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름을 비추는 새벽-20화 (20/25)

20. 자백

‘오라버니, 오라버니.’

“화, 화야.”

옥사 벽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꿈에서 자신을 부르는 예화의 모습에 익태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 팔을 억세게 잡아채는 바람에 익태는 화들짝 놀랐다.

“곧 추국이 시작될 것이니, 죄인들은 일어나시오.”

죄인들은 다시 질질 끌려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지, 벌써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영의정은 다시 시작될 고신이 두려워 벌써부터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옆에서 흐느끼는 아버지의 눈물에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한 익태는 그저 눈을 감아 버렸다.

도대체 조정 대신들은 무얼 하느라 아직도 자신들을 이곳에 내버려 두는 것인지. 이곳을 나가자마자 그 늙은이들부터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쓸모없고, 무능한 늙은이들.

추국장에 들어선 도운은 눈을 감고 부르르 떨고 있는 익태와 울고 있는 영의정을 지나 한 내관의 앞에 섰다. 부러뜨린 등채를 대신하여 새로 마련한 등채로 한 내관의 턱을 위로 올렸다.

“죄인에게 묻겠다. 약 여섯 해 전, 화성에서 의원을 교살하여 죽이고 익수사로 위장한 적이 있느냐?”

한 내관도 이번만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잠시 굳은 표정 그대로 도운을 바라보던 한 내관은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곧 고신에 너덜너덜해진 불쌍한 늙은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잔기침과 함께 흘러나왔다.

“소인은…… 절대…… 그런 일이 없사옵니다. 전하,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를 보시어…… 제발 소인에 대한 곡해를 멈추어 주시옵소서. 평생을 궁에 매여…… 왕실을 위해 살아온 소인이옵니다…… 어찌 화성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인에게…….”

어흐흐흐흐, 한 내관은 서럽게 흐느끼며 괴롭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증인 대령하라.”

“예, 전하.”

도운의 명에 재환의 등 뒤로 사내 둘이 졸래졸래 따라 들어왔다.

“전하, 화성 관아에 속해 있는 의생(醫生: 검시의)과 오작사령(仵作使令: 시체검안관노) 대령이옵니다. 당시 유빈마마의 부친이신 서 의원의 시신을 부검하였다 하옵니다.”

“당시 사건 경위가 어찌 되느냐?”

나라님의 용안을 처음 보는 순간, 소심한 의생은 긴장감에 토기가 올라왔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마른침을 몇 번을 삼킨 후에야 겨우 바들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이…… 여섯 해 전 유월 초하루가 지난날이었습니다. 고을에 유명한 의원이었던 서 의원이 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는 고발을 받고, 그때 관아에 계셨던 현감나리와 형리, 그리고 여기 오작사령과 함께 서의원의 집으로 햐, 향하였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시, 시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떠했느냐?”

“그것이 얼굴색이 푸르고 또 부, 붉었습니다. 무원록(無冤錄: 검시서적)에 따르면 익사체는 그 얼굴색이 붉거나 푸르지 아니하고, 허옇게 뜬 색이어야 합니다. 또한, 콧구멍 부분에 흰 거품이 자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아, 않았사옵니다. 익수사하였다는 시체가 그리 보이지 않으니, 타살을 의심해, 했사옵니다. 하여 혹 독살일까 싶어 은비녀를 입에 넣었지만 검어지지 아, 않았습니다요.”

의생은 말을 많이 하여 목이 타는지 목 근처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고는 입술을 한번 쓱 닦았다. 그러다 문득 저의 보고를 기다리고 계시는 나라님의 얼굴을 흘끔 바라본 의생은 얼른 입에서 손을 내리고 목을 바짝 움츠렸다.

“괜찮으니 천천히 이야기하거라.”

“……예, 예. 그것이, 독살이 아닌 듯하여 여기 있는 오작사령이 옷을 벗겨내고 시체의 몸을 사, 살폈습니다. 구타를 당한 것인지 몸 여기저기에 작은 상흔이 보였는데, 특히 목에 액흔(扼痕: 목이 졸린 흔적)이 보였습니다요.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있었습니다.”

“그것을 현감도 보았느냐?”

“예…… 예. 보았습니다요.”

“그래서 처결을 어찌하였느냐?”

이때부터 의생은 눈에 보이게 떨기 시작했다. ‘처결은…… 처, 처결은…….’ 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만 계속 떨었다. 보다 못한 오작사령이 나서 대신 고했다.

“전하, 처결에 관해서는 쇤네가 압니다요. 그것이 그날, 쇤네는 나리들을 모시고 시체를 검안하고 바로 관아로 돌아왔습니다요. 그 후, 현감 나리께서 상부에 올릴 시장(屍帳: 시신의 상태를 기록한 그림)을 작성하시는 것을 도우려, 이놈이 현감 나리 곁에서 먹을 갈고 있었습니다요. 한데 그때 손님이 찾아와 소인은 바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손님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사건을 익수사로 종결하라, 현감 나리가 그리 명하셨습니다요.”

“네 그때 왔었다는 인물을 기억하느냐? 혹, 이곳에 있더냐?”

“그것이 얼굴은 잘…… 여섯 해 전, 한 번 본 사람인지라 기억하기가 쉽지도 않거니와…… 아! 그 양반이 고급스런 부채를 들고, 이렇게 하관을 다 가리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요.”

도운의 입술 끝이 비죽 올라갔다.

“그 부채의 생김은 기억이 나느냐?”

“그것이 정확히 생각나는 것은 없고, 검은색에 무언가 자개문양이 요로코롬 박혀 있었던 것만 기억합니다요. 검은색 부채가 흔한 것은 아니라 소인이 그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요.”

