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름을 비추는 새벽-21화 (21/25)

외전 _부부(夫婦)

어둠이 내려앉은 강녕전 주위로 이는 찬바람이 마치 부엉이 울음소리인 듯 구슬픈 소리를 만들어 냈다. 처소 안에서 도운과 독대를 하던 재환의 얼굴 역시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꼭 떠나야겠는가? 백성들을 위하는 나의 치세에 자네가 필요하다고 해도 떠나겠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신, 큰일을 겪으신 전하께 힘이 되어 드리는 것이 마땅한 신하의 도리인 줄 아옵니다. 허나 소신, 지친 마음을 달래며 나라를 돌아보고 그저 유랑을 하고 싶사옵니다. 부디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도운은 결연한 얼굴로 허리를 굽히는 재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굳이 왜 떠나려 하는지 알고 있기에 아니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재환 같은 인재를 그냥 떠나보낼 수도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사로서 나라를 돌아보는 것은 어떠한가? 유빈이 돌면서 보았던 곳들을 자네가 돌아보게. 백성들의 삶이 유독 힘들다고 유빈이 말했던 지역들을 돌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약 백성을 괴롭히는 지방 관리들이 있다면 처벌하여 억울한 백성들을 도와주게. 그저 정처 없이 떠도는 것보다, 그편이 마음을 정리하기도 편하지 않겠는가.”

마음의 정리, 재환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슬픔이 스치듯 빠르게 지나갔다. 어떤 대답도 내 놓지 못하고 앉아 있는 재환의 무거운 모습에 도운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어사란 즉일출발이 원칙이나 내 자네에게 시간을 더 주겠네. 허니 애류당에 들러 청조에게 인사는 하고 떠나게.”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고뇌에 차서 임금의 처소를 나오는 재환에게 어느새 남현이 다가왔다.

“꼭 그래야만 하겠는가? 역당들이 처결된 지 아직 달포도 지나지 않았네. 이럴 때일수록 자네가 전하의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리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지. 만약 그리한다면 영의정 대감께서도 자네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겠나.”

남현의 충고에 재환의 얼굴이 아픈 듯 일그러졌다. 곧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유약한 소년 같은 모습에 남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예, 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었지요. 단지 저 하나의 입신양명이 아닌 가문의 자랑이 되고, 나라의 큰 동량이 되고 싶었습니다. 소인 그렇게 되리라 늘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었는지, 너무 부끄럽습니다. 노력을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더이다. 저의 뜻대로 아니 되는 소인의 마음이…… 소인의 마음 같지가 않습니다.”

“이보게…….”

“아무리 해도 불충한 마음을 덜어낼 수가 없으니, 이런 소인이 어찌 충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떠나렵니다. 가는 길마다 마음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또 조금씩…… 그리 흘리며 걷다 보면 언젠가 다 비워지지 않겠습니까?”

“휴, 자네가 정히 그래야 한다면 이것만은 약조해 주게. 그 부스러기들을 다 흘려보내는 날이 오거든 꼭 다시 돌아오게. 이것만은 약조하게.”

재환은 선뜻 약조할 자신이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인왕산 바위가 빗방울에 깎여 없어지는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마음의 부스러기를 아무리 털어낸들 언제쯤 이 단단한 마음이 다 닳아 없어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약조를 남겼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약조를 남겼다.

꼭 돌아오겠노라 약조를 남기고 궁을 나섰다. 저자에 부는 찬바람이 어찌나 시린지, 몸이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마음에 쉼 없이 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마음이 얼어 버릴 듯 아파왔다. 재환은 찬바람에 얼어버린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너무 아팠다. 그래서일까. 눈물이……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이튿날, 재환은 애류당에 들렀다. 갑작스런 그의 방문에도 청조는 화사한 얼굴로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예, 마마. 마마께서는 강녕하셨사옵니까?”

“예, 그럼요.”

막녀가 들인 다과상을 앞에 두고 청조는 이것도 먹어 봐라, 저것도 먹어 보라며 재환에게 권하였다.

“얼굴이 수척하신 것이, 근심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근심이라니요, 그런 것 없사옵니다. 그간 큰일들을 해결하느라 수고를 좀 하였더니 기력이 쇠한 듯하옵니다.”

“나리께서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그 이야기는 모다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셨는데 제가 감사인사 하나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너무 송구하고,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 목숨을 살려 주셨는데, 제가 갚지 못할 큰 은혜를 또 입었습니다.”

재환은 미안하여 어쩔 줄 모르는 여인의 뽀얀 뺨과 재잘거리는 붉은 입술, 커다란 눈망울을 응시했다. 저 눈망울 속에 담긴 것이 자신이라면…….

“소신, 전부터 마마께 꼭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었사옵니다.”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말씀을 해 보세요.”

