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27/111)

26.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서릿발처럼 차가운 페로몬이 느껴졌다.

청량하던 그녀의 향기가 새벽안개를 머금은 듯 눅눅해졌다.

어떻게 끌어내렸는지 이불은 침대에서 바닥으로 질질질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방 안에 있는 이불이 새빨갛게 변한 상태로 들썩였다.

이불 안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옅게 들렸다.

“아리엘.”

이안이 어르는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 이불을 털이 한 가닥이라도 보이지 않을 만큼 끝까지 덮었다.

“왜 울어.”

그는 아리엘이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바닥에 앉았다.

이안은 침대에 기대앉아 바로 앞에서 들썩이는 이불을 가만히 바라봤다.

마음의 문을 단단하게 걸어 잠갔는지 말을 꺼내기만 해도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빨간색 물감을 엎은 듯이 이불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네가 날 무서운 곳에 데려가라고 했잖아.’

“의무실은 왜 안 가고.”

‘싫어. 거기 갈 바에는 차라리 아플레. 아픈 게 더 나아.’

나는 계속 고개를 도리질을 치며 이불을 뒤집어쓴 상태로 숨을 헐떡였다. 고개를 흔들자,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이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내 눈에서 아까 못 흘린 눈물이 한이라도 맺힌 듯, 펑펑 흘러나왔다.

아리엘은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자신이 뒤집어쓴 이불을 바라봤다.

다리가 퉁퉁 붓고 피가 흘러넘치는 상태였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에서 통각을 못 느끼도록 지워 놓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멍하니 울었다.

이안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를 향한 불신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열어 놨던 고양이의 마음속에 있는 문이 철컥하고 잠겨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발 이리 줘 봐. 너 아프잖아.”

‘싫어. 내가 널 뭘 믿고. 언제 그 무서운 곳에 데려갈 줄 알고?’

‘너도 나를 그 사람들처럼 날 대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 말을 들으니, 머릿속에서 지워진 통증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유리 파편들이 박힌 곳이 쑤셨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기억의 편린 때문인지, 진짜 유리 파편들 때문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이 정도는 예전에 당했던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럼 앞에서 기다릴게. 마음이 진정되면 나와.”

<예민한 우리 집 고양이와 친해지기>에서 나온 대로 이안은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이제 방 안에는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첩자라.’

그가 방금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첩자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누가 첩자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단지 지켜보기만 하고 청소를 아직 하지 않았을 뿐. 그는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만 처리하고 나머지를 정리하는 것은 미루고 있었다.

한 번 청소를 하더라도 그들은 잠시 몸을 추릴 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작을 집어넣을 거니까.

새로운 첩자가 들어와 번거롭게 누가 첩자인지 다시 찾는 것보다는 첩자인지 누가 알고도 내버려 두는 것이 훨씬 나았다.

찬찬히 그들의 숨통이 조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꽤나 악질적인 취미이긴 하지만.

어차피 그들은 카델리온 저택 안에서 무언가를 할 엄두조차도 내지 않았다.

아니,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다.

가문이 이렇게나 큰데 첩자가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는데.

‘그 첩자가 날뛰면 곤란하지.’

아무래도 대청소를 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엘은 살며시 이불을 내렸다.

새기 고양이는 고개를 슬쩍 들어 얼굴만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아리엘은 미동 없이 눈만 감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내가 쟤를 믿어도 되는 걸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진심으로 나를 해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첫 만남 때를 빼면.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챙겨 주는 편에 가까웠다.

‘……근데 쟤도 똑같을 수도 있어.’

아무도 믿으면 안 돼. 아리엘.

그들 역시 그 사람들처럼 언제나 너에게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어.

‘하지만 여태까지는 안 그랬잖아.’

과거에서부터 학습된 기억들과 카델리온 저택에 남아서 쌓은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녀가 이불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한 발자국.

딱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그 모습이 다 그려지는 이안은 움찔거려지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느라 꽤 애를 먹었다.

나는 바닥에 그대로 못 박힌 채 서서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성급하게 뛰어왔는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단정하게 다니던 평소와 달리, 현재 그의 옷차림은 괘나 흐트러져 있었다.

“아리엘, 충고하나 해 주자면, 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그 역겨운 기대 포기해. 너는 사랑받지 못해. 너를 찾는 수인은 그저 너를 이용하려고 하는 거겠지. 마치 우리 아버지처럼.”

“나는 네가 어디가 쓸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셀레스틴이 천사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속살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날이 마지막으로 내게 잘 대해준 날이었지.’

왜 그때 그녀가 나를 아리엘이라고 부른 걸까? 생각해 보니 딱 그날 하루만 그녀가 나를 아리엘이라고 부른 것 같았다.

‘너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비꼬아서 말한 걸까.’

그리고 그 이후로 나에게 친절한 셀레스틴은 사라졌다. 악의 가득한 그녀만 남아 있었을 뿐.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붙잡았다.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안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저 고양이가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

저 솜뭉치가 마음을 열 때까지.

