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15/111)

14.

“헉. 저 포오즈 취하신 것 좀 보세요! 역시, 정말, 제 뮤즈다워요.”

마담 헤일라는 감격에 찬 눈빛으로 한술 더 떴다.

도대체 이게 무슨 포즈인데.

관자놀이 아파서 관자놀이 누르고 있는 건데.

‘근데 잠시만요. 마담.’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을 것 같은데. 제가 왜 마담의 뮤즈인 거죠? 아니, 제가 언제부터 마담의 뮤즈였던 거죠?

제가 아는 뮤즈와 마담이 아는 뮤즈가 다른가요. 어떻게 평범한 검은 고양이가 유명 부티크 주인의 뮤즈일 수 있는 거야. 세상이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갑자기 검은 고양이가 세계 정복하기라도 했나.

세상이 고양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고양이에게 아부하기 위해서라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저 마담이 아부해야 할 사람은 저기 옆에서 앉아 나를 구경하고 있는 백호였지 내가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 저택엔 정상이 없는 거야.

이 저택에 오면 정상이 비정상으로 바뀌는 건가.

마담 헤일라가 허리를 곧게 펴더니 박수를 짝짝 두 번 쳤다.

“자. 얘들아, 어서 가지고 오렴.”

응접실 안으로 엄청나게 많은 행거와 거기에 걸려 있는 온갖 옷가지들, 그리고 보석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그 큰 응접실이 드레스와 보석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러려고 앞에 거울을 둔 거였어?’

나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내 털을 비추고 있는 거울의 용도를 깨달은 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긴 저 거울이면 내 몸을 다 비춰 주긴 하지.’

근데 원래 부티크가 옷을 주로 파는 데가 아니었나. 왜 파티용 드레스, 실내용 드레스, 잠옷 등 온갖 옷부터 시작해서 액세서리, 보석, 심지어 장난감까지 왜 별것이 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까.

‘심지어 드레스도 다 고양이 용이야.’

내가 아는 부티크가 잘못되거나 이 세상의 부티크의 정의가 잘못됐나.

아니면 세상이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까 둘 중 도대체 무엇일까.

정말로 고양이가 세계를 제패했으면 미쳐 돌아갈 만하다고 생각하던 중 마리가 작게 내 귀에 소곤소곤 말해 줬다.

“고양이님, 이 부티크는 보석점과 연계해서 옷에 알맞은 보석을 같이 세공해서 파는 거로 유명해요.”

그래도 고양이 옷 파는 곳은 아닐 거 아니야….

“장난감은… 아마 특별히 가져오신 것 같고요.”

마리는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행복한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고양이 영상구를 보내 주신 걸 보면서 열심히 작업했습니다. 어찌나 영감이 샘솟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했답니다. 호호호.”

야. 너 그래서 저번에 영상구로 나 찍는다고 한 거였어?

나는 이안을 흘겨봤다.

그러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코를 툭 건드리곤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이제 저거 다 입어 봐야지.”

뭐라고!?! 저걸 언제 다 입어 봐. 장난이지? 야. 장난이라고 말해.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얄밉게 샐쭉 입꼬리를 올렸다.

마리를 향해 돌아보니 마리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혼자 ‘어떤 옷부터 입어 보시게 할까….’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앨런은 슬쩍 내 눈을 외면했다.

뭐지. 모두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이 기분은.

그렇게 나는 책상 위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

‘고양이 몸에 입을 게 뭐가 있다고.’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장신구와 드레스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담 헤일라와 마리는 프릴과 레이스가 잔뜩 달린 고양이용 드레스부터 이런저런 옷을 내 몸에 대고 서로 진지하게 상의해서 날 갈아입혔다.

이렇게 보니 둘이 죽이 척척 잘도 맞았다.

그렇게 열띤 토론으로 결정한 첫 옷은 하얀색 프릴과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와 심플한 보석 장신구 하나였다.

그렇게 나에게 옷을 입혀 주고 하는 첫말이,

“고양이님 한 번만 빙그르르 돌아 주시면 안 되나요?”

이거였다.

‘그래. 너네라도 즐거우면 됐지….’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책상 위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르 돌았다.

“잘 어울리네.”

“그렇게요. 고양이님과 잘 어울리십니다.”

“역시 고양이님은 제 심장을 가져가실 것이 분명해요.”

마리야, 무표정으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니까. 매번 말하지만 네 심장을 내가 어디다 써. 너 혼자 고이 네 가슴안에 보관해 놔.

“천사가 강림하셨어….”

마담 헤일라는 몽롱하고 힘이 풀린 목소리와 함께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얘도 이상해.

나는 이안을 툭툭 쳤다. 그러자 그가 왜 부르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야, 얘 정상인 거 맞지?’

“이래 봬도, 마담 헤일라는 사무적이고 딱딱하다고 유명한 사람이야.”

이안이 내 귓가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정말 이게 사무적이고 딱딱한 태도라고 생각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게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더 대단한 건지.

나는 얼른 대답하라고 이안의 손가락을 앞발로 꾹꾹 눌렀다.

그 사이에 또 남색 계열의 드레스가 어느새 내 몸에 입혀져 있었다.

“맙소사-! 이렇게 입으시니 완전 시크하고 도도하신 것 같고. 정말 밤의 여왕 같으세요! 평기일을 다 씹어 먹으실 모습이에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고양이님의 위엄을 보여 주기에 정말 딱 좋은걸요.”

“헤일라, 너에게 우리 아리엘은 ‘우리’ 고양이가 아닌 것 같은데.”

이 와중에 그녀의 말을 바로잡고 있는 그에 내 얼굴이 파스스 식었다.

‘그런 건 바로잡지 말라고.’