“그래? 혹, 이리 생겼더냐?”

도운은 입고 있던 쾌자 아래 허리춤에서 합죽선을 꺼내 활짝 펼쳐 보였다. 도운의 손에 들린 합죽선을 보자 한 내관이 경기하듯 몸을 들썩거렸다. 늘 가늘기만 했던 그의 눈이 처음으로 번쩍 뜨여 그 안에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파르르, 한 내관의 콧속에서부터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다. 도운의 손에 들린 합죽선을 바라보는 한 내관은 눈을 부라리며 사납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형틀에 포승줄로 결박당한 몸이 앞으로 나가지 않자 곧 발작을 일으키듯 발버둥 쳤다.

“내놔아아!”

“무엇을 내놓으라는 것이냐? 혹 이 부채 말이냐? 부채가 너에게 매우 소중한 물건인가 보구나. 그리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니.”

“저의 것입니다. 주상이 함부로 가져갈 물건이 아니오!”

“닥치거라!”

‘크헉’, 쇳소리로 기침을 해대는 한 내관의 입에서 타액이 질질 흘렀다. 단단한 등채로 한 내관의 가슴을 강타한 도운은 합죽선을 재환에게 건네주었다.

“주상이라? 건방진 놈. 네놈이 진정 왕실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냐! 네 그 불손한 태도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종사관은 합죽선을 자세히 보아라.”

“예, 전하.”

재환은 합죽선을 조심스럽게 받아 세심히 살펴보았다. 햇빛에 비쳐 보니, 투명하리만큼 얇은 한지 사이로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에 쥐기 편하도록 얇게 깎아 만든 대나무 속살이나 겉대 사이에 무엇을 숨기기는 매우 힘들어 보였다. 이어 부채 머리끝에 달려 있는 선추가 눈에 들어왔다. 재환은 쪽빛 선추끈에 매달린 장방형 모양의 작은 선추를 손으로 쥐었다.

장수를 상징하는 불로초와 거북이가 정교하게 조각된 대추나무 선추 아래에 작은 박쥐 문양 비취가 이어져 있었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햇빛에 반짝이는 박쥐 장식을 손으로 당겼다. 작은 서랍처럼 열리는 그 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가 나왔다. 재환은 서둘러 합죽선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종이를 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종이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의경 세자의 죽음에 동조한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모두 합심하여 한일환의 조카를 중전에 올리고, 모든 권력을 함께 나눈다는 동맹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한일환을 시작으로 조정대신들 일곱 명의 이름과 지장이 찍혀 있었다. 충격적인 사실에 재환은 한 내관을 노려본 후, 떨리는 손으로 연판장을 도운에게 넘겼다. 연판장을 확인한 도운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종사관은 무얼 기다리고 있는가. 당장 가서 역당들을 추포하지 않고.”

“예, 전하. 소신 명 받잡겠사옵니다!”

재환은 의금부에 대기하고 있던 겸사복장 이하 겸사복들과 나졸들을 끌고 의금부를 나섰다. 그들의 형형한 기운에 육조거리를 지나던 백성들이 길을 비켜주면서도 무슨 일인가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일곱 명의 대감들 댁으로 인원을 분배하여 보낸 재환은 좌상 대감의 가택으로 향했다. 아버님과 동문수학했던 좌상의 배신은 더 큰 배신감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좌상의 가택으로 쳐들어온 재환과 군관들에 의해 집안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종사관의 신분으로 가죽목화를 신은 채 방 안으로 들어온 재환의 모습에 좌상은 바닥을 벌벌 기며 도망 다녔다.

“어째서, 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진 것입니까? 어찌 그런 무서운 생각을!”

“그것이…… 그것이…… 이보게, 재환. 자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옛정을 봐서 제발 나를 못 본 척해 주면 아니 되겠나? 내 이리 잘못을 빌겠네. 응?”

“못 본 척해 드리면 어찌하시렵니까? 도주라도 하시렵니까?”

비굴한 좌상의 모습에 재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겨우 이런 추잡한 간신배 따위들이 세자 저하를 독살하여 사직을 흔들고, 제 누이를 유폐시키고, 제 식솔을 노비로 만들었다.

“죄인을 포박하라!”

“이보게, 이보게!”

자신을 향해 부르짖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재환은 뒤를 돌았다.

* * *

도운은 눈에서 피가 나올 듯 벌겋게 날이 선 한 내관을 향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제 네 죄를 인정하겠느냐?”

“무슨 죄가 있다 이러십니까? 소인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모다 모함이옵니다.”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할 증좌가 네 합죽선에서 나왔다. 이래도 발뺌을 하는 것이냐?”

“그 합죽선이 저의 것이라는 증좌가 어디 있사옵니까? 설령 그것이 소신의 것이라 하여도, 누군가 선추 안에 장난을 친 것이겠지요. 소신의 선추에는 누군가가 조악하게 위조한 연판장이 아닌 패철(佩鐵: 나침반)이 들어 있었사옵니다.”

계속된 한 내관의 발뺌에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계속 여유로운 미소만 짓던 도운은 뒷짐을 지고 익태의 앞에 거만하게 섰다.

“너는 어떠냐? 네 죄를 인정하겠느냐?”

“모함이옵니다.”

도운을 노려보는 익태의 눈초리가 한 내관의 그것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이렇게 닮은 모습을 보니 핏줄은 핏줄인가 보구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도운은 헛웃음을 짓다, 이를 갈며 자신을 쏘아보는 익태를 향해 일갈했다.

“내 분명 한 번만 묻는다 하였다. 이미 한 번을 물었으니 다음엔 언제 다시 물어볼지 모른다.”