“마마를 처음 뵈었던 그때에, 마마께서 혹 전하보다 소신을 먼저 만났던 것이라면 소신에게 마음 한 자락 내어 주셨겠습니까?”

“그것이 어인 말씀이십니까?”

“만약, 마마께서 전하보다 저를 먼저 만났었다면, 소신과 인연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마마께서 전하를 찾아 헤맨 것인지, 그저 서방을 찾아 헤맨 것인지 궁금하여 그러하옵니다.”

재환의 물음에 청조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리를 먼저 만났다 하더라도, 저는 결국 전하와 인연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하이시기에 저의 서방님이 되신 것이지, 서방으로 만났다 하여 저의 지아비가 전하이신 것은 아닙니다.”

“어찌 확신하시옵니까?”

“인연은 모름지기 하늘에서 정해 주는 것이지요. 평생을 은애하고 은애할 저의 인연은 전하 단 한 분뿐이십니다. 하늘이 정해 주셨고, 저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나리께서 만약이라 말하신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청조의 대답에 재환은 슬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소신도 하늘에서 정한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옵니까?”

“예, 그렇고말고요. 나리같이 늠름하고 다정한 분의 연모를 받을 여인은 참으로 복이 많은 여인입니다. 분명 아리땁고 고운 여인일 것입니다.”

진심으로 해맑게 웃으며 답을 주는 청조에게 자신의 인연은 이제 없다 말하고 싶었지만, 재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한 듯 차를 한입 들이킨 재환은 무언가에 홀린 듯 찻잔을 내려놓고 청조를 바라보았다.

“소신, 마마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신, 마마를…….”

“마마, 유빈마마. 곽 상궁이옵니다!”

갑자기 급한 듯 청조를 부르는 곽 상궁의 목소리에 재환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혀끝에서 맴돌았다. 곧 장지문이 열리고 곽 상궁이 들뜬 얼굴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마마, 어서 나가 보셔야 할 듯하옵니다. 마마의 어머니께서 궁에 도착하셨다 하옵니다. 그뿐 아니라 두 아우들도 함께 도착하였다 하옵니다.”

“뭐? 어머니…… 어머니께서? 아직 도착할 시기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어머니께서 마마를 뵙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오셨다 하옵니다. 어서 나가 보소서. 주상전하께서도 소식을 들으시고 곧 애류당으로 납신다는 전갈이옵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청조가 가슴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벌써부터 눈물이 가득 차올라 찰랑거렸다. 복받치는 감정에 비틀대는 청조를 곽 상궁이 부액하여 나오자, 막 애류당으로 들어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먼발치에 보였다.

“어머니, 어머니!”

말로는 이미 전해 들었지만, 정녕 높으신 후궁 마마가 되어 버린 딸의 모습에 어머니는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청조는 바삐 대청에서 내려와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청조…… 청조야. 네가 정녕 청조가 맞는 것이냐?”

“예, 어머니. 저입니다, 청조입니다.”

자신을 끌어안은 딸의 몸을 억지로 떼어낸 여인은 청조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손으로 살살 만져 보았다. 정녕 자신의 딸이 틀림없었다. 지난 몇 해간 연락 한 번 없어 근심을 쌓게 했던 자신의 딸이 고귀한 후궁마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마,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곧 다과를 마련해 올리겠사옵니다.”

“어머니, 안으로 드셔요. 안으로 드셔서 이 못난 여식의 절부터 받으셔요. 이 못난 여식이 어머니께 꼭 절을 올릴 것입니다. 너희들도 어서 안으로 들자.”

곽 상궁의 말에 청조는 눈물을 갈무리하고 어머니와 아우들을 데리고 급히 처소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재환은 조용히 애류당을 나섰다.

되었다. 저리 행복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으니 다 되었다.

못다 한 고백은 목구멍으로 깊게 삼켜 버렸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재환은 어느새 남루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마패를 허리춤에 잘 갈무리하였다. 어사라는 것이 원래 수발들어줄 대리를 대동하고 다니는 것이었지만, 재환은 홀로 길을 떠났다. 숭례문을 빠져나와 도성 밖으로 첫걸음을 떼는 순간 하늘에서 차가운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눈꽃 송이가 춤을 추듯 허공 속을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재환은 차가운 꽃송이가 눈에 닿아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눈꽃 송이가 길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 가는 길마다 흘릴 마음의 부스러기가 다 덮일 수 있도록. 덮였던 부스러기가 눈과 함께 이대로 녹아 버릴 수 있기를.

* * *

새해가 밝고 여기저기 쌓였던 눈이 어느새 다 녹아 버렸다. 올겨울은 유독 추웠으니, 올해는 대풍이 들려나 보다 하며 도운은 청조를 보며 웃었다. 둘은 편한 무명옷을 걸치고 함께 후원에 들어 양지바른 곳을 찾아다녔다. 어느새 봄 냄새를 맡고 올라온 연한 냉이와 쑥, 달래를 함께 캐며 다녔다. 도운이 그것들 넣고 끓인 된장 조치를 좋아하니, 이른 봄부터 그것을 끓여 달라 청조를 졸라댔었다.

