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_입덧
새벽녘에 그냥 눈이 떠졌다. 청조는 아직 어두운 허공을 향해 눈을 깜박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저 앉아있기만 하였는데도, 잠결에 이상한 기척을 느낀 도운의 눈이 슬쩍 떠졌다. 얇게 뜬 눈에 푸른 어둠 속에 멍하니 앉아있는 청조가 들어왔다. 미동도 없이 무릎을 껴안고 앉아있는 청조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도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왜 그러는 것일까. 도대체 왜 또 그러는 것인가. 다 나았다 생각한 옛 상처가 다시금 떠오른 것인가. 오도카니 앉아있는 청조의 뒷모습에 도운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청조야.”
도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는 청조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왜…….”
겁이 서린 목소리가 애써 떨림을 감추고 있었다. 애타는 속내를 감추려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인 도운은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서방님.”
“그래, 말을 해라.”
초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던 청조가 시선을 돌렸다. 도운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 듯, 잠시 움찔거리던 입술이 다시 앙다물어졌다.
“왜, 혹여 무서운 꿈을 꾼 것이냐?”
청조의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렸다.
“그럼, 잠자리가 불편하여 그러느냐?”
또다시 설레설레 흔들리는 청조의 고갯짓에 도운의 마음이 더욱 타들어 갔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청조의 대답에 결국 도운은 차마 묻기 힘든 그것을 물었다.
“그럼 설마,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네가 어찌 또 이러는 것이냐.”
“그것이…….”
“그래, 괜찮으니 말을 해 보아라. 응?”
“그것이 달포 전, 서방님과 함께 산을 내려올 적 저자에 들렀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것이 왜?”
청조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차마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예전에야 모르지만, 이제는 어엿한 종일품의 빈이었다. 헌데 혹시라도 이런 말을 꺼낸 것이 대비마마께라도 알려진다면, 분명 체면 없다 꾸지람을 할 것이다.
“어서 말을 해보아라. 저자에 갔던 것이 왜?”
“저자에 들러서 소첩에게 사주셨던 엿가락을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고말고. 네가 그날따라 엿가락이 먹고 싶다 특별히 나를 졸랐지 않느냐.”
“예, 소첩이 그리했지요. 허면 엿가락을 먹고 나서, 소첩에게 사주신 비녀를 팔았던 장돌뱅이도 기억하십니까?”
“아무렴, 그것도 당연히 기억하지. 왜, 그 장돌뱅이가 너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었더냐?”
목소리를 높이는 도운의 질문에 청조가 도리질을 쳤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 장돌뱅이가 서 있던 자리 뒤에 포목점이 하나 있었고, 그 포목점을 끼고 들어간 골목에 주막이 하나 있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국밥과 함께 부아저냐(허파전)를 먹었지요.”
“그랬지.”
“……그 저냐가 먹고 싶습니다.”
청조가 다시금 입맛을 다셨다. 그때 소반에 올라왔던 부아저냐가 먹고 싶었다. 기름이 자글자글하게 달아오른 번철에서 노릇노릇하게 지져지던 저냐의 모습이 떠오르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것이 먹고 싶다고?”
“예, 주막의 찬모가 손끝이 여문 지 맛이 제법이었지 않았습니까? 칼로 자근자근 두드린 부아에 간이 골고루 배어있었고, 또 그 사이사이에 스며든 녹두의 향이 향긋하였습니다. 특히 씹을수록 쫄깃한 부아가 입안에서…….”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너무 먹고 싶은 듯, 청조는 침을 또다시 꿀꺽 삼켰다. 도운은 그런 청조의 모습이 사뭇 이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부아저냐는 청조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었다. 청조는 육류보다 채소를 더 좋아하였고, 기름에 부친 음식보다는 숯불 향이 은은한 구이를 더 좋아하였다.
게다가 그때 주막에서 먹은 저냐의 맛이 그만하긴 했지만, 자다 깰 정도로 그 맛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렴 한낱 저자의 찬모 솜씨가 수라간 상궁의 솜씨보다 뛰어나진 않을 것이다.
허나…… 도운은 생각을 멈추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청조가 그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예, 전하. 찾으셨사옵니까?”
대답과 함께 번을 지키던 상궁이 안으로 들었다.
“지금 소주방에 일러 부아저냐를 만들어 올리라 하라.”
“아닙니다. 그냥 두십시오.”
당황스런 도운의 명에 청조가 급히 도운을 말리고는 상궁을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네가 지금 먹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우세스럽다 흉잡습니다. 영 먹고 싶으면 점심에 올리라 할 터이니 걱정 마셔요.”