“한 번을 물어도 두 번을 물어도, 백 번, 천 번을 물어도 소신의 대답은 같사옵니다. 저의 무고함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슬슬 결말을 봐야 할 시간이었다. 도운은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보는 익태에게 씩하고 근사한 미소를 보여 준 후,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죄인을 대령하라!”

도운의 한마디에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여인의 발악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이윽고 금군들에게 잡힌 언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끌려 들어오는 여인의 모습을 확인한 익태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왜, 대체 저것을 왜? 참을 수 없다는 듯 익태는 도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대감마님! 도련님! 쇤네를 살려 주시옵소서.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쇤네는 죄가 없사옵니다. 허어엉. 살려 주시옵소서.”

영의정과 익태의 앞으로 끌려가던 언년은 그들을 돌아보며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그러다 결국 형틀에 묶인 언년은 목을 잔뜩 움츠리고 겁먹은 눈으로 주위만 둘러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쇤네는 잘못이…… 잘못이 없습니다아.”

“시끄럽다. 네 지금 예가 어디인 줄 알고 눈물 바람인 것이냐! 당장 그치지 못할까!”

도운의 추상같은 호령에 언년은 히끅대며 억지로 울음을 멈추었다. 도운의 무서운 얼굴을 바라보며 끅끅거리던 언년은 곧 속곳이 축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축축함이 이내 치마까지 번지고, 금세 지린내가 올라왔다. 무릎이 맞부딪힐 정도로 다리가 심하게 떨렸다.

“너의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

“모…… 모르옵니다, 전하. 소인은, 소인은 잘못이 없사옵니다.”

“네가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알아볼 것이다. 네 보름 전, 여기 앉아 있는 죄인의 사가를 다녀온 적이 있지?”

“예?”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나는 듯했다. 도운의 하문에 겁이 난 언년은 바들거리며 익태를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보는 익태의 모습에 언년은 보기에도 안쓰럽게 입술을 부들거렸다. 금세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두려움에 사지가 달달 떨렸다.

“그, 그런 일 어, 없습니다요. 참말 없사옵니다.”

겁에 질려 없다고 대답한 언년은 아직도 저를 예의 주시하듯 노려보는 익태를 흘끔 바라보았다.

“내 다른 죄인들에게도 그리했지만, 두 번은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자백을 하거나, 고신을 당하다 이대로 죽거라.”

“예? 저, 전하! 전하!”

겁에 질려 자신을 부르는 언년을 차갑게 바라보던 도운은 지체 없이 돌아섰다.

“시작하라!”

찢어질 듯한 언년이의 처절한 비명이 시작되었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주리를 틀어 버리는 억센 장정들의 손에 벌써부터 허벅지의 살점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뼈가 꺾여 버릴 것만 같은 고통과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지 못한 언년은 곧 게거품을 물고 혼절해 버렸다.

“히익! 푸, 푸!”

얼굴을 강타하는 찬물세례에 정신을 차린 언년은 입에 들어간 물을 뱉어내며 바람 빠지는 소리로 숨을 몰아쉬었다.

“소곤을 준비해라.”

도운의 한마디에 나졸은 버드나무를 납작하게 깎아 만든 소곤을 손에 쥐었다. 침을 탁탁 뱉어낸 손바닥으로 나졸이 소곤을 차지게 감싸 쥐는 모습을 보자마자 언년은 겁에 질린 채 고개를 흔들며 울었다.

“제발…… 제발, 전하, 전하! 아아악!”

곤장의 종류 중 가장 작다는 소곤 한 대만으로도 허벅지가 끊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언년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경기하듯 몸을 뒤틀었다. 귓가에 ‘휘잉’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째 매타작 소리가 철썩하고 바로 울렸다. 단 두 대 만에, 언년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갔었습니다요! 갔었습니다요! 전하, 쇤네가 갔었습니다요! 허어엉, 그러니 제발 그만 치십시오. 허엉.”

“언년이 네 이녀언!”

언년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리자 곁에서 고신을 당하던 익태가 언년을 부르며 창자가 끓어오르듯 소리를 질렀다. 곁에서 소리를 지르는 익태를 무시하고 도운은 언년의 앞으로 다가섰다.

“내 뭐라 하였느냐, 두 번 물어보지 않을 것이니 고신을 당하다 죽으라 하지 않았더냐. 한데 네가 이제 와 자백을 한들 무슨 소용이냐? 계속 쳐라!”

“예, 허나…… 허나! 아아악!”

언년을 포함한 죄인들의 울부짖음이 절정에 도달할 때쯤, 재환은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굴비 두름이 된 죄인들을 끌고 의금부로 들어왔다. 의금부에서 나는 피비린내와 피떡이 된 죄인들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대신들은 벌써부터 살려달라 울부짖었다. 그 모습에 도운은 짜증이 난다는 듯 소리쳤다.

“쓸데없이 왜 자꾸 살려 달라 비는 것이냐! 감히 일국의 세자를 독살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네놈들이 아무리 빌어도 절대 아니 살려 줄 것이니, 괜히 힘 빼지 말거라. 앞으로 고초를 견디려면 아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옵니다. 곡해이시옵니다. 그것은 한 내관 저자가 모다 꾸민 일이옵니다. 모함이옵니다. 이는 모함이옵니다. 소신들은 아무 죄가 없사옵니다. 정말이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전하!”

“그럼 여기 찍힌 이 지장은 너를 모함한 자가 네 엄지를 잘라다 찍은 것이냐?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의 손가락부터 확인해라.”

나졸들이 억지로 좌상의 손가락을 쫙 펴서 먹물을 발라 종이에 꽉 눌러 찍었다. 도운은 종이에 찍힌 좌상의 엄지손가락 지문과 연판장과 비교했다.

