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뽀드득뽀드득.
다른 이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볼 수 없는 하얀 눈 위에 조그마한 아기 고양이 발자국이 하나둘 새겨진다.
발바닥에 차가운 눈이 닿는 느낌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요 며칠 사람들이 따뜻하다고 해서 덜 추울 줄 알았는데, 털이 곤두설 정도로 쌀쌀한 건 마찬가지였다.
봄에는 춥고, 여름에도 으슬으슬하고, 가을에도 쌀쌀하고, 겨울은 더 추웠다.
‘생각해 보면 항상 추워했으니 더위를 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네.’
그래도 맨날 추위에 벌벌 떨었으니 어느덧 추위가 익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입 벌릴 때마다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아씨… 무슨 이런 것까지 시키냐….’
조금은 비범한, 새까만 털을 가지고 있는 아기 고양이(19세)는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고 있었다.
‘어떤 놈이 묘 팔자가 상팔자라고 했냐. 내가 그 말 지은 사람 대륙 끝까지 찾아가서 따진다.’
괜스레 짜증 나는 기분에 앞에 있는 눈을 앞발로 퍽퍽 찼다.
‘기필코 따지고 만다.’
내 발에 차인 무고한 눈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옛날에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던 인간들도 최소한 나보다는 편하게 살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내 기억 속의 인간들은 설산까지 가서 꽃을 따 오진 않았는데.
지금 나는 대뜸 꽃이 보고 싶다며 꽃을 따 오라는 그 망할 셀레스틴 시몬드의 부탁을 받고 한겨울 산속을 헤매는 중이다.
시몬드가에는 셀레스틴을 위한 꽃이 잔뜩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그냥 나를 향한 악의적인 괴롭힘이다.
엿 먹어라. 이런 거.
‘시몬드 가문의 이런 대우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서럽네.’
서럽다기보다는 귀찮고 짜증 나는 건가.
‘고고한 흰 고양이’인 시몬드 가문.
시몬드 가문은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 가문 중 하나이다.
‘고양이 족의 수장이니까.’
수인 대륙에서 하얀색 고양이는 행운의 상징이었고, 검은색 고양이는 불운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시몬드 가문의 핏줄은 하나같이 모두가 하얀 고양이었는데, 이는 가문을 행운의 상징으로 만들어 줬다.
행운의 시몬드.
사람들이 그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굉장한 자부심으로 여겼다.
하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이는 닿을 수 없는 별, 아리테아라는 수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대대로 하얀 고양이만 탄생하던 시몬드에서 까만 고양이가 태어났다.
거기서 까만 고양이인 나는 별종이었고,
“저것은 사특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할 것이다!”
“이 불운 덩어리 새끼는 도대체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야?”
“누가 네 언니니? 언니라고 말하지 마. 더러운 거 옮아.”
역시나 그 고고한 흰 고양이들은 나를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내 존재 자체를 경멸하고 혐오했다. 난 그들의 치부였다.
하지만 나 역시도 의문이었다.
그 고고한 흰색 고양이들 사이에서 몸집도 작은 검은 고양이가 왜 태어났을까.
내가 과연 시몬드가의 일원이 맞긴 한 걸까.
그들은 날 지독하게도 괴롭히면서 내 존재 자체를 철저하게 은폐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이 굴었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6살 이후, 가족의 이름 한번 제대로 불러 보지도, 그렇다고 내 이름을 불리지도 못한 채로 그들의 단순한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내 이름? 나도 모른다.
모두가 날 ‘불운 덩어리’라고 불렀을 뿐.
그저 ‘불운 덩어리’라는 것이 내 이름이 아니길 바랐다.
불운 덩어리가 내 이름인 거면 정말로 슬플 것 같은데.
가족이라는 작자들은 나를 괴롭히기에 바빴다. 처음에는 물 떠 와라, 구두를 신겨라, 구두를 닦아라 같은 사소한 심부름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천사의 깃털 같은 새하얀 백발을 가지고 악마 같은 말들을 내뱉을 때면 그 머리칼이 그렇게 잔인해 보일 때가 없었다.
구두를 닦으라고 해서 구두를 닦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두에 더러운 기운이 가득하다고 버리라 했고,
음료수를 가져오라고 시켜 음료수를 가져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머리에 쏟아부었으며,
한겨울에 꽃을 가져오라 시켜 개고생해가면서 꽃을 가져가면 사특한 기운이 담겨 소거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모두의 앞에서 짓밟고 불태웠다.
와. 이렇게 생각하니 진짜 위대한 인성들이다.
‘소각도 하지 못할 쓰레기들.’
9살, 남들보다 늦게 첫 인간화에 성공하고 나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시켜 먹는 셀레스틴에게 화가 나서 반항도 몇 번 했다.
“꽃이 갑자기 보고 싶네. 꽃 좀 따 오렴.”
“여기요.”
“꽃은 어디 있니?”
당시 되지도 않는 요구에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꽃받침을 하곤 한마디 했다.
“여기요.”
그리고,
짝-!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장렬하게 뺨을 한 대 맞았었다.
“앤, 이 장갑은 버려 주렴.”
시몬드 부인과 셀레스틴은 그날을 시작으로 온몸을 구석구석 때렸다.
그래. 나의 반항이 상당히 비정상적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날 셀레스틴을 때린 것도 아니고, 반항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반항치고는 너무한 거 아닌가.
날이 가면 갈수록 체벌 수위는 심해졌고, 끝내 나는 반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내 태도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내가 얌전해지자마자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요구까지 해대면서 나를 부려 먹었다.
