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29/111)

28.

탁.

아직 다 성치 않은 몸의 그녀가 들어오고 집무실 문이 닫혔다.

“부르셨습니까. 에인트의 마리 엔젤러스, 주군께 인사 올립니다.”

집무실 문이 닫히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항상 그렇듯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위에 팔을 올렸다.

높게 올려 묶은 블루베리 색 머리가 흔들림 없이 기울어졌다.

기사들이 복종을 표하는 완벽한 자세였다.

시녀복을 입고 있어 거치적거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세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 폼이 뛰어난 기사를 연상케 했다.

아리엘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며 심장의 존속을 논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에인트.

이안이 양성한 그의 그림자.

그에 의한, 그를 위한 조직.

정보 수집부터 첩자를 심고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그들은 이안을 위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이안은 예전부터 비밀스럽게 거리에 나앉은 아이들 중 검술, 활, 정보 수집같이 어느 한 방면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수인들을 거둬 자신의 사람들로 키웠다.

거리에 나앉은 그들에게 그의 선택은 빛이자 구원이었다.

그렇기에 하나하나 제각기의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그들은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그들은 다른 쪽의 정보를 교란하거나 다른 단체들을 박살 내는 일 같은 과격한 일들을 자주 맡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존재하는지 모르고 그들이 활동하는지도 몰랐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이 활동을 조심스럽게 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들은 말을 할 수 없기에.

그들은 마치 이 세상의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는 어둠이었고 동시에 어디에서나 잘 스며드는 그림자였다.

카드에 앞면이 있으면 뒷면도 있듯이, 공식적으로 그를 돕는 것이 기사단과 보좌관이었다면 그들은 오직 이안을 위해 물밑에서 바삐 움직이는 조직인 것이다.

그녀는 길어지는 대기 시간에도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 주군의 명령을 기다렸다.

탁. 타다닥.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원래대로라면 상어를 의심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들이 불렀을 때 기가 막히게 타이밍 맞게 암살자들이 들어왔으니.’

에티아 가(家).

바다의 우두머리, 대해의 지배자, 최상위 포식자인 상어족.

그들의 사절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뭍으로 잘 올라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에티아 가주가 고양이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뭍으로 올라오면서까지 나선다니.

‘그러기엔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그들은 그들의 영역 밖으로 잘 나오지 않으니까. 아리엘과 그들의 접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 이안이 누구를 만날지는 어느 가문이라도 조작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편이었고, 웬만해서는 접촉을 안 했으니까.

그가 누굴 만날지 정보를 빼내는 것 자체가 카델리온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델리온에서는.

‘에티아 가주의 일정표가 흘러 들어간 걸까.’

뭍으로도 나오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 에티아.

에티아의 첩자는 에티아에서 꽤나 높은 곳에 있나 보지.

‘그토록 철저히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그걸 생각한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럼 그 암살자들은 누가 보낸 거지. 그렇게 생각이 없이 교묘한 행동을 보면 여우족 같은데, 하는 짓은 여우족 같진 않고.’

뱀이나 늑대인가.

아니면 제3의 세력일 수도 있고.

잠시 손가락을 두드리며 고민에 빠진 이안이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느릿하게 뗐다.

“너.”

책상을 두들기던 이안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잠시 서부에 좀 다녀와.”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한 건 서부에 갔다 와서 한꺼번에 처리하도록 하지.”

“명 받들겠습니다.”

마리가 그의 말에 부복했다.

후에 몰아칠 큰 폭풍에서의 작은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

몽실몽실한 분홍색 구름 위의 하늘에 털 뭉치들이 유유히 떠다녔다. 나는 그 털 뭉치들을 쫓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동화 속에서 솜사탕 마을이 나온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이게 뭐지.’

나는 하늘에 떠다니는 하늘색 털 뭉치를 잡아 살펴보았다. 하지만 솜사탕을 닮은 하늘색 털 뭉치는 내가 그것을 잡자마자 얄밉게 휙 빠져나갔다.

‘악. 야! 돌아와.’

나는 놓쳐 버린 털 뭉치를 잡기 위해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내 손안에서 탈출해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털 뭉치가 순식간에 내 입안으로 쏙 돌진했다.

‘헐…… 달아…….’

‘맛있어!’

파란 구름이 입안에 들어가자 달콤한 것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몽실몽실한 솜사탕 구름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이 붕 뜰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 유명한 구름으로 만든 구름빵이 이런 맛이지 않을까.

‘솜사탕 먹고 싶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한국에서 먹었던 모든 음식이 그리웠던 거지만.

나는 털 뭉치들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거대한 구름 위에 올라탔다.

‘얘도 맛있을까?’

호기심에 이끌려 내가 올라탄 구름을 한 입 깨물었다. 폭신폭신한 구름을 한 입 베어 물자 그 구름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맛있어…….’

나는 무아지경으로 구름을 뜯어먹었다.

내가 구름을 뜯어먹는 사이 핑크색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조금씩 조금씩 점차 맑게 갰다.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 같았던 분홍색 하늘이 평소와 같은 청아한 푸른 하늘로 변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올라탔던 구름도 많이 흐려져 없어지기 직전인 상태였다.

그 순간, 중력이 내 몸을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와아아아! 떨어진다아아-!’

깜빡깜빡.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뜬 채로 깜빡거렸다.

‘아, 뭔가 솜사탕을 먹는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무슨 꿈을 꾸었는지.

나는 평소와 똑같이 잘 자고 일어났다.

이안이 치료를 해 줘서 그런 걸까. 어제 그렇게 많이 피를 흘리고 많이 다쳤는데 오히려 몸 상태나 컨디션은 평소보다 좋았다.

평소에는 몸이 무거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가벼운 느낌이라고 할까.