한 발자국.

아리엘이 그에게 더 가까이 왔다.

이제 한 발만 내디디면 그와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조금 더 하면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를 부를 것 같으면서도 그러지 않는 모습에 이안은 감질났지만 꾸준히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툭툭.

작은 솜뭉치가 그를 쳤다.

나는 이안의 손등을 한 번 더 살살 쳤다.

이안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이안의 손등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던 그였기에 그의 손을 제대로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그가 장갑을 벗을 때는 거의 내가 졸음에 잠겨 있어서 그의 손이 어떤지 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의 손은 예상했다시피, 길고 곧았다. 그리고 하얗기까지 했다.

내가 이안의 손등을 몇 번 툭툭 건드리자 티 없이 깨끗하고 곧았던 하얀 손에 아직까지도 흐르고 있는 내 피가 묻었다.

‘근데 쟤는 왜 방 밖에서는 꼭 장갑을 끼고 있는 걸까.’

나는 이안의 손등 주변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차가운 내 발바닥이 그의 손등을 이리저리 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얘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 강제로 날 데려가려고 했다면 아까 데려갔겠지.’

그래. 실험은 하지 않을 거야.

한참을 서서 그의 주위에서 서성이던 나는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포근히 누웠다.

아리엘의 마음속에 있는 깜깜한 동굴에서 갈라진 한 틈새 사이로 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 빛을 따라가 동굴 안에 박혀 있는 돌을 밀었다.

마침내 아리엘이 그녀의 동굴에서 나와 그의 손바닥 위로 온전히 올라왔다.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평생 나올 것 같지 않던 그녀가 나와 이안을 향해 걸어갔다.

그게 한 발자국이긴 하더라도.

***

아리엘에게서 새어 나오는 청량한 페로몬이 그녀가 올라와 있는 곳부터 시작해 그의 온몸을 포근하게 덮었다. 그러자 뜨거운 안개가 자욱이 가득 찬 듯한 두통이 사라졌다.

항상 자신을 경계하듯이 어딘가 묘하게 날이 서 있었던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었다.

날이 서지 않은 페로몬은 달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건 마음의 빗장을 허문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 그녀라니.

뱃속이 이상하게 들끓었다.

얌전하게 누워 있는 현재 그의 모습과 다르게 그의 배 속 안에서부터 끓어오른 광폭한 열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맛보는 과실은 달콤했고 황홀했다.

솜뭉치를 도망가지 못하게 꽉 잡아 두고 싶었지만, 조금만 힘을 주고 잡았다가 짓눌려서 터질까 봐 그럴 수 없었다.

‘납작해진 아리엘이라도 좋을 것 같은데.’

그녀가 그의 손바닥을 꾹꾹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소름 끼치도록 강렬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찡하게 간지럽기도 했고 손끝이 짜릿하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겨우 억눌러 놨던 페로몬이 그의 감정에 반응해 다시 마음껏 날뛰려고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미세하게 뿜어져 나오는 맑고 시원한 페로몬이 그의 페로몬을 진정시켰다.

그녀의 페로몬이 진정하라는 듯이 느릿하게 그의 등줄기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의 고통을 잠재워 주는 그녀의 페로몬은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모를 묘한 고양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항상 그가 느꼈던 작열감이 사라졌고, 작열감이 사라진 곳에서는 그녀를 향한 깊은 갈망이 채워졌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깊은 만족감으로 목 안에서부터 그르렁거리면서 나올 것 같은 달콤한 한숨을 삼켰다.

‘기쁘다……?’

아니, 기쁘다라는 그렇게 간단한 말로 이 복잡한 기분을 정의할 수 없었다.

어떤 단어로도 이 뻐근하면서도 흉포한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싶으면서도 그녀를 고이 모시고 싶은 이 기분은 양가적이었다.

마치 오래도록 갈망했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팔랑거렸던 아름다운 나비가 오랜 기다림 끝에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날아다니는 나비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그 나비를 풀어 주고 싶으면서도 다른 곳으로 가거나 남에게 보여 주기 싫어 유리로 된 작은 상자 안에 자신만 볼 수 있도록 가두어 놓고 싶은 느낌이었다.

확실한 건, 그녀를 놓쳐선 안 되었다.

그는 힘들게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그의 것을 빼앗길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됐든 못 뺏어가.’

이안은 누운 상태로 미세하게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렸다.

나는 이안의 허벅지 위에 누운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얘 뭐해……. 설마 자나?’

손가락 한 마디조차도 미동도 없는 이안에 나는 이안의 팔을 꾹꾹 눌러 재촉했다.

‘야. 네가 오라며. 왔잖아.’

‘오라고 해 놓고 꼼짝도 안 하는 건 뭐야.’

약간의 불만이 섞인 꾹꾹이에 닫혀 있던 이안의 눈꺼풀이 서서히 걷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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