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24/111)

23.

이안의 이마에 작은 고양이 발자국이 불그스름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피식피식 웃었다.

망할.

내 인생.

심지어 그가 나를 잡고 있는 바람에 그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나는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이안의 시선이 내 뒤에 있는 영상구로 옮겨갔다.

영상구에서는 내가 날아 차는 장면이 중지되어 있었다.

“설마 저걸 따라 하신 겁….”

“큽…… 흐읍…….”

이안 역시 그걸 봤는지, 뒤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야. 그냥 웃지. 저렇게 웃음 참는 게 더 보기 싫거든.’

나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와 눈을 마주친 이안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이마에 떡하니 고양이 발자국이 찍혀진 이안이 크게 웃었다.

“항상 자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시는 위대한 고양이님이시군요.”

앨런이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발견해낸 사람 같았다.

이안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원래 역사에 길이길이 남겨질 위대한 위인은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는 법이지.”

“그럼 고양이님도 수인사를 바꿔 놓으시겠군요. 아기 고양이이실 때부터 자기 성찰을 하시다니. 역시 위인들은 떡잎부터 남다른가 봅니다.”

나는 저 두 호랑이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일이 그렇게 많더니 안 도와줘서 정신이라도 나갔나.

‘저 호랑이들은 헛소리 늘어놓기 대회에 나가면 1등을 할 게 분명해. 누가 카델리온 가에 있는 수인들이 말이 없고 차갑다고 했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면 앨런이 요즘 많이 힘들었나?’

그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멍이 든 보라색 밤탱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더 핼쑥한 그의 얼굴을 보며 나름대로 신빙성 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앨런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더 초췌하고 지쳐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야. 원래 비정상인 사람들이 스스로 정상이라고 하고 괜찮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괜찮다고 하는데.

“저 이래 봬도 실력은 좋습니다. 저를 때릴 만한 사람은 루이즈 님과 이안 님밖에 없을걸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실력파로 들어와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서.”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재능이 많은 게 죄죠.”

왜 저 입을 한 대 때리고 싶은 걸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앨런이 바로 누구에게 얻어맞았, 아니 누구와 대련을 했는지 깨달았다.

……왜 대련을 했는지도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전형적인 학자처럼 생겼는데.’

뭔가 공부만 할 것 같고.

아니면 딱 펜만 들어서 서류만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

그냥 가녀린 학자 그 자체인데.

검도 잘 다룬다니.

솔직히 말해서 의외였다.

‘루이즈랑 이안 정도만 쟤를 때릴 수 있으면 거의 기사단장 정도 되는 거 아니야……?’

그 정도면 수인이 아닌데.

거의 완벽한 스펙이잖아.

왜 그런 스펙으로 카델리온 가의 보좌관을 하고 있는 걸까.

요즘 시대, 보좌관 되기도 쉽지 않구나.

나는 앨런에 대한 평가를 마음속에서 수정했다.

***

하아암-

나는 핫 핑크색 쿠션에 누워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했다.

그렇게 집무실에 가지 않은 며칠 간의 내 일탈은 실패했다.

그리고 현재, 또 집무실이다.

정말 행복한 인생이다. 하하.

집무실에 질질 끌려 들어오니 이 호랑이들이 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일은 하지 않고 내 발을 가지고 장난친다.

‘……일하라고.’

나는 심드렁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이게 고양이 발바닥이라는 건가.”

이안이 내 발바닥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느낌이 좋은지 그가 아까부터 내 발바닥 젤리 부분만 계속 눌러 대는데, 그게 어느 정도냐면 영원히 닫혀서 더 이상 성장을 하지 않게 만든 성장판이 열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수준이었다.

‘오 시원하다.’

생각지도 못한 발 마사지에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서 좀 더 위에 눌러 주면 좋을 텐데.

‘응. 거기 거기. 응응.’

그가 귀신같이 내가 원하는 부분을 찾아 꾹꾹 눌러 주었다.

내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면서 갸르릉거렸다.

정성스럽게 내 발을 주무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우리 이걸로 도장 찍자.”

안돼.

그가 내 발을 아프지 않게 흔들었다. 그에 의해 강제로 흔들리는 내 발 때문에, 나는 누군가에게 인사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무래도 떡잎부터 남다른 아기 고양이이시다 보니 이 발바닥으로 찍으면 효험이 더 강력해지지 않을까요.”

무슨 이상한 소리야.

‘……저거 너네 업무 관련된 서류 아니니.’

학자 같은 지적이고 훈훈한 얼굴로 헛소리를 하는 건 심각한 괴리감을 불러왔다. 애초에 그가 열과 성을 다해 연기하는 거부터가…….

부디 앨런을 흠모하는 귀족 영애들이 이 장면을 보지 말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예.”

나는 만사가 귀찮아져 그냥 내 발바닥을 가지고 장난치도록 내버려 뒀다.

내 발바닥으로 도장을 찍든 말든 언젠가는 씻겨 주겠지.

‘근데 발바닥 젤리는 너희한테도 있거든?’

아. 여기서 호랑이로 변하면 집무실 책상이 박살 나겠구나.

‘박살이 아니라 개박살 나겠는걸.’