실질적으로 몸무게에서의 차이는 없겠지만.

나는 활기찬 기운이 도는 몸으로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멍하니 천장을 봤다.

“아리엘 님. 피하세요!”

팅. 챙. 챙-!

까앙-!

휘익.

칼이 나에게 떨어져 내려오는 그 상황.

그것을 옆에 있는 활대를 자연스럽게 쳐 내는 마리.

그리고 아무것도 못 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나.

그런 나 때문에 다친 마리.

어제 있었던 일이 내게 적잖이 충격적이었는지 어제의 그 상황이 자동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도대체 전생까지 기억한 마당에 뭐가 충격적이라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위협쯤이야 당할 수 있지. 뭐.

입안이 씁쓸해졌다.

힘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가 떠오르자 무력감과 자괴감이 내 몸을 잡아먹으려고 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때 내가 무언가라도 할 수라도 있었다면.

마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마리는 다쳤을까?

글쎄. 애초에 도움이 될 순 있었을까.

다들 무기를 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마리도 그렇고 암살자들도 그렇고.

처음에 그녀가 기사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마리의 정체가 뭐지.’

아리엘의 머릿속에서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해도 질문에 대한 답은 보이지 않았다.

‘마리의 정체가 무엇인가가 뭐가 중요해. 마리가 죽을 뻔했는데.’

나 때문에.

그녀가 나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루이즈 카델리온이 조금만 늦게 들어왔더라도, 나와 마리는 그날 그 자리에서 둘 다 죽었을 것이다.

활력이 돌던 몸의 힘이 발끝부터 쭉 빠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활발했던 몸이 다시 물먹은 솜처럼 변했다.

‘그래. 이대로 살 수는 없어.’

아리엘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아. 내가 여태까지 너무 안일하게 살았어.

언제까지고 이런 행복이 계속되리라 생각하면서.

‘이건 민폐인 것 같아.’

‘뭔가를 알고, 힘을 키워야 해. 나를 지킬 수 있도록. 언제까지 카델리온 저택에 얹혀서 살 수는 없잖아.’

지금은 그가 흥미 때문에 나를 데리고 있는 거라지만 그가 언제까지고 나를 데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언젠가는 나가야 하겠지. 그때를 대비해 놔야 해.’

‘그래. 책을 보러 가자.’

“먀아!”

‘마리!’

나는 방에서 마리를 불렀다.

아직 마리가 방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오늘 일찍 일어났나. 아침부터 우중충해졌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어머. 기침하셨나요. 고양이님.”

뒤에서 내가 알던 마리가 아닌 익숙한 듯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였다.

“오늘부터 고양이님의 새로운 전속 시녀인, 레아 슈에트라고 합니다.”

내 또래로 보이는 구불거리는 레몬색 머리를 높게 올려 묵은 레아가 슬며시 웃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볼에 홍조가 있고 부끄러운 듯이 눈을 밑으로 내린 것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인 듯했다.

“마리 님은 현재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내셔서 제가 대신 아리엘 님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리 님께서 돌아오시게 되시면 앞으로 저와 마리 님이 함께 아리엘 님을 모시게 될 것 같습니다.”

‘마리가 휴가를 냈다고?’

역시 저번에 나 때문에 아파서 휴가를 냈을 확률이 크겠지.

나는 마리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곤, 악수를 하기 위해 레아에게 두 앞발을 내밀었다.

‘우리 잘 지내보자.’

“어머! 먼발치에서 뵈었지만 실제로 보니 이렇게 귀여우실 줄은…….”

손을 내밀자 그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수줍음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 착각이었나 보다.

뭐지.

내 느낌이 죄다 틀리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나 그래도 촉 좋은데. 진짜 좋은 편인데.’

그녀가 귀한 유리구슬 대하듯 아리엘의 발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포개 놨다. 그녀의 눈에서 별빛이 쏟아져 나를 향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져 눈을 살짝 피했다.

그러자 몽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저택 하나 부술까요? 이 정도면 이안 님도 인정해 주실 것 같은데.”

‘저기. 미안한데, 우리 만난 지 2분도 안 지났는데.’

도대체 얜 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고양이를 처음 보자마자 저택을 부순다는 얘기를 하다니.

이 정도면 호랑이 집에는 정상이 없다는 것이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열려 있는 조그만 문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복도에 나온 아리엘은 총집사의 설명을 더듬으며 공용 서재로 향했다.

“직진하시고요.”

직진하고.

“우회전하시고 직진하시면 됩니다. 허허.”

……우회전을 어디서 하는 거였지?

“고양이님, 만약 서재에 가시는 거면 앞으로 한 번만 더 가시고 우회전하시면 돼요.”

레아가 복도 한가운데 서서 방황하던 나를 붙잡아 줬다.

겨우 서재에 다다른 내가 앞을 바라봤다.

“아주 간단하죠?”

‘설명만 간단했네.’

저택 안에 있는 서재에 다다르니 엄청나게 큰 나무문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집사의 말로는 이 문이 흑단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했던 것 같은데.

‘와…… 문이 왜 이렇게 커?’

나는 고개를 올려 들어 그 문을 바라봤다.

“고양이님 들어가시게요?”

‘응응.’

고개를 끄덕이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레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들어가시는 데 불편하시다면, 이 문 부숴 버릴까요?”

넌 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문 열어 달라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부숴 버리고 싶냐고 물어보다니.

맨날 자신 심장의 존속을 논하는 마리도 그렇고 벌써 무언가를 부숴 버리겠다고 몇 번이나 한 레아도 그렇고 왜 다들 무언가의 존속 여부를 논하려 하는지.

어. 근데 생각해 보니 저 말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뭐 부숴 버리겠다는 말.

‘……우리 처음 만난 사이 아니었니? 왜 나는 너의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지.’

정말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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