겨우 도운을 달랜 청조는 그의 품에 안겨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여전히 부아저냐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막 부쳐낸 따끈한 저냐를 한입 깨무는 순간 바삭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씹을수록 쫄깃해지던 식감에 은은히 풍기던 녹두 향이 향기로웠던 것 같았다. 달포나 지난 음식의 맛이 이제 와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청조는 저냐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 노력하였다. 한밤중에 저냐를 찾아대는 자신을 보고 한미한 중인 집안 출신의 마마가 아직도 궁의 법도를 모른다는 말이 나올까 걱정스러웠다. 아니, 그보다 예도 모르고 후사도 생산하지 못하는 마마 대신, 혈통 좋고 기품 있는 다른 여인들을 후궁으로 들이라며 대신들이 주청을 올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청조는 날이 밝고서도 저냐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먹고 싶었다. 어느덧 정오가 지나고, 달걀을 입혀 노릇하게 부친 저냐가 점심상 위에 놓여 안으로 들어왔다. 곁에서 시중들던 곽상궁이 저냐 한 점을 조그만 접시에 옮겨 담아 밥그릇 옆에 놓아주었다.
“이것이 혹여 부아저냐인가?”
“예, 마마. 주상전하께서 금일 마마께서 잡숫고 싶어 하시니, 정성으로 지어 올리라 특별히 하명하시었다 하옵니다. 하여 소주방의 성상궁이 직접 재료를 골라 정성으로 만들었다 하옵니다. 잡수어 보소서.”
“그런가?”
청조는 기꺼운 마음으로 저냐를 한 점 들어 올렸다. 바삭하고 따뜻한 저냐는 고소하였다. 하지만 저자에서 먹었던 그것과 무엇인가 달랐다. 녹두 대신 메밀가루를 써서 그러한가 싶기도 했다. 최고의 재료를 사용하였고 솜씨 좋은 성상궁이 정성으로 지었으니 그 맛이 월등히 좋은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저자에서 먹던 저냐가 먹고 싶은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시옵니까?”
“아닐세, 맛이 아주 좋네. 성상궁이 수고를 많이 하였겠어. 고맙다 이르게.”
“예, 마마. 그리 전하겠나이다.”
늦은 오후, 정무를 끝내고 잠시 애류당에 들린 도운은 청조의 얼굴을 살폈다.
“내 부아저냐를 특별히 올리라 하명하였는데, 맛이 그만하였느냐?”
“예, 서방님 덕에 소첩이 아주 맛좋은 저냐를 먹었습니다.”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청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운은 손으로 청조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아직도 저자의 저냐가 먹고 싶은 것이구나.”
“예? 아닙니다. 참으로 맛나게 먹었습니다.”
“누가 맛나게 먹지 않았다 하더냐. 저자의 그것을 먹고 싶어 한다 하였지.”
도운은 다 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청조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정무에 시달리느라 고단하신 서방님 앞에서 정숙하지 못하게 먹을 것을 탐내는 모양새라, 아직은 마마라는 칭호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많은 자신이었다.
“내일 저자에 나가보자.”
“저자예요?”
“그래. 네가 궁에만 있으려니 갑갑하여 그런게지. 내일 저자에 함께 나가서 네가 그토록 먹고 싶다는 부아저냐 한번 맛 좀 보자. 내 이번에는 그것의 맛을 천천히 음미해 볼 것이다.”
“참말이셔요?”
“암, 참말이지. 네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다 먹여줄 것이다. 그러니 참지 말고 말을 해라. 네가 참을 이유가 전혀 없다.”
왜 그런 것을 참느냐. 청조는 통박을 주는 듯 부드럽게 웃는 도운의 허리를 껴안았다.
“소첩이 지난번 서방님께서 사주신 비녀를 하고 저자에 나갈 것입니다. 백옥 깎아 만든 그 하얀 비녀와 더불어 하얀 모시 저고리 입고, 서방님께서 좋아하시는 푸른 쪽빛 물들인 치마를 입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늘빛 담은 도포를 입고, 너를 닮은 푸른 쪽빛 세조대로 치장을 해야겠다.”
“서방님의 세조대는 소첩이 직접 메어드릴 것이어요.”
어여쁘게 조잘거리는 청조의 입술에 꾹 입맞춤을 남긴 도운은 저녁에 다시 오마하며 애류당을 나섰다.