“네 손가락이 다섯 개씩 잘 붙어 있고, 연판장과 지금 네가 찍은 손도장 모양이 이리 같은데 억울하단 소리를 지껄인 것이냐! 뻔뻔하기가 하 없다! 요망한 저놈들의 손바닥에 장을 지지거라!”

“예!”

금세 인두가 준비되고 대신들의 손바닥에 장이 지져졌다. 피비린내에 살타는 내까지 더해져 의금부는 역한 냄새로 가득 찼다. 죄인들이 내지르는 신음이 사방에 곡성처럼 메아리쳤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의 목소리와 역한 냄새에 언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감을 자극하는 공포와 고통에 눈물이 질질 흘렀다.

핏물에 절어 버린 치마가 이미 뭉개진 다리에 철썩 달라붙었다. 매타작을 맞을 때마다 언년의 허벅지에서는 떡방아 찧는 듯 둔탁하면서도 찰진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마지막 찰진 소리를 끝으로 언년은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얼굴을 후려치는 차가운 물벼락에 언년은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더 이상 악을 지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 전하…… 갔었습니…… 흐흑, 갔었습니다아…… 제발…… 용서를…… 갔었습니다.”

가늘게 흐느끼며 읍소하는 언년에게 다가간 도운은 냉정한 눈으로 언년을 질타했다.

“그러게 한번 물을 때 답을 잘하지 그랬느냐. 언년이 너는 예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눈치가 없느냐. 유빈이 네가 상전의 의중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눈치가 없다 지적하였다지? 지금 보니 유빈의 말대로 네가 정녕 눈치가 없음이라. 쯧쯧, 보거라. 결국 네가 상전의 충고를 업신여기다 이 꼴이 되어 버렸지 않느냐.”

“쇤네가…… 죽을죄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제발 용서를…….”

허어엉, 눈물에 콧물까지 범벅된 언년은 엉엉거리며 잘못을 빌었다. 뭐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매타작만 멈출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죄인의 사가에는 왜 갔느냐?”

“……흐윽, 중전마마, 중전마마 심부름을…….”

“네 이년! 그 입 다물라! 으악!”

언년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익태는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내려치는 나졸의 억센 힘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익태의 발악을 비릿하게 바라보던 도운은 시선은 그대로 익태에게 두고 언년에게 물었다.

“무슨 심부름이었느냐?”

“초를…… 전하의 처소에…… 초를 들이라…… 그리만 말하면 된다…… 그러셨습니다.”

“그것뿐이냐?”

“예, 예. 정녕…… 그것뿐이옵니다. 정말이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전하, 제발!”

“언년아.”

“……예, 예…… 전하…… 살려 주시옵소서. 갔었습니다…… 이년이 갔었습니다…… 이제 그만…….”

“진작 말을 했어도 어차피 너는 이 꼴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네가 감히 중전의 위세를 등에 업고 유빈 앞에서 건방을 떨어대었느냐. 내 이제부터는 감히 유빈을 능멸한 너의 방자함을 엄히 다스릴 것이다. 매를 계속 쳐라!”

“예? 전하, 전하! 아아아아악! 허어엉.”

도운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언년은 예화 탓을 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괜히 중전마마 때문에 자신이 걸레 같은 꼴이 되었다. 무릇 아랫것들은 상전을 잘 만나야 하는데, 괜히 상전 잘못 만난 탓으로 내 모습이 이것이 무엇이냐. 어흐흑, 서러움이 복받쳤다. 자비 없이 허벅지를 강타하는 매질에 울부짖는 언년을 익태는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억울하냐? 결국, 네 집에서 부리던 계집종이 너의 아끼는 누이의 죄를 실토하였다. 일국의 왕을 독살하려 한 계획에 중전도 껴 있었다니, 이제 내가 어찌할까? 너는 아직 자백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겠지? 네 누이는 얼마나 버틸지 내 한번 지켜볼 것이다. 여봐라! 죄인인 주가 여인을 끌고 와라!”

“예, 전하!”

남현은 절도 있게 읍하고 바로 교태전으로 달려갔다. 남현이 뛰어가는 뒷모습에 익태가 발악하며 몸부림쳤다. 도운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며 죽일 듯 몸부림쳤다. 형틀에 묶인 손목을 빼내려 미치광이처럼 발악한 것도 잠시, 나졸이 내리치는 몽둥이찜질에 금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익태의 감긴 눈이 움찔거렸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자 흐렸던 눈앞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져 갔다. 필사적으로 바동거리며 끌려 들어오는 여인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자, 익태는 눈을 번쩍 떴다.

“예화, 화야!”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아버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오라비와 아버지의 모습에 예화가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예화의 몸이 마치 종이 인형처럼 맥없이 끌려가 형틀에 앉혀졌다.

“전하, 어찌 이러실 수 있사옵니까? 일국의 국모이자 왕실의 안주인인 신첩입니다. 하늘 앞에서 함께 국혼을 올린 전하의 처이옵니다. 한데 어찌 이리 대하실 수 있사옵니까? 이는 과거 어느 왕실에서도 볼 수 없었던 패악이옵니다!”

“시끄럽다! 과인의 처소에 독초를 들이라 명한 것을 내 모를 줄 알았느냐!”

“아니…… 오. 아닙니다. 그런 것이…….”

도운의 일갈에 예화는 입만 벙긋거렸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던 예화는 핏물에 젖어 축 늘어져 있는 언년의 모습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 삼켰다.

“어…… 언년이.”

금세 눈물이 차오른 예화는 겁에 질린 얼굴로 익태를 바라보았다. 만신창이. 그 말 그대로였다. 늘 단정하던 오라비가 어찌하여 저런 모습으로. 충격과 공포로 몸이 달달 떨렸다. 너무도 무서웠다.

