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18/111)

17.

이안이 앞에 있는 고양이를 쳐다보며 차갑고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냉수를 맞은 듯,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자, 그가 무얼 하든지 수군거리는 주변의 수인들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가 들고 있던 새끼 고양이를 느릿하게 검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머리와 다르게 속은 기이한 열기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손끝부터 차갑게 식은 피가 전신을 돌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 했어?”

최대한 침착하게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린 그가 나긋하게 읊조렸다.

조금 전까지 이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도 자신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고양이가 바구니 안에서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무슨 일 있나. 아니면 방석을 더 푹신한 걸로 깔아줬어야 했나.’

계속해서 살짝씩 흔들리는 바구니에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 느릿하게 달라붙었다.

“카델리온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카델리온 가주님, 이런 방안은….”

그러나 그가 느끼는 불안함을 비웃기라도 한 듯, 유독 오늘따라 많은 사람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아! 카델리온 가주님, 제가 다리를 잘못 디뎌 넘어진 것 같은데, 혹시….”

“시종을 불러드려야겠군요.”

“괜찮습니다. 그런 걸로 바쁜 시종들을 귀찮게 할 수는 없지요. 그냥 휴게실까지만 데려다주,”

“다행히도, 바로 옆에 걸어가는 시종이 있군요.”

“아….”

“이 영애분께서 발이 아프신 모양이니 휴게실로 데려다주게.”

“카델리온 가주님, 마물 퇴치 병력에 대한 지원 말인데….”

“사안을 서신으로 보내주시면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해보겠습니다.”

“네, 넵!”

그는 으레 짓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성가신 상황들을 빨리빨리 처리해나갔다.

그때 살짝만 흔들리던 바구니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심상치 않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구니 안에 있는 털 뭉치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알아챈 그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뒤에서 아쉬운 시선들이 따라붙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그 순간,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까만색 털 뭉치가 바구니 뚜껑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얼마나 높게 도약하는지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가 아닌 높게 도약하는 개구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았으며 연회장에 박쥐라도 날아든 줄 알았을 수도 있을 만큼, 높은 높이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나.’

살면서 추위를 못 느낀 그였지만, 손끝부터 전신의 피가 빠르게 식었고 심장이 뒤틀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하긴, 이 복잡한 연회장이면 쉽게 움직일 수도 없어 가장 탈출하기 좋은 기회였을 것이리라.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데려온 것이었다.

제멋대로 카델리온에 데리고 왔다지만 이리 빨리 벗어나려고 할 줄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왜 탈출하려고 하는 거지? 정말 집 안에 숨겨 놨어야 했나.’

아니면 묶어 놔야 했던 걸까.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자신만 볼 수 있게끔.

‘나만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그 눈빛도 좋을 것 같은데.’

그 맹목적인 눈 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이든.

진득하고 불안한 기운이 뱀처럼 그를 휘감았다. 자책과 불안, 분노, 집착 등 혼탁한 것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조그마한 눈덩이가 빠르게 부풀어나는 것처럼 무섭게 크기를 키운 감정들은 주변의 것들을 먹어 치웠다.

검고 탁한 감정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멍이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맑은 척을 하고 있었던 본심이 전처럼 암흑처럼 탁하게 물들었다.

그것이 전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물들었을지라도.

이전과는 결이 다른 난폭한 감정이 날뛰었다.

소유욕을 담은 벽안이 번뜩였다.

그가 새까맣게 물든 마음을 가리기 위해 눈을 휘었다.

“내가 탈출은 안 된다고 했을 텐데.”

검푸르게 불든 벽안에 어디서 왔는지 모를, 어둡고 기이한 집착이 넘실거렸다.

“해명해.”

아리엘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 이거 잘못하면 인생 꼬이겠구나.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19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데 1등 공신이었던 그녀의 생존본능이 외쳤다.

술 마시고 싶어서 뛰어내렸던 게 그렇게 큰일이 될 줄이야.

아무래도 저 맛 간 파란색 눈동자를 보아하니, 사실대로 말해야 할 듯싶었다.

나는 한숨을 쉬곤, 저 핑거 푸드가 올려진 테이블을 내 앞발로 가리켰다.

‘그러니까, 저 핑거 푸드 있지.’

그러고는 앞발을 살짝 까닥여 술잔을 입에 털어 넣는 시늉을 했다.

‘저 핑거 푸드 옆에 있는 술이 먹고 싶어서…….’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설명을 마친 나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이안의 손에 얼굴을 박곤 축 늘어졌다.

시야를 가릴 곳이 이안의 손바닥밖에 없다는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 쪽팔려.’

“……술을 먹고 싶다고?”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자 격하게 끄덕이는 아기 고양이를 보며 이안은 알 수 없는 황당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이유가 술 때문이라니, 이건 마치 그가 술에게 진 것 같기도 하지 않은가.

기묘한 패배감과 함께 그의 온몸에 힘이 턱, 빠지면서 거대한 안도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어서 가자.’

수치심마저 다 내려놓은 아리엘이 이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녀가 핑거 푸드가 나열된 테이블을 가리키며 이안을 재촉했다.