다음날 조참(朝參)을 마친 도운은 바삐 애류당으로 향했다. 백옥으로 만든 비녀에 맞추어 눈처럼 하얀 저고리를 입은 청조의 뽀얀 얼굴이 도운의 등장에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자신에게 포르르 다가오는 청조의 쪽빛 치마가 푸른 파도처럼 일렁거리며 율동을 만들어 냈다. 그 어여쁜 모습에 도운의 마음 또한 기쁨으로 일렁거리며 벅차올랐다. 청조는 약속대로 하늘빛 도포를 입고 온 도운에게 짙은 쪽빛 세조대를 메어 주었다.
“가자.”
“예, 서방님.”
저자로 나간 청조는 오랜만에 보는 저자 구경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흥겨워했다. 저자는 수많은 인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몸에 물건을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들에, 저마다 목청을 높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인들과 흥정하는 백성들로 저자가 시끌벅적했다.
모두의 얼굴에 구김이 없고, 활기가 넘쳤다. 청조는 날이 갈수록 활기가 넘치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 부아저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들의 모습만 계속해서 살폈다.
“이쪽이다.”
두리번거리는 청조의 어깨를 감싼 도운이 청조를 가볍게 이끌었다. 청조는 그에게 이끌려 어느새 주막에 들어섰다. 마당 한쪽에 만들어진 아궁이의 검은 번철 위에서, 노란 계란 옷을 입은 각종 저냐들이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찬모로 보이는 이가 노릇하게 부쳐진 저냐를 그릇에 담고, 비어버린 공간에 재료들을 올리며 열심히 저냐를 지지고 있었다. 청조는 노랗게 익어가는 모습과 풍겨오는 기름 향에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여기, 부아저냐와 국밥을 가져오게. 탁주도 한 사발 내어 오고.”
“예, 나으리.”
도운은 청조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곧 주모가 국밥과 저냐, 그리고 탁주를 올린 소반을 들고 안으로 들었다. 소반이 앞에 놓이자마자, 청조는 따뜻한 부아저냐부터 집어 입에 넣었다.
“어떠하냐, 맛이 그만하냐?”
도운의 물음에 청조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이상하다는 듯, 젓가락으로 한 점을 더 들었다. 고개가 다시 기울어졌다.
“왜 그러느냐?”
“맛이, 전이랑 다른 것 같습니다. 서방님이 맛 좀 보셔요.”
청조가 집어주는 부아저냐를 입에 넣은 도운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나는 잘 모르겠다. 부아저냐의 맛이 다 이런 것이 아니었느냐. 특별히 더 나쁠 것도, 특별히 더 좋을 것도 없이 딱 내가 아는 저냐의 맛이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전에는…… 뭔가 더 쫄깃한 것이, 부아의 향이 더욱 진하고 고소했던 것 같은데.”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이보게, 남현!”
“예, 주인나리. 찾으셨사옵니까?”
“주모를 데려오게.”
잠시 후, 후덕한 인상의 주모가 안으로 들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요, 나리.”
“혹여 저냐를 만드는 조리법이 바뀌었는가?”
“그것은 왜, 뭐가 입에 맞지 않습니까요?”
지체 높아 보이는 양반의 물음에 주모가 조아리던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괜한 책이라도 잡혀 주막에 불이익이라도 오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그것이 아니고, 맛이 전과 좀 다른 거 같아 그러네.”
도운의 말에 긴장이 풀린 주모의 어깨가 안심하듯 아래로 쑥 내려갔다.
“그것이, 며칠 전 찬모가 바뀌기는 했지만, 맛이 어찌 다른지는 쇤네가 잘…….”
“그래? 찬모가 바뀌었다고. 그럼 전에 있던 찬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거야 찬모의 집에 있지 않겠습니까요? 찬모의 서방 되는 이가 크게 다쳐 당분간 서방의 몸조리를 돕는다 하였습죠.”
“자네가 찬모의 집을 아는가?”
“쇤네가 아는 것은 아니고,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그이의 집을 알고 있습니다요.”
찬모의 부름에 동그란 얼굴의 어린아이가 바삐 달려왔다. 도운과 청조는 아이를 따라 찬모였던 여인의 초가로 향하였다. 도성에 사는 백성들의 형편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변두리에 사는 백성들의 초가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자, 청조는 저냐 한 점이 먹고 싶어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장옷에 덮인 청조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백성들은 오늘도 한 끼를 걱정하며 살 터인데, 그간 마마로 사는 편안한 삶에 익숙해졌다고 저냐가 먹고 싶다는 사치스런 투정이나 부리다니. 청조는 이만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도운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말을 하려는 찰라, 아이가 한 초가 앞에 섰다. 아이는 스스럼없이 열려있는 싸리문 안으로 들어가 아주머니를 불렀다. 안에 대고 부르는 소리에 반빗간에서 여인이 대답이 흘러나오더니, 곧 두 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받친 여인이 산처럼 둥근 배를 내밀며 마당으로 나왔다. 청조의 시선이 동그란 여인의 배에 꽂혔다.
