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내가 문 부수는 것을 겨우 뜯어말려 문을 연다는 아주 상식적인 방법을 택한 레아가 문을 밀었다.
“정말 이 정도는 부숴도 이안 님께서 용서해 주실걸요.”
웅장한 문이 소리 없이 매끄럽게 밀렸다.
“합리적인 이유잖아요.”
합리적인 이유긴 도대체 어디가 합리적인 이유인 거야.
고양이가 문을 못 연다고 문을 부수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라니.
요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이 생겼는지, 마리가 거듭 나에게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고 설득했지만 계속 거절했다.
문을 연다는 아주 상식적이고 고상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문을 부술 필요까지는 없었다.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문이 열리자 넓은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거 서재 맞아?’
돔 형식의 천장 유리에서부터 내려오는 따뜻한 햇살이 약 2층 정도 되는 높이의 서재를 빈틈없이 환하게 뒤덮었다.
서재 안에서 햇빛에 부유하는 아주아주 작은 먼지들이 도서관 안의 나른한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와…… 진짜 크다.’
책들이 그 큰 서재 안에 꽉 들어차 있었다. 일주일 동안 날이 새도록 책의 권수를 세어도 다 세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만물에 대한 지식은 모두 카델리온에 있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이곳은 카데리온의 손님들이나 고용인들까지 모두가 방문할 수 있는 공용서재였다.
‘어떻게 이런 서재가 한곳이 아닐 수가 있지.’
역시 수장의 가문은 서재의 스케일부터 다르다 이건가.
비록 다른 저택의 서재들에 대한 것은 설명을 듣지도 못하고 가 보지도 않았지만 카델리온 저택의 서재처럼 이렇게나 클 것 같지는 않았다.
저택 구경을 할 때 서재는 어딨는지 설명만 듣고 다시는 갈 것 같지 않아 넘어간 곳 중 하나였는데, 직접 보니 놀라웠다.
왜 총집사님이 카델리온 저택에 진심인지 알 것 같았달까.
‘나도 내 집에 저런 서재가 있으면 당연히 자부심을 갖지. 설령 내가 실제로 책을 읽어 보지 않더라도.’
관상용으로도 훌륭한 서재였다.
어마어마한 서재의 규모에 입을 떡하니 벌리고 쳐다보았다.
입을 벌리고 볼 수밖에 없는 웅장함이었다.
“찾으시는 책 있으신가요?”
한 손에 책을 몇 권 들고 있는 사서가 레아를 향해 물었다.
“아. 제가 찾는 게 아니어서요.”
그녀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럼 누가 읽으실 책입니까? 알맞은 책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레아가 활짝 웃었다.
“저희 고양이님이요.”
“네?”
“저희 고양이님이요.”
“하하. 고양이가 책을 읽는다니,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십니까.”
영혼 없이 웃으며 내려간 안경을 추켜올린 그는, 책 읽을 사람을 어서 빨리 말해 보라고 은근히 눈초리를 주었다.
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농담 아니에요.”
사서는 못 믿겠다는 눈초리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럼 진짜로 책을 읽는다고요?”
“……저 고양이가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긴. 고양이가 책을 읽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럼 그냥 종이 냄새 맡고 싶어서 온 걸로 생각해요.’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려고 노력하곤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서재를 돌아다녔다.
레아가 아리엘을 따라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 흘려 말했다.
“사서님은 소문에 둔하시군요. 저 고양이님은 한 번 보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고양이님이시라고 저택 내에서 소문이 자자한데.”
‘……?’
그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저 정도면 <수인 대륙에 이런 일이>의 1면에 나와야 하는 고양이가 아닐까.
도대체 그런 고양이가 왜 카델리온 저택에 있는 것일까.
이곳에 있을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고용인은 왜 고양이에게 존칭을 붙여 말하는 것이고.
사서 인생 15년, 도합 35년 인생 중 제일 당황스러운 날이었다.
역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사서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사서를 지나쳐간 아리엘은 서재를 빨리빨리 둘러보며 페로몬에 대한 책을 찾아다녔다.
