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11/111)

10.

‘이 방은 영원히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핫핑크색 방석을 꾹꾹 눌렀다. 왜 하필 이 방석의 색깔이 그 많디많은 색깔 중 왜 하필 핫 핑크인진 모르겠지만.

편하니깐 색깔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저 백호의 취향인가 보지.’

나는 다양한 취향들을 존중한다.

근데 저건 또 저기 왜 있는 걸까.

‘…집무실과 활이라니.’

집무실 한구석에서 은빛 활과 화살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화살을 쓰면 악어를 사냥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저 정도이면 곰과의 근접전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잘못해서 저 활대 몇 번 휘두르면 사람 몇 명은 그냥 죽어 나가겠는데.’

저걸 들 수 있긴 할까.

핫 핑크색 방석에다가 보통의 다른 화살과 활보다 압도적으로 위협적으로 생긴 화살과 활이라니.

‘도대체 무슨 조합일까.’

아. 모르겠다. 저 호랑이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생물이 아니야.

‘날 집무실로 데려올 필요도 없는데 집무실로 데려오고 말이야.’

나는 활과 화살에서 시선을 돌리고 애꿎은 진하고 선명한 분홍색 쿠션을 마저 꾹꾹 눌렀다.

집무실을 열고 3초 만에 도망 나간 나는 얼마 되지 않아 고동색 머리 남자에게 잡혀 집무실로 질질질 끌려왔다.

질질 끌려오는 와중에도 저택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집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끌려오면서 생각나는 집사님의 얼굴에, 나는 바닥에 스크래치 하나 남지 않도록 발바닥을 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 내가 왜 이안의 집무실에 처박혀 있을까. 분명 나는 저택 구경을 하려고 했는데.’

그것참 의문이다. 방들을 구경하래서 구경했더니 왜 그 끝은 이안의 집무실인 거냐고.

참담한 결과에 절로 숙연해졌다.

‘도대체 이런 루트 누가 짜 놨어.’

당연히 이안이겠지 뭐.

아무래도 내가 여기 와 있는 건 저 머리 좋은 호랑이가 수를 썼기 때문이 분명하다.

‘안 그러면 여기에 내가 드러눕기 딱 좋은 사이즈인 이 방석까지 있을 리가 없지.’

어쩐지 저택 구경을 허락해 주더라니.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구경하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총 집사께서 이 방을 보여 주려고 필사적이셨던 같았다.

나는 열심히 업무 처리를 하는 이안을 보면서 몰래 눈을 홉떴다.

이안은 한가득 쌓인 서류 산의 종이들을 하나씩 집어 앞에 두고 만년필을 사각사각 움직이더니, 다른 손으로는 내 눈을 가렸다.

“고양아, 그렇게 못생기게 눈을 치켜뜨면 못써.”

쟤 분명 눈은 서류에 고정되어 있는데.

기가 막히게도 내 눈이 있는 위치를 큰 손이 딱 가렸다.

그 큰 손에 내 얼굴 전체가 가려졌다.

내가 손에서 벗어나 시야 확보를 하기 위해 얼굴을 슥 내리자, 그의 손도 같이 내려왔다.

‘……?’

내가 얼굴을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그의 손도 같이 기울었다.

아무래도 저 호랑이는 옆통수에도 눈이 달린 게 분명하다.

‘아, 답답해.’

움직일 때마다 따라오는 손바닥에 손바닥을 이리저리 피하던 내가 손바닥 피하기를 포기했다.

그에게서 고개를 홱, 돌린 내가 아까 나를 연행하다시피 데리고 온 고동색 머리 보좌관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래. 쟤도 마음에 안 들어.’

무서운 속도로 날 쫓아온 보좌관은 ‘죄송합니다!’라고 한 마디 소리치곤 내 두 발을 잡은 채 집무실로 끌고 갔다.

안 가겠다고 난리 치는 범죄자를 연행해 가듯이.

그렇게 모두의 앞에서 두 발을 붙잡힌 상태로 집무실에 끌려갔다.

저 보좌관에 의해서.

‘물론 그 간절했던 눈을 보아 무언가의 사정이 있었을 것 같긴 하지만.’

보좌관의 그 간절한 사정이 성과급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녀가 생각했다.

‘아. 쪽팔려.’