“응? 두식이 아니냐?”
“예, 아주머니. 저가 아주머니를 찾으시는 양반 나으리를 모셔왔지요.”
“양반 나으리?”
“예, 저기요.”
아이가 가리킨 방향에서 도운 일행을 발견한 여인은 곧바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려 애를 썼다.
“되었네, 편하게 있게.”
“예? 허, 허지만.”
“괘념치 않으니 굳이 예의 차릴 필요 없네. 보아하니 몸도 무거워 보이는 것을.”
살갑게 건네는 청조의 말에 여인은 배가 많이 무거운 듯 다시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청조의 눈이 허리를 받치는 여인의 손에 이어 다시 둥근 배로 향하였다. 청조의 눈빛에서 부러움을 읽은 도운은 재빨리 여인에게 물었다.
“그대가 얼마 전까지 주막의 찬모로 있었다지?”
“예, 나리. 헌데 쇤네의 집에는 어찌…….”
“여기 내 처가…….”
‘아이고오’
도운의 말은 방안에서 들리는 괴로운 신음 소리에 중간에서 끊어져 버렸다. 안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여인은 뒤뚱거리며 바삐 안으로 들었다.
“무슨 일인가?”
여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던 도운은 인상을 찡그렸다. 방안에서 피고름 내가 진동하였다. 사내의 종아리에 감아놓은 면포가 붉게 변해 있었고, 여기저기 다른 곳도 엉망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자가 자네의 서방인가?”
“예, 나리. 며칠 전 심하게 매질을 당하다 이리되었는데, 변변한 치료도 받을 수가 없으니. 아이고, 이러다 사람 잡겠습니다요. 이보시오, 정신 좀 차려 보라니까! 아이고, 이러다 송장 치르겠네. 정신 좀 차려 보시오, 흐흑.”
여인이 연신 고통에 신음하는 사내의 젖은 이마를 닦아 주었지만, 이미 열꽃이 온몸에 번져 있었다. 도운은 바삐 밖에 있던 아이를 시켜 의원을 데려오라 명하고는 여인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매질을 당했다는 말이 심히 거슬렸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매질을 이리 심하게 하였단 말인가.
“그것이, 소작을 주신 양반 나리 댁에 갔다가 멍석말이를 당하고, 다시 포청에 끌려갔습죠. 멍석말이를 당한 것도 모자라 거기서 장까지 맞았습니다요. 아이고, 아이고!”
“멍석말이? 그것을 왜 당했나? 자네의 서방이 무슨 죄라도 지었는가?”
도운의 물음에 가슴을 치며 흐느끼던 여인이 펄쩍 뛰었다. 서방이 억울하게 매질을 당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서방이 죄인이라는 누명까지 받는 것은 진정 억울했다.
“아닙니다요, 나리! 쇤네의 서방은 잘못이 없습니다요. 아무렴요, 없고말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말씀을 올려보게.”
곁에서 부드럽게 채근하는 청조의 말에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울었다.
“그것이, 올해에 수확한 보리를 돌려받으러 갔었습니다요.”
“보리?”
“예, 보리 말입니다요. 글쎄, 마을 어르신의 말을 들어보니, 소작을 주신 양반 나리의 밭이 고, 고 뭐라 하는 땅이라 합니다요. 그것이 나라에서 주는 땅이라던데.”
“공민전 말이냐?”
“예, 나리. 이제 공민전인가 뭔가 하는 그 밭에서 소작을 하면 소작료로 수확의 이 할만 내어 놓으면 된다 하지 않습니까. 헌데 쇤네는 예년대로 팔 할을 내었습죠. 춘궁기를 견디느라 어찌나 힘들었는데, 겨우 얻은 수확의 팔 할이나.”
여인은 소맷부리로 연신 눈물과 콧물을 찍어 내었다.
“헌데 알고 보니 나라님께서 명을 내려 주셨다지 뭡니까요. 이제는 수확의 이 할만 내어 놓으면 된다 합니다요.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뭘 알겠냐마는 나라님께서 그리하라 하셨으면 응당 그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요, 나리?”
“그렇지.”
눈치를 살살 살피던 여인은 도운이 그렇다 맞장을 쳐주자 더욱 서럽게 울분을 토해냈다.
“해서 저희 내외가 나머지를 돌려주십사 청을 하러 그 댁을 찾아갔습죠. 헌데 되레 저희 서방에게 강상죄를 물어 멍석말이로 매질을 하고, 포청까지 끌고 가 저 꼴로 만들었습니다요.”
