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온 원흉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서글서글한 흰 셔츠와 편안할 것 같은 검은색 긴 바지만 입은 그는 팔짱을 낀 상태로 문 쪽에 기대어서서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려 웃고 있었다. 막 씻은 모양인지 머리칼에서 물이 한두 방울씩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지면서 셔츠의 어깨 부분을 적셨다.
그러자 그가 하얀색에 가까운 은빛이 도는 머리칼을 한 번 털었다.
묘하게 관능적인 느낌이 드는 그에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곤 그에게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주춤 뒤로 물러섰다.
시몬드 정원에서 그와의 첫 만남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절대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기억이 되살아나자 자연스럽게 경계가 되었다. 내 털이 부풀어 오르고, 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있던 터라, 뒤로 물러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테이블에서 밑으로 떨어지면 다른 고양이들보다 몸이 허약한 나는 점프력이 아무리 좋아도 발목 정도는 가볍게 부러질 것이 자명했다.
내가 뒤를 보고 떨어질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하는 사이, 그가 다가와서 초콜릿 쿠키가 담겨 있는 접시를 가져갔다.
‘아. 초콜릿 쿠키 하나도 못 먹었네. 먹고 싶었는데.’
죽더라도 먹고 죽는 게 좋은데. 내 몸이 아픈 건 나중의 일이었다.
나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떠나가는 초콜릿 쿠키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초콜릿 먹으면 안 돼.”
‘나는 수인이어서 먹어도 될 텐데.’
내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불만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넌 음식도 잘 못 먹잖아.”
이안은 방에 있는 종을 흔들곤 말했다.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담백한 쿠키 가져와.”
초콜릿 쿠키를 받은 시종은 군말 없이 허리를 숙이고 조용히 나갔다.
나는 허망하게 떠나가는 초콜릿 쿠키를 바라봤다.
저 간식이 내 것이 아니었다니. 절망적이었다. 아무래도 책상 위에 있는 간식은 저 수인을 위한 간식인 게 틀림없었다.
하긴 어쩐지 밥그릇에 맛없는 당근만 잘게 잘려서 올라와 있더라. 나 채소 싫어하는데. 당근은 너무 싫고 셀러리는 더더욱 싫어.
‘근데 쟤 왜 왔지…?’
목숨을 구걸했던 첫 만남이 썩 좋지 않았기에 혼자 온갖 생각들이 다 몰아쳤다. 날 죽이러 왔나? 아닌데. 그때 나 살려 준다고 했었는데. 그럼 저 초콜릿 쿠키를 바꾸러 온 건가…? 근데 굳이 저 초콜릿 쿠키를 바꾸겠다고 한 가문의 가주가 여기까지 행차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여기 온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나 보러…?’
아. 이건 좀 에바다. 김칫국 너무 많이 마셨는데.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내 방이니깐 왔지.”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역시. 김칫국 마셨으면 부끄러울 뻔했어.
이안의 어투는 산을 보고 산이라 하고 물을 보고 물이라 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지극히 당연하고 가벼운 어투였다.
‘그렇구나. 네 방이어…서… 응…?’
하지만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냐아?!?(네 방이라고?!?)”
아무래도 이안이 말할 때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이건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인 것이 분명했다.
헐.
내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니야. 얘가 날 놀리려고 거짓말하는 걸 거야. 도대체 얘가 왜 나랑 같은 방을 써. 소설에서도 여주인공이랑 같은 방은 쓰지도 않았는데.
쟤 다른 수인들은 안 좋아하는 거로 아는데. 아니, 안 좋아하는 걸 넘어서 거의 혐오하는 걸로 알았는데.
‘그런데 쟤가 동물을 좋아했어?’
아니. 절대 안 좋아했다.
그럼 도대체 왜.
나는 잠시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현실을 인정했다.
어쩐지. 일개 고양이에게 주는 방치고는 엄청 넓더라.