“오…… 오라버니, 갓을 어디 두셨습니까? 갓을 쓰셔야지요. 양반은 상투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멍하니 말을 하는 예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신이 나간 듯한 누이의 모습에 익태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어찌하여 죄인의 차림새가 저리 화려할 수 있다는 말이냐! 당장 죄인의 당의를 벗기고 첩지와 용잠을 빼 버려라!”

“예, 전하!”

달려드는 사내들의 우악스런 손길에 예화의 당의가 벗겨지고 머리에서 용잠이 뽑혀나갔다. 이어지는 사내들의 손길에 예화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것이 무슨 짓이냐! 당장 내 몸에서 손을 떼거라! 꺄앗!”

결국, 초라한 소복 차림이 된 예화의 몸이 형틀에 매이고 주릿대가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고신을 시작하라!”

“예!”

순식간에 예화의 비명이 날카롭게 울리자, 익태가 다급히 소리 질렀다.

“모다 소인이 저지른 것이옵니다. 중전마마는 모르는 일이었사옵니다!”

도운은 손을 들어 고신을 멈추라 신호한 후, 익태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 소신과 한 내관이 계획한 것이옵니다. 등촉제작자의 노비를 죽이고, 증좌를 없애려 등촉제작자의 목숨을 위협하였사옵니다! 다 소신이 한 일입니다! 중전마마는 죄가 없사옵니다!”

익태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자 익태보다도 더 너덜너덜해 보이는 영의정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었다. 하룻밤 신기루처럼 사라질 일장춘몽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무릉도원에서 몰래 훔쳐 먹은 천도복숭아에 대한 벌을 장하게 받는 느낌이었다. 상실감과 후회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유빈을 데려오게.”

도운의 명에 의금부 관저 내에 대기하고 있던 청조가 나타났다. 추국장에 들어서던 청조는 죄인들의 끔찍한 모습과 역한 냄새에 토기가 올라와 입을 가리고 뒤를 돌아섰다. 금세 곁으로 다가온 도운이 청조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으냐?”

“예, 괜찮습니다.”

도운에게 몸을 기댄 청조가 한 내관의 앞까지 다가왔다. 한 내관은 거친 숨을 내쉬다 이제는 우아한 마마의 모습이 된 청조를 한껏 노려보았다. 완전히 변해 버린 여인의 모습을 비웃는 한 내관의 주름진 입술 끝이 비죽비죽 떨렸다.

“하, 삐쩍 곯은 까마귀 같던 것이 신수가 아주 훤해졌구나. 굶어 죽어가는 것을 살려 주었더니…… 이제 와 나를 모른 척하고 주상의 곁에 붙어? 이래서 머리 검은 것들은 거두는 것이 아니지.”

“은혜? 은인이 아니고 원수다. 네가 죽인 서 의원이 바로 청조의 아버지임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더냐.”

“뭐…… 뭐?”

“멍청한 늙은이. 청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으로 데려왔으니 네 무덤을 네 손으로 판 꼴이 아니냐. 너 혼자 모든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정하고 있다 착각하고 살았더냐? 너야말로 하늘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왜 내 아버님을 죽이셨소?”

질책하는 무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조의 눈빛에 한 내관은 잠시 어지러웠다.

누가 누구의 딸? 하, 하하.

* * *

서 의원. 여섯 해 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목 졸라 죽인 의원이 서가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 더 이상 초를 만들 수 없다 징징거린다는 이명을 직접 만나러 화성엘 들렀었다. 눈 밑이 퀭하여 질질 짜던 이명의 하소연을 건성으로 듣고 있던 참이었다. 어차피 금덩이 하나를 쥐여 주면 입 다물고 일할 놈이니, 하소연을 좀 들어주는 척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데 이놈, 말하는 것이 하 이상하였다. 누가 무엇을 눈치채? 자신의 마누라를 진맥하던 의원이 납에 대한 일을 의심한다 하였었다.

“그 의원이라는 자가 어찌 그걸 알게 되었다는 건가? 혹, 자네가 무슨 말을 하였나?”

“그것이 아니라, 내 마누라 때문이구먼. 내 마누라의 건강이 매우 좋지가 않아. 오늘내일 딱 뒤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니까. 그이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 마누라를 진맥해 왔고, 자네 동리에서 은을 제련하는 이들까지 진맥을 하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것이지!”

“그가 어디까지 아는가?”

“여편네가 용초 만들 적에 납을 가져다 어찌어찌 써 버린다고, 하나에서 열까지 몽땅 다 말해 버렸으니 그이가 어디까지 알겠나? 응? 내 금덩이에 환장하여 여편네가 죽게 생겼으니…… 아이고, 흐윽. 그이가 마누라를 진맥한 지가 오래되어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지만, 실로 그이는 중인이고 의원이란 말이지! 당장에 관아에 가서 이 일을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나설 거라 했는데…… 이걸 어째. 그가 나서면 누구의 말을 믿겠나! 어흐흑, 다들 그이의 말을 듣고 나를, 나를…… 나는 너무 무서우이. 어찌하나? 이제 어찌해.”

머리를 감싸고 흐느끼는 이명을 짜증 난다는 듯 바라보던 일환은 우선 생각을 정리했다. 이명 저자가 겁이 많은 것도 있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재물 따위로 회유할 수 없는 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쉽지 않겠어.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겠지. 어찌 처리할까 고민하던 그때 밖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날세. 이명, 자네 어디 있는가? 작업장에 있나?”

작업장 입구에 처져 있는 발을 들치고 서 의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자네 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하는가?”

