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13/111)

12.

날은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새로운 신년과 평기일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온 대륙이 떠들썩했다.

귀족 소녀들은 서로 모여서 재잘거리며 평기일에 입거나 착용할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맞추러 부티크로 떠났다.

이미 유명 부티크들은 평기일 이후 두세 달까지의 예약이 꽉 차 있었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곧 자신에게 들어올 사랑스러운 월급을 생각하며 입꼬리가 귀에 걸린 상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물론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은 미래의 연인들을 위해서나 새로 생길 친구들을 위해 영식, 영애들이 모조리 예약해 버려 웬만한 곳은 이미 예약이 다 차 있는 상태였다.

또, 이미 입고 갈 옷들과 장신구를 맞춘 소녀들은 자신들의 티 파티를 열어 평기일에 입을 옷들에 대해 서로를 은근히 견제하기도 했다. 평기일 즈음에는 연회를 열거나 무도회를 여는 것이 관례가 아니기에 모두들 서로의 착장에 대한 호기심이 짙어지고 있었다.

특히 네 개의 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중앙에 위치한 지역, 상인들이 가장 바쁘게 오가는 중앙의 자유 도시는 곧 있을 축제 준비로 떠들썩한 평소보다도 훨씬 활력이 넘쳤다.

평기일 파티를 비롯해 몇 번 개방되지 않는 새하얀 수정으로 가득 찬 수정궁도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특히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끝도 안 보이는 엄청난 규모의 연회장에 그곳 시녀들과 시종들은 수정궁을 청소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밖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추위에 볼이 빨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쏘다니며 축제 준비를 하는 현장들을 구경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말로는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나돌아다니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모자를 씌워 주고 나서의 그들을 바라보는 흐뭇한 표정은 얼굴에 숨겨지지 않았다.

모두가 바쁜, 평기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하루였다.

‘와. 눈이 온다. 오늘도 엄청 춥겠는걸.’

그리고 나는 축제를 얼마 앞두지 않은 날에 느긋한 몇 안 되는 수인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벽난로에 붙어 앉아 창문으로 눈이 오는 풍경을 바라봤다.

온 세상을 포근한 하얀 이불로 따뜻하게 덮어 주듯, 밖에는 함박눈이 하나둘 푸근히 내려 쌓이고 있었다.

카델리온 선대 가주가 이번 평기일 파티 개최를 전적으로 이안에게 다 맡겨 버린다고 한 이후, 그는 어디 증발이라도 한 건지, 옷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초반에는 나를 보려고 몇 번 찾아오긴 했다.

“아리엘 잘…….”

“이안 님, 수정궁 측에서…….”

“아리….”

“이안 님, 수정궁 측에서 명단을 급하게…….”

“가지.”

대충 이런 흐름이 반복된 이후로 점차 발길이 뜸해지더니 요즘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도 비추지 않는 걸 보니 엄청 바쁜듯싶었다. 요즘 심심한 참이라, 오면 엄청 열렬하게 환영해 주려고 했는데.

‘아이고, 너무 안타깝네.’

나는 느긋하게 따끈따끈한 군고구마와 우유를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예전 전생에 먹었던 맛과 지금 먹고 있는 우유의 맛이 다른 것 같았지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며 먹는 중이다.

한국과 여기는 세계부터 다른데 어떻게 맛이 같을 수 있을까.

다른 것이 당연했다.

‘아마 또 뭔가를 잔뜩 넣었겠지.’

각종 약재라던가.

첫날뿐만 아니라 가끔 음식을 먹자마자 헛구역질을 여러 번 하고 쓰러진 이후에 이안과 마리를 비롯한 나를 아는 수인들은 나를 무슨 개복치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먹는 음식들에는 요상한 맛이 나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희귀한 약재가 들어가 있었다.

원래 눈 오는 날에는 군고구마지. 군고구마의 짝은 우유고.

‘근데 지금쯤 그 호랭이는 뭐 하고 있으려나.’

맛있는 걸 먹으면서 호랑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그 호랑이가 어지간히 소중해졌나 보다. 처음에는 그냥 납치범이었는데.

‘진짜 나를 데려간다 했을 때 쟤가 미쳤구나 싶었지.’

