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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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확히 전생에서의 모든 일이 기억 나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나는 교수님이 내주시는 과제에 치여 살았다. 무식하게 학점 많이 쌓는다고 빽빽한 스케줄로 수강 신청을 해놓은 내 탓도 있긴 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꽃다운 나이에 활짝 피지도 못한 상태로 죽었다.

내 전생은 과제에서 시작해 과제로 끝난 삶이었다.

그래도 검은 고양이인 것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온종일 갇혀서 실험당하고 맞는 것보다는 양반이었다.

전생에는 최소한 실험당하지도 않았고 혼자도 아니었으니깐.

슬프게도 내가 지난 생을 떠올린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내 주위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보통 소설을 보았을 때 전생을 기억하면 부모가 갑자기 죄를 뉘우쳐 후회하거나 딸을 어화둥둥 해 주거나 아니면 갑자기 남주인공이 짜잔하고 나타나거나 그러던데.

내가 전생을 기억해도, 내 주위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심부름을 빙자한 괴롭힘을 제외하고는 방 밖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마저도 감시하는 사람이 멀리서 한 명씩 따라오니, 할 수 있는 것도 달리 없었다.

내 인생의 장르가 갑자기 부둥부둥 받는 육아물이나 로맨스물로 바뀔 수는 없던 것이다.

아. 그래도 나에게는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여기가 어떤 책 속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은 꿈도 희망도 동심도 없는 피폐물이었다.

그것도 쓸데없이 더럽게 긴 소설의.

내용은 간단했다.

빈민가를 전전긍긍하던 여주가 할머니의 숨겨진 유산을 받아 땅을 사게 되고, 그 땅이 운 좋게 광산이어서 상단을 세워 대성공을 거둔 후 어느 날 미친놈인 남주에게 감금당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책에선 여주와 남주의 풋풋한 사랑은 개나 줘 버렸다.

개연성도 화끈하게 말아먹었고.

개연성 따윈 말아먹은 책이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우연’과 ‘운명’의 연속이었다. 작가는 ‘운명’이라는 말을 눈곱만큼도 없는 개연성을 이어 붙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남주가 여주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단지 남주의 미친 집착과 여주와 남주가 만나기 전의 여러 쓸데없는 사건들, 그리고 그 배경에 대한 묘사만 중점적으로 나와 있었을 뿐.

…애초에 사랑이 있긴 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놀라운 책이었다.

그때의 나는 단지 남주의 미친 집착을 보고 싶어서 이걸 읽은 걸까? 아니면 남아도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서 읽었던 것일까. 아직도 내가 그 책을 왜 읽었는지 의문이다.

하여튼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책 아주 앞부분, 극 초반에서 나오는 남주가 여주를 만나기도 전에 ‘처참히 도륙하는 시몬드가의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거.

전생을 기억하고 이 세상이 책 속 세상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12살짜리 여자애에게는 퍽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그날 밤새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튀자.’

이 거지 같은 가문이 남주에게 망하기 하루 전에 튀기로.

그렇게 튀어서 사업을 해 돈 많은 백수로 살기로.

…그렇게 나는 그날 인생 일대의 목표를 세웠다.

‘남주가 시몬드가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는 게… 이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지?’

책에서는 남주가 시몬드가 수인들을 한겨울에 쓸어버린다고 나와 있었지, 구체적인 시기까지 언급이 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바닥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소복이 쌓인 눈이 내 발 모양대로 푹푹 꺼졌다.

‘아. 눈을 보니깐, 팥빙수 먹고 싶다.’

새하얗고 고운 눈을 보니 문뜩 빙수가 먹고 싶어졌다.

빙수. 떡 빙수. 콩떡 빙수.

눈 퍼다가 팥 넣고 떡 넣고 연유 뿌려서….

퍽.

내 발길질에 맞은 눈이 사방으로 튀었다.

‘인생 다 부질없다.’