“그…… 그것이…….”

“마음의 준비는 되었는가? 정히 힘들면 내가 함께 가주겠네. 응당 겁이 나는 마음이야 백분 이해를 하지만, 이는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일세. 이는 단지 독살을 넘어서 역모고 반역이네. 감히 일국의 세자 저하를…… 그런데, 자네 왜 그러나?”

이명은 벌벌 떨며 잔뜩 겁먹은 눈으로 서 의원과 서 의원 너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그러냐니까? 허억!”

어느새 뒤로 다가온 한 내관의 합죽선이 서 의원의 목젖 아래 부근에 닿았다. 한 내관은 뒤에서 부채의 양 끝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단단하고 굴곡진 부채의 겉대가 목젖 아래를 힘껏 누르니 숨이 컥컥 막혀왔다. 컥컥대며 발버둥 치던 서 의원의 몸이 작업대에 이리저리 부딪히고는 곧 눈이 돌아갔다.

‘끄으으으윽!’, 눈이 돌아가는 오랜 친우에게서 숨넘어가는 괴로운 신음이 흐르자 이명은 그 자리에서 귀를 막고 덜덜 떨며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악!”

결국, 숨을 거둔 친우의 시체를 보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명은 정신없이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얼굴이 휙 돌아가며 눈앞에 별들이 반짝거렸다. 한 내관에게 뺨을 대차게 맞고서야 이명은 겨우 발악을 멈출 수 있었다.

“내 말 잘 들어. 시체에 물을 뿌리고, 저자의 사가까지 직접 업고 가서 익사했다고 전해. 그리고 당장 화성을 떠날 준비를 하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명이 벌벌 떨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한 내관은 그의 나머지 한쪽 뺨도 대차게 휘갈겼다.

“알았나!”

양쪽 뺨을 감싼 이명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을 가지러 나섰다. 물통을 들고 돌아와 죽은 친우의 몸에 물을 부었다. 혹시라도 마른 부분이 있을까, 엉엉거리며 울면서도 꼼꼼히 확인하며 물을 뿌렸다. 한 내관의 계획 하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흐르고 이명은 한 내관을 따라 도성으로 올라왔다. 한 내관은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했다. 그를 자신의 영역 아래 두고 감시하기도 편했고, 일을 지시하기도 수월하니 이래저래 잘된 일이었다.

이명을 도성으로 이주시킨 후, 화성엘 갈 일이 전혀 없었다. 간혹 납을 받으러 사람을 보내긴 하였으나, 자신이 직접 발걸음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세 해 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갈 일이 생겼다. 병약해진 의경 세자를 위해 온양행궁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눈에 띄게 쇠약해진 의경 세자는 긴 행궁을 견디기 힘겨워할 정도로 기력이 쇠해 있었다.

하여 궁으로 돌아오는 길, 도성과 온양의 중간 지점인 화성에 잠시 들렀다. 화성의 지주였던 김 대감의 사가에서 며칠을 지내며 쉬기로 하였다. 왕세자 저하의 방문이라는 영광에 몸 둘 바를 모르던 김 대감은 매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잔칫상을 준비했다. 그리고 잔치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그곳에 품을 팔러 왔던 여인을 처음 보았다. 슬슬 행실이 바르면서도 사내의 욕정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여인을 산에 올려보내려 계획하고 있던 참에 눈에 뜨인 여인이었다.

멀리서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산에 올려보내기 딱 안성맞춤인 여인이구나. 집안의 노비에게 간단히 물으니,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운 처자라고 했다. 홀어머니에 어린 아우들이라. 일이 참 수월할 듯싶어 그날 저녁 바로 여인을 찾아갔다. 가까이서 보니 훨씬 흡족하였고, 일은 너무 수월하게 흘러갔다.

마침, 김 대감의 사가에 함께 품을 팔러 왔던 여인의 어미가 각혈을 하며 쓰러지는 것을 멀리서 발견했다. 일이 이리 수월할 수가 있을까? 여인의 외양도 품성도 매우 흡족했고, 상황은 딱 맞게 맞물려 돌아가니 정녕 하늘은 저의 편이구나 생각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허리가 젖혀질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와 집안의 기둥을 붙잡아야 했을 정도였다.

여인의 다짐을 받아낸 후, 의경 세자에게 여인에 관하여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쯤 도운이 또다시 여인을 내쳤다는 말을 들은 의경 세자는 굳이 여인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간 궁에 있을 적에야 확인을 해 보고 싶어도 확인을 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보고 싶다니, 마음껏 보여 주지.

그간 고르고 골랐던 천박한 계집들과는 사뭇 다르니 못 보여 줄 이유가 무엇인가. 참하고 어여쁘기까지 한 저 여인을 보여 주면 자신에 대한 세자의 신임까지 더욱 견고해질 터이니 이거야말로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일이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의경 세자를 여인의 초가로 안내했다.

의경 세자는 한참 동안 집안을 살폈다. 열심히 반빗간을 드나들며 바지런히 움직이는 여인의 모습을 한 시진째 바라보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로 곧 쓰러질 듯하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거늘, 그날따라 유독 고집을 부렸었다.

“마마, 이만 자리를 옮기시지요. 날이 꽤 춥사옵니다. 귀한 옥체에 감모라도 드실까 소인이 너무 두렵나이다.”

“조금만, 일다경만 더 보고 가세.”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멀리서 여인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의경 세자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혈이, 그 아이가 많이 좋아하겠어.”

혈이라는 이름이 금지되어 버린 지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나, 의경 세자는 늘 그 이름으로 자신의 아우를 불렀다.

“그래, 모시는 어미가 많이 아프다고?”

“예, 저하.”

