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연스럽게 경계가 되었는지 털이 위로 솟아 내 몸을 부풀렸다. 하지만, 털이 아무리 부풀어도 티도 나지 않는다는 게 흠이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고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렇게 일어나서 주위를 살피는데, 셀레스틴과 그녀의 시녀들은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셀레스틴의 취향에 맞춰 겨울에 피는 꽃으로 꾸며 놓았던 정원의 꽃들은 새빨갛게 물든 채 이리저리 꺾여 있었다.
정원에 널려 있는 고용인들의 시체들. 그리고 작게 들려오는 비명 소리.
나는 당장 앞에 보이는 풍경에 사색이 되었다.
“…털 뭉치?”
그때 위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나를 지칭하는 것 같은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리고 나를 부른 사람과 제대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남주?’
망할.
휘이잉.
눈을 싣고 온 차가운 겨울바람이 둘 사이를 갈라놓듯이 매섭게 불었다.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사르륵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멋있고 단정하게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과 달리 내 털들은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마치 누가 털 뭉치를 잔뜩 꼬아 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것이 혼란스러운 내 마음과 같았다.
나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앞에 있는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부릅뜬 눈으로 정면에서 겨울바람을 맞느라 눈이 시려왔다.
하지만 만약 눈을 깜빡인다면, 그 사이에 저 무시무시한 은색 날붙이에 의해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악!”
그때, 바로 뒤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무언가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툭. 데구르르.
그래, 마치 저것처럼 죽을 것 같다고.
내 발 바로 앞으로 굴러온 것을 한 번 쳐다본 나는 바로 눈을 피했다. 눈을 뜨고 있는 머리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날 쫓아오고 있었던 감시자의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앞을 보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남주가 인상을 찌푸린 채 피가 묻은 자신의 칼을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 묻은 것처럼.
그 인성 파탄자가 시몬드 가문을 무참히 도륙하는 게 오늘이었어? 망할. 아. 내 인생. 산에서 내려오지 말걸.
‘셀레스틴은 죽은 걸까, 아니면 도망친 걸까. 어떻게 된 걸까.’
현재 내 주위에는 셀레스틴은커녕, 붉은 선혈을 뚝뚝 흘리고 있는 칼을 들고 있는 수려한 외모의 남자밖에 없었다.
고운 은색 실이 차르륵하고 쏟아질 것 같은 머리칼과 빙하를 담고 있는 것같이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 날카로운 턱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높은 콧대. 그리고 압도적으로 긴 다리와 완벽한 비율.
거기다가 검은 제복과 딱 떨어진 핏의 까만색 바지는 긴 다리를 더욱 길어 보이게 만들었다.
이렇게 보니 글로 읽었을 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마치 신이 영혼을 담아 공들여 조각해 놓은 것 같았다. 넋을 놓고 볼 만큼 지독하게 잘생긴 남자였다.
역시 잘생기고 예쁘다고 유명한 카델리온이었다.
성격은 더러워도.
그 남자에게서는 가만히 서 있어도 차원이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먹이를 궁지에 많이 몰아넣어 본 최상위 포식자인 티가 여실히 났다.
‘와… 존잘….’
내 앞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통을 잠시 잊게 해 주는 외모였다.
아니, 오히려 비교돼서 더 빛나 보였다.
호랑이들은 다 잘생겼다더니, 사실인가 봐.
나는 시녀들이 말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야.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맹수계 수인이 그렇게 잘생겼대.”
“은혜롭게 생겼다는데?”
“헐. 보고 싶다. 특히 카델리온가가 그렇게 잘생겼다는데.”
“보면 눈이 멀어 버릴 수도 있대.”
“야야, 너희 그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문?”
“카델리온가는 수인을 홀려서 산 채로 확, 잡아먹어 버린다는 소문.”
“아. 나는 그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잡아먹혀도 좋을 것 같아….”
그때는 ‘아니, 걔네가 구미호냐……. 사람 홀려서 잡아먹게.’라고 조용히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직접 보니, 사람 홀려서 잡아먹는다는 뜻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저건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얼굴이다.
‘와… 어떻게 수인의 눈이 저렇게 생겼지?’
전생이었다면 안경과 렌즈의 광고란 광고는 다 싹쓸이했을 것 같은데.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홀려 잠시 경계를 풀고 멍하니 그를 보던 중, 순간 느껴지는 한기에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리곤 앞발로 볼을 찰싹 때렸다.
정신 차려. 너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고.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은 이안 카델리온이야. 그 잘생긴 얼굴로 수인들을 홀려서 잡아먹는다는 그 카델리온.
경각심을 가져도 저 빼어난 얼굴에 홀려 힐끔힐끔 올려다보게 되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상상 이상으로 파급력이 컸다.
얼굴로 사람 홀려서 잡아먹는다는 시몬드가 시녀들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저 얼굴이면 아마 잡아먹어달라고 지원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할 것 같은데.
나는 이미 눈이 제대로 마주쳐 버린 거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얼굴을 열심히 감상했다.
잘생긴 얼굴 보고 죽은 고양이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저 남자의 얼굴이나 저 피 묻은 검을 보았을 때, 날 살려 주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껏 이렇게 고생만 하고 죽기는 여태까지 한 고생이 너무 아까운데.
‘당장이라도 도망갈까.’
마침 앞에 있는 남주는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자신의 까만색 장갑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도망가도 될 것 같은데.’
발을 빼기 위해 힐끗 눈을 내리니 앞에 굴러다니는 머리통과 눈이 마주쳤다.
만약 도망간다면 나도 저렇게 되겠지.
‘어떻게 해야지 살 수 있을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한번 엎드려 봐…?’