“의원에게는 보였는가?”
“먹고살 것도 없는 쇤네의 형편에 의원이 다 뭡니까요? 이대로 저이가 저리 가버리면 쇤네는 정녕 억울하여 못삽니다요.”
여인은 둥근 배를 쓰다듬으며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곧 아이도 나올 것인데, 쇤네가 어찌 살아야 좋을지 통 모르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던 도운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그가 역정이 단단히 난 것을 안 청조는 여인을 다독이며 밭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다. 도운은 때마침 도착한 의원에게 병자를 맡긴 뒤, 구역을 맡고 있는 우포청(右捕廳)으로 향했다. 당당하게 포청으로 들어가는 도운의 뒤로 둥근 배를 한 여인이 겁에 질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뒤따랐다.
앞서가는 양반 나리께의 지체가 꽤나 높아 보이긴 하나, 포청이었다. 괜히 저 같은 천한 것 때문에 공연히 나리께서 화를 당하시는 건 아닌지, 또 억울함을 풀지도 못하고 저까지 화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자신마저 잘못되면 서방은 고사하고 뱃속의 아이까지, 일가가 몰락해버리는 일이었다.
여인의 고민을 알아챘는지 청조가 무거운 여인의 몸을 직접 부액하며 부드럽게 달랬다.
“걱정하지 말게. 서방님께서 자네의 억울함을 꼭 풀어주실 것이니.”
다정하면서도 위엄 있는 청조의 위로에 여인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제발 억울함을 풀 수 있도록, 여인은 마음속으로 천지신명을 간절하게 찾았다.
앞장서던 남현이 나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이자 나졸이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이어 어디선가 포도대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저…… 저…… 전…….”
“포도대장은 말을 아끼시오.”
말을 더듬는 포도대장에게 남현이 조용히 경고를 했다.
“우리 주인나리께서 일이 있어 보자고 하시었으니, 어서 뫼시지요.”
“예? 아, 예. 이쪽으로 드시옵소서.”
도운은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으로 거침없이 올라선 후, 포도대장에게 일러 소작을 준 지주를 당장에 끌고 와라 명하였다. 바로 일행을 꾸려 나간 종사관이 곧 지주를 끌고 포청으로 돌아왔다. 너른 마당에 들어선 지주의 얼굴을 본 도운의 인상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너는.”
“저……전…….”
역정이 난 도운의 얼굴을 알아본 지주는 파랗게 질려 말을 더듬었다.
“그 입 다물라! 네가 정녕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 일찍이 너를 죽음으로써 다스려야 마땅하였으나, 은혜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었거늘. 아직도 부패한 관료들과 청탁을 일삼고, 죄 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뺏어 먹고 있어!”
도운의 호통에 한때 의금부 지사로 지내다 파직된 박호근의 다리가 벌벌 떨렸다. 겁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어깨를 한순간에 베어버렸던 악귀 같은 도운의 모습이 떠올라 오금이 저렸다.
호근을 무섭도록 쏘아보는 도운의 눈빛에 살기가 어른거렸다. 저놈을 진즉에 죽음으로 벌하였어야 했다. 청조를 매질하라 시킨 놈을 그나마 살려 두었던 것은 익태를 속이는 일에 협조를 잘 하였기 때문이었다. 도운은 벌벌 떠는 호근의 모습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혀를 찼다. 곁에 있던 청조 역시 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백성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공명심에 눈이 멀어 자신을 쥐어짜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하던 못된 습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또 억울한 백성을 만들다니. 청조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네가 저 아낙을 아느냐?”
도운의 물음에 호근은 둥근 배를 내밀고 있는 여인을 곁눈질했다.
“예, 아, 아옵니다.”
“일전의 저 아낙의 내외가 너를 찾아갔다가, 그 서방 되는 이가 이곳 우포청으로 끌려와 매타작을 맞고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에 대해 할 말이 있느냐!”
“그…… 그것이.”
호근은 말을 더듬으며 몸을 떨다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그것이, 내, 내외가 소인을 찾아와 보리를 달라 떼를 쓰더니, 끝내는 패악을 부렸사옵니다. 보리를 내어 놓으라 감히 양반에게 고, 곡괭이를 휘두르니 강상의 죄를 물어 혼을 내어 주었사옵니다. 허나,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강상의 죄는 죽음으로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 온데, 소인이 포청에 발고를 하는 것으로…… 마, 마무리하였사옵니다.”
“허, 강상의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느냐. 그럼 너부터 당장 죽어야겠구나.”
“예? 그…… 그것이 무슨.”
도운은 호근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여인에게 물었다.
