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5/111)

4.

“알겠어. 살려 줄게.”

‘고마워.’

살았다! 성공했어. 남주로부터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고! 나는 속으로 축배를 들었다.

‘안녕! 만나서 무서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앞발을 흔들며 인사했다. 묘하게 씰룩거리는 입꼬리와 행복감으로 바르르 떨리는 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개구멍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탈출은 시도에서 그쳤다.

개구멍에 몸이 반도 들어가기 전에 나는 커다란 손에 의해 붙잡혔다.

커다란 손이 내 몸을 느슨하지만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다.

나는 손안에 붙잡힌 채로 그 안에서 나가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앞발이랑 뒷발을 휘저어봐도, 그 큰 손안에 있는 내 몸은 앞발이랑 뒷발만 움직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물 안에 걸려 밖으로 나가기 위해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기분이 이런 기분인 걸까.

나는 결국 손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곤 황당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뭐지…? 이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남자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여러 번 쳐다봤다.

남자의 손이 개구멍으로 못 빠져나가도록 나를 붙잡고 있었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내 모습을 본 남주는 나를 들어 올려 자신의 눈과 내 눈을 맞췄다.

평소였으면 감탄만 내뱉었을 것 같은 그 오묘한 파란색 눈은 나에게 배신감만 불러일으켰다.

‘야! 살려 준다며!’

억울함에 내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놓아준다고 했잖아!’

나는 짧은 팔과 다리들로 열심히 항변했다. 살려 준다고 했으면서, 못 가게 잡는 건 뭐야. 나 나가게 해 준다는 거 아니었어…?

살려 준다고 했잖아.

희망 고문했던 거야?

생각할수록 분했다.

‘내가 어떻게 노력했는데.’

이렇게 죽는 건 너무 억울하고 슬픈데.

억울해서라도 이렇게는 못 죽는다.

눈앞이 뿌예지고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툭 치면 얼굴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질 것 같았다.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남주가 눈꼬리를 살짝 휘었다.

“내가 살려 준다고 했지. 도망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겠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가 내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어쩐지 저 서늘한 눈에서 짓궂은 장난기가 보인다면 내 착각일까. 제발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뭔가 감당 못 할 것 같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 거야. 그래. 기분 탓이야. 기분 탓이어야만 해.

저 위대하신 분을 내가 어떻게 감당해.

여주도 감당 못 한 저분을.

나는 턱을 치켜들고 남주를 바라봤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연두색 눈에는 눈물이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남주는 내 눈을 보더니 어느새 모여 있는 그의 부하들이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나를 들고 말했다.

“얘도 데려간다.”

이…… 미친…….

‘야!! 도대체 나는 왜 데려가는데!!!’

정말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뭐가 어떻게 됐나.

나는 황당함을 넘어 놀라움으로 인해 벌어지는 입을 닫지 못했다. 방금까지 차오르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마 이것보다 더한 눈물 퇴치법은 없을 거다.

‘그렇게 아무거나 주워 가는 거 아니라고!’

연두색 눈동자에서 강렬한 레이저가 쏘아져 나왔다.

‘어렸을 때 아무거나 줍는 거 아니라고 안 배웠냐!!!’

하지만 상대는 호랑이였고, 나는 그 손에 대롱대롱 들린 그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아기 고양이였다.

내 앞에 있는 흉포한 호랑이가 지금 상태 그대로 나를 손에 말아 쥔 다음, 조금만이라도 힘을 세게 쥐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목숨은 날아가 있을 거라고 나는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내 앞에 있는 호랑이는 그냥 호랑이도 아니고, 방금 내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수인 한 명을 죽인 정신 나간 호랑이였다.

그것도 정신이 매우 많이 나간.

그리고 그는 지금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 그 검을 쥐고 있었다.

하룻고양이 범 무서운 줄 아는 나는,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쥐고 있는 호랑이 앞에서 쫄아서(절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가 벌어져 있는 내 입을 친절하게 살포시 닫아 주었다. 정말로 나를 데리고 가기로 마음을 굳힌 듯, 그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나를 올려두었다.

‘쟤가 날 도망가게 내버려 둘 것 같지도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현실을 빠르게 순응했다. 그리곤 이안의 손바닥 위에 앉아 그나마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울분에 찬 나의 내적 외침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

결론만 말하자면, 참 다행스럽게도 지금 나는 세상과 작별하지 않고 잘 살아 있다.

그래. 어제 나는 죽지 않았다.

꿀잠을 자 버린 것이 문제지만.

‘어떻게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위에서 잘 수가 있는 거지.’

물론 살려 준다고 하긴 했지만.

‘심지어 중간에 한 번도 안 깨고 푹 잤어. 나는 정신이 나간 걸까.’

남주가 나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이후, 처음 느껴본 온기 때문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쓰러졌다.

아니, 원래 잘 안 그러는데.

‘심장에 서리 낀 것같이 맨날 덜덜 떨면서 다녀서 그런가.’

이 세계에서 처음 느껴 보는 온기는 나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머리 박자.’

