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인간화도 못 하는데 페로몬은 무슨.’
루이즈의 제안을 거절하고 여느 때와 같이 도서관에 간 나는 인간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며 터덜터덜 책장 사이를 누비고 있다.
‘정말 좋은 기회이긴 했는데.’
책 속에서의 루이즈는 뛰어난 기사로 나왔다. 그녀는 마물을 토벌하며 북방을 지키는 대표적인 기사였다.
북방의 수문장.
루이즈 카델리온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원작에서는 짧게 잠시나마 지나가듯이 언급했는데, 그녀를 꽃 중 장미와 같은 검술을 쓴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아름답지만 잔인한 검술.
한눈을 팔고 볼 수밖에 없지만, 한눈을 파는 순간 잔인하게 죽게 만드는.
그것이 루이즈 카델리온의 검술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멋지긴 하다.’
그렇기에 모든 기사의 동경 대상이 됐을 터.
‘하지만 페로몬을 다루는 것도 인간화가 된 다음인걸. 인간화가 더 시급해.’
일단 뭐든지 내가 인간화에 성공하게 된 다음에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 고양이 몸뚱어리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카델리온 저택에서 나갔을 때를 대비한 자금을 가지고 집을 마련하는 거든, 내 몸을 지킬 호신술을 배우는 거든 뭐든.
일단 인간이 되어야 했다.
페로몬에 관련된 서적은 엄청나게 많은 반면에 그중 인간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극히 드물었다.
‘제발 여기 있어라.’
<재밌어서 밤새 읽는 페로몬 이야기>
누가 봐도 재미없어 보이는 재목이었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던 나는 책을 펼쳤다.
『CH.5 누구나 쉽게 하지만 글로 쓰기는 어려운 인간화 방법.
1. 앞발을 내밀어 보세요.』
‘주먹 지르기 하면 또 나지.’
모두 알지 않은가. 한국에서 태권도장 가는 건 필수 코스 중 하나인 거.
‘내가 이래 봐도 태권도 3품이었단 말씀.’
비록 품새는 못 하지만.
‘주먹 지르기는 자신 있다고.’
아마도.
발차기를 더 잘하긴 하지만.
나는 태권도 주먹 지르기를 하듯이 앞발을 훅하고 내밀었다.
『그리고 장풍을 쏜다는 느낌으로 몸 안의 기운을 주먹에 집중시켜 한곳으로 쏩니다. 그러면 페로몬에 따라 변화가 각기 다르게 나타나요.
여기까지는 모두가 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것을 페로몬 활용이라고 해요.』
‘……기운이 있어?’
오. 기운이 있어!
몸에 이질적인 기운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뻗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내 몸 안에 돌아다니는 기운을 주먹에 모았다.
‘악!’
그 뒤, 내 앞에 있는 책을 향해 쐈다.
……그리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와. 어떻게 이렇게 소름 돋게 그 어떤 변화도 없을 수가.
사방은 고요했고 굉장하게도 내 몸은 평소랑 똑같았다.
바람에 흔들려 한 장 정도는 넘어갈 법한 종이도 단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명 그러면 페로몬이 작동된다고 했는데……?’
하긴 예로부터 무언가의 기를 다루는 것은 중국의 전통 무술이었지, 태권도가 아니었다.
‘밑에 더 설명 없나.’
『이 과정을 반복하면 누구나 쉽게 인간화를 할 수 있답니다.』
‘망할.’
하지만 제목부터 알 수 있듯이 아주 친절하신 책에는 설명 따위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게 뭐가 친절한 거야.
‘후우…. 몇 번만 더 해 보자.’
나는 겨우 발견한 인간화에 관련된 부분이 아까워 방금 한 동작을 몇 번 더 시도해 보았다.
휙.
휘휙.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고양이님, 같이 저택 부숩시다. 하다못해 서재라도.”
그때 뒤에서 레아가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또 부숴 버리자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하여 뒤를 돌아봤다.
제발 넌 그만 좀 부숴…….
왜 뭘 자꾸 박살 내려고 하는 거야.
네가 말한 것들 다 부쉈으면 카델리온 저택은 진작에 남아나지도 않았어.
게다가 거기 하나하나 형태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너는 모를 수도 있지만.
만약에 부숴 버린다면 총괄 집사님이 뒷목 잡고 쓰러지실걸. 하지만 말리진 않을게. 원한다면 못 본 척해 줄 수 있어.
책에서 페로몬을 사용하면 주변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더니 레아가 상태 이상에 걸린 것 같았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레아에게서 고개를 돌린 후, 책에 나온 대로 다시 시도해 보았다.
물론 뒤에서 당연히 ‘부술까. 부숴야 하는데. 가주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와 비슷한 헛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요즘 따라 연무장의 나무 인형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산산조각이 나고 있대.”
“기사님들이 훈련하시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건 아닌 것 같던데. 기사단장님도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신다고 하더라고.”
“범인은 아직 안 잡혔대?”
“어. 세상 흉흉해. 멋대로 돌아다니지 마. 어느 순간, 확! 우리가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으니까.”
하필 오늘 아침에 하녀들의 대화가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범인이 레아는 아니겠지.
항상 그러면 맞던데.
아니야. 아닐 거야.