그래. 인생 다 부질없다. 기껏 전생을 기억하면 뭐 하냐.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그 인성 파탄 난 또라이가 우리 가문 박살 내기 하루 전에 튀기나 해야지.’

나는 이런저런 잡생각들을 떠올리며 꽃을 찾기 위해 눈 쌓인 산속을 하염없이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하지만 꽃은커녕 풀떼기들도 하얀 눈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단지 하얗기만 한 산이 날 놀리는 것 같았다.

나랑 꽃이랑 숨바꼭질하는 줄 아나…

‘나 찾아봐라~.’

꽃이 이러는 거 같네.

나 찾아봐라는 뭐야. 나 잡아 봐라도 아니고.

하긴, 여기서 나 잡아 봐라하고 외치면 사랑의 술래잡기가 아니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맹수와 함께 목숨 건 추격전을 벌이겠지.

그리고 나 잡아 봐라의 끝은 ‘악!’이라는 단말마와 함께 끝.

‘완벽한걸.’

오. 세상이 다 삐뚤게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늦은 중2병이 왔나.

하지만 이건 이해해 주길. 밥도 안 먹고 이 추운 겨울날, 눈 쌓인 산에서 꽃 찾다 보면 그 누구라도 세상이 다 별로고 삐뚤게 보인다.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걷다가 저 멀리 눈 사이에 파묻혀 있는 빨간색 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건 뭐지?’

나는 옅은 기대감을 안고 슬금슬금 그 무언가로 다가갔다.

아마 꽃이지 않을까. 꽃일 것 같은데.

어느 정도 걸어가자 그 빨간색 점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찾았다!’

활짝 핀 빨간색 예쁜 꽃이었다.

오늘을 제외한 며칠 동안 날이 좋고 따뜻해서 꽃이 핀 것 같았다.

이렇게 금방 찾은 걸 보니, 오늘은 운이 좋았다.

나는 어차피 셀레스틴에게 자근자근 밟혀 부서질 꽃을 소중히 내 입에 물었다.

아무래도 고양이이다 보니, 꽃을 물고 가는 건 들고 걸어갈 수가 없어 행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앞발로 꽃을 들고 뒷발로 일어서서 걸어가는 고양이 봤어? 못 봤잖아. 만약 가능하면, 그건 <수인 열전-진기명기 편>에 나와야 하는 실력이지.

꽃을 입에 물고 물끄러미 서 있자, 날 선 바람이 털을 가르고 지나갔다.

‘으. 추워.’

등을 훑고 가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한 번 부르르 털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매서운 겨울바람에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이리저리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겨울인데 나뭇잎이 달려 있네.’

세찬 바람에 내가 물고 있는 꽃 역시도 이리저리 맥없이 휘둘렸다.

그 모습이 마치 지금의 나와 같았다.

‘척박한 겨울에 힘들게 피자마자 곧 자근자근 밟히고 태워질 운명의 꽃이나, 남주에게 처참히 살해당할 예정인 나나.’

‘어차피 둘 다 똑같은 운명이네.’

어쩐지 꽃에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다음 생엔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잠시 꽃에다가 애도를 표한 후, 조심조심 산에서 내려갔다.

‘셀레스틴에게 전달되기 전까진 열심히 모셔야지. 이 추운 겨울에 핀 희귀한 꽃인데.’

그 꽃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고이 잘 모셔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꽃을….’

“끼에에에에에엑!”

저 멀리서 귀뚜라미의 목을 쥐어짤 때 나올법한 괴성이 귀를 뚫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악에 받친 누군가가 절규하는 소리 같았다.

섬뜩한 느낌에 내 털이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아까 지나가듯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 평범한 산은 야생동물 출현지역이었다.

그러니까 운이 나쁘다면 호랑이나 늑대, 멧돼지 같은 동물들과 맞닥뜨려 그들의 먹이로 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내 눈에 보이는 돌 중 가장 가까운 돌 뒤에 숨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게 움직였는지, 제대로 몸을 다 숨기기도 전에 두두두두, 하는 땅의 울림이 느껴졌다.