“그대의 말로는 올해 수확한 보리를 돌려받기 위해 저자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하였지.”
“예, 나리.”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해보게. 나라님께서 무어라 명을 하셨다 했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쥔 여인은 숨만 쌕쌕 내쉴 뿐 도운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 채, 바짝 마른입만 한동안 쩝쩝거렸다.
“분명 그 뭐시다냐, 그 밭이 고, 공민전인가. 아무튼 뭐 그것이라 하여 소작료로 수확물의 이 할만 내면 된다고 나라님께서 명을 하셨다고 들었습죠.”
“헌데 뭐가 문제였나?”
“그것이 나리께서 저희한테 예년대로 팔 할을 받아 가셨습니다요. 해서 쇤네와 쇤네의 서방이 나머지 육 할을 내어 주십사 청을 하러 찾아갔습니다요. 쇤네 같은 무지렁이가 뭘 알겠냐마는 나라님이 그러라고 하시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요? 해서 나리의 댁으로 찾아가 보리를 돌려받으려고 하였습죠. 헌데…….”
결국, 울음을 터트린 여인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소맷부리로 눈물만 찍어냈다. 도운은 여인이 말을 잇지 못하자 호근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설마 나라님의 명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하겠느냐?”
“그, 그 밭은 고, 공민전이 아…….”
“공민전이 아니라고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내 호조에 일러, 직접 문서를 보여주어야 네가 똑바로 말을 하겠느냐! 또한, 만에 하나라도 네 땅이 공민전이 아니었다 한들, 소작료로 육 할 이상을 받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정한지가 언제인데! 감히 국법을 무시하고 소작료로 팔 할을 걷어! 팔 할을!”
“그, 그것이.”
벌벌 떠는 호근을 향해 도운은 손에 든 부채를 힘껏 던져 버렸다. 도운이 던진 부채가 호근의 이마에 맞고 떨어지자, 만삭의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더욱 거칠게 몰아쉬었다.
“보리가 무엇이냐! 지난해 걷은 식량이 떨어지는 시기의 배고픔을 이겨내려 심는 귀한 곡물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보리를 기다리느라 춘궁기를 힘들게 견뎠을 백성들에게 곳간을 푸는 인정을 베풀지는 못할망정, 그간 주린 배를 채울 유일한 곡물인 보리를 강탈해가다니! 괘씸하기가 하 없다!”
“아니옵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아니면 무엇이냐! 네까짓 것이 양반이랍시고 갓을 쓰고 거만하게 팔자로 걷더니, 나라님의 말씀도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지. 나라님께서 분명 국법을 무시하고 소작료로 이 할 이상을 걷을 시 공민전으로 받은 땅은 국고로 다시 환수한다 하였다. 헌데 네가 감히 하늘 같은 나라님의 명을 허투루 여기는 것이 아니냐! 나라님을 욕보인 너야말로 강상의 법도를 어긴 것이지 무엇이냐! 강상죄를 범하였으니, 너의 말대로 목숨으로 너의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근엄하게 호통을 치는 도운의 목소리에 벌벌 떨던 호근은 목숨만 살려 달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시끄럽다! 너는 비단 국법을 어기고 나라님을 욕보인 것만이 아니라, 죄 없는 백성에게 누명을 씌워 그 목숨까지 위협하였다. 그것이 국법을 어긴 죄보다 더 큰 죄이니라. 백성이 무엇이냐!”
도운의 호통이 포청의 너른 마당에 크게 울렸다.
“백성이란 무릇 이 나라의 근간이요 근본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처럼, 모쪼록 나라의 근간인 백성이 튼튼하고 단단하여야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다! 너같이 제 배만 부르겠다고 백성을 핍박하는 이가 의금부 지사로 지내었으니, 그간 나라를 받치고 있던 뿌리를 갉아 먹고 있던 꼴이 아니냐! 내 곳간에 사는 더러운 쥐가 가엽다 하여 살려 주었더니, 교활한 쥐새끼가 아주 내 집안의 기둥까지 갉아 먹으려 하였구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소인이 잘못했나이다! 부디! 한 번만 더 자비를!”
“너에게 자비란 다른 악행을 시작하는 기회일 뿐이니, 자비를 베풀 의미가 전혀 없다. 허니 내 너에게 두 번 다시 자비를 베풀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포청의 대장 역시 청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시시비비가 분명한 이 일을 두고 어찌하여 저 아낙의 서방 되는 이에게 그리 모질게 장을 칠 수가 있는가. 조사를 제대로 하였다면, 응당 보리를 돌려주었어야 맞지 않는가. 아직도 관복을 입고 있는 놈들 중에 이런 천치들이 있다니! 이런!”