“내 내탕금을 내어 줄 터이니, 깨끗한 초가 하나 마련해 주고 세간도 알맞게 꾸려주게. 곡식과 약재로 곳간을 넉넉히 채워주는 것도 잊지 말고.”

“저하, 그러다 주상 전하께서 아신다면 또 노여워하실 것이옵니다.”

“그야 자네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리고 얼마 전 진상된 산삼 몇 뿌리가 있었지? 그것도 가져다주게.”

“저하, 그 산삼은 저하를 위해 특별히…….”

“아니네, 나야 그것 말고도 귀한 것은 다 먹고 살지 않은가? 저 여인의 어미에게 가져다주게. 저리 참하고 귀한 여식을 내 아우를 위해 내어 주는데, 내 아까울 것이 무엇인가? 곧 산에 오르거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인데, 부디 혈의 곁에서 잘 보필하여 주면 바랄 것이 없겠어. 한데 이상하지. 왜인지 저 여인이 잘할 것만 같네. 꼭 그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그러니 가져다주게. 내 아우를 잘 보필한 여인에 대해 미리 상을 내리는 것이니.”

“저하. 저하의 아름다운 우애를 불민한 소인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나이다. 죽여주시옵소서.”

한 내관이 머리를 조아리자 의경 세자가 엷게 웃었다.

“흥, 내관들은 모다 그리 교육받는 것이냐?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꼭 죽여 달라는 말부터 하는구나. 그만 돌아가자.”

반빗간에서 막 나온 여인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아쉬운 듯 바라보던 의경 세자가 발걸음을 돌렸다.

“혈이 이야기를 해 보게. 풍채가 그리 엄장한가?”

“예, 어찌나 풍채가 좋으신지, 소인 세자 저하를 뵙기가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것이 왜 망극한가? 자네도 혹 혈이 내 정기를 빨아 먹고 그리 강건하다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의경 세자의 시선에 한 내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늘 부드럽고 자애로웠지만, 힘이 있었다. 이간질을 하려 해도 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여인들을 쫓아내는 도운의 행실을 탓하려 하면, 필시 여인들에게 모자람이 있었을 것이다 딱 잘라 말을 하는 이였다. 몸은 쇠약하였으나 그 정신력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내 언젠가 보위에 오르면,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성수청의 국무와 소격서 제조부터 쓸어버릴 것이야. 세 치 혀로 감히 왕실을 농락하고 대군을 산으로 쫓아낸 몹쓸 망종 같으니라고.”

“부디 저하의 뜻대로 하소서.”

말을 올리는 한 내관의 입술 끝이 징그럽게 말려져 있었다. 염라대왕을 만나거든 부탁이라도 한번 해 보시오. 부디 뜻대로 해 달라고, 쿡쿡.

“혈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게. 근자에 어떤 서책을 즐겨 읽는다던가?”

한 내관은 도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서책을 좋아하고, 아이 몸통만 한 장작을 단번에 쪼갤 정도로 힘이 장사다. 산에서 홀로 수련하신 검술 실력이 훌륭하고, 활 솜씨도 좋아 종종 사냥으로 산짐승을 잡아 온다더라. 그에 관한 이야기야 매번 같은 말이지만, 그래도 의경 세자는 늘 도운에 관해 묻고 같은 대답을 들으며 즐거워했다.

“도승지의 집에서 혈에게 필요한 것을 잘 보내고 있겠지? 그가 잘 헤아려 보내겠지만, 자네가 한 번 더 신경을 쓰게. 그리고 이번엔 자네가 여인을 데리고 직접 산에 오르게.”

“허나, 저하. 그러다 주상전하께서 아시면…….”

“그리해. 내 이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다 도성으로 출발할 것이니, 자네가 직접 여인을 산에 데려다주고 얼추 시각을 맞추어 궁으로 돌아오면 되지 않겠나. 내 자금을 넉넉히 쥐여 줄 터이니, 가는 길에 목화도 좀 넉넉히 사 가게. 목화 잔뜩 넣고 누빈 의대도 넉넉히 준비해 가고. 곧 입춘이라지만 산에서의 겨울이라는 것이 유독 길고 춥지 않은가. 소고기도 좀 사 가고, 또…… 그래, 진가루(밀가루)를 많이 구해 가게. 혈이 어릴 적 만두를 좋아했었으니 아주 좋아할 것이야. 혹, 저 여인이 만두를 맛깔나게 빚을 줄 알까? 그러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아니 그런가?”

“예, 저하. 잘할 것이옵니다. 심려를 놓으소서.”

“그렇겠지. 아주 잘할 것이네. 내 그런 예감이 드네.”

하지만 의경 세자가 말한 것 중, 한 내관이 산에 들고 간 것은 진가루뿐이었다. 의경 세자가 하사한 산삼 뿌리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아껴두었다. 이제껏 그가 쏟아부은 동궁전 내탕금들이며 도운의 초가 살림 앞으로 정해진 쥐꼬리만 한 내탕금까지 모다 한 내관의 수중으로 곧바로 떨어졌다. 그중 일부가 초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니, 제 손으로 저의 목숨을 갉아먹는 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아우를 뒷바라지하는 꼴이라니.

하, 하하하하. 청조를 산에 데려다주고 내려오는 길, 한 내관은 산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 * *

“제 손으로 저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던 것은 바로 너다.”

도운의 한마디에 한 내관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입안에 고여 있던 피에 새빨갛게 변해 버린 이를 한껏 내보이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저의 목숨을 자신이 갉아먹은 것인지, 아니면 죽은 의경 세자가 정녕 옥황상제에게 떼를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하던 내가, 늘 모든 이의 머리 꼭대기에 있던 이 한일환이가! 어찌하여 저 계집이 누구의 딸인지 알아보지 않고 산으로 데려갔단 말인가! 왜! 겨우 저런 계집 하나 때문에 나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이리 망쳐 놓다니!