자기가 호랑이 구두 위에 꽃을 올려 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는 아리엘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소중한 호랑이긴 하지. 내 물주시기도 하니깐.’

최근 그가 나에게 보여 준 호의는 대단했다.

당장 여기서 고개를 돌려 저기 천장까지 이어져 있는 괴상한 탑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내 물주임에도 불구하고 눈 오는 날에 군고구마 맛을 알지 못하는 백호 한 마리가 불쌍해졌다. 돈이 많으면 뭐 해, 이런 소소한 행복도 누리지 못하는데.

‘아 원래 수인 동정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마리에게 이안과 앨런의 고구마까지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마리를 쳐다봤다.

‘마리.’

마리는 묘한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네. 고구마 더 필요하신가요?”

‘응.’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게 된 마리는 내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가져다줬다.

그렇게 삐까뻔쩍한 내 접시에는 백호와 그 근처에서 같이 다니는 고동색 머리 호랑이의 고구마까지 올라와 있다.

‘근데 호랑이들 거 챙기긴 했는데 어떻게 갖다 주지…?’

나는 혼자 골똘히 고민했다.

‘이안이 어딨는지도 모르는데.’

그때였다.

“아리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말로 내 앞에 그가 서 있었다. 그 살짝 뒤에는 저번에 봤던 고동색 머리 보좌관이 서 있었고.

바쁘긴 엄청 바빴는지, 이안의 눈이 살짝 그늘져 있었다.

정장의 크라바트가 약간 흐트러진 상태로 눈가는 살짝 그늘져 있고 한쪽 입꼬리만 올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음….’

그 모습이 어딘가 심각하게 퇴폐적이었다.

‘저 얼굴은 안 어울리는 게 없구나.’

다크서클을 퇴폐미로 소화해 내는 미친 얼굴이다.

그 뒤에 있는 고동색 머리 보좌관은 눈이 시커먼 게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같은 다크서클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보좌관 쪽이 압도적으로 다크서클이 더 짙었지만.

이안이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보다 더 나른하게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앨런은 그냥 과제 폭탄에 파묻힌 학생이 겨우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름 미남인 앨런이 들었다면 너무하다고 억울함을 표했을 생각이었다. 어떻게 일반적이지 않은 주군의 얼굴과 자기 얼굴을 비교할 수 있냐면서.

‘안녕.’

나는 열렬하게 환대해 주겠다는 결심을 지키기 위해 쭈뼛쭈뼛 이안에게 다가가 이안의 발목에 꼬리를 감쌌다. 하지만 아직 꼬리가 짧아 발목에 꼬리가 다 감싸지지 않았다.

그 모양새는 그저 발목에 꼬리를 비비는 것처럼 보였다.

‘자. 이 정도면 엄청난 환대지?’

나는 뿌듯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칭찬해 줘. 잘했지?’

그러나 그는 입술을 말아물고 눈꼬리가 휘어진 채 묘하게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보좌관이 나에게 어딘가 심각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아리엘 님. 새로운 수염이 생기셨군요.”

‘응…? 어떤 수염?’

“저게 고양이 수염인가?”

이안은 웃음을 꾹꾹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차라리 그냥 웃어.

나는 입 근처를 앞발로 닦았다. 입 근처에 묻어 있었던 하얀색 우유가 내 앞발에 묻어 나왔다.

‘마리. 미리 알려 줬어야지.’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마리를 쳐다봤다.

그러자 마리는 내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고양이님께서 너무 귀여우셔서요.”

“아리엘, 기다려 봐.”

이안은 앞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더니 바닥에 앉아 내 입 주변을 꼼꼼히 닦았다. 날 들어 올리지 않고 자기가 바닥에 앉아 내 입을 닦아 줬다는 거에서 깊은 감동이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요즘 누구의 손에 붙잡혀 들어 올려진 지가 꽤 된 것 같았다.

“다 됐다.”

내 입가를 손수건으로 쓱쓱 문지르던 그가 쪼그려 앉아 있던 상태에서 일어났다.

“마리, 성과급 줄게.”

