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33/111)

32.

북부보다 비교적 따뜻한 서부에서는 어느덧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푸른 나뭇잎으로 햇빛을 가린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하늘을 빼곡히 메웠다.

화사한 햇살이 나뭇잎들에 막혀 여기까지 들어오지 못해 숲은 어두컴컴했다.

‘북부는 여기보다 춥겠지.’

휘이잉.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마리는 푸른 나뭇잎들을 한 아름 매단 채 여름을 환영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았다.

‘아리엘 님은 잘 계시려나.’

그녀는 처음으로 남에 대한 걱정을 했다.

그녀의 삶은 누군가를 걱정할 정신적. 신체적 여유가 없었고, 또 그녀는 누군가를 걱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 자신만 챙겨도 너무 벅찼기에.

누구나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모두가 그렇듯 그녀의 삶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엔젤러스.’

동쪽의 옛 수장, 표범의 수많은 방계 중 하나였던 그 성은 사라졌다.

다른 방계들의 권력 싸움에 의해.

그 순간 남들과 같은, 남들보다는 조금 더 좋을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은 산산이 부서졌다.

저택이 불타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어서 가! 너라도 살아야지 우리 가문이 살아남는다.”

“맞아. 우리는 내버려 두고 가렴. 마리.”

“우리는 나중에 빠져나갈 수 있어.”

그들이 한 말 중 나중에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일까.

그 아이는 주춤거렸다.

“가!!! 어서.”

그 순간,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가라고 무섭게 다그쳤다.

다그치는 말에 그녀는 그들을 두고 저택 밖으로 뛰쳐나왔고, 뛰쳐나오자마자 저택은 거대한 화마에 집어 삼켜졌다. 무섭게 크기를 불린 그 괴물은 걸신이 들린 듯이 집을 먹어 치웠다.

와르르.

그리고 그 순간, 저택이 무너졌다.

어린 마리의 블루베리 색 머리카락에 붉은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거대한 화재가 그녀에게 남긴 것은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의 재산도, 그녀를 챙겨 주던 사람도 아닌 존재하지도 않는 ‘엔젤러스’라는 가문의 이름뿐이었다.

지금은 가문 이름을 들어도 어느 가문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없어진 가문이었지만.

6살의 어린 소녀에게 화마라는 그 괴물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그렇기에 아이는 독해졌고, 남들에 대한 쓸데없는 감정들은 차단했다.

“엔젤러스? 엔젤러스가 왜 여기있지.”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를 돌며 암흑가를 전전하던 아이를 이안이 데려왔다.

그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앤젤러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그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가 하는 어떤 말에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에인트로써 활동하다가 뜬금없이 고양이의 시중을 들라는 주군의 명령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많고 많은 수인 중 자신일까. 자신의 주군은 자신을 버린 것일까.

그런데 그 고양이님을 처음 본 순간, 그녀는 그녀와 그 고양이님이 어딘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양이님을 보면 굳게 닫힌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던 감정의 수도꼭지가 돌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슷해서.

혼자 남겨졌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존경스러워서.

그래서 알게 모르게 고양이님을 더 신경 쓴 것일 수도 있다.

그녀와 있으면 자신이 희미하게라도 웃는 것이 느껴졌고, 그녀에게 대하는 말투와 목소리는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그리고 아리엘 님은 그런 그녀가 어떤 기분인지 세심히 살폈고, 그녀도 놀랄 만큼 그녀의 기분을 잘 알아챘다.

‘이안 님이 심기가 불편한 상태에서 주워져 카델리온에 와서도 아직까지 살아 계시니 업무 다녀올 때까지 잘 살고 계시겠지.’

‘목이 안 날아간 것도 신기한데.’

확실히 누군가에게 죽을 것 같은 고양이님은 아니시긴 했다.

고양이님이 다른 수인을 매장시켜 버리시는 거면 몰라도.

‘상황 판단이 빠르신 고양이님이시니까.’

암살자들이 튀어나온 상태에서 난리를 치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들 앞에서.

보통의 수인들 같은 경우는 인간의 상태에서도 패닉에 빠져 이성적 사고가 마비된다.

멍하니 굳어 있는 것은 물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악을 쓰거나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암살을 당하는 보통 수인들을 그렇게 살해당해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검은 털 뭉치처럼 작으신 아리엘 님은 자기보다 몇 배나 큰 암살자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왔음에도 주저앉아 울긴커녕 패닉에 빠지시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셨지.’

그 아기 고양이는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 듯, 가만히 그녀의 주위에 서서 칼이 날아오는 순간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칼을 피했다. 침착한 눈빛으로 주변이 돌아가는 것을 관찰하시면서.

냉철하고 현명한 상황 판단이었다.

‘작지만 강하시지.’

바로 앞에 놓인 이것들과 같은 부류와 달리.

‘입을 쉽게 놀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끔찍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것까지 파악할 머리는 되지 않았던 거겠지.’

마리는 무표정하게 발 앞에 놓인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들이었다.

그날, 아리엘을 공격한 암살자들과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카델리온에서 도망쳐 나온 첩자.

그녀는 발로 그 시체를 툭툭 건드렸다.

그녀의 눈에서 동정심은 보이지 않았다.

벌레의 시체를 바라보았을 때의 그런 무감각하고 아무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눈이었다.

그 시체의 팔이 그녀가 미는 신발에 의해 힘없이 움직였다.

관절이 꺾여 있는 상태로 그녀의 발이 미는 그대로 움직이는 모양이 기괴했다.

‘늦었네.’

그것도 한 발자국 늦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세 발자국 정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그 시체는 뭉개져 있는 얼굴로 온갖 관절들이 뒤틀려 손을 흔드는 것 같은 모양새로 있었다.

