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20/111)

19.

“…엘.”

깜빡.

현실이었다.

“아리엘. 괜찮아? ”

감기지도 않고 뜬 눈 상태로 멍하니 있던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깜빡깜빡.

여러 번 눈을 깜빡거리며 눈의 초점을 잡아갔다. 내 얼굴 바로 앞에서 이안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회장 안의 뜨거운 열기가 아닌, 차가운 밤바람이 내 털을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다.

쌀쌀한 밤바람을 맞자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다.

아. 여기는 그때 그곳이 아니다.

그 지하실도 아니고, 아무도 없었던 설원이 아니었다.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불안감이 뒤집어진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사르르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그 자리에 안도감이 채워졌다.

이안이 느릿하게 내 털을 어루만졌다.

‘그래. 여기 앞에 있는 호랑이도 있고.’

이안이 나를 죽일 거면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겠지, 다른 사람이 나를 죽이도록 두겠어?

내 털을 쓰다듬는 다정한 온기에 마음이 놓였다. 처음에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에게 마음을 놓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나는 앞발로 그를 툭툭 치며 불렀다.

‘이안.’

“왜?”

‘가자.’

나는 바깥을 향해 발을 뻗었다.

“연회장에서 나가서 돌아가자고?”

‘응응.’

이안은 여우 수인과 만났을 때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같이 아득해지던 표정을 떠올렸다.

“그래 집에 가자.”

카델리온 저택이 그녀의 집이니 도망치지 말라는 바람이 담긴 말이었다.

집이라는 말로 그 저택이 당연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혹시 그녀가 도망치려고 할 때 그 말이 기억에 남아 발걸음을 주춤할 수 있게.

그런 말로 그녀가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면야 몇 번이든지 더 할 수 있었다.

털을 쓰다듬자 그녀에게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청량함이 그를 감쌌다. 보이지 않는 시원한 기운이 그의 숨통을 트여 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서 느꼈던 기운이다.

시끄러운 머리를 잠잠하게 만들고 안식을 선물해주는 그 기운.

아리엘 특유의 기운이 춥기로 유명한 북부에 살아도 항상 더웠던 그를 감쌀 때면 소름 끼치도록 좋았다.

‘물론 네가 떠나 버려도 내가 찾아내겠지만.’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검푸른 빛으로 가라앉았다.

이안은 그 말을 속으로 생각하며 아리엘의 털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런 이안의 생각을 알 턱 없는 아리엘은 고민했다.

‘집.’

집이라니.

도대체 어디를 내 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걸까. 전생에 있었던 집? 아니면 지하실에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던 그 시몬드 저택?

‘이 세상에서 내 집이 있긴 한 걸까…?’

언제부터 저 호랑이의 집이 내 집이 된 걸까.

과연 저 호랑이의 집이 내 집이 맞을까. 나는 오랫동안 ‘집에 가자’라는 그 한마디를 머릿속에서 계속 곱씹었다.

‘정신 차려. 여긴 책 속일 뿐이라고.’

나에게 집이란 전생에서 살았던 곳이 전부였다. 정확히는, 전부여야만 했다. 다른 곳이 ‘내 집’이어서는 안됐다.

여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야. 그런 곳일 뿐이야.

계속해서 되뇌게 되는 생각에 입안이 씁쓸해졌다.

처음은 훌륭했으나 끝은 엉망진창인 하루였다.

***

“고양이님, 평기일의 마지막 날인 오늘, 무엇이 열리는지 아세요?”

마리가 내 털을 부드럽게 빗질해 주었다.

‘뭐가 있는데?’

나는 의문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불꽃놀이가 열린답니다. 평기일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죠.”

내 털을 다 빗은 마리가 빗을 내려놓았다.

나는 저번처럼 뻗치지 않은 내 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한번 이안 님이랑 같이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불꽃놀이라니. 불꽃놀이는 전생에 있을 때도 몇 번 못 봤던 건데.

불꽃놀이라는 말에 아리엘의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게다가 여기 불꽃놀이는 굉장하다고 했어.’

특히 원작에서 평기일의 불꽃놀이가 환상적으로 묘사되었었기 때문에 더더욱 보고 싶었다.

‘불꽃놀이……!’

마리. 당장 가자. 집무실로.

나는 비장하게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집무실 문을 연 사람은 마리지만 그건 넘어가도록 하자- 당당히 이안에게 달려갔다. 짧은 다리 때문에 오도도도 뛰어가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걷는 것보다는 당연히 빨랐다.

내가 그의 앞으로 달려오자 그가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고 쳐다봤다.

‘이안!’

‘불꽃놀이!’

‘가자!’

우리 자유 도시 축제 가 보자. 전등도 날리고 불꽃놀이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나는 일하고 있는 그의 바짓자락을 물고 그를 올려다봤다.

“아기 고양이님께서 자유 도시에 가시고 싶은 모양입니다.”

마리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가지. 뭐.”

내가 집무실에 오자마자 종이를 정리하고 있던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앨런은 한가득 쌓인 일을 힐끗 쳐다봤다.

“이안 님, 그럼 일은…….”

“오늘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죠……?”

“그럼 내일 해.”

일이 간단하게 정리됐다.

그래. 원래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뤄야지.

나는 이안의 훌륭한 마인드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와 이안을 번갈아 보던 앨런은 이안의 강경한 태도에 반대하는 것보다는 아부하기로 재빨리 마음을 바꿨다.

“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을 미루라는 유명한 말이 있잖습니까.”

나는 기막힌 표정으로 앨런을 쳐다보았다.

