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9/111)

8.

그가 쿠키를 몇 번 부러트리더니 그것을 내 입속에 넣어 주고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정답이었나 보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직전이었기에 날름 쿠키를 받아먹었다.

쿠키를 받아먹고 앞을 보자 예쁘게 휘어진 벽안이 보였다.

야. 그런데 느슨한 옷차림에다가 그런 얼굴로 그렇게 웃으면 어떡하냐? 그건 반칙이지. 무슨 고양이 홀리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조금 전에 머리에서 떨어진 물 때문에 어깨의 일부분은 젖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음흉한 변태 고양이였으면 어떡할 뻔했어.’

쿠키를 어느 정도 받아먹고 나서는 그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그런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긴장이 풀어졌다.

긴장이 풀어진 몸은 꽤 노곤했다.

나는 꾸물꾸물 자세를 바꿔 이안의 손바닥 위에 웅크렸다.

‘와. 따뜻해. 이 손바닥이 쟤 손바닥 위만 아니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 그럼 그 손바닥 주인을 마음껏 사랑해 줬을 거야.’

그의 손바닥 위에 눕자 그가 나를 쓰다듬었다.

매번 추위만 느끼면서 덜덜 떨다가 거의 처음 느껴 보는 온기에 저절로 갸르릉대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부드러운 손길로 날 쓰다듬고 있던 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오늘은 아직도 안 자고 있었네.”

‘오늘은 늦게까지 정원에서 놀아서 못 잤어.’

하암-

물밀 듯이 쏟아지는 졸음에 항복한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물론 입을 가리는 센스는 잊지 않았다.

열심히 노느라 피곤했는지, 평소에 잘 느끼지 못하는 따스함과 함께 졸음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그런 나를 본 이안은 손으로 나를 들고 침대에 누운 후, 나를 자기 배 위에 올려놨다.

옷 아래에 있는 딱딱한 복근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느낌이 신기해서 괜히 여러 번 꾹꾹 눌러 봤다.

배 위를 여러 번 누르자, 따스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딱 핫팩 똑딱이를 누르고 나서 핫팩이 따듯해지는 그 직후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렇게 꾹꾹 누르는 행동에 심취해서 핫팩 똑딱이를 누르듯이 열심히 누르는데, 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변태 고양이.”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상태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이 머리를 움직이자 결 좋은 은발이 사르륵하고 살짝 움직였다.

그의 큰 손이 내 머리를 감쌌다.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은 그는 내 털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 여기 이안의 배 위지.’

망했다.

몰려오던 잠도 다 달아났다. 아무래도 내가 졸음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미쳤다. 미쳤어. 아무리 신기해도 그렇지 다른 사람의 몸을 꾹꾹 눌러 버리고….

심지어 성격 말아먹은 남주인데.

감히 내 배를 올라타고 누르다니. 죽어라. 푹. 찍 하고 죽는 거 아니야…?

나는 사정없이 떨리는 눈으로 이안의 배 위를 밟고 있는 내 발과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걱정 마. 안 잡아먹어.”

그가 비뚜름히 웃더니 말했다.

“여태까지도 안 잡아먹었잖아.”

아니, 저기요. 그렇게 잡아먹을 것 같은 웃음을 짓고선 안 잡아먹는다고 하면 믿음이 하나도 안 가거든요!

“오히려 내가 잡아먹히게 생겼는걸.”

이안이 자신의 배 위에 있는 내 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한마디에 모든 사고가 정지됐다.

‘뭐, 뭘 잡아먹어??’

그러곤 화르륵 머리에 열이 올랐다.

‘내가, 널, 왜 잡아먹어!!’

아마 사람이었으면 얼굴 전체가 홍당무로 변하지 않았을까.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거든!’

타오르는 수치심에 고개를 퍽 숙이자. 묵직하고 깊은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어둡지만 따뜻한 향이라고 해야 할까.

편안한 기운이 내 마음을 꽉 채우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나는 내 시야에서 이안을 최대한 가리기 위해 자세를 편하게 바꾸었다.

어떤 자세를 취하더라도 이안의 배 위라는 게 흠 아닌 흠이었다.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잘 수 있는 완벽한 자세를 찾은 나는 얼굴을 박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푸우….”

그리고 곯아떨어졌다.

“하.”

이안은 혼자서 곯아떨어진 아기 고양이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참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호랑이와 아기 고양이의 밤이었다.

***

그 이후에도 나와 호랑이는 싸우지 않은 상태로 사이좋고 평화롭게 잘 잤다.

그러니까, 잠을 잘 잤다는 말이다.

 실수로 자다가 호랑이의 얼굴을 발로 꾹 눌러 백호의 얼굴에 내 발자국이 남았다든가, 백호의 머리카락을 실타래 엿으로 착각해 행복한 기분으로 잘근잘근 씹으며 잤다든가 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있는데, 그건 아주 사소한 문제이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하여튼 나는 상당히 게으르게 잘 지내고 있다.

“냐아암-.”

눈을 뜨고 대자로 누운 상태에서 고개만 휙휙 돌려 방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이 방이 그 백호의 방이라니.’

어딘가 익숙했던 방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럼 탑이나 고양이 집 같은 것들도 이안이 주문한 걸까.’

마음속에서 이안에 대한 호감도가 쭉쭉 올라갔다.

이안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원래 등 따신 상태로 잘 먹고 잘 자게 해 주면 나쁜 사람 아니라고 했는데.