그 기억이 떠오르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끌고 올 거면 이쁘게 끌고 가지. 범죄자 연행하는 것처럼 질질 끌고 가는 건 뭐야.

“고양이님. 그렇게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시면 연약한 제 심장에 무리가 갑니다만.”

엘런이 심장을 꽉 부여잡았다. 참으로 과장된 몸짓이 아무래도 심장은 엄청 튼튼한 것 같았다.

강철 심장을 가지지 않았을까.

앞으로 살날은 많아 보였다.

무병장수할 듯싶다.

“무서워서 업무 처리를 못 하겠습니다. 고양이님.”

그는 정말 진심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업무를 처리하며 말했다.

목소리가 깃털보다 가벼운 것이 곧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한데, 저 빠르게 움직이는 손 좀 어떻게 하고 말할래?’

나는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는 문서를 한 번 쳐다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고양아, 업무 처리를 못 하겠다잖아.”

그가 내 얼굴을 자기 쪽으로 살포시 돌렸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묘한 짜증이 묻어 있는 웃음이었다. 짜증 날 일이 따로 있나? 보좌관이 업무를 잘 처리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해서 짜증 났나. 근데 그럴 것 같은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짜증이 난 걸까.

‘맞다. 원래 호랑이는 이해하려고 하는 거 아니랬어.’

옛사람들이 하셨던 말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내 얼굴을 돌려준 이안은 여전히 내 볼을 찌부시킨 상태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곤 말했다.

“쟤 말고, 날 봐.”

그렇게 강제로 나는 이안의 얼굴을 감상 아닌 감상을 할 수 있었다.

줄이 달린 동그란 은테 안경을 쓰고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이 지적인 이미지처럼 보이게 했다.

업무를 처리할 때는 웃지 않아서 그런지 서늘한 느낌을 풍겼다.

까칠하고 차가운 학자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웃을 때는 엄청 화려한 느낌을 줬는데. 지금 다시 바라보니 서늘하고 냉한 상의 미남이었다.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네. 저게 어떻게 수인의 외모야.’

확실히 시몬드가 시녀들이 홀려서 잡아먹히는 것도 괜찮다며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영접해 보고 싶다고 발을 동동거리게 한 얼굴답다.

‘저 얼굴이 마음에 드는 사람 손가락 접어! 하면 대륙이 반으로 접히겠네.’

그를 바라보던 내 시선이 얼굴에서 손가락으로 내려갔다.

‘와. 손도 예뻐.’

책상 위에 올라온 까만 장갑을 끼고 있던 첫 만남과 다르게 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은 길고 곧았다. 보통 사람들의 얼굴을 거의 다 가릴 것 같은 꽤나 큰 손이 하나둘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그 손 위에 살포시 내 발을 올려놓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근데 쟤 키도 크잖아.’

손도 크고,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무슨 애가 얼굴 빼고 다 커?

그의 긴 기럭지를 떠올린 나는 내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다리와 달리 짤따란 솜뭉치가 보였다.

‘…….’

역시 인생은 불공평하다.

‘…쟤는 자기가 잘난 거 알까?’

“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열렬한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면 아무리 나라도 부끄러운데.”

열심히 얼굴을 뜯어보며 감탄하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이 무심히 서류에다가 휙휙 사인을 계속했다. 전혀 부끄러워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나도 안 부끄러워 보이는데. 너.’

“이안 님께서 부끄러움을 아셨습니까?”

고동색 머리의 보좌관은 진지한 얼굴로 물어봤다. 저게 놀리는 것인지 궁금해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궁금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다 말라 죽어 가는 식물이 물을 한껏 머금은 것 같은 눈이었다.

그에 이안은 싱긋 웃고는 서류에 사인하던 것을 멈추고 만년필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만년필을 던졌다.

마치 종이비행기 날리듯이.

가볍게.

슝-

만년필이 엄청난 속도로 앨런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서류 산에 파묻힌 채 서류를 사인하면서 무심하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까딱하고 기울였다.

팍.

아슬아슬하게 앨런을 스쳐 지나간 만년필이 벽에 꽂혔다.

그래. 만년필이 벽에 떨어지지 않고 벽에 꽂혀 있다.

그것도 꽤 깊숙이.

저게 가능한 일일까.