봄이 되어 애초롬한 향을 풍기며 올라오는 봄나물이 후각과 식욕을 자극하는 따사로운 날이었다. 저고리의 소맷부리를 걷어 올리고 열심히 나물을 캐는 청조의 곁에 쭈그려 앉은 도운은 갑자기 손으로 열심히 땅을 팠다. 한참 땅 여기저기를 파헤치다, 연하게 올라온 풀들 사이를 헤집으며 무언가를 쫓는 듯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녔다.

한참 부산스럽던 그의 행동이 딱 멈추더니 싱긋 미소를 크게 지었다.

“청조야, 청조야. 이것 좀 보아라. 내가 캔 이것이 무엇이냐?”

“어디 좀 보시어요.”

청조가 무엇인가 하고 고개를 들자, 도운은 청조의 얼굴 가까이로 포개 쥔 두 손을 들이밀었다.

“어맛!”

도운이 손을 벌리자마자 엄지손톱만 한 작은 청개구리가 청조의 얼굴로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란 마음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청조를 보고 도운은 입을 가리고 키득대며 웃었다.

“너는 어찌하여 매번 속느냐?”

“짓궂으셔요!”

“네가 매번 이리 깜짝 놀라니, 내가 그것이 귀여워 그러는 것이 아니냐?”

“흥, 소첩이 된장 조치 아니 끓여 드리렵니다. 누룽지만 박박 긁어 상에 올릴 것입니다.”

청조가 괜히 눈을 곱게 흘기며 콧소리를 냈다.

“으응? 정말이냐? 내가 달래랑 냉이 넣고 끓인 된장 조치를 겨우내 기다린 것을 알면서도 네가 아니 끓여 준다는 말이냐? 정말 그럴 것이냐? 응? 부인, 부인.”

부러 점잖게 ‘부인’하며 다가오는 도운의 모습에 청조는 맑은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예쁘게 웃는 청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춘 도운은 눈꼬리를 크게 휘어댔다.

“이 못난 서방이 다 잘못했소. 그러니 금일 점심엔 된장 조치 끓여주고, 주전부리로는 요 쑥 넣고 쑥버무리 하여 식혜랑 내주시오. 내 그것이 맛나면 부인께 선물을 드릴 것이외다.”

“예? 무슨 선물 말씀이옵니까?”

“그런 것이 있다.”

싱글벙글 웃던 도운은 청조의 곁에 찰싹 붙어 나물 캐는 것을 돕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먹지 못할 풀을 한 움큼씩 뜯어다 바구니 안에 훌훌 던져 넣으면서도, 청조의 일을 돕는다며 의기양양했다. 나물을 다 캐어 낸 후, 도운은 청조의 뒤를 쫓아 함께 우물가로 향했다. 도망가는 청개구리를 잡는다며 땅을 파헤쳤으니, 손이며 흰 적삼의 소맷부리가 온통 흙이었다. 도운은 우물가에서 손을 씻고 앉아 곁에서 나물을 다듬는 청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저 좋고 행복했다.

도운은 열흘에 한 번씩 청조와 연경당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단청이 없는 연경당은 일반 여염집 같은 고즈넉하고 소박한 모습의 독립된 기와였다. 궁인들도 없이 단둘이서 보내는 하루는 연경당의 모습만큼이나 소박하고 정겨운 일과였다.

역당들을 처결한 후, 비어 버린 관직을 재정비하고 국본을 바로 세우고자 도운은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눈이 날리기 전에 청조와 함께 산에 한번 다녀오고 싶었지만, 좀처럼 여건이 되지 않았다. 궁 생활이라는 것이 저도 이리 답답한 일인데, 청조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켜야 할 많은 예법들과 항시 자신을 향해 있는 남의 시선이 버거울 것이었다.

하여 생각한 것이 연경당에 들어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겨우내, 며칠 짬을 내어 이곳 연경당에서 함께 화로에 밤도 구워 먹고, 떡도 구워 먹었다. 도운은 옥류관에 있던 청조의 보퉁이를 찾아와 예전 청조가 만들어 줬던 털배자를 꺼내 입었다. 그 배자 입고 산에서 생활했을 적 마냥 연경당 마당도 쓸고, 장작도 직접 팼다. 청조와 함께 대청에 나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내린 눈을 감상하며 고드름도 아득아득 깨물어 먹었다.