이렇게 다시 생각하니, 정말 대단한 인간들이네.
그래도 버틸 수 있다는 점에서 내 인생은 살만했다.
아무리 다치고, 마음이 짓밟히고 때로는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도 견딜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가주님께서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저 불운 덩어리의 불운을 제거해 보겠다.”
그 말을 하자마자 모두 가주님의 자비로움을 칭송했다.
불운 덩어리를 저택에 받아 주는 것을 넘어서 불운까지 제거해 주시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받아 준다고 칭송하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시종들과 시녀들은 킥킥거리며 발로 나를 툭툭 찼다.
“다행인 줄 알아. 불운 덩어리 주제, 당장에 쫓겨나도 모자랄 판에 각하의 자비에 기대어 이 저택에 있을 수 있는 거잖아?”
“각하께서도 인자하시지. 굳이 저런 것을 받아들이시다니. 나였으면 진작에 내다 버렸을걸.”
“그니까. 데리고 있기엔 찝찝하잖아. 주위를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라니.”
“하지만 우리와 다르신 각하는 너의 불운까지 제거해 주신다고 하셨잖니.”
“만약 불운이 제거 되도 네 본질을 잊지 말렴. 너는 어디까지나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오물 덩어리니까.”
“여기가 행운의 시몬드여서 네가 있어도 괜찮은 거지, 다른 데 있었으면 너는 너의 액운 때문에 이미 죽었을 거야.”
“그게 예정된 너의 운명이니까.”
시종, 시녀들이 시몬드가의 일원인 나를 괴롭히는 건 이상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추겼으면 모를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시몬드 가의 치욕이나 다름없었고, 안에서는 이렇게 괴롭히더라도 밖에서는 모두가 나의 존재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얼마나 많은 잔혹한 짓을 하더라도 그것이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생물체였으니까.
심지어 집사는 나와 마주치는 것도 더럽다는 듯이 내가 있는 곳 자체를 오지 않았다.
그래. 당장 시몬드 부인이나 셀레스틴만 보더라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앞장서서 괴롭히는데 시종 시녀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말릴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만무했다.
사람들은 괴롭힘당하는 나를 봐도 못 본 척, 내가 존재하지 않는 양 넘어갔다.
그러자 날이 갈수록 괴롭힘이 심해진 것은 당연한 얘기고.
가주의 명령 덕분인가, 그가 나의 불운을 제거하겠다고 말한 이후로 시몬드 부인과 셀레스틴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목적으로는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씩 천한 것을 보는 경멸스러운 눈빛과 함께 이상한 심부름을 몇 개 시켰을 뿐.
대신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차원이 다른 지옥이 펼쳐졌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지옥도였다.
수인이라면 제대로 된 정신도 붙잡기 힘든.
끊임없는 통증에 정신이 짓밟히고 제대로 뭉개져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고통이었다.
여태까지의 셀레스틴과 시몬드 부인, 그리고 시종 시녀들의 괴롭힘은 모두 장난처럼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고통에 내 혈관들은 항상 비명을 질렀다.
“……박사님…….”
“그래도 반… 성공…….”
항상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통에 까무룩 기절했다.
나는 그들이 올 때 즈음이면 그 끔찍한 고통을 다시 경험하기 싫어서 상처가 봉합된 몸으로 저택 안을 죽어라 뛰어다녔다.
그것은 살기 위한 도망이었다.
그 필사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봉합해 놓은 상처들이 터지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결론은 항상 그들에게 붙잡혀 의무실인지 실험실인지 모를 그곳으로 끌려가는 거였다.
누가 그랬던가. 포기하면 편하다고.
그래. 포기하면 편했다.
내 반항은 쓸모없었고 내 마음속에 조그맣게 싹 틔웠던 무력감은 어느덧 나를 잡아먹어 버릴 만큼 커져 있었다.
도망 다니는 것을 포기한 뒤로, 나는 거의 다 뜯겨 나가 너덜너덜한 박스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지 못했다.
잠들어 있으면 고통이 덜하다는 말에 가만히 누워 실험이 진행되기 전에 일찍 잠들려고 했다.
그 와중에 내가 살아 있나 죽었나 하루에 한 명씩 주기적으로 확인하러 오는 것은 여전했다. 경과를 확인하며 종이에 뭔가를 적는 사람도 꽤 자주 왔었고.
도대체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게다가 내 상태도 항상 똑같았다.
항상 박스 안에서 잤고, 눈을 떠 보면 피투성이가 되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반항한다고 그들에게서 도망 다니다가 봉합된 상처들이 다 찢어져 온몸에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덜 아팠다.
그리고,
“쯧. 저건 실패작이다.”
라는 말과 경멸하듯 보는 눈초리와 함께, 나의 지옥은 끝났다.
그 눈동자 안에 얼핏 서린 두려움도 보았던 것 같다.
물론 감시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가위, 주사, 칼과 온갖 약물이 있는 끔찍한 곳으로 안 끌려가도 됐고, 한동안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실험을 끝내고 며칠간 그 박스 안에 누운 상태로 꼼짝도 못 했다.
엄청 아팠다.
어떤 기운이 몸을 여기저기 헤집으며 곳곳을 찔렀다.
인간화가 가능했던 몸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심장에 서리가 낀 듯, 온몸이 꽁꽁 얼어 버릴 것같이 시린 몸이 불에 덴 듯 지져지는 것 같았다.
정말 모순적이고 극렬한 고통이었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도 힘들게 하는 모순적인 고통 속에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때였다.
‘……오 X 됐다.’
내가 전생을 기억하게 된 건.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