폭풍같이 휘몰아친 도운의 역정 끝에 호근은 옥으로 끌려들어 가고, 포도대장 역시 바로 파직이 되었다. 도대체 저 젊디젊은 나리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시기에 까마득히 올려다봐야 하는 지체 높으신 양반 나리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인지, 여인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놀란 마음에 입만 헤벌리고 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아.”
“이보게, 왜 그러는가?”
“아무래도 아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요. 어미가 놀랐으니, 이 안에 든 놈이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것입지요.”
“아이가…… 말인가?”
둥근 배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을 바라보는 청조의 눈빛에 부러움이 묻어나왔다.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핏덩이의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그 유대감을 몹시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마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여인은 소맷부리로 눈물 콧물을 찍어 내며 고개를 조아렸다.
“은혜는 무슨,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일세. 내 사람을 시켜 자네의 집으로 보리를 가져다주라 이를 것이네. 또한, 의원에게 미리 병자의 치료에 대한 값을 치러 놓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부디 서방의 병구완에 힘쓰게. 아이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고, 마님! 참으로 감사합니다요. 참으로 감사합니다요.”
눈물을 찍어 내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여인은 문득 지체 높은 젊은 마님께서 자신의 누추한 초가까지 발걸음을 한 이유를 듣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헌데, 마님. 쇤네를 찾아오신 연유는 무엇인지.”
“아, 그것.”
뽀얀 웃음을 흘리는 청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리 고초를 겪은 여인에게 겨우 저냐가 먹고 싶어 찾아왔다는 말을 하려니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아닐세. 내 달포 전에 저자에서 먹었던 부아저냐가 문득 먹고 싶어 주막엘 찾아갔었네. 헌데 손맛이 달라 그러한가, 도통 그 맛이 안 나. 해서 주모에게 물어 자네의 초가를 찾아갔던 길이었네.”
“아이구, 마님. 그렇다면 쇤네가 바로 만들어 올려야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쇤네가 뚝딱 만들어다 올릴 것입니다요.”
“아닐세, 몸도 무거운 사람이. 어서 돌아가서 서방을 보아야지. 걱정이 될 터인데.”
말은 그리 하면서도 또다시 입맛이 돌았다. 청조는 이런 자신이 겸연쩍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치스런 투정이나 부린다며 스스로를 꾸중하였건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다시 입맛이 돌았다. 그런 청조의 망설임을 뻔히 눈치챈 도운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힘들겠지만, 자네가 수고를 좀 해줄 텐가? 내 수고비는 섭섭지 않게 치를 것이니.”
“아닙니다, 나으리. 수고비라니요. 응당 쇤네가 만들어 올려야지요, 암만요.”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여인의 모습에 도운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주막으로 가면 되겠느냐?”
“예, 나리. 주막에서 쇤네가 솜씨를 발휘해 보겠습니다요.”
여인은 커다란 배가 무거워 뒤뚱거리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막에 다다라 주모에게 사정을 이야기 한 후, 바로 저냐를 만들어 왔다. 군침이 도는 모양새였다.
“어서 한 점 먹어보아라.”
도운이 직접 젓가락을 들어 부아저냐 한 점을 청조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자신의 내자를 살뜰히 살피는 수려한 젊은 나리의 모습에 놀란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저런 양반 나리도 있구나, 새삼 놀라웠다.
“어떠하냐? 먹고 싶었던 그 맛이냐?”
“예, 그 맛입니다. 어찌 이런 맛을 내는가? 필시 자네만의 비법이 있는 게지?”
청조의 물음에 여인이 고개를 흔들며 겸양을 떨었다.
“아유, 미천한 쇤네에게 비법이 따로 있겠습니까요.”
“그래도 자네가 만든 저냐는 무언가 다르네. 씹을수록 쫄깃하고 고소한 것이.”
“비법까지는 아니고, 부아를 삶을 때 주막에서 만들고 남은 술지게미(술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넣어 삶으면 누린내가 나지 않고 육질이 조금 더 쫄깃해지긴 하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찬모는 술지게미를 넣지 않고 부아를 그냥 삶았다고 합니다요. 그러니 굳이 비법을 말씀하라 하시면 술지게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래? 술지게미라, 누린내를 잡기 위해 넣는 청주대신 그 방법을 응용한 것이구먼. 술지게미라면 어차피 버리는 것인데, 버리는 것을 이용하여 음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다니. 자네가 참으로 영리한 사람이 아닌가.”
“아이고, 아닙니다. 참으로 아닙니다요, 마님. 주막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익히게 된 것입지요.”