“뭐하십니까. 가시죠.”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앨런이 뒤를 돌아봤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한 번 한숨을 쉰 아리엘은 앨런이 열어놓은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남은 보좌관 두 명은 그날 자정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일하다가 일주일 유급 휴가받았다는 말이 있다.

참 좋은 직장이다.

***

자유 도시는 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낮처럼 환했다.

평기일의 마지막 날인 만큼 사람들은 더욱 북적북적했다. 아쉽게도 불꽃놀이 때문에 풍등 날리기는 하지 않는지, 바람에 이끌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풍등들은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 곳곳에서 호객 행위가 가득했고 가격을 낮추려고 하는 사람과 그대로 파려는 사람의 즐거운 흥정 소리가 들렸다.

“엄마. 저거 쓰면 나무 신님이 소원 들어주는 거야?”

어린아이의 발랄한 목소리에 순수한 궁금증이 가득했다. 때 묻지 않고 동심으로 가득한 어린아이의 모습에 저절로 흐뭇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래. 저기에다가 소원을 쓰고 나무 신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나무 신님이 소원을 들어주실 거야.”

아이의 엄마는 손을 꽉 잡은 상태로 다정하게 말했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아이의 엄마가 그 뒤에 ‘엄마 손 꼭 잡고 있어야 해. 그래야지 나무 신님이 소원 들어주신대.’ 같은 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그 말을 듣고 주변을 살펴보니, 네 갈래의 길이 교차하는 길거리의 정중앙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전구에 둘러싸여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각자의 바람을 담아 소원을 적은 종이들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다가 소원을 쓰면 나무 신님이 소원을 이루어준대.”

로브를 푹 눌러쓴 이안이 나를 안은 상태로 속삭였다. 나지막하고 낮은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그거 알아? 사실 나무 신은 없어.’

이 말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인간화를 할 수 없기에 나는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끝냈다.

내 동심은 이미 사라졌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과 그 고동색 머리는 나를 소원 나무 앞으로 데려갔다.

“넌 무슨 소원 적을래?”

이안이 나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순간 내가 지금 인간의 상태로 있는 줄 알았다. 쟤는 내가 글을 도대체 어떻게 적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떻게 적어 주게…? 내가 소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아무리 보통 고양이랑은 다르긴 해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까진 하지 않을 텐데. 북부에 있는 일반 호랑이들은 글도 읽고 쓸 수 있는 걸까.

“아기 고양이신데 어떻게 소원을 적을 수 있겠습니까. 주군.”

“우리 고양이는 천재니까 할 수 있어. 내가 주워왔잖아.”

이안은 종이에 영어 알파벳을 a부터 z까지 다 적는 거랑 비슷하게 수인어 철자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적어놓았다.

“자, 한 글자씩 골라봐.”

나에게 전생 패치가 달렸는지, 수인어를 실제로 공부한 적도 본 적도 없었음에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것참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고민도 없이 글자를 척척 짚어 이안을 바라봤다.

그는 내가 한 글자, 한 글자 짚을 때마다 그가 내 앞에 있는 종이에 그대로 받아 적었다.

‘무병장수.’

‘부귀영화.’

‘절세미인.’

그렇게 완성된 세 단어였다. 이안이 자신의 소원을 쓰는 동안 나는 배부른 표정으로 완성된 단어들을 쳐다봤다.

‘나무 신님이 저 세 단어라도 이루어주셨으면 소원이 없겠어.’

나무 신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없다는 것을 알고도 믿고 싶은 게 고양이 심리인가 보다. 그렇게 나는 흐뭇하게 내가 짚은 글자가 쓰여 있는 종이를 바라봤다.

옆에서 이안과 보좌관의 황당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뭐 어때.

‘넌 뭐 썼어?’

이안이 뭘 썼는지 궁금해진 나는 그의 종이를 슬쩍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뺐다. 그러자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챈 이안은 팔을 높이 들어 종이를 가렸다.

“비밀이야.”

‘저 얄미운 녀석. 내 건 다 보더니.’

그의 소원 종이를 훔쳐보는 것을 금방 포기한 나는 원하는 위치를 가리키며 이안을 두들겼다.

계속되는 아리엘의 재촉에 이안이 그녀의 것을 먼저 나무에 달아주었다.

무병장수, 부귀영화, 절세미인 이 세 단어가 허공에 대롱대롱 달렸다.

아리엘이 달린 단어들을 빤히 쳐다봤다.

‘음. 나도 이렇게 진심이 될 줄 몰랐는데.’

그것을 보니 나무 신이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마치 나무 신이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소원 나무 기념품 팝니다. 와서 들러 보고 가세요-!”

“달달한 과일 주스 3쿠퍼!!”

“시-원한 맥주 2쿠퍼에 드립니다! 싸다 싸!”

‘이안, 저기 가자!’

아직 술에 대한 욕망이 꺼지지 않았는지, 시끌벅적한 거리 사이에서 맥주를 판다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나는 맥주 판다는 소리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맥주 파는 데를 찾고 이안을 툭툭 쳤다. 시원한 맥주 마시자. 우리.

시-원하다잖아.

이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그가 내 코를 툭 쳤다.

“주정뱅이 고양이.”

“그러게요. 술을 이렇게나 좋아하시니 술 한번 마시고 나시면 머리에 이안 님 넥타이라도 두르실 것 같습니다.”

“넥타이는 앨런, 네가 머리에 두르고 마시잖아.”

“그건 딱 한 번이었습니다. 주군.”

앨런이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한 번이라도 넥타이를 머리에 두르고 마신 적이 있는 거야? 그것도 상사 앞에서? 와. 정말 대단한데. 역시 그 주군에 그 부하인가.

그때 한 목소리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