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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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에서 본 욕조는 매우 넓고 깊었다. 과장 하나 없이 호랑이는 물론이고 하마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하긴 호랑이가 편안히 씻으려면 하마 정도는 들어가야 하는 크기의 욕조가 맞겠지. 호랑이가 욕조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놀 수도 있을 텐데.

‘욕조가 꽉 끼면 불편해서 편하게 못 씻지.’

마리는 그녀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를 조심스럽게 욕조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나는 욕조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욕조가 너무 넓어 나 혼자 욕조에 들어가 있으니 홀로 외딴 섬에 떨어진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를 욕조에 내려놓은 마리가 능숙하게 물을 틀기 시작했다.

샤아아아아.

넓은 욕조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이 내 발목을 넘어 허리까지 찼는데도 불구하고, 마리는 물을 잠그지 않았다.

저 물이 욕조에 가득 차면 나 익사할 텐데.

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실수로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왠지 이 저택에 와서 다른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은 목숨의 위협을 많이 받는 것 같다.

‘마리, 마리. 물 좀 잠가 줘.’

나는 너와 같은 종족이 아니라고.

나는 욕조에 담긴 물을 앞발로 치며 다급하게 마리를 쳐다봤다.

찰박찰박. 하고 물을 치는 소리가 났다.

생존을 위한 SOS 신호였다.

마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물놀이가 재밌으세요?”

‘물놀이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나는 속으로 절망했다.

어떻게 생존을 위한 구조 신호가 물놀이가 되는 거야.

‘물 잠가 줘!’

나는 계속 찰박찰박 물을 치며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마리는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린 상태로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19년 살고 이렇게 죽는 것인가. 허무하게.

내 묘비명에 ‘사인- 목욕하다가 익사로 사망.’이라고 적히는 거야?

다행히 나를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던 듯, 마리는 곧 욕조에 물을 잠그고 나를 씻기기 시작했다.

원래 고양이들은 물을 싫어해 씻기려면 버둥거리면서 난리를 쳤겠지만, 나는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었기에 내 몸을 마리의 손에 맡긴 상태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어제오늘 겪은 엄청난 일들 덕분에 온몸에 진이 빠져 버둥거릴 힘이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내가 어쩌다가 카델리온 저택에 오게 되었을까…….’

북부의 카델리온.

남부의 세르디한.

서부의 아쉴라.

동부의 마르코스.

그리고 중앙의 자유 도시까지.

크게 보면 대륙은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혼돈의 시대가 끝나고 수인들은 서로 싸우는 것에 지쳐, 각 지역의 대표들이 그 지역을 통치하기로 했다.

그렇게 수인들은 가장 강한 가문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는 특별한 대표를 두지 않고 네 명의 수장에 협의에 의해 자유롭게 운영되는 중앙을 제외하면, 크게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총 4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금의 수장 가문을 결정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수장인 가문이 대대로 그 지역의 대표를 맡고, 만약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현 수장을 죽이면 된다. 마치 신하가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일은 초대 수장을 정한 이후로부터 세어봐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문 일이다.

‘최근에는 수장이 많이 바뀌었네. 십몇 년 사이에 두 번이나 바뀌었을 정도면.’

여태까지 서부의 아쉴라와 동부의 마르코스를 제외한 북부와 남부는 한 번도 수장 가문이 바뀐 적이 없었다.

그중 현재 내가 있는 카델리온 가(家)는 얼음의 방패이자 창이라고 불린다.

공식적인 칭호는 얼음의 수호자.

북부의 산맥에서 마물로부터 위협을 막아 내기에 그런 칭호가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카델리온 가문이 다 말도 안 되게 강하고 무엇보다 성질이 더러워서’ 눈의 수호자로 불릴 수도 있는 것을 굳이 얼음의 수호자라고 불린다는 쪽에 조금 더 비중을 두는 편이다.

“괜찮으세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리가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물었다. 뭉친 부분을 꾹꾹 눌러 주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이건 재능이다.

‘응응. 아주 좋아.’

나는 흐뭇하게 골골거리며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인간이 되고 돈이 생기면 마리에게 은혜를 갚을 겸, 마사지 샵을 차려 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여튼, ‘그’ 카델리온에서 현재 가주 후계자인 이안 카델리온은 역대 카델리온 가주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하다.

전장에서 그를 보았던 사람들은 그를 보고 수인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책에서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었다.

『황금빛 치유계 페로몬을 두르고 광휘와 함께 적들을 도륙해 나가는 모습은 수인에게서 볼 수 없는 위압감을 만들어 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개미 떼처럼 무수한 적들이 칼끝에 쓸려 나갔다. 그의 상처들은 생기는 즉시 바로 치유되었고, 그 모습을 본 자들은 아군과 적군 상관없이 경탄했다.

적들을 섬멸하는 그 모습은 잠시 무료함을 느껴 현실 세계에 잠시 내려온 전쟁의 신 같았다.』

하지만 실력과 성격은 반비례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안 카델리온은 그 대표적인 표본이다.

이 책의 남주인공은 미친놈이다. 그것도 하필 엄청 센 미친놈. 책에서는 그가 역대 카델리온의 가주 중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정신 나갔다고 했다.

원래 똑똑하고 힘 있는 애들이 미치면 답도 없다더니, 진짜였다. 누가 대륙에서 손꼽을 정도로 큰 상단의 주인을 감금할 생각을 하느냐고.

‘아니, 좀 더 위에. 응응. 거기 거기. 딱 좋아.’

