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17/111)

16.

서늘한 밤공기와는 다르게,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연회장은 꽤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아리엘은 바구니에서 고개를 쏙 내밀어 연회장을 훑어보았다.

“어머, 이안 카델리온 님이 하얀색 바구니를 들고 계셔요.”

“하얀색 정장에다가 하얀색 바구니로 포인트를 주는 방식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방식이에요!”

“우와… 들어오자마자 저 멀리서 빛을 내뿜는 사람보고 깜짝 놀랐어요.”

“바구니를 미리 사놔야겠어요. 이렇게 보니 이번 유행의 중심에는 바구니가 서 있을 게 분명해요.”

“어떻게 이런 패션이 이렇게나 잘 어울릴 수 있는 걸까요?”

‘잘 어울리는 게 아니라 이안의 얼굴이 좋은 거겠지….’

어떻게 하얀 정장이랑 바구니랑 잘 어울려.

수군거림 속에서 연무장 안에 있는 수인들은 옷차림을 비롯해 모든 게 다 가지각색이었다.

옷이 겹치는 수인을 보고 썩어들어 가는 표정을 짓는 몇몇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표정을 지은 수인들은 은근히 서로를 피해 다녔다.

‘저 정도면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라 불러야 하는 건가.’

저렇게 기분 나쁘단 걸 티 내면 안 좋을 텐데.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지나가는 수인을 보고 내가 혀를 찼다.

‘하긴, 사교활동이 주인 이곳에선 옷이 겹치는 게 치명적이겠지.’

수인들이 많으니 그들의 상황도 가지각색이었다.

“혹시 내일 시간 있으세요? 없으시다면,”

“어, 없어요!”

‘무슨 소리야, 너 내일 릴리가 여는 티 파티 참석하기로 했잖아.’

‘조용히 해. 그거 취소할 거야.’

“근데… 왜 물어보시는….”

“아, 그러면 혹시 내일 저의 시간에 함께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머, 너무 좋아요.”

풋풋한 감정이 이제 막 생긴 듯 서로 볼을 붉힌 채 대화하는 남녀들도 있었고, 벌써부터 만취한 상태로 인생 친구를 만난 듯한 사람들도 있었다.

“거기, 이름 모를 영식!”

“아니, 사람이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으면 이제 기억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건 모르겠고, 당신이 아주 나랑 잘 맞는 사람이란 건 알겠네!”

“왜 불렀는가?”

“우리, 내일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기억나지?”

“중앙도시 아프론 술집에서 만나자고 자네가 지금 10번째 말하는 중이네.”

“하하!”

그중 가장 볼 만한 건 단연코 사랑싸움이다.

‘돌려 까는 솜씨가 정말….’

팝콘이 있었으면 바구니 안에다가 넣고 와작와작 씹으면서 봤을 텐데.

특히 한 여자를 두든, 한 남자를 두든 묘한 삼각관계와 귀족들의 기 싸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기야, 둘이 다시 사귀어?”

요컨대 이런,

막장 드라마 말이다.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 연한 황갈색 머리의 영애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떻게 네가 쟤를 그런 눈으로 쳐다볼 수가 있어. 완전히 끝났다며.”

“아니야, 진짜 완전히 끝났어.”

‘우와. 저건 끝난 눈빛이 아닌데.’

황갈색 영애의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가 앞에 있는 여자를 향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지었다.

‘최소한 황갈색 영애의 얼굴은 봐야지. 이 남자야.’

짜게 식은 아리엘의 눈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흐음. 정말 끝난 거야? 우리가?”

불타는 빨간 머리를 가지고 있는 여자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덧붙이자 분명 ‘다 끝났다고’ 말한 남자의 귓바퀴의 끝부분이 빨개졌다.

‘아오! 저게 무슨 완전히 끝난 거냐고!’

그 모습을 모두 보고 있는 나는 황갈색 머리 여자가 안타까워 죽을 것 같았다.

‘둘이 헤어져!’

자신이 다 답답한 듯, 바구니를 신나게 긁던 아리엘은 바구니에서 얼굴을 더 빼꼼 내밀고 쳐다보았다.

“우리…….”

황갈색 머리 영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렇지. 잘한다.

‘할 수 있어. 헤어져.’

나는 속으로 응원하며 말을 이어 가려는 그 영애를 지켜봤다.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오며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다.

“우리, 서로 영원히 함께하기로 약속했는데, 이러면 서운해.”

‘뭐?!?’

남색 머리와 양쪽 귀에 피어싱을 뚫어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는 남자였다.

‘어? 지금 무슨 상황이야.’

빨간 머리한테도 애인이 있던 거야?

근데, 저 황갈색 머리 남친이랑 바람을 피워??

‘쯧쯧. 세상 말세가 따로 없네. 말세가 따로 없어.’

그 말이 끝나자, 내가 이입하고 있었던 황갈색 머리 여자가 마저 입을 열었다.

자신의 팔짱을 끼고 빨간 머리 여자를 아련하게 쳐다보는 남자가 아니라 새로운 얼굴에게로.

“야, 너 나한테도 그 말 했었잖아. 근데 지금 쟤한테도 그렇게 한 거야?”

어….

‘어, 어?’

어?!?

황갈색 머리 영애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너 정말… 이… 되먹지 못한….”

‘헤어졌으면 그걸로 끝이지 또 뭘 바라는 거야.’

내가 이입하고 있던 황갈색 머리 영애도 멀쩡한 게 아니었던 걸까.