심지어 언제부터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그런 것보다 반쯤 닫혀 있는 상태에서 내려가는 눈꺼풀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나는 꾸벅꾸벅 조는 것에 집중하다가 결국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 보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아… 눈 떠 보면 익숙한 천장이 보일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겨우겨우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상태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대자로 가만히 누워 내 발을 움찔거렸다.

‘도대체 어떤 점이 이안 카델리온의 호기심을 자극한 거냐고.’

분명 이 상황은 원작에서도, 내가 예상했었던 상황에서도 없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행했던 행동이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괴상한 행동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 그래도 등 따습게 잤으니깐 좋은 걸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잘 모르겠다.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안 돌아가. 나는 가만히 누운 상태로 눈만 도르륵 굴리며 방 안을 살펴봤다.

‘무슨 방이 뭐 이리 넓고 화려하지. 침대도 엄청 넓고.’

생각보다 매우 넓은 방에 내심 놀라며 기지개를 쭉- 켰다.

“냐아아암-.”

그렇게 잤는데도 졸리다.

자도 자도 졸리다. 이게 바로 묘체의 신비인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약간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님. 고양이님의 전담 시녀가 된 마리라고 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냐아…?”

졸음에 푹 빠져 비몽사몽 대답을 하자,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젊은 여자가 들어와 창문에 처져 있는 커튼을 걷었다.

“고양이님, 기침하셨나요?”

“냐아….”

윽. 햇빛 싫어….

시녀가 커튼을 걷자 방을 비추는 밝은 햇빛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밝은 햇빛을 보아하니, 다른 수인들은 점심을 먹고 있을 정도의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밥 대신 잠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시몬드가에 있을 때, 땅바닥에 버려져 있는, 음식물 쓰레기만도 못하는 밥을 앞에 두고 내가 자주 했던 선택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햇빛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뭔가 지이익 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기분 탓일 거다.

베개 밑으로 들어가자, 나에게 다가오는 햇빛이 방금 전보다는 약하게 느껴졌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역시 자고 일어났을 때는 어둡게 있어야지.

하지만 내게 행복감을 안겨 주었던 어둠은 딱 10초 후에 끝이 났다.

“고양이님, 주무신 지 하루하고도 한 시간이 지나셨어요. 다시 주무시게요?”

마리가 베개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니, 안 잘 거야. 근데 햇빛이 너무 밝잖아.

나는 내 의사를 피력하기 위해 슬그머니 엎드려 있던 상태에서 앉은 자세로 바꾸고 꾸물거리며 앞발로 내 눈을 가렸다.

새끼 고양이가 미적대며 자신의 앞발로 눈을 가리자 어디선가 ‘헙’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마리는 용케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알아들었는지, 방 안으로 들어온 햇빛을 자기 손등으로 가려 주었다. 눈앞에 그늘이 져 한결 편해진 나는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앞발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바로 내 눈앞에서 보였다.

블루베리 색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상태로 나를 바라보는 마리는 시녀보다는 기사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기사 중에서도 무감각하게 적들을 처리하는 사람. 감정에 동요하지 않을 것 같은 굉장히 침착하고 이성적이고 냉정할 것 같은 상이었다.

마리의 두 눈과 내 두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돌았다.

마리가 고개를 푹 숙이곤 조용한 목소리로 수줍어했다.

“고양이님, 목욕하시러 가실까요?”

잠깐. 너 뭔데, 왜 이렇게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수줍게 말해.

이성적이고 냉정할 것 같았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힘찬 동공 지진과 함께 한 발자국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고양이님 목욕 안 하실 거예요? 이안 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엊그제 개구멍을 이용해 꽃 따다 오셨다면서요. 잠드셔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셨는데….”

어딘가 묘하게 울적해 보이는 표정과 목소리였다.

아니. 하러 가자. 아까는 네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갑자기 볼을 수줍게 붉혀서 당황스러웠던 거였어.

나는 다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마리의 분위기가 확 밝아지더니, 자기 손으로 나를 잡았다.

“그럼 목욕하러 가실까요?”

‘으악!’

그녀가 나를 들어 올리며 번쩍 일어났다.

야! 날 잡아 들고 가라곤 안 했는데! 나 혼자 갈 수 있어. 나도 다리 있어. 나도 걸을 수 있다고. 나 잘 걸어.

나는 마리의 손아귀 안에서 버둥거렸다.

잡아들리는 기분 나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그렇게 버둥거리다가 밑을 봐 버렸다.

아니. 잠시만. 여기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여기서 떨어지면 추락사로 죽을지도 몰라.

‘여기서 떨어지면 무조건 추락사다.’

털 뭉치인 나에게는 심장이 벌렁벌렁해지는 너무 높은 높이였다.

나는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곤, 덜덜 떨며 내 앞발을 마리의 손에 꼭 올려 뒀다.

지금은 단지 마리가 손에 쥐고 있는 힘을 갑자기 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이 경험 다시는 하기 싫어. 절대 안 해.’

그렇게 나는 마리의 손에 대롱대롱 붙잡힌 상태로 욕실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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