나는 만족스럽게 마사지를 받으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피폐 소설 속에서의 여주인공인 ‘클로에’는 상단의 주인이었다.

그것도 대륙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라고 했나? 일곱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라고 했나?

아무튼. 중요한 건 클로에의 상단이 엄청 크다는 거다.

그렇기에 카델리온 저택에서 탈출을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탈출 시도 중에서는 거의 성공할 뻔한 적도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원작에서 그녀는 꽤 많은 수인의 도움을 받아 탈출 시도를 하는데, 모조리 다 실패하게 된다.

‘특히 뱀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려고 할 때 거의 성공할 뻔했었지.’

이안은 저택에서 나가려는 것을 실패한 그녀에게 탈출 시도가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는지, 그녀가 저택에서 나갈 수 있게끔 도와준 사람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녀에게 일일이 친절하게 얘기해 준다.

잔인하게도, 이렇게 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거야.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마치 다음번에는 성공해 보라고 조롱하는 것처럼.

‘굳이 이런 데서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는데.’

클로에의 탈출 시도가 잦아지자 어느 날 그는 여주인공의 모든 것이었던 그녀의 상단을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괴멸시킨다.

그리고, 탈출하려고 수인들을 기다리는 클로에를 향해 그들의 머리를 던져 주며 사르르 해맑게 웃는다.

그러곤 말했다.

상단이 없어졌노라고.

클로에는 좌절에 빠지며 이안에게 상단 사람들은 살려 달라고 그에게 울면서 청했고,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상단의 괴멸 과정을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상단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책 속에서 그녀에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뭘 받을지 기대하는 어린이같이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상단의 최후는 상당히 처절하고 잔인했다.

순간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털자 털에 묻은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고양이님 목욕을 그만하실 건가요?”

내가 턴 물방울에 잔뜩 맞은 마리는 물방울 세례가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를 끼치지 않는지, 덤덤하게 수건으로 내 몸을 부드럽게 닦았다. 물방울들이 잔뜩 튀겨 옷이 젖은 마리를 보자 내심 미안해져 왔다.

하지만 정작 자기 옷이 물에 젖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녀가 내 몸에 마저 남아 있는 물기를 탈탈 털었다.

‘와. 완전 시원해.’

털을 탈탈 터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역시 마리는 마사지 샵을 차려야 해. 처음 보는 수인이지만 호감이 샘솟았다.

마리는 어느 정도 내 몸에 남아 있는 물기를 수건으로 탈탈 턴 후, 나를 들어 올리려고 내 몸을 잡았다.

‘아… 그거 싫은데….’

이렇게 대롱대롱 들려 다니는 거 오늘 이후로 다시는 안 한다. 정말.

여기 와서 10번 넘게 해 본 다짐을 다시 하며 눈을 꾹 감은 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내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지!

너무하네.

‘으아악… 너무 높아….’

들어 올려질 때마다 마치 애벌레 랜드의 추락하기 직전, 점점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었다.

새끼 고양이 시선으로 성인 여성이 들어 올린 높이를 보았을 때, 바닥이 까마득하게 멀리 느껴졌다. 나는 호달달달 떨리는 두 앞발을 마리의 손 위에 꼭 올려놓았다. 목숨줄을 잡는 절박한 몸짓이었다.

‘없던 고소공포증도 생기겠어….’

원래 고소공포증이 좀 있긴 했는데.

나는 바닥을 보던 두 눈을 꾹 감았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하자….’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다섯 마리… 이건 아니야.

참새 짹짹, 병아리 삐약삐약, 오리 왈왈… 무슨 오리가 왈왈이야. 왈왈은 개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왈왈하니깐 이안 카델리온이 생각나는 건 또 뭘까. 걔는 미친개가 아니라 호랑이라고.

‘와. 나는 그 호랑이 저택에 있네.’

새삼스레 내 상황이 놀라웠다.

호랑이 저택에 있는 아기 고양이라니.

이런 경우는 예상한 적도, 바란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이 보이지 않는 물음에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져 왔다. 방금 씻고 와서 그런지 몸이 녹진해졌다. 몸이 노곤해지기 무섭게 졸음들이 다시 밀려들었다.

눈을 감았더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깜깜한 것이 앞으로의 내 미래 같았다.

‘아… 분명 나 25시간 잤댔는데….’

이상하게 이놈의 잠은 자도 자도 또 온다.

나는 노곤한 몸을 마리에게 매달린 상태로 축 늘어뜨리곤 다시 잠들었다.

***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일주일 동안의 카델리온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감금은 개뿔, 나를 데려온 남주는 항상 일하느라 바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너무 좋았다.

그렇게 나는 항상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전형적인 한량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마리가 어째 눈 뜬 시간보다 눈 감은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보면 할 말 다 했지 뭐.

‘역시 행복한 백수 라이프….’

연분홍색 쿠션이 내가 올라가자 푹 꺼졌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자는 방에 하나둘씩 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방이 점점 안락하게 바뀌기 시작해 들어오면 벗어날 수 없는 마약 같은 방이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지금 내가 올라가 있는, 엄청 폭신폭신해 보이는 방석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휘황찬란하게 생겨 머리 박고 밥만 먹어야 할 것 같이 생긴 밥그릇에다가 안에 들어가기도 황송한 고양이 집이라고 추정되는 공간, 천장까지 연결되어 마치 오x의 마법사에나 나올 법한 방 안에 있는 탑까지…….

이제 곧 방 안에서 모험을 떠나는 아기 고양이 용사 이야기를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양이님.”

늘어져 있는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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