언제 저택을 부수자고 했냐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아를 한번 다시 쓱 다시 바라보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싸한 기운을 무시하며 수련을 시작했다.
‘좋아. 단전부터 기운을 끌어모아…….’
‘주먹까지 쏜다.’
휙. 휙휙.
내 앞발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여전히 나와 내 주변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제자리를 지켜 주시는 종이 님의 노력이 갸륵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분명 모두가 할 수 있는 단계라고 하면서 반복하면 누구나 인간화를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음. 나는 책에서 말한 모두라는 범주 안에 속하지 않는군.
도대체 누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한 거지.
저자랑 싸울까.
‘이 책. 버려.’
나는 앞발로 그 책을 덮은 다음 앞으로 쓱 하고 밀었다.
“이젠 새로운 무술까지 발명하시는군요. 역시 고양이님이에요.”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목소리로 레아가 말했다.
하지만 저 별똥별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을 보니 저 말이 도저히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진심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지.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니까.”
뒤에서 들리는 나긋나긋하고 우아한 목소리.
루이즈였다.
‘저, 호랑이들이!’
도대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이상한 평가 좀 내리지 말아줄래…?
난 도대체 쟤네에게 무슨 이미지길래 의미 없는 주먹질이 새로운 무술의 창조까지 이어지는 걸까.
이대로 내 이미지 괜찮은 걸까.
내 이미지 돌려놔.
‘……처음부터 챙길 이미지는 있었겠지?’
어느 목소리가 나를 쓸데없는 공상으로부터 끄집어냈다.
“앞에 있는 너는 가 봐.”
‘레아는 왜…….’
내가 궁금해할 겨를도 없이 레아가 허리를 숙이고 서재에서 나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레아까지 내보낸 걸까.
‘나랑 저분이 심오한 얘기를 할 게 있나.’
뒤에서 뜻밖의 내용이 들렸다.
“너. 인간화를 하는 방법 알고 싶지? 그거 찾는 거 아니야?”
루이즈가 천천히 내가 있는 코너의 서적들을 훑어보곤 그것들을 두드렸다.
톡. 토독.
일정하게 책들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인간화는 너무 쉽고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거라 연구하기도 까다롭고 관련 서적들이 그리 많지도 않아. 그래서 인간화는 연구자들이 좋아하는 부분이 아니야.”
그때 책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내가 알려 줄게. 나도 꽤 늦게 했거든. 인간화.”
내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게다가 바쁘신 가주님과 달리 나는 시간도 남아돌아.”
최고의 기사가 제안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
문서들이 뭉텅이씩 쌓여 있는 책상 위를 밝히는 촛불.
그것이 어두컴컴한 방 안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다.
실루엣도 겨우 구분하는 유독 더욱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는 소파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장신의 남자뿐이었다.
똑똑.
고요한 방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오시죠.”
그 남자는 그들이 올 줄 알고 있었던 듯 찻잔을 느릿하게 돌리며 말했다.
찻잔 안에 있는 찻물이 이리저리 위태롭게 흔들렸다.
찻물이 찻잔 안에서 흘러넘칠 듯하면서도 흘러넘치지 않았다.
달칵.
밖에서 문이 닫히는 문소리가 났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쭈뼛거리면서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것은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분명 존대를 하고 있는데 그들을 존중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존중하지 않는 것 같지도 않은 묘한 말투였다.
그것이 그들의 지위는 비슷했지만, 상하 관계는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실패…… 했습니다.”
“실패라.”
남자가 설핏 냉소적인 비웃음을 머금었다. 방 안의 어둠이 넘실거리며 촛불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완벽히 성공하지 않은 이상 모든 것이 실패작이었다.
그리고 실패작은 살아 있으면 안 됐다.
그것에게서 그들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도록. 단서 하나를 흘리는 것은 몹시나 치명적인 일이었다.
방 안에 고요한 적막이 잠시 흘렀다.
“앞길을 막는 잡초들은 미리미리 뿌리까지 뽑아 제거하라고 했을 텐데요.”
꼬리가 드러난 이상 언젠가 그들은 알아낼 것이다.
그들이라면 무조건.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빈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쪼르르.
빈 찻잔에서 물이 채워지며 찻잔에 있는 물들이 튀기는 소리가 났다.
‘혹시 그것이 성공작은 아닐까.’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침묵하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실패작은 되도록 생포해 오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다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실패작이면 그 즉시 폐기 처분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만약 성공작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다시 가둬 놓고 성공작으로 만들면 되었다.
“그 시녀에 대해서도 알아보세요. 그 밖의 다른 쪽은 원래대로 진행하고.”
한 번의 자그마한 실수가 치명적인 실수로 변해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런 일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필요했다.
어느 정도의 준비가 될 때까지 시작을 미뤄야 했으므로.
상대방에 의해 불가피하게 사건의 활시위를 앞당겨서는 안 되었다.
활시위를 당기는 수인은 자신이어야 했다.
“네.”
방 안에 들어온 그들은 식은땀이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알았다.
그가 그들에게 한 번의 관용을 베풀어 준 것을.
다음 ‘실수’ 같은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것 또한.
그 고양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 고양이가 무슨 파문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 자신도, 그 고양이도, 그 고양이를 주워 온 이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