그렇게 이안이 신나게 내 발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데, 앨런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안 님, 에티아 가주님께서 방문하셔서 한 번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무슨 이유로 왔는데?”

“해상 교역권에 대해 말씀하시러 왔다고 하십니다.”

“쯧.”

이안은 혀를 차며 일어났다.

와, 얘 드디어 사람 보러 응접실로 나가네.

여러분 제 눈앞에 있는 호랑이가 수인을 보러 응접실에 가요.

“마리, 아리엘 잘 보고 있어.”

“아리엘, 빨리 갔다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만약 도망가면 앞으로 쭉”

‘……쭉?’

“슈는 금지야.”

뭐?!?

가만히 앉아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던 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런 나를 한번 쓰다듬고 발걸음을 옮겼다.

‘저……. 저 치사한 자식.’

어떻게 슈를 가지고 협박할 수 있는 거야. 나는 도끼눈을 뜨며 이안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렇다고 그렇게 노려보지는 말고. 내 여린 마음이 상처받거든.”

‘여린 마음은 개뿔. 웃기고 있어.’

그가 문손잡이를 잡은 상태로 뒤를 돌아 나에게 말했다.

“마음이 아파요.”

‘저건 또 귀신같이 알아채요.’

나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저 호랑이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저 얄미운 호랑이의 뒤통수를 보니 저 뒤통수를 한 대 내리치고 싶어졌다.

탁.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 문이 닫혔다.

그들이 나간 이곳에는 마리와 나, 둘밖에 없었다.

집무실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마리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엘 님, 책 읽어 드릴까요? 가문 도서관에서 허락을 받고 가장 간단해 보이는 동화책을 가져왔습니다.”

마리는 <아리테아의 별>이라는 책을 들고 있었다.

그 책은 까만색 표지와 별 하나만 그려져 있는 게 도저히 동화책이라고 볼 순 없는 표지였다.

동화책이 암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리엘 님은 보통 고양이보다 훨씬 명석하시니, 이 책 정도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쟤네는 내가 동화책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할까.

‘하긴 내가 보여 준 행보가 보통 이상했어야지.’

나는 금방 납득하곤 시선을 돌렸다.

‘좋아. 우리 그 책 읽자.’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자에 앉아 있는 마리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서 앉았다.

내가 허벅지 위에 올라가자 마리가 책을 열었다.

“옛날 옛날에 수인과 인간이 섞여 살던 시절, 아리테아라는 수인이 살았어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항상 그러하듯, 그녀는 당연히 엄청나게 예뻤다.

“어딘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지요. 저 멀리에 서 있어도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었을 정도로 예뻤답니다.”

“그 모습은 쉽게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리감을 주었어요.”

마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길가에서 어린이들을 도와주며 여행을 떠나는 마음씨 착한 수인이었어요. 우연히 그걸 본 인간 영토를 다스리고 있던 헤시국 왕은 아리테아를 데려와 키우기로 했답니다.”

“당시에는 인간이 멸종하기 전이었거든요. 아리엘 님.”

마리가 덧붙였다.

“아리테아는 기대를 품은 채 그 왕을 따라갔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잔혹하리만큼 높은 탑, 그 꼭대기 방 하나뿐이었어요.”

“그녀는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태로 대부분을 그 방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이거 꿈과 희망이 가득한 동화책 맞지……?’

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동화책을 쳐다봤다. 마리는 덤덤하게 다음 내용을 이어 말했다.

“헤시국의 시녀들은 아리테아를 신기해하면서도 좋아했어요. 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아리테아와 그녀의 시녀들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답니다.”

“아리테아는 항상 바깥세상이 그리운지, 가끔씩 창밖을 바라봤어요.”

“그래서 시녀들은 아리테아에게 바깥 얘기를 말해 주고, 아리테아는 그 이야기를 빙그레 웃으며 들어주는 그런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됐어요.”

“‘아리테아 님, 혹시 먹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아리테아 님, 아리테아 님이 생각나서 인형을 사 왔어요!’”

“아리테아는 빙그레 웃으며 항상 말했어요. ‘아니. 괜찮아.’ 그럼 헤시국의 시녀들은 그런 것이 익숙한 듯 대화의 주제를 돌렸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꿈과 희망이 가득 찬 동화책은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어려운 이야기를 쉽고 간단하게 줄여서 적은 느낌도 나고. 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아리테아는 달이 빛나는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어요.”

“그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달님, 달님. 부디 제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아리테아는 환하고 영롱한 하얀 광채와 함께 하늘에 별이 되었…….”

답니다.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채 마리는 동화책을 덮고 순식간에 옆에 있는 활과 화살을 잡아 앞을 향해 겨눴다.

“누구시죠.”

평화롭던 집무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미처 넘기지 못한 동화책 한 장이 삐죽 튀어나온 채 나동그라졌다.

삽화가 없는 책에서 유일하게 삽화가 있는 장면이었다.

그림에는 왕자와 빛에 둘러싸인 하얀색 백금발의 아리테아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때 마리가 급하게 외쳤다.

“아리엘 님!”

챙-!

단단한 활대와 칼이 부딪쳤다.

암살자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