나는 킹사이즈보다도 더 큰 침대 위에서 대굴대굴 굴러다녔다.

‘원래 침대를 넓게 만든 건 이리저리 굴러다니게 하려고 그런 거야.’

호랑이가 누워도 컸던 침대는 어찌나 광활한지 이리저리 굴러다녀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리다가 굴러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내 털.’

나는 침대 위를 걸어 다니며 내가 굴러다닌 곳을 샅샅이 살펴봤다.

다행히 털이 뭉텅이씩 빠져 있진 않았다.

‘아직 탈모는 아닌가 보네.’

요즘 탈모 걱정이 부쩍 늘었다.

마음속에서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으… 털이 다 빠진 아기 고양이가 되는 건 상상만 해도 싫어.’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침대를 돌아다녔다.

침대가 폭신폭신해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발이 폭폭 빠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어제 이안이 잤던 자리는 휑하니 빈 상태로 차게 식어 있었다.

침대에서 자지 않았던 것처럼 자리가 차게 식은 걸 보아하니 거의 새벽부터 나가 할 일을 하러 간 것 같은데, 참으로 부지런한 호랑이다.

‘나는 절대 저렇게 부지런히 못 살아.’

‘이츠 임파서블.’

똑똑.

“고양이님, 저 들어갈게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지만 어딘가 묘하게 발랄한 것 같기도 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냐아(들어와).”

분명 머릿속으로는 인간의 말을 생각하고 내뱉는데 입 밖으로 “냐아.”, “냐옹.”과 같은 고양이 말이 나오는 건 십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생각과 말이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고양이의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게 된다.

어차피 해도 고양이도 못 알아듣고, 수인들도 못 알아듣고 모두가 못 알아듣는데,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고양이들이라도 알아들으면 고양이들이랑 떠들면서 놀기라도 했을 텐데.’

마리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 고양이님, 점점 일찍 일어나고 계시네요.”

미안한데 지금은 해가 정중앙에 있는 시간인데.

어떤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있을 수도.

하긴 그래도 며칠 동안 내리 잠만 잤었던 첫날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긴 했다.

마리는 장하다는 듯 내 턱을 쓰다듬어 주곤 나를 안아 욕실로 데려갔다. 나를 안는 마리의 폼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능숙해졌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원래 오랫동안 자는 게으른 고양이가 아니다.

시몬드가에서는 ‘그날’ 이후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의식을 잃고 있어서 피로가 누적된 거일 거다.

‘시몬드가에서도 오래 자긴 했지만.’

그건 고양이의 습성 아닐까.

굳이 오랫동안 잔 것에 대한 변명을 굳이 해 보자면, 여기는 시몬드가 보다 훨씬 따뜻하다. 특히 이안이 있을 때 훨씬 따스하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북부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포근한 이불과 푹신한 침대, 그리고 완벽한 암막 커튼까지. 이런 환경은 오래 자지 않고는 못 배길 수준이었다. 마치 잠을 자기 위해 만들어진 방 같았다.

‘그런 방에서 오래 자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

‘게다가 여기는 사람들이 깨우러 오지도 않는데, 어떻게 일찍 일어나.’

나는 혼자 속으로 완벽한 자기합리화를 마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양이님, 오늘은 이 저택에 있는 방들을 구경하실 건가요?”

‘여기 구경할 수 있어?’

“오늘은 저택을 구경하실 수 있을 거예요.”

마리는 익숙하게 내 털을 수건으로 탈탈 털면서 말했다. 어느덧 숙련된 집사가 다 되어 가고 있다.

몇 개의 방을 제외하면 저택에 있는 어느 방이든지 자유롭게 봐도 된다고 그녀가 말했다.

바로 어제 이안이 허락해줬다면서.

그 호랑이가 허락한 것이 놀라웠지만 정원을 산책하거나 혼자만 노는 것이 심심하던 찰나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오늘의 할 일이 정해졌다.

마리가 내 털을 다 털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문 앞으로 달려갔다.

‘마리, 가자!’

나는 문고리를 돌리기 위해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나 내 앞발이 손잡이를 잡을 턱도 없었다.

슬프게도 손잡이에 닿기에는 손잡이가 너무 높이 있었다. 내가 짧은 게 아니라.

내 앞발은 손잡이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마리를 기다렸다.

“미야아옹!(마리, 빨리!)”

어서 나가고 싶은 마음에 앞발을 흔들며 마리를 재촉했다.

마리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문을 열었다.

방문이 소리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방문을 열자 푸근하게 생기신 할아버지가 문 앞에 서 계셨다.

정장을 입고 있고 얼굴에 연륜이 녹아 있는 것을 보아 이 저택에서 꽤나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곰돌이 풍이 생각나는 이미지였다. 그 하의 실종 상태로 빨간색 티셔츠 입고 가끔 꿀통 들고 다니는 곰 있잖아.

“안녕하십니까. 고양이님, 오늘 하루 저택 안내를 맡은 이 저택의 총 집사입니다.”

“오늘 하루 이 저택에 대해 속속히 잘 아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뭘 알아…?’

내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데.

설마 저택의 유래와 역사 같은 얘기를 해 주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이 저택을 내가 이해해야 할 이유도 없는데.

순간적으로 푸근하게 웃고 계시는 총집사님이 전생에서 올라온 옛날 과외 선생님으로 보이는 건 왜일까.

마치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어디가~ 공부해야지.’라는 무서운 말을 내뱉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급격하게 탈주하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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