방금까지만 해도 작은 낙서 하나 없이 매끈했던 벽이 만년필을 중심으로 해서 금이 가 있었다. 저택의 수리를 담당하고 있는 수인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아연한 기색으로 입이 벌어진 상태로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졌다.

누가 내 뒤통수를 한 대 톡 치면 그 상태 그대로 혼절해서 기우뚱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이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앨런.”

“네. 주군. 근데 이번에는 피하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쉽네. 맞을 수 있었는데.”

그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혀를 쯧 하고 찼다.

“이렇게 인재 한 명을 잃고 싶으시다뇨. 진짜 골로 가는 줄 알았습니다.”

앨런이 울상을 짓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같은 인재가 흔한 줄 아십니까.”

그냥 평범한 만년필이나 손수건 같은 것들이 주군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살인 병기가 되었다. 하나하나 온 신경을 기울여서 피해야 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이안 님이 던지신 만년필에 맞게 되면 두개골이 박살 나 며칠 정도는 의무실에서 놀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문서로 눈을 돌렸다.

‘쟤 분명 만년필에 머리 뚫릴 뻔하지 않았어…?’

나는 저 평화로운 대화가 믿기지 않아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주변을 보니 나머지 보좌관들은 이안과 앨런이 뭘 하든 신경도 안 쓰고 각자 평화롭게 자기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보좌관들을 툭툭 치며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어보면 ‘무슨 일이 있었어요?’라고 되물어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안도 만년필을 날리고는 책상 밑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만년필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새로운 만년필을 꺼내 한 번 끄적거린 이안은 서류를 마저 처리하기 시작했다.

앨런 역시 고개를 까딱인 후, 한 번 이안에게 울상을 짓더니 다시 서류 산에 파묻혔다.

그 모습이 한두 번 일이 아니었던 듯, 퍽 익숙해 보였다.

마치 매일 일어나는 일상처럼.

만년필이 벽에 꽂히도록 날리는 게 일상이라니.

여기서 심장이 철렁한 건 나뿐이었나 보다. 역시 여기는 이상하다. 정상적인 게 없어.

너무 놀라 뻣뻣하게 굳어 버린 내 머리를 대신해서 마음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만년필 하나가 벽에 꽂힌 상태로 약 5분간의 평화로운 침묵이 유지되다가 서류 산에 파묻힌 앨런이 퍼뜩 고개를 들고 물었다.

5분 전의 사건은 없었던 것처럼 아까와 다를 바 없는 가벼운 말투였다.

“근데 이안 님. 고양이님 이름은 아십니까?”

“아니.”

“설마, 고양이님 이름도 모르신 상태로 납치해 오신 겁니까?”

그러자 되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정적에 앨런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와. 주군. 이렇게까지 나쁘신 줄 몰랐습니다. 어떻게 납치해 온 고양이 이름도 모르다니요. 납치범으로서 도리가 있지.”

처음부터 납치를 하면 안 되지. 게다가 납치범으로서의 도리라니.

뭔가 이상한데.

“적어도 납치를 하실 때는 누구를 납치하는지는 알아야 하시지 않을까요.”

도대체 저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처음부터 글러 먹은 것 같은데.

“원래 납치를 안 해서.”

‘야! 원래 납치를 하는 게 더 이상하거든!’

나는 벌떡 일어나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눈이 저절로 세모꼴로 만들어졌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꼬리마저 빳빳이 세워진 게 느껴졌다.

“그건 그렇죠. 이안 님은 원래 납치를 안 하시긴 하죠.”

‘아니, 원래 납치를 안 하면 뭐를 하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알고 싶지 않아졌다. 원래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가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납치는 얘가 처음이라.”

‘첫 인질이 되어서 영광이네요.’

내 이마가 그의 손가락에 툭 밀렸다. 그와 함께 몸뚱어리가 뒤로 넘어갔다.

그가 앞서 한 무시무시한 말 때문에 째려보려던 눈이 자연스럽게 공손해졌다.

“고양아.”

이안이 나를 쓰다듬으면서 불렀다.

‘왜.’

내가 무념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름이 뭐야?”

갑자기?

‘근데 그걸 지금 물어보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이름 없는데.’

그리고 그 순간 고양이를 보고 있는 앨런과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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