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26/111)

25.

앞의 광경을 보자,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녀의 팔, 다리가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비참했다.

‘또…… 저걸로 나를 찔러?’

둥둥 떠다니는 처절하고 참혹한 기억들이 눈과 귀를 막았다.

거미줄처럼 나를 옭아맨 기억들이 나를 놔주질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밀려오는 기억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기억에게서 숨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고양이님, 여기가 그 의…….”

그러나 계속해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과거의 기억들에 수인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들렸다.

“……슨 일…….”

“…….”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점처럼 희미해졌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또?’

언제 이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또 느껴야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비참한 거 아니야?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희도 똑같은 존재였구나.

역시 수인은 믿으면 안 된다더니.

믿었던 백호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얄밉긴 해도 항상 잘해 주던 호랑이들이었기에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강력한 주먹 지르기는 처음인걸.”

“따로 사람을 때리는 법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우신 게 아닐까요.”

“근데 아리엘, 슈 사 왔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때리면 내 가녀린 손가락이 부러져 무거운 슈를 못 들지 않을까.”

‘수백이 넘는 적을 학살하고도 손가락 하나 다친 데 없던 네가?’

“아야야…. 봐. 손가락 빨개졌잖아. 너한테 맞아서 빨개진 부분인데.”

‘…진짜 아픈 거였어?? 내 주먹이 그렇게 세?’

“푸하하하하.”

‘야!’

“슈까지 줬는데 조금 전에 웃었다고 그렇게 매서운 눈초리로 보면 마음이 아픈데… 자, 아.”

‘헐. 달아.’

“예쁘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리엘 말고, 내 얼굴.”

“아, 예에…. 그러는 눈빛은 아리엘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이런 앨런, 관찰력을 더 키워야겠어. 바로 앞에 있는 꽃을 보고 있었는데.”

“이안 님, 혹시 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와도 될까요?”

카델리온 가에서 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아니, 너희는 시몬드 가의 그 수인들보다도 더해.’

원래 믿지도 않았던, 아니 그런 행동을 할 줄 알고 있었던 사람이 나에게 고통스러운 일을 행한 것보다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더 아픈 법이었다.

이제 차츰차츰 정을 주기 시작했는데.

‘맞아.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됐어.’

왜 그게 이제 다시 생각났을까.

가슴이 지끈거렸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또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터질 것만 같았다.

두꺼운 북을 내리치듯 심장을 내리치는 소리가 뇌를 지배했다.

딱딱히 응고해 있었던 얼음장 같은 안 좋은 기억들이 산산이 깨져 나를 찌르는 날카로운 파편이 되었다.

지겨워.

무서워.

끔찍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피에 각인된 두려움이 한층 선명해졌다.

삐-

여러 곳에서 이명이 들려왔다.

내 몸에 박힌 유리 조각들처럼 머리가 산산이 깨질 것 같았다.

“잡아!”

“그러게, 내가 도망쳐도 소용없다고 했잖니.”

날 옥죄는 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손.

“순순히 따라왔으면 좋았을 것을. 쯧.”

하찮고 더러운 것을 보듯 경멸하는 눈빛.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무의식 속에 새겨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그 끔찍한 것들이 성난 파도처럼 나를 덮쳐 왔다.

간신이 눌러놨던 기억 속의 댐이 폭발했다. 곧 무의식 저편에 새겨져 있는 것들이 홍수처럼 콸콸콸 흘러넘칠 거라는 걸 깨달았다.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알게 되겠지.’

이 의무실과 그때 ‘그곳’이 점점 겹쳐 보였다.

나는 쓰러져가는 내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당장 여기를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돼 버릴 것만 같았다.

‘놔!’

아리엘이 있는 힘을 다해서 집사의 손을 세게 찼다. 아등바등하는 아리엘과 달리, 그녀를 꼭 붙잡고 있는 집사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놓으라고!’

아리엘은 자신을 올려 둔 손 위를 할 수 있는 한 가장 세게 깨물었다. 이빨 자국이 생긴 집사의 손에서 힘이 잠시 빠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 틈을 타 밑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피가 흐르는 몸으로 재빠르게 뛰었다.

‘도망쳐야 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짧은 다리들을 쉼 없이 움직였다.

하얀색 대리석 바닥에 빨간색의 핏방울들이 떨어졌다.

눈을 뜨자 주변의 환경이 휙휙 빠르게도 바뀌었다.

퉁퉁 부은 다리와 피가 흐르는 몸으로 나는 끊임없이 뛰고 또 뛰었다. 뒤에서 다른 사람들이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중에 실험을 당하든 뭐든, 지금 당장 내 몸에 난 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발을 멈춰 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가장 급했다.

하지만 나는 내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멈춰. 멈춰야 해. 이렇게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되는데.’

내 머리는 뛰면 안 된다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말하는데, 내 다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로 인지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금 당장 멈췄다간 옛날의 그 지하실에 처박힐 것 같았다.

그런 공포감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두려움이 뇌를 지배했다.

나는 어딘지 모를 곳에 멈춰 선 상태로 열려 있는 아무 방에나 들어갔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아리엘이 지나간 자리는 어디로 갔는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사방에 핏방울 자국이 있었다.

