념하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차하면 그의 코나 눈 위에 올라가서 버티면 되겠지.’
그렇게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 나는 그의 코를 쓰다듬었다. 그의 코를 쓰다듬으며 내 안에 있는 서릿발같이 차가운 기운을 꺼냈다.
고개를 돌려 철저히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로.
‘고양이 손은 약손…….’
의미 없는 흥얼거림은 그냥 보너스였다.
내가 흥얼거리면서 그의 코를 문질러 주자 지금 뭐 하냐는 듯한 황당한 그의 시선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저 어이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꼬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엄마 손은 약손 모르나.’
나는 고개를 돌렸던 상태에서 다시 힐끗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엔 답이 쓰여 있었다.
정신 나갔니.
이런 얼굴이었다.
‘음. 모르나 보다.’
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외면하곤 하던 행동을 계속했다.
‘의미가 있는 걸까.’
상성 페로몬이니까 의미가 있겠지.
나는 내 머릿속에 싹 텄던 의구심을 지워냈다.
하지만 이거 말고는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언가에 베였을 때의 처치법, 다리가 부러졌을 때의 대처법, 벌에 쏘였을 때의 대응법 등등…….
작은 상처들을 임시로 대처하는 법만 기억났다.
애초에 한국에선 저렇게 위급한 상황은 119에 신고해서 응급실에 갔지, 저런 걸 치료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 따윈 없었다고.
‘……차라리 그의 정신을 통증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다른 쪽으로 쏠리게 하는 게 낫지.’
상처에 신경이 쏠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무섭게 고통이 엄습해 온다.
그러나 그의 몸은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저 백호가 한 것처럼 나도 피를 핥아야 하나?
나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흠칫했다.
‘……옛말에 피가 난 곳에 침 바르면 낫는다는 말이 있던데.’
게다가 이곳은 신비로운 수인의 세계.
그가 내 발을 핥자 밀려들어 온 따뜻한 페로몬이 생각났다.
쟤가 내 상처 핥으니까 나았잖아.
내 상처도 꽤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혹시 모른다.
나도 똑같이 하면 내 페로몬이 그에게 더 잘 전달될지도.
저 백호가 난 상처는 페로몬 때문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더 많은 양의 내 페로몬이 전달된다면 상처가 아물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이안의 페로몬이 회복계 페로몬이라서 내 상처가 나았을 확률이 크긴 했다.
나는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 보기로 했다.
진짜 한번 해 봐?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생각이었다.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는 게 낫지.’
그가 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런 정도는 눈 꾹 감고 한 번 정도는 해 줄 용의가 있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사실 그녀의 생각이 어느 정도 맞는 생각이긴 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목숨 줄을 앞당기는 생각이었겠지만.
그녀와 그는 상성 페로몬이었다.
그는 페로몬 폭주 중이었고, 날뛰는 페로몬을 안정시킬 그녀의 페로몬이 간절한 상태였다.
아직까지 그녀를 죽이고 씹어 먹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할 수 있어.’
나는 다시 큰 결심을 했다.
눈을 꾹 감고 칼날에 베인 듯해 보이는 그나마 가장 작아 보이는 상처를 핥았다.
감은 듯 안 감은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떠 그의 상처를 쳐다봤다.
눈을 떠 보니 칼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사라진 상태였다.
‘……된 건가……?’
그의 페로몬이 회복계 페로몬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나의 행동 때문에 그런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내가 골똘히 고민에 빠진 사이에 백호가 침대에서 움직이는지 침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쟤도 참 독하다. 어떻게 저런 몸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아리엘이 속으로 감탄을 했다.
옆을 돌아보니 그가 고개를 올려 내 쪽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어느새 피가 굳었는지 붉게 물들어 있던 이불이 적갈색이 된 채 같이 따라왔다.
적갈색 상태로 포삭포삭한 것이 가을에 단풍이 든 상태로 떨어져 말라비틀어진 거대한 나뭇잎 같았다.
그가 킁킁거리면서 내 냄새를 맡았다.
얼굴을 기울여 내게로 훅 가까이 왔다.
그러곤 내 목덜미를 콱!
물어 버렸다.
‘……어?’
뭐지.
뒤통수 후려치기인가.
아. 나 죽는다.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건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목숨 걸고 기껏 살려주려고 노력했더니. 진짜 죽이려고 하냐.’
어차피 버둥거리거나 도망간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단지 더 고통스럽게 죽을 것일 뿐이다.
다행히 아프지는 않았다.
‘……안 죽이나……?’
목덜미에서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나는 눈을 살짝 뜨고 백호를 바라봤다.
‘왜 안 아프지?’
간식 상태 체크?
그루밍이라도 하는 거니……?
나는 실눈을 뜨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힐끔 그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네 식량이냐…….’
피식-
그러자 위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비웃냐?
내가 너를 위해 잡아먹힐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있었는데?
가소롭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다.
기껏 걱정해 줬더니.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
은혜 갚는 고양이는 서운했다.
‘……그런데 이제 그만 내 몸 좀 놓아주지 않을래?’
여기서 쟤 얼굴로 발차기하면 놓아주려나.
아픈 애한테 해를 입히면 안 되는데.
생존을 위한 투쟁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의 송곳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쯤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침대로 무사히 착륙에 성공한 나는 슬금슬금 그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물론 침대가 끝도 없이 넓어서 그런지, 내 발걸음이 좁아서 그런지 멀어져도 멀어져도 별로 멀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이동하는데 시야가 점점 넓어졌다.
‘어……?’
‘베개가 이렇게 작았나……?’
아닌데. 베개 엄청나게 컸는데.
모든 물건이 예전보다 작아 보였다.
예전에는 베개가 침대처럼 거대해 보였다면,
지금은 베개가 베개처럼 보인달까.
‘시야가 살짝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내 몸을 다시 봤다.
‘어…… 어……?’
‘어?!?!’
‘……미친.’
내 앞발을 보니 앞발이 아닌 매끈한 손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