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파티가 점점 무르익어 가는 그 시각.
저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셀레스틴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
“어머. 가만히 있어도 안 좋은 일을 몰고 다니는 검은 고양이인 주제에 이안 님의 손바닥에 앉다니, 망측해라.”
“자기의 주제도 모르고. 평기일 연회라니.”
“그러게요. 이안 님의 손바닥이 부정 탈까 봐 걱정되네요.”
“그렇죠. 만인의 연인이신 이안 님의 손바닥은 소중하니까요.”
“안 그래요? 셀레스틴 영애?
셀레스틴과 모여 있는 영애들은 화려한 부채로 하나같이 입을 가리곤 호호 떠들었다. 영애들은 시기, 질투, 경멸 등이 담긴 눈초리로 그 고양이를 쳐다봤다. 말로는 깔보고 무시하는 말을 했지만, 그 안을 파헤쳐보면 옅은 질투심이 담겨 있었다.
‘왜 저따위 주제가 영애들에게 시기, 질투 받는 거야. 왜 저런 애가 이안 카델리온의 손바닥 위에 앉아 있어?’
어딜 가든 최고는 자신이어야 했다.
‘내가 쟤 때문에 어떤 짓거리들까지 했는데.’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셀레스틴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삼키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안 좋게 바라보지는 말아주세요. 저 아이도 저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닐 거니까요.”
명주실같이 부드러운 하얀색 머리를 곱게 늘어뜨려 놓은 모습과 연한 빛깔의 연두색 눈.
그리고 우아하지만 화려한 푸른빛이 은은하게 도는 드레스는 마치 성녀를 떠올리게 했다.
“어쩜 셀레스틴 영애는 마음씨도 참 고우세요.”
“그러니까요. 빼어나신 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빼어나신 것 같아요.”
그러자 그 주위에 있는 영애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이 마치 여왕벌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 같아 보였다.
“천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셀레스틴 영애이지 않을까요? 이런 이타적인 품성을 갖추신 셀레스틴 영애는 너무 완벽하세요.”
“맞아요. 마치 아리테아 님이 환생하셨더라면 셀레스틴 영애일 거예요!”
“맞아요. 맞아요.”
그 얘기가 나오자 셀레스틴이 은은히 웃으며 말했다.
“아리테아 님이라뇨. 과분한 이야기네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에게선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기뻐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하긴, 성녀와 닮았다는데 누가 그것을 마다할까.
셀레스틴은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애의 모습도 너무 아름다워요.”
“특히 영애와 어울리는 그 머리핀이 영애의 사랑스러움을 부각해 주는 것 같아요.”
“어머. 제가 직접 고른 건데…! 고마워요.”
앞에 있는 영애가 볼을 사과처럼 불그스름하게 붉힌 채 푹 숙이며 말했다.
“섬세하기까지 하시고. 정말 셀레스틴 님이 아리테아 님의 환생 아니실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 고운 은발과 은은한 연둣빛 눈까지.”
뒤에 있던 영애들이 웅성웅성 떠들었다.
아닌 척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셀레스틴의 미소가 짙어졌다.
‘왜 내 관심을 그딴 것이 잠시라도 빼앗는지.’
하지만 어차피 그래도 이 세상의 주인공은 자신일 것이다.
“혹시, 셀레스틴 님. 녹스 님과의 일화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한 영애가 궁금하다는 듯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리엘을 까던 다른 영애들도 그녀를 쳐다봤다.
경멸이 담긴 눈빛은 어디 갔는지, 순수한 호기심만이 담긴 눈빛들이었다. 그 모습들이 퍽 맹목적이어서 어미 새를 기다리는 아기 새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럼요.”
셀레스틴은 자애로운 미소로 답했다.
“저희의 첫 만남은…….”
그녀가 자애로운 영애의 탈을 쓰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와 녹스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마치 사랑에 빠진 성녀 같은 모습이었다.
꿈과 희망이 가득 찬 아름다운 사랑에 빠진 순수한 소녀 같기도 했다.
고결해 보이는 그 모습이 도저히 질투와 경멸 같은 검붉은 감정으로 가득 찼었던 적이 있는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
동부의 옛 주인이었던 여우 일족의 히아트 가(家) 가주가 시몬드 가 가주를 툭 쳤다.
“시몬드 가주, 저 검은 고양이 봤나?”
히아트 가주가 턱짓으로 ‘그’ 검은 고양이를 가리켰다. 그의 눈빛에 ‘저 아이가 그 아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봤어.”
맞다.
저 아이는 저택에 있던, 쳐다도 보기 꺼림칙한 불운 덩어리 그것이 확실했다.
시몬드 가(家)와 히아트 가(家)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꽤나 공고한 동맹으로 맺어진 긴밀한 사이였다.
“자네들의 저택이 망가진 것은 단순한 사고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저 고양이는 호랑이의 품으로 갔구만?”
물론 보통 가문들은 모르겠지만.
‘실험체로써라도 쓸모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실험마저 못 버텨 내다니. 쯧.’
카델리온의 손에 죽은 줄 알았던 불운 덩어리가 보이자 시몬드는 혀를 찼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싫어 일부러 그것만 내버려 두고 다 같이 도망갔는데, 일이 이렇게나 꼬일 줄이야.
셀레스틴이 이안 카델리온이 이 저택을 정확히 언제 쓸어버린다고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은 이미 죽어있겠지.
분명 주변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안 카델리온 성정을 보아 벌레 보듯이 쓸어버릴 줄 알았건만.