바위 옆으로 힐끗 보니 멧돼지 한 마리가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그냥 가라.’

제발.

“꾸에에에엑!”

점점 기괴한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섬찟해지는 느낌이었다.

바위 뒤에 가만히 앉아 숨을 죽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검은색인지 갈색인지 모를 멧돼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저 멀리서 앞만 보고 직진하던 멧돼지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발걸음을 멈춘 멧돼지가 무언가를 찾는 듯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겨울 산속의 공기가 목덜미를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니지?

불안한 느낌이 든 찰나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멧돼지와 내 눈이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멧돼지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저 올라간 입꼬리가 자신의 먹이를 찾은 듯이 만족스러워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까.

아무래도 그 멧돼지의 오늘 점심은 나인가 보다.

‘착각이야.’

착각일 거야.

착각이어야만 해.

기묘하게 올라간 멧돼지의 입꼬리를 보자 전신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서서히 방향을 틀은 멧돼지가 나를 향해 돌진했다.

저건 나를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X발. 그래. 착각일 리가 없지.’

나는 급하게 바위를 박차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숨 쉴 틈도 없이 눈 쌓인 넓은 산속을 질주했다.

‘아니 왜?!?!?’

멧돼지는 시력이 안 좋다고 했는데.

분명 안 좋다고 했는데.

나는 최대한 많은 나무의 사이를 지나갔다.

나무 간의 간격은 상당히 좁아 내가 이리저리 도망가기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무식하게 일직선으로 돌격해오는 멧돼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야에서 나무들이 휙휙 넘어갔다.

그때 쿵, 소리와 함께 무언가 눈에 파묻히는 소리가 들렸다.

“꾸에에에엑.”

한참을 달리던 나는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큰 덩치에 나는 그 멧돼지의 위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위를 바라보니, 갈색 털 달린 커다란 짐승이 눈 위에 뻗어 있었다.

머리에는 커다란 혹이 나 있는 상태였다.

‘쟤는 하필 나무에 부딪혀도 두꺼운 나무에 부딪히냐.’

물론 나한테는 다행이지만.

유심히 그 모습을 관찰하던 나는 멧돼지의 콧구멍에 눈을 쑤셔 넣곤 혹여나 멧돼지가 다시 눈을 뜰까 봐 후다닥 산 밑으로 내려갔다.

멧돼지와 추격전을 하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산에서 내려온 건지, 얼마 걷지 않아, 저 멀리 시몬드가의 저택이 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요하지?’

저택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산에서 거의 다 내려오면 보이는 개구멍을 통해 땡땡이치려는 시녀들도, 나를 괴롭히려고 대기 타고 있는 시종들도, 산에 꼭 한두 마리씩 있는 동물들도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위험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산 아래는 한산하고 적막했다.

샤아아-

산에서는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기묘한 침묵이었다.

‘뭔가가 이상하면 다시 개구멍으로 나오면 되겠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어딘가 찜찜한 느낌과 함께 개구멍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들은 엎드려 배에 힘을 주고 낑낑거리며 서로를 밀어주고 빼내 주며 개구멍을 통과했지만, 나는 수월하게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는 새끼 고양이인 게 참 편했다.

‘으악!’

개구멍을 나오고 나서 난데없이 나와 마주친 까만색 구두코에 내 눈이 확장됐다.

핑. 데구르르르….

그리곤 처음 보는 까만색 구두코에 내 몸이 부딪혔다.

솜뭉치로 만든 공이 굴러가듯이 내 몸이 데구르르르 굴러갔다.

벌떡 일어난 나는 털을 부르르 털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파악을 하려고 하니, 어딘가 기묘한 느낌과 함께 위압감이 느껴졌다.

위험하다. 이거 위험해.

본능이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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