그러자 이안이 돌연,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처연한 표정을 지어냈다.

“또 누구랑 사랑을 나누게? 아리엘?”

‘……?’

“어떻게 날 버리고 다른…….”

‘이놈의 입!’

아리엘이 급하게 이안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솜뭉치를 쳐다봤다.

‘내가 언제 그랬어!’

그걸 정말 모르냐는 듯이, 그가 눈꼬리를 해사하게 접어올렸다.

해사한 눈웃음과 함께 그가 살짝 입을 벌려 그 솜뭉치를 입안에 넣으려고 하자, 아리엘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호, 호랑아…?’

자신의 발 중 일부가 그의 입 안에 물려 나가지 못한 아리엘이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리엘의 흔들리는 눈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그가 그제야 자신의 입에서 솜뭉치를 떨어뜨리곤 살짝 눈꼬리를 휘었다.

“…과 함께 사랑을 나누러 가려고 했잖아. 나는 아리엘만 바라보다 버려진 호랑이가 되어버렸는데.”

이안이 아리엘의 귀에 속삭였다.

‘이거 입을 막으니까 중간의 말이 빠져서 더 이상하게 들리잖아.’

“술이야, 나야.”

‘너, 너!’

아리엘이 그를 여러 번 두들기자 그제야 그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휴, 인생 살기 힘들다.’

아리엘은 이안의 손바닥에 엎어져 누웠다.

그런 아리엘을 한 손에 올려놓은 이안은 다른 한 손에 바구니를 든 채 핑거 푸드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이거 이거.’

나는 이안의 손바닥에 풀썩 앉은 채 영롱한 자줏빛을 띤 채로 나를 기다리는 것 같은 한 와인 잔을 가리켰다. 쪽팔렸던 기분은 잊힌 지 오래였다. 다리 한 짝 대신 잠시 동안의 쪽팔림이라니 생각해 보면 싸게 먹힌 것 같기도 하다.

“얘는 안 돼.”

이안이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칫.

나는 그 옆에 있는 와인 잔을 골랐다. 와인 잔에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분홍빛을 영롱하게 띠고 있는 와인의 상큼한 향이 매력적이었다.

“얘도 안 돼.”

‘그럼 그 앞에 거.’

열대 과일 향기가 고급스럽게 나는 황금빛 와인이었다. 한 번 마시면 부드러운 목 넘김에 반할 것 같은 게 꼭 한번 먹어 보고 싶었다.

“이거?”

그가 내가 가리킨 와인을 가리켰다.

‘어어!’

나는 격한 끄덕임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는 내가 여태까지 뚫어져라 쳐다봤던 와인들의 바로 옆옆 자리에 있는 오렌지 주스를 집었다.

그리곤 내 코를 톡 치며 짓궂게 말했다.

“주정뱅이 고양이. 새끼 고양이가 그렇게 술을 마셔도 돼?”

‘이미 마셔 봤는데. 게다가 이미 19살이야. 성인 지났어!’

전생에서와 달리 생일이 지난 순간부터 나이를 세는 이곳에서는 18살부터 성인으로 취급했다.

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리엘은 비 맞은 고양이처럼 추욱 처진 채 이안을 쳐다봤다.

“그렇게 바라봐도 와인은 안 돼.”

그가 단호하게 내 눈을 가렸다.

쳇. 매정한 놈.

이안이 나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데리고 다닌 덕분에 바구니에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시선들이 나에게 집중됐다.

이안의 신분 덕분인지, 노골적인 시선들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힐끔거리는 눈길들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개중에는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과도한 관심 어린 시선에 온몸이 따끔따끔해질 정도였다.

“카델리온의 가주를 뵙습니다.”

짙은 검은색 머리를 휘날리며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쉴라의 가주를 뵙습니다.”

뱀의 아쉴라.

최근 몇 년 전 표범의 이다스에게서 서부의 수장 자리를 가져간 가문.

책 속에서는 아쉴라가 여주의 탈출을 돕는 데 적극적으로 일조하기도 했었다.

“이분이 그 고양이님이시군요.”

그렇기에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은 퍽 호의적이었다.

싱긋 미소를 걸치며 다가온 그와 이안의 손바닥 위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킨 내 눈이 맞닿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아쉴라 가주의 새까만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길게 수축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인자하게 눈을 접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귀여운 고양이를 두셨습니다. 제가 데려가서 키우고 싶을 정도군요.”

……근데 왜 이렇게 꺼림칙할까.

‘내가 뭔가를 잘못 봤나.’

“안타깝게도, 제가 먼저 발견했는지라.”

“아, 만약 제가 먼저 발견했으면 제가 데려갈 수 있었을까요.”

그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된 채였다.

“저 고양이를 데리고 서쪽의 저택에 오실 생각이 있다면,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가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성스럽게 준비해 놓으라 일러놓을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아쉴라의 가주가 자리를 비웠다.

저런 말만 하려고 이안에게 왔다고?

‘저 사람 뭐지?’

왜 저 사람이 나를 아는 것만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걸까. 나는 저 사람 목소리도, 저 얼굴도 처음인데. 미묘한 위화감이 전신을 휩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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