그 후로, 열흘에 하룻밤은 꼭 이곳에 들어 궁의 예법 따윈 벗어던지고 그저 여염집의 평범한 부부가 되어 생활했다. 도운은 청조를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직접 피웠고 물도 길었다. 청조는 도운이 불을 지펴준 반빗간에 들어 음식을 장만했다. 청조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도운은 스스럼없이 반빗간에 들어 간도 봐주고 상도 들어주었다.

나라님이 반빗간에 들어 무엇을 하는지 안다면, 아마 대신들이 올린 상소가 서안 위에 산처럼 쌓일 거라 농을 하며 함께 웃곤 했다.

원하던 된장 조치에 고봉밥을 뚝딱 해치운 도운은 점심상을 물리자마자 춘곤증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봄이 되자 종종 몸이 나른하고 졸렸다. 청조를 끌어안고 짧은 오수를 즐기던 도운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혹여 청조가 잠에서 깰까 조심스럽게 대청으로 나온 도운은 마당에 읍하고 서 있는 관원 몇 명을 발견했다.

“왔느냐?”

“예, 전하. 소신들이 다소 서두른 것이 아닌지 모르겠사옵니다.”

“아니다. 시간에 맞추어 잘 왔느니라.”

막 잠에서 깬 왕의 망극한 모습에 도화서 화원들이 송구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용포는 고사하고, 도포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왕은 그저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는 일반 백성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있거라. 내 곧 다시 나올 것이다.”

“예, 전하, 명 받잡겠사옵니다.”

안으로 든 도운은 조심스런 손길로 청조를 깨웠다. 슬며시 열린 청조의 눈썹에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잠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청조야, 일어나 보거라.”

도운은 눈만 끔벅거리며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청조의 눈썹에 바람을 후 불어 잠을 날려주었다.

“서방님, 무슨 일이옵니까?”

“밖에 화원들이 기다린다. 어서 일어나 준비를 하거라.”

“예? 화원들이요?”

어리둥절한 청조는 화원들이 기다린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삐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섰다. 이미 그림 그릴 준비를 끝마친 도화서 화원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유빈마마를 향해 조용히 읍하고 섰다. 작년부터 왕을 사로잡은 여인이라, 궁 안팎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빈마마의 존재를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것은 처음인지라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이리 와 여기 앉아 보시오.”

“예, 전하.”

화원들의 앞이라고 존대를 해 주는 도운의 말투에 청조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운은 자리에 앉은 청조의 치마를 어여쁘게 펴주고, 연꽃처럼 풍성하게 부푼 치마 위에 늘어진 삼작노리개도 더욱 어여뻐 보여라 매만져 주었다. 여인의 수발을 들어주는 왕의 모습이 어찌나 망극한지, 화원들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느 사내가 여인의 치마며 장신구를 매만져 준단 말인가. 또한, 어느 사내가 여인과 함께 자신의 초상을 그린단 말인가. 심지어 그냥 초상화도 아닌 왕의 어진이었다. 허나 이를 어진이라 말해야 할까? 용포에 익선관을 쓴 것도 아닌, 도포에 갓을 쓰고 계시니 이를 어진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초상화라 해야 하는 것인지 자신들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두 분 마마가 함께하시니 엄밀히 말해 이는 초상화도 될 수가 없었다. 긴 세월 화원으로 살아온 인생, 생애 처음 그려보는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고뇌에 빠진 화원들이 토끼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청조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매만져 주는 도운의 얼굴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다 그의 갓끈을 풀러 다시 묶어 주었다.

“내가 묶은 갓끈이 부인의 마음에 안 차는가 보오?”

“안 차는 것이 아니라 소첩이 묶어 주고 싶어 그러하지요.”

“그럼 옷고름이 섭섭해하지 않겠는가? 세조대는 또 어찌하고.”

“걱정을 마시어요. 옷고름이 섭섭하다 하면 소첩이 다시 매만져 주면 되고, 세조대가 서운타 하면 소첩이 다시 매듭지어 주면 되지요.”

도운의 익살맞은 질문에 달콤하게 속삭인 청조는 도운의 허리에 둘러 있던 세조대와 옷고름을 차례로 풀고는 다시 어여쁘게 매듭지어 주었다. 준비가 다 끝나자 도운은 청조의 옆자리에 앉아 작은 손을 꼭 잡고 보듬었다. 청이 만든 고약이 실로 효과가 뛰어난지라, 겨우내 요 작은 손이 보드랍게 변해 있었다.

“앞으로는 해가 바뀔 때마다 너와 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림으로 기록해 둘 것이다. 너랑 나랑 백발이 되거들랑, 이것들 보고 젊은 시절을 추억하면서 놀자꾸나.”

“예, 서방님.”

먼 훗날, 저와 어찌하고 놀까 벌써 생각하시다니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코끝이 찡하였다. 은애하는 이의 곁에서 부부로서 함께 늙어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청조는 화원들을 향해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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