사방으로 퍼져 있는 핏방울에 고용인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아리엘 님!”

“아리엘 님 어디 계세요.”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야 했지만 지금 당장 다른 사람들에게 가면 나를 예전 그곳으로 데려다 놓을 것만 같았다.

‘내가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는데.’

그 고통을 거짓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항상 이곳이 책 속의 세상이라는 것을 되뇌었다.

책 속의 내용을 제외한 전생의 기억들이 항상 휘발되려고 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억지로 붙잡고 살았다.

그 방에 있던 주사기와 바늘들이 잊히지 않고 뇌리에 선명히 박혀 떠나가질 않았다.

‘원래 수인들은 다 똑같은 거야?’

나는 그 방에 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모든 사물이 뿌옇게 보일 정도로 눈앞이 흐려졌다.

눈에서 물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눈물이 나오는 얼굴을 이불에 묻었고, 얼굴을 묻자 이불이 내 시야를 캄캄히 덮었다.

‘내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다들 그러는데.

그를 믿었던 내 마음도 배신감으로 까맣게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들썩이는 새하얀 이불보가 아리엘의 몸에서 나온 빨간색 피로 물들어 갔다.

“아리엘.”

고요하던 방 안에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들어왔다.

‘…저리 가.’

지금 제일 듣고 싶지 않았던 수인의 목소리였다.

***

이안이 에티아의 가주와 해상 교역에 대한 얘기를 마치고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몸을 깊숙이 숙인 시종이 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이안 님, 집무실에 암살자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안이 바로 표정을 무섭게 굳혔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비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아. 다들 미쳤나 보군.”

그 해사한 웃음 뒤에 가려진 눈이 누구 하나 죽일 듯 싸늘했다.

“혹시 내가 요즘 마물들을 별로 안 죽였나.”

얼마 전에 족히 4미터에 육박한 괴수의 몸을 홀로 찢어버린 이안이 고민했다.

‘자, 잘못 들었나.’

비뚜름한 웃음 뒤에 살기가 맴돌았다.

“아니면 내가 만만해 보일 정도로 약했다던가.”

시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혼자서 한 군단의 병력을 넘어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계신 가주님이?

시종은 마물을 퇴치하기 위해 갔던 현장을 떠올렸다.

카델리온의 고용인들은 비상상황에 대비해 칼이나 활 같은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분명 검을 잘 다룬다 생각해서 카델리온에 들어갔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무력감만을 느꼈던 그 날의 충격이 생생했다. 사실 무력감을 넘어 공포심과 경외심마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상처가 생겨도 바로 아무는 그 모습. 몇몇 마물들을 제외하면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면 카델리온을 건드리지 말라고 대놓고 경고라도 해야 했나.”

한동안 밤손님이 안 찾아오길래 잠잠히 있었더니.

“아, 그렇군. 마물을 죽였지, 수인을 죽인 적은 없었네.”

평소 다른 귀족들에게 대하던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싸늘한 목소리였다.

시종은 덜덜 떨면서 눈을 땅으로 고정한 채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중 몇은 마리 경께서 처리하셨고 나머지는 루이즈 님께서 생포하셨습니다.”

이안이 서늘한 눈으로 시종을 바라봤다.

시종은 이안의 얼굴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직, 허리를 숙인 상태로 땅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마리 경께서는 의무실에서 회복 중이십니다.”

“그리고 고양이님께서는…….”

시종은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어 갔다.

“총집사님께서 부상을 입으신 고양이님을 치료하기 위해 고양이님을 데리고 의무실에 들어가셨습니다만,”

이안은 그 이야기를 팔짱을 낀 채 계속 들었다.

“고양이님께서 의무실에 들어가시자마자 총집사님의 손을 깨무셨습니다. 그리곤 총집사님의 손에서 내려간 고양이님이 피를 철철 흘린 채 숨을 헐떡이시면서 도망가셨는데, 어디로 도망가셨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수색 중에 있습니다.”

그의 푸른 벽안이 길게 수축했다.

선뜩한 냉기를 가진 파란색 눈동자가 잘 벼려진 칼보다도 날카롭게 변했다.

“그 쥐새끼들은 지하 감옥에 가둬 놨나?”

“네. 루이즈 님께서 시체까지 모두 지하 감옥에 가둬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모든 암살자가 각각 다른 방에 있는 상태입니다.”

“서쪽 별관으로 옮겨. 그리고 서쪽 별관에다가 준비하고 있으라고 해. 내가 내일 직접 갈 테니.”

이안이 차갑게 웃으며 말하곤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시종에게 넘겼다.

그러곤 말도 없이 2층 중 열려 있는 방문 하나를 쳐다보곤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새끼 고양이가 도망쳤다면 문을 닫을 정신까지 있었을 확률은 거의 없었을 테니.

‘그 몸으로 의무실에서 멀리도 갔네.’

애초에 그 성치 않은 조그만 몸으로 여기 문을 닫을 수도 없을 것이다.

시종은 멀쩡히 붙어 있는 제 목을 한 번 매만지곤, 빈자리를 한 번 쳐다보았다. 괜히 목 언저리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안이 사라진 쪽으로 아무 말 없이 허리를 한 번 숙인 뒤,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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