‘이안이 그걸 데려갈 줄이야.’
여태까지 그 흉한 것이 도망가나 안 가나 감시한 것이 다 쓸모없어져 버렸다.
‘역시 그것이 실패했을 때 죽여야 했어.’
손을 더럽히기 싫었던 것이 문제였었다. 카델리온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지금은 죽이기도 쉽지 않을 터. 만에 하나라도 카델리온이 시몬드 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낸다면, 일족의 멸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대륙에 피바람이 몰아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자신이 편해지고 싶다는 안일한 욕심이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쯧. 카델리온에게서 용케 살아남았나 보군.”
히아트 가의 가주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아니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의 눈동자는 카델리온 가주의 손 위에 올라가 있는 그것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그는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에서 시선을 뗐다.
“나는 그 후계자에게 인사하러 가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이 먹던 와인을 시종에게 건내준 히아트 가주는 보폭을 넓혀 걸으며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
저 멀리서 옅은 황토색 머리칼의 남자가 이안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이안은 작게 혀를 찼다.
“카델리온의 새 가주를 뵙습니다.”
“히아트 가의 가주를 뵙습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던 히아트 가 가주는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노련하게 웃었다.
“가주 자리에 오르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파티를 주최하시다니, 역시 카델리온 가 답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너 같은 애송이가 실력도 되지 않으면서 파티를 주최했네. 카델리온 가는 원래 그러는 거니. 아니면 혹시 다른 사람이 주최한 게 아니니.’
물론 웃으면서 하는 말 안에 숨어 있는 뜻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지만.
이안은 수장의 자리도 뺏긴 히아트 가 가주가 저렇게 깔짝대는 것에 대한 짜증을 미소 뒤로 감추고 그 말을 받아쳤다.
“히아트 가(家)가 여길 참석해 주시니 이 자리가 예전보다 이곳이 더욱 빛나는 것 같습니다.”
‘평기일 파티를 주최하는 것보다 참석하는 게 더 어울리네.’
수장이라는 자리는 히아트 가(家)에게 너무나 과분한 자리였다. 그리고 모자란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얘기를 이안 카델리온은 하고 있었다.
“전에 히아트 가는 히아트 가대로 산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쫓겨난 것이 히아트 가의 방식이면 그 방식대로 사셔야지요.
수장은 힘에 의해 뺏기고, 영향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들이 수장을 뺏긴 것은 단지 그들이 무능력해서일 뿐이다.
그뿐이다.
이안은 히아트 가 가주가 동부의 수장에 앉아 있을 때 했던 얘기를 그대로 다시 읊었다.
그는 아리엘이 있는 한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고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이미 아리엘이 술 마시겠다고 멋지게 바구니에서 날아오르며 1차 탈출을 감행했던 적이 있기에.
이안과 히아트 가 가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 내 다리 왜 이래.’
그때 한참 동안 히아트 가의 가주와 이안을 바라보던 아리엘은 자신의 다리들이 덜덜덜 떨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짧디짧은 다리들이 눈에 띌 수도 있을 정도로 후들거리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다리를 가만히 멈추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떨리는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저 얼굴, 내 기억 속에 없는데. 뭐지. 왜 이렇지.’
머릿속에 각인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비슷한 목소리를 찾기 위해 기억 속을 뒤적였다.
“이번엔 어떻게 됐나?”
“두고 봐야지. 쯧.”
“도대체 언제 성공하려고 그러나. 저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으니 빨리 끝내게. 늦어지면 꼬리가 밟힐 수도 있으니.”
“반 이상 성공…….”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까지도.
그래. 그 실험실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주삿바늘과 함께 가끔 들렸던.
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예고하는 목소리.
‘저……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그가 누군지 알고 나서부터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500m 달리기라도 한 듯 심장이 쿵쾅쿵쾅 빨리 뛰었고 시야가 아득히 점멸했다.
마치 공허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리엘. 진정해. 저 사람은 지금 널 해치지 못해.’
왜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만약에 해치면? 다시 그곳으로 끌려가면? 사람도 많은데, 눈에 띄지 않게 나를 데려가는 건 어렵지 않아. 어차피 수인들은 내가 없어져봤자 신경 쓰지 않는다고. 오히려 기꺼워할걸. 그러면 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고통에 잠식되어야 하는 건가?
수도 없이 불안하게 떠도는 생각들이 그녀를 좀 먹었다.
물론, 아리엘이 들고 있는 이안 카델리온 때문에 애초에 아리엘을 데려가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만, 현재의 아리엘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태풍처럼 거칠게 불어닥치는 두려움에 잠식된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이 고요한 게 태풍의 눈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다.
사방은 조용했다.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소복이 쌓인 눈들조차 날리지 않는 설원.
고요한 설원 위에 혼자서 서 있었다.
‘벗어나야 해.’
나는 걷고 또 걸었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수북이 쌓인 회색빛 눈이 내 발을 삼켜 한 발자국 전진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고요가 조용히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서 있다는 게 미친 듯이 두려웠다.
‘이안…… 이안 어디 있어…….’
나는 본능적으로 이안을 찾았다.
‘도망갈 생각 하나도 없으니까, 어디 있어…….’
눈물이 눈에서 그렁그렁 한 방울씩 뚝뚝 흘러나올 것 같았다.
무서웠다.
혼자 있는 것이.
겨우 되찾은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과거의 그 끔찍한 기억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삐-
누가 머리를 내려친 듯 귀에서 이명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끔찍했던, 하얀색으로 가득 찬 그 설원이 유리가 깨지듯이 와장창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