너무 바빠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앨런과 이안은 왜 일하러 안 가고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할 일이 엄청 많은 것 같았는데 여기서 땡땡이쳐도 되는 걸까. 물론 아리엘은 ‘아기 고양이 의상 맞추기’가 두 사람의 공식 일정에 올라와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헤일라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끊임없이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연분홍색 옷.

“어머. 어쩜 이것도 잘 어울리신다. 어떻게 다 찰떡같이 소화하시지.”

하얀색 옷.

“고양이님께 벽이 느껴져요. 완벽….”

보라색 옷.

“이 신비로운 느낌 보세요! 역시 제 뮤즈 님은 타지에서 오신 게 분명해요. 판타지…”

하늘색 옷.

“오오! 앞으로 저는 경마장에 못 갈 것 같아요. 고양이님. 고양이님을 보니 말이 안 나와서요! ”

기타 등등 다른 여러 옷까지…

“고양이님을 보니 갑자기 아이디어가 막 샘솟네요.”

그렇게 한참 동안 인형 놀이를 하듯 내 옷을 갈아입히던 마담 헤일라는 갑자기 노트를 들더니 직원에게 연필을 건네받았다.

‘고양이어서 반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만에 하나라도 수인이라면.

물론 이 나이까지 인간으로 못 변한 걸 보면 동물이겠지만.

연필을 건네받은 그녀가 신들린 듯한 손놀림으로 슥슥슥 노트에 무언가를 그렸다. 30초도 안 지난 채로 금방 아름다운 드레스 한 벌의 윤곽이 노트에 그려졌다.

“만약 고양이님의 인간이 되었을 때의 모습에 맞는 옷을 상상해서 그린 겁니다. 만약 인간이 되신다면, 제가 이 드레스를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들어서 고양이님께 드리겠어요.”

앞에 있는 고양이님께서 사람이 되다니. 정말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 것 같았다.

‘그럼 저 신비한 검은 털은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카락이 되어서 밤처럼 빛나고…….’

마담 헤일라는 그 노트를 소중히 꼭 쥔 상태로 뭔가를 상상하듯 눈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고양이님께서 인간이 되시면… 상상만 해도 황홀하네요.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으시겠지만.”

그렇게 나는 갖가지 주접을 들으면서 해탈한 상태로 모든 드레스를 피팅 당하는 것을 마쳤다. 그래도 드레스 피팅을 당하면서 마담 헤일라가 30초 만에 디자인을 끝낸 드레스 한 벌을 득템했다.

나쁘지 않은 수확이었다.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다니 예쁘겠지.

나중에 인간이 다시 될 수 있으면 받으러 갈 거야.

“아리엘, 마음에 드는 거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해 보고 싶은 거 있어.

옛날부터 꿈꿔 왔던 것이 있었다.

나는 앞발로 이안을 톡톡 두드린 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할 수 있다, 아리엘.’

전생을 기억하고 난 후 늘 하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였다.

이안은 숨까지 크게 들이마시면서 비장한 표정을 짓는 아리엘을 주의 깊게 쳐다봤다.

아리엘을 집에 데려온 이후, 저렇게 비장한 표정을 짓는 아리엘은 처음이었다.

‘저 디자이너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 뺨이라도 때리려나.’

‘아니면 저 보석을 마담 헤일라에게 던지려나.’

헤일라는 선대 가주 부인의 친구이기 때문에 보석을 던졌다가 걸리면 곤란한데.

‘비록 나이가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나긴 하지만 친구는 친구니깐.’

이안은 만약 저 아기 고양이가 보석을 헤일라에게 던졌을 때 어떻게 어머니가 모르도록 처리를 해야 할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눈을 반 정도 감은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느리게 툭툭 두드렸다.

모두가 긴장한 찰나, 비장한 표정으로 아기 고양이가 한 발을 내디뎠다.

나는 소심하게 앞발을 장식이 가장 적어 보이는 드레스들이 걸려 있는 행거의 앞부분을 척하고 짚었다.

‘여기부터’

그리곤 행거의 맨 뒷부분까지 달려가 끝부분을 다시 척하고 짚었다.

‘여기까지 다 주세요.’

내가 이걸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소시민이었을 적 드라마와 소설을 보며 꼭 하고 싶었었다.

“여기서 여기까지 다 줘.”

어차피 다 사려고 했던 것을 뭐 저리 비장하게 행동하는지.

이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거야!

나는 앞발로 짝짝짝 하고 박수를 쳤다.

나도 이런 거 한번 해 보고 싶었다고! 비록 내 돈이 아니라는 게 아쉽지만.

근데 이안이 짚은 부분이랑 내가 짚은 부분이랑 범위가 달랐다.

이안이 가리키는 부분을 본 내 두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야, 이 수많은 옷이랑 보석을 다 사겠다고?’

저 많은 양을 사는 것을 보니 말이 안 나와서 경마장엔 내가 못 갈듯싶었다.

아리엘이 처음부터 끝까지 행거에 있는 옷들을 다 달라고 하는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드레스의 가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택을 구경할 때의 아기 고양이의 반응을 들은 이안은 말했었다.

“저택에 옷들이랑 보석들 들여올 때 가격은 싹 숨겨. 일절 말도 하지 마.”

이것은 놀라운 이안의 선견지명이었다.

비록 아리엘이 후에 다리를 덜덜 떨며 기절했다고 해도.

아리엘이 마리를 피해 몰래 쏘다니다가 하녀들이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 한 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다리를 덜덜 떨며 기절한 것은 어느 미래의 이야기다.

덕분에 그녀의 마음속에서 대륙에서 제일 고급스럽고 비싼 부티크들 중 하나인 세리안 부티크는 단지 이상한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이상한 부티크로 자리 잡았다.

호랑이들과 비슷하게 이상한 수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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