‘페로몬, 페로몬에 관한 책이 어디 있지.’
그래도 나름 페로몬은 수인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이라 전생에서의 생물과 같은 학문이어서 눈에 잘 띌 텐데.
그렇게 나는 책장 사이를 분주히 걸어 다녔다. 책들의 제목을 위에서부터 훑어보던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빨간빛 책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음…… 이건 뭐지? 주인님과 하녀의 은밀한 하룻밤……?’
저런 책이 서재에서도 있는 건가.
‘생각보다 개방적인 서재네.’
내가 한자리에 멈춰 있자 조용히 뒤따르고 있던 레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고양이님.”
그녀가 내 시선이 머물러 있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 책을 꺼내 자연스럽게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자신의 것을 가져가듯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눈꼬리를 접어 올렸다.
“어머. 고양이님, 책이 잘못 꽂혀 있었나 봐요. 제가 잘 돌려놓도록 하겠습니다.”
‘그 잘못 꽂혀 있는 책이 왜 네 주머니에 들어가는데.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며.’
나는 황당한 눈초리를 레아에게 보냈다.
내 눈초리를 받은 레아가 눈웃음을 치더니 능청스럽게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둘러보시죠. 고양이님.”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책이 있는 서적에서 발걸음을 뗐다.
여기는 약초 관련된 곳이고.
여기는 질병들에 대한 곳.
그리고 여기는…….
‘앗. 찾았다.’
몇 걸음 걷다 보니 내가 찾는 책들이 금방 눈에 띄었다.
<3살짜리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페로몬 이야기>
<재밌어서 밤새 읽는 페로몬 이야기>
<페로몬 개론서>
나는 이런저런 책들을 펼쳐 놓고 동시에 읽어 내려갔다.
전생을 기억해서 그런지 이렇게 여러 책을 다 펼쳐 놓고 봐도 요점 파악에 문제가 없었다.
‘그냥 엑스트라가 아닌, K-출신 엑스트라니까.’
시험 기간만 되면 교과서와 학습지 등 여러 자료를 펼쳐 놓고 노트 정리를 했던 힘인 것일까. 역시 한국 출신의 엑스트라는 다르긴 다른 법이다.
『페로몬이란 무엇일까요?
페로몬이란 수인에게 내재 되어 있는 기운으로 가끔씩은 종의 특성에 맞게 능력을 강화해 주기도 합니다.
아주 특이한 경우로는 이능과 비슷한 능력이 나타날 때도 있다고 하네요!』
‘음. 이런 내용은 필요 없고.’
한참 인간화에 대한 내용을 뒤지면서 나에게 필요 없는 내용을 빨리빨리 넘겼다.
『상성 페로몬은 서로 상성이 맞는 페로몬이다.
각 페로몬들이 내뿜는 특유의 열기가 있는데, 이 페로몬의 열이 맞으면 상성 페로몬이라고 한다. 이는 페로몬에서 나는 향과는 다르다.
상성 페로몬일 경우 특정 수인과 있었을 때 몸이 갑자기 따뜻해지거나 시원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소문으로는 페로몬 과잉이 상성 페로몬일 경우 서로의 기분이나 생각을….』
『보통 페로몬들에게는 상성 페로몬이 없으며, 주로 특이하거나 희귀한 페로몬에게서 나타난다.
희귀한 페로몬일수록 상성 페로몬도 희귀하며 상성 페로몬을 찾는 것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힘들다. 페로몬 과잉증이 아닌 수인들은 그냥 있으면 좋은….』
‘넘겨. 얘도 넘기자.’
펄럭펄럭.
책장들이 빠르게 넘어갔다.
『페로몬 과잉증
페로몬이 수인의 체내에 과다하게 있는 현상을 뜻한다.
애초에 이 증상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하기 때문에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못했다.