그렇게 시체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는 상태 그대로 깊은 숲속 바닥에 완벽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올 것을 안 것처럼.

‘너희는 늦었다.’

완벽한 기만이었다.

이런 시체는 서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조직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북부의 국경 지대에 있는 깊은 숲속, 남부의 국경 지대에 있는 가파른 절벽 밑에서도, 동부에 있는 어느 한 동굴에서도 똑같은 형태의 시체가 나왔다.

똑같은 수인이 벌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암살자와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사람들은 다 죽였네.’

물론 아리엘을 잡으러 온 암살자들에게 그나마 접점이 있는 수인들이라고는 한둘뿐이었지만.

그나마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시체들조차도 각 지역들이 접하고 있는 곳에 있고. 때문에 뭔가를 특정하여 뭐라고 추측할 수도 없었다.

그 시체들은 무언가 손 쓸 것도 없이 완벽하게 망가져 있었다. 얼굴부터 발가락 하나까지 다.

치밀했다.

시체를 조사하는 사람이 봐도 빈틈없이 처리해 두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저렇게까지 은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쪽은 몇 없기에.

‘마을이나 다시 가 볼까.’

권력 교체가 이루어진 동. 서부 모두 둘 다 빠르게 안정되었다.

아니, 안정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안정된 상태였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평소처럼 정확하게 맞춰진 듯이 굴러갔다.

잘 맞물려진 톱니바퀴처럼.

특별히 특이점이 보이는 마을들은 없었다.

마리는 그 시체에서 눈을 떼고 마을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 자리에 있던 그녀의 신형이 빠르게 사라졌다.

특별히 이상한 것이 없었기에 역으로 이 모든 게 이상했다.

뭔가 엇나가고 있다고 그녀의 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을 제외하고 모든 사실을 다 기록했다.

참혹한 상태로 각 지역의 접경지대에 나타난 시체들, 각 지역의 마을 중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난 마을이 없다는 것까지 모두.

***

『……혹시나 해서 여쭙니다. 아리엘 님은 삼시 세끼 밥은 잘 먹고 계시는지요.

편식하시면 안 되는데, 당근을 무척이나 싫어하셔서 걱정입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도 전해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전보를 읽고 있는 이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항상 어떤 임무를 가든 한 장 이내로 끝나던 그녀의 전보가 세 장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중 아리엘에 관한 이야기가 두 장을 차지했다.

용건만 이야기하는 그녀가 답지 않게 이런 이야기를 보내다니.

‘루이즈에 이어 어느새 마리까지 포섭해 놨네.’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동부와 서부지역 마을 모두 혼돈에 빠진 모습이 아닌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군사 쪽에서 최근 갑자기 사망한 실력 있는 기사는 없었는데.’

이안은 그 사항을 들은 이후, 각 가문의 고위 기사 정도 되는 기사들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나 병사에 대한 사례들을 찾게끔 지시했다.

하지만 최근 며칠 사이에 동부, 남부, 서부, 바다의 기사 중에서 실력 있는 기사가 갑자기 병사하거나 의문사한 일은 없었다.

최소 셋 이상의 고위 기사급 실력.

그들은 어디에서 온 걸까.

『……이상입니다.

금방 찾아가 주군께 대면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아리엘 님께 당근 편식 좀 하지 마시라고 부탁드려 주십시오.

마리 올림.』

이안이 다 읽은 서신을 촛불에 태웠다.

촛불은 잠시 크기를 키워 종이를 집어삼킨 후 다시 너울거리다가 잠잠해졌다.

“마리 님께서 뭐라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곧 올 거래.”

‘오늘도 핵심만 빼놓고 얘기해 주시는군.’

알아서 추측해라 이건가.

앨런은 자주 있던 일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중요한 건 이거였다.

앨런은 이안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곧 있으면 ‘그날’이 찾아올 텐데 아리엘 님은 어떻게 할까요?”

이 얘기가 나오자 이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확히 언제로 예상되는데.”

“내일에서 내일모레로 예상됩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의 서늘한 벽안이 휘어졌다.

“아리엘은 그냥 내버려 둬. 내 방에.”

“네. 알겠습니다.”

이번엔 아리엘 님이 정말로 죽으실 수도 있겠군.

아니, 죽으시겠군.

그것도 이안 님께.

그분이 오시자 저택에 활기가 돌았는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해서 그렇게 먹이신 건가.’

안타깝네.

앨런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다른 말을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보좌관의 일은 가주님을 보좌하는 일이지, 가주님에 대해 참견하는 일은 아니기에.

얼핏 보면 보이지 않는 선.

그 한 끗 차이를 넘어서면 안 됐다.

그것은 특히 중요했다.

카델리온에서는.

이안 님이라면 더더욱.

“평소처럼 사람 못 들어오게 잘 막고. 사람 죽어 나가는 꼴 보기 싫으면.”

그가 차가운 벽안을 담고 있는 눈꼬리를 휘어 접으며 웃었다.

“물론 다른 수인들이 죽어도 나는 상관없지만, 네가 귀찮잖아?”

‘제발 기분이 안 좋으셨을 때 그만 웃으셨으면.’

차라리 아주 어렸을 때의 그 서릿발 같은 무표정이 더 나은데.

항상 봐도 너무 무섭다.

앨런은 생각들을 속으로 삼키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똑똑.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빠르게 들렸다.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기 위한 노크가 아닌 듯, 노크를 한 뒤에 바로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밖에서 들어온 루이즈가 이안의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누님, 그렇게 아무 때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교양은 어디…….”

그리곤 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엘이 아파.”

얼마나 놀랐는지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심각하게.”

그 말에 움직이고 있던 이안의 만년필이 그대로 멈추었다.

“발 하나도 까딱 못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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