나는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그를 황당하게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마리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설마 마리, 성과급에 날 팔아넘긴 건 아니지? 내 눈이 다시 가느다랗게 변했다.

그래도 성과급 정도면 날 팔아넘겨도 돼. 내가 허락해 줄게.

성과급 정도면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

그렇게 이안이 내 입 주변에 묻은 우유를 꼼꼼히 닦아 주고 내 털을 빗으로 빗겨 준 다음 우리는 1층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 탁자에 올라와 있는 거울이 내 모습을 비추었다.

잔뜩 화난 고슴도치 같이 뻗친 털은 봐도 봐도 외면하고 싶었다.

분명 이안이 빗질을 해 주었는데 그가 내 털을 어떻게 빗질한 건지, 지금 내 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쳐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

이안이 빗을 놓고 은근한 미소를 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안이 내 머리를 빗겨 준 직후, 거울을 쳐다본 나는 할 말을 잠시 잃었었다.

풍선에다가 머리카락을 비비고 하늘 높이 띄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잘 어울리세요.”

마리가 여느 때와 같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뜬 내가 마리를 슬쩍 쳐다보았더니 그녀가 내 눈을 살짝 피했다. 그리곤 내 눈치를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밤송이 같으셔서 귀여우십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똑같은 무표정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아기 고양이님께서 흉포하진 않지만 게으른 남부 지역의 사자가 되셨습니다.”

내 모습을 본 보좌관은 간단한 한 줄 평을 남겼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다시 바라보곤 짧은 감상을 했다.

‘음. 마치 파인애플이 된 것 같군.’

꼭 파인애플이 된 것만 같은 신기한 기분이다. 그래도 게으른 사자보다는 상큼한 파인애플이 낫잖아.

아, 제일 중요한 군고구마를 주는 것도 까먹지 않았다.

내 모습을 감상하고 이안의 발을 톡톡 친 나는 그들을 위해 준비한 고구마가 있는 내 접시로 다가갔다. 그러곤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더니, 그들이 고구마를 들어 먹기 시작했다.

이안은 고동색 머리 보좌관 거까지 군고구마를 준비하는 게 퍽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그 보좌관은 꽤나 감동한 듯했다.

촐싹거리는 말투로 “이안 님, 우리 고양이님이 제 것까지…! 참 기특하시지 않습니까?”라고 하다가 이안의 정장 자켓 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이 또 날아갈 뻔했던 걸 보면.

결론적으로 둘은 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다.

이안도 나를 바라보며 맛있게 먹었다. 자기 군고구마를 먹기 좋게 뜯어서 내 입에 넣어 주기도 했지만.

앨런이 “눈 오는 날에는 군고구마를 먹어야 하는군요.”라며 끄덕거렸던 걸 생각하면 내 군고구마 설파 작전은 통한 것 같다.

이제 눈 오는 날 먹는 고구마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겠지.

나는 응접실 탁자에 놓여 있는 거울을 외면하고 응접실을 마저 둘러봤다.

‘응접실에 거울은 왜 놓여 있는 거야.’

1층 응접실은 이안의 방이랑은 또 다른 분위기였다.

이안의 방과 집무실이 단정하다면-비록 이제 이안의 방은 고양이 물품 때문에 전혀 그런 느낌이 나지 않지만-, 들어온 사람의 기를 죽이기 위한 목적인지 응접실은 상대적으로 화려한 느낌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하지 않았다.

딱 손님이 감탄하고 끝날 정도의 화려함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질 때쯤 발견할 수 있는 그 안에 있는 고아함과 세련됨.

그 정도였다.

응접실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건 지금 내가 올라와 있는 소파였다.

응접실 소파가 특히 푹신푹신했는데, 마치 이안의 집무실에 있는 그 핫 핑크색 방석을 소파로 만들면 이렇게 될 것 같았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나는 소파를 꾹꾹 누르며 소파에서 걸어 다녔다. 발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내 발을 감싸면서 폭신폭신하게 들어가는 느낌이 중독성 있었다.

‘여기는 왜 왔어?’

응접실에 올 만한 일이 없기에 나는 의문을 품은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이안 님, 앨런 님, 그리고 고양이님.”

그때 문이 열리더니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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