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25/111)

24.

칼날이 빠르게 날아오는 동시에 내가 급하게 옆으로 굴렀다. 머리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감에 의한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오른쪽 허리 부분 검은 털을 스쳐 지나간 검은 과격한 소리를 내며 원래 서 있었던 바닥에 박혔다.

아까 몸을 움직이지 않았으면 심장이었을 부분이었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옆에 꽂힌 단도를 보자 정신이 아연해졌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절망적인 가정에 털이 오소소 솟았다.

‘침착하자. 침착해.’

가만히 덜덜 떨면서 이 상황을 바라볼 때 마리가 돌연 활대를 큰 궤적으로 휘둘러 칼을 막았다.

날아오는 칼의 궤도가 꺾여 창문으로 떨어지자,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여섯.’

여우 하나에 멧돼지 셋, 곰 둘.

옆에서 당장 달려 나오려고 하는 멧돼지 하나랑,

“쯧.”

암살자가 벽을 박차고 그녀를 향해 뛰었다.

‘저기 달려오는 무지렁이 한 명.’

푹, 그녀가 들고 있는 화살촉이 달려오던 암살자의 배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녀가 지체하지 않고 꽂아 넣은 화살대를 비틀었다. 화살대가 장기를 깊숙이 헤집어 놓았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린 암살자의 입에서 울컥 핏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허공에서 암살자들이 뛰어내렸다.

팅. 탱. 챙.

챙-!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칼날들이 쇄도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흐릿해지는 초점을 겨우 잡고 정신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뭘 할 수 있는 거지? 살아남을 수는 있나?

공황이라는 형체 없는 흐릿한 괴물이 나에게 다가왔다.

패닉에 빠지는 순간 끝이었다.

‘정신 차려!’

양발로 자신의 볼을 두드린 아리엘이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델리온 가에 암살자를 보낼 멍청이들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오랜만에 아기 고양이님과 평화롭게 동화책을 읽고 노닥거리려고 했는데, 상식도 없는 암살자가 카델리온의 저택에 쳐들어오다니. 곱게 죽지는 않을 텐데. 정말 머리가 없는 건가.

쯧, 그녀가 혀를 찼다.

새끼 고양이를 한 손에 붙든 마리가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그녀가 빠르게 내려가며 암살자의 오금을 신발로 내리찍었다.

“아니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걸까.”

서리라도 끼일 듯한 싸늘한 목소리였다.

지체 없이 앞에 있는 암살자의 명치에 화살을 꽂아 넣은 마리가 다시 한번 화살을 푹, 찔러넣었다.

쿵. 태산 같은 덩치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곰 하나 갔고.’

후웅. 친구를 잃어 슬펐는지 또 다른 암살자의 검에서 나온 무서운 파공음이 집무실을 갈랐다.

근력 강화가 곰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페로몬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지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세기였다.

쿠당탕탕! 쨍그랑!

물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집무실에 있는 의자는 어딘가 벽으로 처박혔고, 책상에 놓여 있던 정갈한 서류들은 구겨지고 찢어진 채 사방에 흐트러져 있었다.

바퀴가 제자리에서 헛돌 듯이 굳어 버린 머리가 헛도는 것 같았다.

현재 암살자 넷에 마리 한 명.

근접전에서의 활과 화살, 그리고 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은 마리의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을 끊어 내지 못했다.

아직은.

채앵. 챙-!!

날카로운 칼들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암살자 한 명이 죽었다.

‘셋.’

“그래도 실력은 꽤 좋네요. 그 허술한 경비를 뚫고 들어올 정도면.”

그녀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죽을 걸 알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 아예 머리가 소멸한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왜 들어온 걸까.

‘저 정도 실력이면 다른 가문에 몇 없는 상급 기사 정도는 됐을 텐데.’

제대로 교육이라도 받은 듯, 저들의 움직임은 무질서했지만 일정한 규칙성을 띠고 있었다.

기사의 것이 아닌 움직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암살자의 움직임도 아니었다.

‘아. 정말 더럽게 성가시네.’

달려오는 멧돼지에 신경질이 난 그녀가 강하게 쳐 냈다.

카앙-!

검과 활이 부딪치면서 검이 날아갔다.

그녀가 자신이 들고 있는 활과 화살을 무감각한 눈으로 쳐다봤다.

‘곧 있으면 부서지려나.’

전쟁에서 쓰거나 임무를 부여받을 때 쓰는 활이라고 해도 이 난리를 치는데 여태까지 안 부러지는 것도 기적이었다.

애초에 근접전에서 쓰려고 만들어놓은 활도 아니었다.

앞에 있는 멧돼지가 속도를 높여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아, 망할.’

최대한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내가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물건에 걸려 넘어졌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몸에 하나하나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유리 조각들이 박힌 몸에서 뜨끈한 피가 흘렀다.

그 피가 익숙하지 않게 느껴졌다.

마치 내 피가 아닌 것처럼.

현실감 따위는 없었다.

끼이익, 날카롭게 벼려진 얇은 두 칼을 마리가 활대로 쳐 내곤 다른 손을 허리춤에 대충 매달아 놓은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았다.

그녀가 뽑은 화살을 성의 없이 어느 한쪽으로 던졌다.

휘익!

그녀가 던진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 창에 걸터앉아 있는 여우 수인 한 마리의 목에 박혔다.

여우 수인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목을 잡고 비틀거리다가 칼을 날리려는 듯 행동을 취했으나, 칼을 바닥에 그대로 떨어트리곤 그가 힘없이 쓰러졌다.