방에 있는 장식도 유독 휘황찬란했어.
침대도 너무 좋았고.
욕실도 너무 넓더라.
나는 새삼스레 고개를 휙휙 돌려 방을 다시 봤다.
방 안에는 디x니 랜드에나 있을 법한 방 천장까지 이어진 탑이랑 앉으면 폭 꺼지는 푹신푹신한 쿠션, 들어가긴 부담스럽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엄청 아늑한 고양이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 등 모든 게 그대로 있었다.
얘 설마 자기 방에다가 저런 물건을 가져다 놓은 거였어…?
어딘가 저 익숙한 물건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안 카델리온도.
쟤가 저 물품들을 사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근데 일주일 동안 생활하면서 나는 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같은 방에서 생활했으면 한 번 정도는 봐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어떻게 같은 방인데 한 번도 보지 못할 수가 있지.
나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았다.
‘아닐 수….’
“너는 항상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잖아.”
대수롭지 않은 그의 말이 내가 잡고 있던 마지막 희망의 끈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 그럼 내가 자는 동안 와서 자고 간 거야?’
“응. 같이 잤지. 같은 방에서. 너는 자느라 몰랐겠지만.”
나 왜 납득하고 있지.
잠시만.
와, 그럼 나는 지금 건장한 18세 수인 남자랑 같이 잔 거야? 한 침대에서?
믿기지 않는 사실에 나는 테이블 끝에 서 있는 상태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이 파렴치한 호랑이야. 내가 아무리 새끼 고양이라고 해도 그렇지. 나 19년 살았는데. 알 거 다 아는 나이인데. 내 눈가가 파르르르 떨렸다.
나는 호랑이를 세상 파렴치한을 보는 듯 쳐다보았다.
“왜. 할 말 있어?”
그가 뻔뻔스레 사르르 웃으면서 능글맞은 어조로 말했다. 팔짱을 낀 상태로 벽에 기대서 말하는 게 날아 차기를 한 대 날려 주고 싶은 태도였다.
‘저… 저, 뻔뻔한!’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서 이안에게 도끼눈을 뜨고 당장이라도 뛰어오를 것 같은 자세로 몸을 둥글게 말아, 그를 노려봤다.
목숨을 구걸한 지 일주일 만에 싸울 것 같았다.
하지만 잘생긴 얼굴 덕분인지 힘을 빡 주고 노려보고 있던 눈이 느슨해져 헤실거릴 뻔했다.
안돼. 아무리 잘생겨도 이건 넘어갈 수 없어.
나는 힘이 풀린 상태로 헤실거리려고 하는 눈에 다시 힘을 주고 호랑이를 바라봤다.
“뭐.”
더 말해 보라는 듯 이안이 턱을 살짝 들고 입꼬리를 유려하게 끌어당겼다. 반짝이는 은발이 사라락 흐트러졌다. 가늘게 휘어진 눈꼬리에서 이 상황을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분명 저 반응을 보건데,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리 와서 해명해.’
강렬한 충격에 나는 초반에 두려워했던 기억을 잊고 당당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 오른쪽 앞발을 까딱거린 뒤, 테이블 위를 탁탁 쳤다.
‘해명하라고.’
조그마한 까만색 솜뭉치에서 강렬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솜뭉치와 부딪힌 테이블에서 작게 팡팡 소리가 났다.
이안은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느슨하게 걸터앉았다. 그가 턱을 괴곤 나를 바라봤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진짜?’
나는 눈을 가늘게 떠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응. 단지 같은 침대에서 잔 거야.”
‘너… 너!!’
내 수염이 파르르르르 떨렸다.
고양이가 앉아 있던 상태에서 솜뭉치 같은 발을 두어 번 구르며 벌떡 일어났다. 너무 놀라서 입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뭐?!!? 아무 짓도 안 했다면서!’
“같은 침대에서 숙면을 취했다고.”