고민 끝에 나는 굴복한다는 뜻으로 슬며시 엎드렸다.
‘어차피 나는 너를 해칠 수 없으니까 제발 그냥 못 본 척 지나가 주면 안 될까, 남주야?’
나는 내 코가 바닥에 닿을 만큼 최선을 다해 납작 엎드린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힐끔 위를 바라보니, 앞에 있는 남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아무 반응이 없어? 이게 아닌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내 눈동자와 함께 나는 자세를 바꾸고 잠시 고민했다.
‘맞아. 전생에선 두 손을 모두 드는 게 항복한다는 뜻이었어.’
항복을 선언할 때 흰색 깃발을 좌우로 흔드는 사극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백기는 없으니까 손이라도 흔들어야 하나.’
나는 항복한다는 의미로 서서히 두 앞발을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저 가만히 서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앞발을 더 들라고…?’
나는 앞발을 더 높이 올렸다.
전생에서 무언가 잘못해 무릎 꿇고 손들 때 엄마가 ‘손들어!’라고 말한 직후처럼.
그리고 천천히 양옆으로 흔들었다.
꽤나 오랫동안 그런 행동을 하고 있으니 두 다리가 빠질 것 같았다.
‘자 이 정도면 됐지?’
나는 나름 뿌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망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히.
어쩐지 저 벽안이 온기 한 점 없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무시무시한 날붙이로 나를 죽여 버릴 것 같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인 걸까.
‘아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야? 대관절 어떻게 하라는 건데!’
도대체 저 앞에 있는 남자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하긴, 아직까지 내 머리와 몸통이 분리가 되지 않고 잘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긴 했다.
‘에휴….’
답답한 마음에 나는 눈치를 슬쩍 보고 한숨을 폭 하고 쉬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나 꽃 물고 있었지.’
‘살려 달라고 하는 부탁엔 뇌물이지.’
이 상황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나는 몇 시간 동안 산에서 그 개고생을 다 하면서 꽃을 땄다.
‘미친. 꽃 물고 그렇게 열심히 두 다리를 흔든 거야?’
순간 꽃을 물고 두 앞발을 들어 흔들었다는 생각에, 수치심으로 온몸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는.
‘자, 여기.’
이건 진짜 최후의 보루였는데.
‘가지십시오.’
특별히 겨울에 산까지 올라가서 따온 꽃입니다.
꽃 드렸으니, 살려 주세요.
부탁입니다.
마지막에 마지막 수단으로 여태까지 물고 있던 붉은 꽃을 살포시 구두 위에 내려놓고 그의 앞에 앉았다.
“뇌물이야?”
그러자 위에서 드디어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어딘가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응응.’
나는 재빨리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이거 가지고 빨리 가 주는 게 어떨까? 동물 하나 못 본 척 지나가는 건 해 줄 수 있잖아. 그렇지? 날 위해 한 번 정도는 자비를 베풀어 줘. 물론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똑같이 말하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목숨을 구걸하는 다른 사람들과 내가 별다를 게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그들이랑 다른 점이 뭐가 있지?’
그래! 남주야, 그래도 나는 꽃까지 줬잖아. 그것도 눈으로 뒤덮인 산에서 직접 따 온. 그거 귀한 꽃이야. 누가 바람 부는 산에서 직접 꽃을 따 와서 주겠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를 준 거라고.
남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구두 위에 있는 꽃을 집어 빙글빙글 돌렸다. 붉은색 꽃이 남자의 손안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그의 결정에 따라 간단하게 좌우되는 내 생명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간절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 후에, 꽃만 빙빙 돌리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살려 줘?”
‘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아기 고양이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는 것처럼.
있어. 희망이 있어. 나는 살 수 있을 거야. 혼자 마음속으로 자기 최면을 걸듯이 되뇌었다.
“흐음….”
남자는 무심하게 나를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꽃을 돌리면서 고민했다.
“내가 왜?”
헐.
‘야.’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매정한 호랑이 같으니라고. 한 번 정도는 살려 줄 수 있지.
‘자비 한 번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잖아.’
하지만 따질 필요도 없이 여기서 아쉬운 건 나였다.
‘잘 생각해 봐. 이 불쌍한 동물을 죽이면 너는 지옥에 갈 확률이 높아져. 지옥 알지? 무시무시하고 엄청 힘든 곳.’
나는 내 생각이 전달되길 바라며 생각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나를 살려 주면 그래도 지옥에 갈 확률이 조금이라도 적어진다고! 지옥에 가고 싶어? 아니잖아! 그리고 어차피 내가 너보다는 먼저 죽을 것 같으니까, 만약 오늘 네가 날 살려 주면 네가 지옥 재판에 가면 증인 정도로는 나가 줄 수 있어.’
나는 기대감 어린 눈초리로 그대를 쳐다보았다.
‘거기서 긍정적인 말을 해 줄게. 어때.’
그래.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도 무엇보다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기에 나는 마구잡이로 이어진 저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담긴 눈빛을 간절하게 쏘아 보냈다.
남자는 내 눈을 한번 쳐다보더니 꽃대가 휘어질 정도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빨간 꽃을 자기 앞주머니에 넣었다.
항상 내가 가져온 건 깡그리 버려 버리는 모습들만 봐서 그런 걸까. 남자가 꽃을 앞주머니에 넣은 모습을 보자 왠지 기분이 묘해져 콧잔등을 찡그렸다.
“으음….”
꽃을 앞주머니에 넣은 남자는 팔짱을 낀 상태로 손가락을 잠시 툭툭 두들기며 고민했다.
짧지만 영겁의 시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