놀랄 틈도 없이 황갈색 머리 영애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이제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는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던 행동도 그만한 채 그녀가 빨간 머리에게 속사포로 쏘아붙였다.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내 전 남자친구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전 남자친구에게 소개해 줬고, 그런 만남이 있은 뒤로부터 우리는 자주 함께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함께 어울렸던 것뿐인데.”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마음을 추슬렀다고 해도 말하는 도중에 울컥했는지, 붉어진 눈가에 물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녀를 바라보는 표정이 어지간한 배신감을 느낀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빨간 머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억울한 듯 소리쳤다.

물론 시끌시끌한 연회장에 묻혀서 잘 안 들리긴 했지만.

“그건 너도 그렇지 않니? 나도 그렇게 소개해 줬는데 너와 내 전 남자 친구는 어느새 다정한 연인이 돼 있었잖아!!”

생각보다 큰 빨간 머리의 소리에 그 주위에서 놀고 있었던 귀족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오 파국이다.’

…피어싱 남이랑 황갈색 영애랑 서로 전 연인이었다니. 빨간 머리랑 바람남이랑도 그렇고.

게다가 서로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줄 만큼이나 친했다니.

‘지금은 서로의 남친이… 바뀌었잖아?’

게다가 저 바람남은 빨간 머리랑 다시 바람을 폈고.

언제 이렇게까지 파국이 된 거야.

세상에 맙소사. 아. 팝콘이 필요해.

‘오오오. 황갈색 샴페인 잡았다.’

샴페인 간다.

나는 입에 음식이 없지만 입을 오물거리면서 집중한 채 귀랑 눈만 빼꼼 내밀고 흥미진진하게 쳐다봤다. 그들의 대화를 안간힘을 써서 듣느라 아리엘의 세모난 귀가 쫑긋 올라갔다.

“카델리온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그렇게 한참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데 누가 이안에게 인사했다.

아. 흐름 끊겼어. 이 드라마 결말 어떻게 되는지 봐야 하는데.

왜 하필 샴페인을 잡았을 때 인사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아쉬움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바구니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이안에게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사업 관련해서 얘기하는 사람들도 꽤 됐고, 정치적으로 얽힌 사람들도 꽤 있었다.

개중에는 곁에서 아양을 떨거나 유혹하는 여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성적 유혹을 담은 농밀한 페로몬 향이 진동했다.

‘아. 머리 아파.’

환기가 안 되는 방 안에 여러 가지 향이 진한 향수들을 잔뜩 들이부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이 아닌 상태라 그런가, 페로몬에 더욱 예민한 느낌이었다.

계속되는 갑갑함에 나는 바구니의 뚜껑을 들어올려 파티장 안을 더 자세히 살폈다. 이안이 다른 사람들이랑 말 섞기 시작하자, 다들 이안에게 관심을 쏟느라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에는 먹음직스러운 핑거 푸드와 칵테일, 그리고 와인 등 여러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뛰어서 내려갈까? 술 먹고 싶은데.’

나는 슬쩍 바닥을 한 번 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까지는 여전히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눈앞에 인 외의 수준으로 잘생긴 사람이 있는데, 내가 신경이나 쓰이겠어?’

절대 안 쓰이지.

원래 잘생긴 사람 옆에 있으면 그 누구든 오징어로 보이는 법이었다.

물론 이안이 대놓고 손바닥 위에 나를 들고 다닌다든가 하면 말이 달라지긴 하겠지만.

다행히 아직까진 그가 매우 바빠 그런 신경을 쓸 시간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대놓고 바구니에서 일어나 바닥과 바구니 사이의 높이를 가늠했다.

좋아. 지금이 기회야. 사람들도 많고. 이 정도 높이면 뛰어서 내려갈 수 있어. 많이 연습했잖아.

평소에는 쫄아서 뛰지도 못했을 높이가 술을 보고 나니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알코올을 향한 나의 열망이 그렇게 강했던가.

‘이제 그 정도는 먹을 수 있잖아.’

전생에서의 술맛이 아른거렸다.

나는 바구니 안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구니 안에서 뛰기 제일 좋은 자세를 찾았다.

밖에서 이안과 사람들이 열심히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지금의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준비하고. 뛴다. 아니 난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하나, 둘.’

‘셋!’

‘난다아아아!’

나는 눈을 꾹 감은 상태로 바구니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다리를 활짝 펴고 술을 바라보며 날았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털이 밑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아. 생각보다 매우 높은 높이였던 것 같다.

‘설마 죽진 않겠지…?’

그래도 평소에 먹지 못하는 술을 먹으면 썩 괜찮은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낫겠지.

다치면 언젠가는 낫지만 술은 다시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게 내 몸 중 어디 한 군데가 뽀각 날 상태로 바닥에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내 몸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가는 느낌이…

‘어, 뭐지?’

불길한 기운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높이 올라갈 일이 없을 텐데.’

귓가에 나직한 저음이 울렸다.

“아리엘, 뭐 해?”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

그가 나를 잡아 들어 올려 물었다.

눈을 살짝 떠보니 나는 어느새 이안의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새파란 벽안과 내 눈이 맞부딪혔다.

도망가려고 하는 자신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기이한 집착이 이안의 눈동자에 넘실거렸다.

그가 눈꼬리를 예쁘게 휘었다.

“내가 탈출은 안된다고 했을 텐데.”

안경 너머로 보이는 저 눈꼬리에서 깊은 빡침이 보이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내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는 더 화사하고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독을 한가득 품고 만개한 꽃 같았다.

그 안에 가려진 맹수의 벽안이 번뜩였다.

“해명해.”

아.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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