바닥엔 순식간에 여우 수인이 흘린 피 웅덩이가 생겼다.

은색 활에 미세한 금이 갔다.

활의 수명이 끝났다.

‘아. 이 활 못 쓰겠네. 그래도 좋은 친구였는데.’

끼이익. 채앵-!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마리가 더 우세해 보였는데, 지금은 암살자들과 마리가 호각을 다퉜고 그 틈에 허공에서 날아온 잘 벼린 칼날이 마리의 복부에 꽂혔다.

‘이 상태론 한 명 정도는 더 처치할 수 있으려나.’

그녀는 자신의 복부에 박혀 있던 칼을 빼내고 피가 철철 흐르는 배를 움켜쥔 채로 일어났다.

침착하게 다시 싸울 준비를 했다.

-콰앙!

그때 문이 열리더니, 장신의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순식간에 남아 있는 암살자들을 제압했다.

그 동작은 유연하고도 자연스러웠으며,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었고, 여유 있으면서도 빨랐다.

그 일련의 과정이 소리소문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숨을 쉬는 행위같이 쉽고 당연한 행동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멍때리며 바라보았다.

“네가 이안이 데려온 아이구나.”

그녀가 우아하게 눈매를 휘었다.

높게 올려 묶은 짙은 고동색 머리가 휘날렸다.

이안의 누나, 루이즈 카델리온이었다.

***

루이즈 카델리온이 오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온 것은 천운이었다.

“밧줄 좀 갖고 와서 쟤네 묶어.”

그녀가 살아 있는 몇몇 암살자들과 시체들을 모조리 집무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와서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복도에 꿈틀거리는 사람과 시체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숨만 붙은 상태로 가만히 있는 애는 살아 있을 정도로만 회복시켜 놓고.”

몇몇이 밧줄을 주머니에서 꺼내 널브러져 있는 암살자들을 묶었다.

“죽은 애들과 산 애들 모두 지하 감옥으로 보내.”

고용인들이 그녀를 향해 짧게 허리를 숙이곤 밧줄에 묶인 그들을 질질 끌고 갔다.

“이 정도만 하면 나머진 걔가 알아서 하겠지.”

그 한 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갔다.

개판이 된 집무실 안에서 루이즈가 무심한 눈빛으로 앞에 있는 새끼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돌아왔다고 인사하려고 오니까, 반겨 주는 건 쥐새끼들과 난장판이네.”

루이즈가 엉망이 된 집무실을 느리게 한 바퀴 훑어봤다.

“최소한 생각이 있으면 카델리온 저택에는 안 들어왔을 텐데.”

집무실은 속 시원하게 반파된 상태였다.

“특히 그 녀석의 집무실에는.”

이안은 허락받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에 들어오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게 실제 자신의 공간 안에 들어오는 것이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든 뭐든.

“그 쥐새끼들이 편안하게 죽기는 글렀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을지 눈에 훤하네.”

쯧.

루이즈가 혀를 차고 북부에 흐르는 피를 부여잡고 있는 마리를 바라봤다.

“너 이름이 뭐야?”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그녀의 남보라색 머리는 누구의 피인지 모를 피로 얼기설기 엉켜있었다.

“마리 엔젤러스 입니다.”

“흐음- 뭐야. 표범이네?”

그녀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받아쳤다.

무심한 듯 시크했던 얼굴이 활짝 웃으니 정말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말을 들은 마리의 표정이 묘해졌다.

“근접전에 활대랑 화살만 가지고 상급 기사 실력의 6명을 상대하고 그중 3명을 죽였으면 너 좀 하네. 실력이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 않은 편이 아니라 엄청 좋은 편이었다.

루이즈는 기분 좋은 웃음을 생글생글 지었다.

“영광입니다.”

마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뒤를 돌아 집무실을 살펴보고 있는 루이즈 카델리온에게서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의무실에 가서 상처나 치료받고 나서 나한테 다시 와.”

루이즈의 시선이 나에게 다시 닿더니 눈을 휘었다.

“너희 둘 다.”

***

“아리엘 님, 저번에 저택을 구경할 때 의무실은 안 가 보셨지요?”

곰돌이 푸를 닮은 노집사가 나를 안고 바르게 발을 움직였다.

내가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좋습니다. 그렇게 눈을 한 번씩 깜빡여 주세요. 제가 하는 말이 흥미로우시면 눈을 두 번 깜박여주시고요.”

긴장을 풀어 줄 의도인가.

아리엘을 안고 있는 노집사의 재킷이 점점 아리엘의 피로 물들어 갔다.

그러나 노집사는 자신의 재킷이 피에 물들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아리엘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이며 복도를 걸어갔다.

“저희 의무실엔 주치의인 헬킨 선생이 있는데, 명의십니다. 그 선생은…….”

약초 냄새가 코끝에 살짝 맴돌 때 즈음, 노집사가 발을 멈췄다.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천천히 살폈다.

오른쪽 벽면에는 약재들을 넣어 놓은 서랍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는 내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물건들이 있었다.

날카로운 바늘과 칼, 주사기들, 그리고 각종 약물을 보자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여기는…… 그때 그곳 아니야?’

이곳은 예전에 있었던 그곳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내 살을 가르고 찢는 소리가 들어왔던 곳.

내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온몸에 있는 털들이 쭈뼛 섰고, 근육은 딱딱하게 경직됐다.

전신에 소름이 끼치며 식은땀이 흘렀다.

벗어날 수 없는 불길한 생각들이 머리를 빠르게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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