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2/111)

11.

어느새 표정을 부드럽게 푼 이안이 고양이의 볼을 쿡쿡 누르고 있었다.

“얘가 알려 주기 싫다는데?”

이안이 내 볼을 쿡 누르자 내 볼이 폭신폭신한 케이크를 누르듯이 푹 들어갔다. 여기 와서 각종 디저트를 먹으면서 살이 붙은 건지 누가 봐도 야위었던 몸이 말랑말랑해졌다.

납치돼서 확대되기만 했다.

이 고양이 확대범.

근데, 억울하네. 나는 한 번 먹을 때 쿠키 한 조각도 다 못 먹는데.

현재 나는 이안과 마리의 노력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와 양을 찬찬히 키워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디저트가 아닌 음식들은 입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근데 대체 왜 토실토실해지는 거지. 살이 찔 거면 차라리 성체 고양이로 성장하던가.

어딘가 묘하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언제 알려 주기 싫다고 그랬어.’

“방금.”

누르는 족족 폭신폭신하게 들어가는 느낌이 좋은지 그가 끊임없이 내 볼을 누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이름이 없다고!’

짧디짧은 왼쪽 앞발과 오른쪽 앞발을 교차해서 엑스 모양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엑스 같지 않았다.

“이름이… 없다고…?”

‘어.’

나는 끄덕거렸다.

오. 알아들었다. 대박. 이걸 어떻게 알아듣지?

아무리 봐도 그냥 솜뭉치 맞댄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솜뭉치가 얽혀서 삐죽 튀어나온 게 엑스 같기도 하고.

그 모습을 보는 이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싸하게 굳어졌다.

앨런은 오랜만에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름이 없습니까?”

‘어. 없어.’

근데 사는데도 지장은 없어. 여태까지 잘만 살아갔잖아.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언제 표정이 굳어졌냐는 듯, 싸늘하게 굳어졌던 표정을 부드럽게 푼 그가 눈매를 휘었다.

“원하는 걸 말해 봐. 까망이? 검댕이? 삐삐? 말숙이?”

‘맙소사. 말숙이는 또 어디서 나온 거야. 전생에서도 별로 없을법한 이름을 만들어 내는 너의 머리는….’

“아니면 네로 어때?”

검은 고양이 네로라니.

내가 무슨 유명한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이니. 우연의 일치도 어떻게 이렇게 이루어지냐.

나는 딱딱하게 굳어진 내 표정을 풀지 못했다. 딱히 풀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너 만약에 내 이름 저거 중에 하나로 정하면 너랑 연 끊어 버릴 거야. 다시는 안 봐.’

그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저런 애교스러운 눈이랑 표정도 괜찮은데. 저 이름 중 하나로 지으면 이름 부를 때마다 저런 눈으로 봐주려나.”

이게 무슨 애교스러운 표정이야.

애교스럽다는 뜻 왜곡하지 말아 줄래…?

‘엄마야. 쟤 이상해.’

정말 변태인가 봐.

다시 말하는데 취향은 존중하지만, 나에게 그 취향을 발휘하지 않아 줬으면.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지금 모습을 봐선 들은 척도 안 하고 무시하실 것 같습니다만.”

‘맞아. 들은 척도 안 하고 모르는 사람 보는 것처럼 지나갈 거야.’

“그래? 아쉽네.”

“저는 이안 님이 고양이님께 무시당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쓴맛을 한 번 보시는 것도….”

그가 자신의 희망 사항을 조용히 말했다.

“앨런, 뭐라고? 나랑 내일 아침에 대련하고 싶다고?”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용히 하겠습니다.”

그러자 앨런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안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를 한 번 보고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흐음….”

타닥. 타다닥.

집무실에서 길고 곧은 손가락이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이름은…….”

고민을 마친 그가 책상을 두들기던 행동을 멈췄다.

“이름은 아리엘. 아리엘로 하자.”

‘그래. 좋아.’

나는 꽤나 만족스러운 이름에 고개를 끄떡이고 그의 손에 고개를 박았다. 너무 졸려 저절로 떨어지는 고개와 감기는 눈꺼풀을 어쩔 수가 없었다.