“아닐세, 정말 맛있어. 다른 이들이 한 것과는 다르네. 내 이 맛이 얼마나 생각이 났는지, 밤사이 잠을 통 못 이룰 정도였네.”
청조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식탐이 너무 많은 것도 흉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사뭇 부끄러웠다.
“예? 저냐가 생각나 밤사이 잠을 못 이룰 정도라면, 입덧이 아닙니까요? 아무렴, 수태를 한 여인이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면 아기가 짝귀로 태어나는 것입죠. 그러니 귀한 아기씨를 위해 응당 쇤네를 찾아오셔야죠. 예, 당연합지요. 마님께서 수태를 한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쇤네가 더욱 정성을 들였을 것인데 말입니다요.”
여인이 멋모르고 떠드는 소리에 청조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수태? 회임을 말하는가?”
“예, 마님. 어찌하여 그러시는지. 아닙니까요? 이상하다. 잡숫는 모양도 그렇고, 딱 수태를 한 여인이 맞는데…….”
청조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리며 도운을 향하였다. 도운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방님.”
“그만 돌아가자.”
도운은 여인에게 수고비로 얼마의 전냥을 쥐여준 후, 청조와 함께 궁으로 돌아왔다. 급하게 어의를 대령하라는 도운의 명에 애류당의 궁인들이 바빠졌다. 얇은 모시로 만들어진 발이 내려오고, 청조의 팔목에 감긴 명주실이 발을 건너 어의 영감의 손에 쥐어졌다.
“어떤가? 회임이 맞는가?”
도운의 초조한 명에 어의는 고개를 갸웃하다 어의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어 모시로 만든 발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은 어의녀가 청조의 손목을 직접 잡고 맥을 짚었다.
“어떠한가? 회임이 맞는가? 혹 어디가 미령한 것은 아니겠지?”
도운의 다그침에 어의가 먼저 진맥한 결과를 말하였다.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분명 태맥이 잡히는 것이 유빈마마께옵서 회임을 하신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맥으로 보아 대략 달포가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어의녀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예, 어의 영감의 말씀대로 소인 또한 태맥을 느꼈사옵니다.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유빈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를 드리던 궁인들이 다들 물러간 조용한 처소에 도운과 단둘이 남은 청조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청조야, 괜찮은 것이냐? 왜, 기쁘지 아니한 것이야?”
“서방님.”
“그래.”
멍하니 도운을 바라보던 청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 아이였습니다.”
청조가 멍한 듯 조용히 속삭였다.
“그 아이?”
“예, 그 아이가 분명합니다.”
청조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도운은 가만히 청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산에서, 아이가 소첩을 찾아왔었습니다. 집채만 한 몸을 한 어린 호랑이가 이마에 왕(王)자를 짙게 새기고…….”
“왕? 그럼 사내아이가 아니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도운을 바라보며 청조는 눈만 계속 끔벅거렸다. 도운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청조의 복스러운 뺨을 어루만지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던 청조는 이윽고 투명한 눈물을 쏟아냈다.
“그 아이가…… 소첩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재롱을, 재롱을 피웠습니다.”
청조가 점차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하자 도운이 가녀린 어깨를 끌어와 품에 안고 다독거렸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였으니 어찌 아니 서럽고, 어찌 아니 기쁠까.
“진정 산의 정기를 받은 사내아이가 잉태된 것이 아니냐. 어찌나 성격이 급한 놈인지, 달포밖에 안 된 놈이 벌써부터 저냐가 먹고 싶다고 어미를 졸라대다니.”
어미를 졸라 대었다는 도운의 한마디가 청조의 귓가를 맴돌았다. 어미를, 어미를 졸랐다고. 청조는 아직 태도 나지 않는 배를 어루만졌다.
“왕(王)자를 그리 자랑스럽게 이마에 떡 그리고 나타났다니, 분명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영리한 사내아이일 것이다.”
청조는 도운의 허리를 꼭 부여잡고 그의 품에 뺨을 비볐다. 꿈속에서 들었던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랜 시간 그곳에서 홀로 기다렸을 아이가 고맙고 기특하여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도운의 손길에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길이 겹쳐 있는 것만 같았다.
“고맙다, 청조야.”
진심이 담긴 도운의 한마디에 청조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청조의 까만 정수리에 뺨을 기댄 도운에게서 웃음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도운의 가슴팍이 청조가 흘리는 눈물로 촉촉이 젖어갔지만, 도운은 청조의 몸을 더욱 꽉 끌어안고 웃기만 했다.
지어미의 울음소리가 어찌 이토록 어여쁠 수가 있는가. 너무도 어여쁘고, 또 어여쁜 나만의 여인. 나의 청조, 청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