‘야, 말을 제대로 해야지!’
나는 괜히 머쓱해져 다시 제자리에 편히 앉은 뒤, 꼬리를 밑으로 말았다.
그래… 믿는다. 네가 아무리 여주인공을 감금해서 이런저런 일을 벌인다고 해도 설마 자기가 데리고 온 아기 고양이에게 이러진 않겠지.
마음 같아선 당장 이 테이블을 내려가고 싶었다.
아니,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테이블에서 내려가기 위해서는 접시와 컵 같은 여러 장애물을 통과해야 했다. 심지어 무사히 바닥에 안정적으로 닿으려면 엄청난 점프력과 집중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설마 날 그렇게 파렴치한으로 본 거야…?”
내가 눈을 사선 아래로 내리깔아 그의 눈을 슬쩍 피했다.
“와. 너무한데.”
그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내리깔았다. 곱고 기다란 속눈썹에 음영 진 눈동자가 호수에 비치는 달 같은 애처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런 얼굴은 반칙이잖아.’
나는 그를 한 번 더 슬쩍 쳐다보고 다시 시선을 피했다.
분명 저 얼굴이 나를 놀리기 위해 만들어 낸 얼굴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와 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매정한 고양이.”
의자에 걸터앉아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한마디씩 툭 내뱉었다.
“살려 줬더니 살려 준 은인도 안 보러 오고.”
그건 네가 멋대로 죽이려고 했던 거잖아! 그래도 살려 준 건 고맙게 생각해.
속으로 갖은 변론이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들었다.
얼굴을 보면 왠지 바로 사과할 것 같았기에.
“은혜도 모르는 고양이.”
‘…은혜도 모르는 고양이라니.’
이래 보여도 나는 은혜는 갚는 고양이거든. 은혜 갚는 고양이 못 들어 봤어?
나는 발끈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 미친 얼굴과 내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근데 그렇게 말하면 괜히 미안해지잖아.’
집 나가서 있지도 않은 양심이 저 얼굴을 보니 괜히 아파져 왔다.
“주인을 파렴치한 보듯이 쳐다보고.”
‘그건 미안해. 내가 오해했다.’
결국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이안에게 다가가 이안의 손바닥을 앞발로 쿡하고 눌렀다. 첫 만남 때와 달리 장갑을 끼지 않아서 그런지 그의 손을 잘 관찰할 수 있었다.
‘검을 잡아서 거칠 줄 알았는데.’
말랑말랑한 젤리가 따뜻한 손바닥에 닿았다.
그와 내 발이 맞닿은 순간, 이안이 아무 말도 없이 내 앞에 자기 손바닥을 펼쳤다.
‘…뭐 어쩌라고?’
나랑 보리보리 쌀이라도 하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보리보리 쌀이 그렇게 하고 싶니? 나는 앞발을 이안의 손 위에 빠르게 올려놨다가 뗐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은 여전히 펴져 있었다.
나는 갸웃거리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이안의 손바닥을 꾹꾹 눌러도 보고 머리도 대 보고 앞발을 올린 상태로 악수하듯이 흔들어 보기도 하고 섬세한 컨트롤로 부서지지 않게 담백한 쿠키를 물어 그의 손 위에다가 올려 주기도 하는 등 별짓을 다 해 봤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첫 만남 때처럼 문제 내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푸는 사람만 때려 맞춰야 하는 속 터지는 퀴즈가 계속됐다.
설마 올라타라는 건가…?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싱긋 미소만 걸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맞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감히 내 손 위에 올라타다니. 하고 나를 높게 들어서 떨어트려 버리면…?’
와. 상상하기도 싫어. 내가 예전에 살자고 꽃 물고 내 앞발까지 흔들었었는데.
‘그래도 죽일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닌데….’
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살포시 올라가 앉았다.
그러자 이안은 잘했다는 듯이 눈꼬리를 만족스럽게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