보통 페로몬 과잉증은 페로몬이 몸속에 너무 많이 내재해 페로몬이 몸을 찢고 나오는 증상이 일반적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가 생겨나며 심한 경우에는 몸이 갈기갈기 찢긴다. 여태까지 발견된 치료 방법은 상성 페로몬을 찾아 체내 열을…….』
‘아 왜 필요 없는 내용만 나오는 거야.’
인간화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내용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짜증 난 상태로 페로몬에 대한 책을 뒤져보고 있는데 뒤에서 세상 온갖 근심이 다 담겨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님이 너무 귀여우셔서 제 안에 내재 되어 있는 폭력성이 활성화되는 것 같아요.”
레아가 한숨을 쉬며 토로하듯이 투덜거렸다.
“레아 님은 원래부터 폭력적이십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앨런이 소리소문없이 나타났다.
“앨런 맞고 싶어요? 아니면 처맞고 싶어요? 저는 너그러우므로 고를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레아가 빙긋 웃었다.
“저는 허약한 제 몸이 소중….”
“나는 2번을 추천해.”
이안이 책장에 기댄 채 말했다.
“흐음. 책 보는 고양이라니. 별일이네. 역시 보통 고양이는 아닐 것 같더니 천재가 맞았어.”
“내가 데리고 왔잖아. 당연히 보통은 아니지.”
‘네가 왜 자부심을 느끼는데.’
나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뒤를 돌아보곤 황당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울 수 없었다.
……무슨 여기가 만남의 광장이냐 다 여기서 집합하게.
도대체 여러 곳의 서재가 있는 그 넓디넓은 저택에서 왜 하필 이 서가에 다 몰려 있는데.
굳이 이 서가에.
루이즈 카델리온이나 이안 카델리온은 카델리온가 일원 전용 서재를 사용할 수도 있으면서.
참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리고 쟤네는 언제 온 거고.’
“근데 동생아, 너 쟤한테 무슨 앙심 있니?”
그러게. 너 나한테 무슨 원한 있니, 남주야.
“저 아이한테 왜 네 페로몬이 처덕처덕 발라져 있어? 지옥 끝까지 쫓아가려고?”
페로몬도 안 쓰면서.
그녀가 뒷말을 삼켰다.
“치료.”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엄청난 내용을 말했다.
“네!? 이안 님이 치료를요??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는 게 아니라?”
앨런이 조용하게 화들짝 놀랐다.
루이즈가 콧노래를 부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진짜 미쳤구나.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네. 빙빙 잘도 돌아가고 있어.”
“사람 앞에다가 두고 미쳤냐니. 서운한걸.”
“하긴 저렇게 귀여우면 가능하지. 아마 얘가 널 늦게 발견했으면 내가 널 낚아채 갔을 거야.”
“범상치 않은 느낌도 나고, 저 눈 봐봐. 예사롭지 않잖아. 책을 읽는 방식도 그렇고. 역사 속 길이 남을 인물이 될 잠재력이 보인달까.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달라.”
……제발 나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것 같다 하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려 줬으면.
나는 단지 한국 출신의 평범한 지나가는 엑스트라1일 뿐인데.
이 저택에 와서 내가 한 것이라곤 이안에게 쫄아 숨죽여 산 것밖에 없는데.
일단, 한국에서의 인생을 기억하고 있는 것부터가 특이한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아리엘이다.
“하지만 방패가 막고 있다고 창이 방패를 못 뚫는 게 아니니까.”
루이즈가 고동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뱅뱅 꼬며 말했다.
“듣는 방패 서운하네.”
이안이 살살 눈웃음쳤다.
전혀 서운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안의 말을 가뿐히 씹곤 나를 보며 이안을 향해 가리켰다.
“쟤 말고 나한테 와. 잘해 줄게.”
루이즈가 이안을 향해 가리키던 손가락 방향을 자신을 향해 바꾸었다.
“어때. 너 내 제자가 될래?”
‘너 수인이잖아. 페로몬 다루는 방법을 알려 줄게.’
루이즈가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목소리를 작게 소곤거렸다.
‘어때.’
차르륵.
그녀의 머리칼이 내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