말숙이나 검댕이보단 아리엘이 낫지.

고개를 박은 나의 목덜미와 등을 이안이 살살 쓰다듬어 줬다. 뽀송뽀송한 검은색 털이 이안의 손길에 따라 갈라졌다가 다시 모였다.

“아리엘이…요…?”

앨런은 저 인간이 뭐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 주군이 설마 미치셨나. 앨런은 정신을 고쳐 주는 의원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소소소 돋아나는 닭살을 하나하나 눌렀다.

그가 오랜만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 드디어 미치셨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저 검은 고양이는 모르는 눈치지만 아리엘은 고대 수인어로 ‘사랑스러운 수인’이라는 뜻이었다.

주군과 사랑이라니 죽었다 깨어나서 다시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앨런. 눈빛이 상당히 불충한데.”

“아닙니다.”

“나 정상이야.”

“아, 네.”

앨런은 영혼 없이 답을 했다.

‘이안 님, 정상은 자신이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생략한 채였다.

자신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거 보니, 정신머리를 고쳐 주는 의원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 더미 쪽으로 앨런이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 생각은 며칠 뒤, 앨런이 이안과 대련-대련이라 쓰고 죽기 직전까지 처맞는 거라고 말한다-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안 님, 선대 가주님께서 평기일 축제는 이안 님께서 주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제 가주니까 해야겠지.”

“원래 가주 초기에는 선대 가주님께서 도와주시는 게 보통 아닙니까. 밑에서 굴려지는 제가 너무 힘듭니다.”

“그거참 유감이네.”

‘벌써 평기일인가. 다음 해 첫 번째 날이 얼마 안 남았네.’

평기일.

평화협정기념일.

말만 들어보면 엄청난 말인 것 같지만 별거 없는 줄임말이다.

평화협정기념일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날은 각 지역의 대표들이 모두 뽑혀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연 날이므로 가장 큰 축제를 벌인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후, 조그마한 분쟁을 제외하면 전쟁의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이런 협정을 기념하기 위해 새해 첫날을 축제와 함께 즐겁게 맞이한다.

귀족들은 네 지역의 수장 가문들이 매년 돌아가면서 주최하는 평기일 파티에 참석하고 평민들은 평기일이 있는 주 동안 자유 도시에서 개최하는 축제에 참여했다.

평기일 파티는 개최자가 어떤 특정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의무적으로 모든 귀족에게 파티 초대장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파티에 초대받은 귀족은 사이가 안 좋은 귀족이 있더라도 파티 참여를 박탈당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평기일 파티에 참석했고.

파티에 갔을 때 생기는 득이 파티에 가지 않았을 때 생기는 득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귀족이 참여하는 파티는 평기일에 진행하는 파티가 거의 유일했다.

그러니까, 평기일 파티에서의 불참은 귀족 사회에서 도태됨을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평기일 파티는 1년이 지나도 두고두고 회자 되며 귀족 사회에서 계속 입방아를 찧으며 오르락내리락하니까.

그렇기에 다양한 수인들이 여러 가지 목적으로 모인다. 그중에서는 높으신 분들에게 잘 보여 인생 역전을 노리는 수인들도 있고, 사업 투자를 목표로 가는 수인들도 있고, 그냥 놀고먹고 마시려고 가는 수인들도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수인이 기대하는 것은 낭만적인 사랑이다.

“하이에나 일족의 영식과 독수리 일족의 영애가 무도회장에서 눈이 맞았다면서?”

“그러니까. 대륙의 소식지에서 둘의 사진이 나왔는데 아주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

“어머머머.”

“아. 나도 그런 운명 같은 사랑 한번 해 봤으면.”

거의 모든 귀족이 평기일 파티에 참석하기에 그만큼 아름답고 잘생긴 수인들이 모두 평기일 파티에 모이게 되고 평소보다 떠들썩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파티에 사랑에 빠진 수인들이 속출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파티에서 만나서 불꽃 축제에 무도회까지, 얼마나 완벽한 데이트 코스야.’

게다가 평기일을 기점으로 해서 많은 귀족이 중앙 도시의 근처에 있는 타운하우스에서 머무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만남을 유지하기에도 좋았다.

“비둘기 수인이랑 까마귀 수인이 결혼한다고 발표했대요!”

“어머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정말, 모든 것을 뛰어넘은 사랑이네요.”

때문에 거기서 사귄 세기의 커플들이 적지 않아 평기일에 사귀면 평생 간다는 말도 생길 정도이다.

‘셀레스틴이 엄청 좋아하겠네.’

그녀는 항상 평기일만 되면 성녀처럼 고결해 보이지만 우아한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파티에 참여했다.

항상 입버릇처럼 자기는 내가 올려다보지도 못할 높은 사람이 될 거라는데, 글쎄. 여태까지 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랑 사귀어 보긴 했으려나. 운명 같은 사랑을 할 거면 일단 사귀긴 해야 할 거 아니야.

객관적으로 셀레스틴은 예쁘긴 했다. 매우 예뻤다.

동그랗고 맑은 연두색 눈동자는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고결해 보였다. 남자라면 한 번쯤은 흠모해 봤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눈만 엄청 높은 셀레스틴은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도 한 번도 사귀어 보질 못했다.

그래. 그녀는 그 유명한 모솔이었다.

도대체 자기보다 지위가 높고 키도 크며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는데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분명 남자들이 고백했는데 자기가 다 갖가지 이유로 마음에 안 든다며 차 버렸겠지.’

보나 마나 뻔했다.

그래놓고 나한테 화풀이하고.

‘아. 나도 올해 축제는 가보고 싶다.’

셀레스틴 꼴을 마음껏 비웃어주기 위해서라도 가야 하는데.

‘근데 막상 거기서 만나면 덜덜 떨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 하겠지.’

몸이 아팠기 때문이든, 감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든, 나는 자유 도시의 축제든 수장 가문들이 주최하는 축제든 어디든 가 보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평기일 축제에 가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심 희망을 품었다.

‘귀족들 있는데 보다는 자유도시가 더 가고 싶다.’

자유도시엔 치맥이 있지 않을까. 안되면 맥주라도.

전생에 마셨던 맥주 맛이 머릿속에서 아른아른 맴돌았다.

‘평기일에 마리한테 중앙 도시 가자고 조르자. 안되면 밤이니까 정문을 넘어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왜 이렇게 음흉하게 웃고 있어?”

기대되는 미래에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데, 앨런과 이야기하고 있던 이안이 그것을 쿡 찔렀다. 이런저런 행복한 상상이 펑 하고 터졌다.

‘음흉하게 웃다니!’

흐뭇하게 웃는 거거든!

“아리엘, 아무리 그래도 도망가는 건 안 돼.”

‘안 도망가. 내가 따스하게 재워 주고 맛있는 거까지 주는 데에서 왜 도망가.’

물론, 여기보다 더 맛있는 거 주고 더 편안하게 재워 주는 데가 있으면 모르지만.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는 그의 손에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몰려왔다.

사르륵사르륵. 내 털들이 이안의 손길에 부드럽게 갈라져 넘어갔다.

‘이렇게 쓰다듬어 준다고 잠들어 버릴 줄 알면 큰 착각…….’

아 정말, 이 몸뚱어리. 잠만 많이 오네.

도움 되는 게 없어.

이안은 잠에 들어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리엘을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고롱고롱 대며 잠든 아리엘을 보더니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던 부드러운 표정을 싹 지워 냈다. 평소처럼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돌아온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앨런. 시몬드 가문에 검은 고양이가 있는 거 알았어?”

‘원래 이런 분이셨지.’

앨런은 확 달라지는 이안의 분위기에 속으로 내심 놀라면서도 그의 질문에 답했다.

“아니요. 몰랐습니다.”

이안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왜 그들은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았을까. 게다가 시몬드 가문에 쳐들어갔을 때도 그들끼리만 도망갔었는데.’

그들끼리만 도망간 건 그렇다 쳐도,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은 건 그들과 다른 검은 고양이라서 그렇다고 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마치 존재 자체를 지워 내려고 한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것처럼.

이안이 생각에 잠겨 있느라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아까와는 다른 무섭도록 싸늘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리엘이랑 시몬드 가문에 대해서 조사해 와. 싹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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