한 내관은 증오로 타들어 가는 눈빛으로 청조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반성 없는 그의 눈빛에 청조가 근엄하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억울하오? 그대가 지금 억울하여 나를 그리 쳐다보는 것이오!”

“내 그때 너의 아비가 누구인지만 알았어도 이리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참으로 분하고 억울하다. 완벽한 계획이고, 대의를 위한 일이었어! 내 청춘, 내 일생을 걸었느니라. 그것을 겨우 너 따위 계집 때문에, 허!”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았어도 그대의 악랄한 계획은 실패했을 것이오! 하늘이 그렇게 두지 않았을 것이니. 열심히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요. 당신 정수리에 난 새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하늘에선 훤히 내려다보고 계시니 말이오. 하늘이 뻔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까짓 멍청한 계획이 실패한 것이 억울하오? 나는, 나는 내 아버지를 잃었고, 전하께서는 형님을 잃었소! 또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소! 다들 소중한 사람과 행복을 잃었단 말이오. 일신의 부귀와 영달에 급급한 나머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데, 죽은 자들보다도 그대가 더 억울하다 말할 수 있겠소! 그 오랜 시간 분수에 맞지 않은 부귀를 누리며 살았으니 이제 그런 얼굴은 당장 집어치우거라! 뻔뻔하기가 하 없다!”

청조의 단호한 일침에 한 내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굶어 죽어가던 것이 누구 덕에 저 자리에 앉았는데, 이제 와 저까짓 것이 같잖은 마마 흉내라니!

“일신의 부귀와 영달? 흥! 나는 우리 민족의 재기를 위해 노력한 것뿐. 우리는 저 초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생활하던 유목민이었어. 그런 우리를 억압하고 천대한 것이 누구요? 우리가 처음부터 천인이었소? 그대들이 백정을 천하다 천대하고, 미개하다 차별한 것이지. 말을 몰며 집단생활을 하던 우리 민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농사를 짓도록 강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조상의 유지를 모다 거부하라 한 것이오. 우리는 민족의 정신을 학살당하고 배척당했어. 그에 비해 겨우 아버지를 잃고, 형님 하나를 잃은 것이 무어가 억울해!”

“그래서, 네가 그리 아끼고 위한다는 너의 민족을 위하여 네가 한 일은 무엇이냐? 네 민족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한 일은 무엇이냐? 네 입은 옆으로 놓였어도 말을 똑바로 세워 하라! 여전히 백정들은 백정으로 살고, 너 혼자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이 욕심 많은 늙은이가 궤변이 참으로 장황하구나. 네가 정녕 네 민족의 부흥을 생각하였다면 차라리 형님의 치세를 도왔어야 옳지 않으냐.”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하던 한 내관은 도운을 향해 비웃듯 입술을 꿈틀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백정으로 태어나,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사내로 태어나 원대한 포부를 갖고, 내 나라를 꿈꾼 것이 어디 잘못입니까?”

“양물도 없는 사내인 주제에 원대한 포부가 무엇인지 네가 알기나 하느냐? 우습기가 짝이 없구나. 왜 과인이 천자인 것이냐. 바로 하늘이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감히 하늘이 주신 과인의 나라를 가지고 양물도 없는 네가 왜 마음대로 꿈을 꾸느냐. 그런 허무맹랑한 꿈을 꾼 대가로 지금 네가 이렇듯 피떡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마음대로 떠들어도 좋습니다. 이게 끝은 아닐 터이니. 내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지지 않을 것이오! 이번이 아니 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또 그다음 생에서라도. 나는 꼭 돌아와 주상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고 나라를 손에 넣을 것이오!”

한 내관의 마지막 발악에 도운은 껄껄 웃었다.

“내 장담컨대, 다음 생에서 너는 한낱 미물로 태어날 것이다. 불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 무서움도 모르고 덤벼들다 결국 스스로 타 죽고 마는 그 작디작은 미물 말이다. 몇 번을 태어나도 그렇게 어리석은 짧은 생을 살다 갈 것이야. 허니 네가 돌아온다 하여 내 눈썹 한 올이라도 건들 수 있겠느냐? 불에 홀려 춤을 추다 죽기에도 바쁠 것인데.”

도운은 말을 마치고 또다시 껄껄대며 웃더니 청조의 손을 잡고 추국장을 떠났다. 추국장을 떠나기 전 그간 죄를 짓고 살았던 인간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백성이 아닌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탐관오리들의 초라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두 눈에 단단히 새겨 넣었다.

백성들이 저에게 풍랑을 일으키지 않도록, 늘 잔잔한 물길을 유유히 항해하는 배가 될 수 있도록. 백성을 위해 겸허한 마음을 단단히 굳히며 궁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근정전에 모인 대신들은 죄인들의 형벌에 대하여 열띤 논의를 펼쳤다. 사약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부터, 양반도 아닌 이들에게 사약은 너무 과분하다는 의견까지 있었다. 결국, 백성들 앞에서 조리 돌림 후 망나니에게 목이 잘리는 쪽으로 의견이 좁혀지고 있었다. 대신들이 죄인들에 대한 처결을 가납해 주십사 도운에게 읍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도운이 입을 열었다.

“과인 역시 그대들의 의견을 존중하오. 죄인들은 처음부터 신분을 속이고, 왕실을 능멸하였소. 특히 오랜 기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일국의 세자를 독살한 점은 살아남기 힘든 죄 중에서도 가장 큰 대역죄요. 허나 그런 이들에게서 단번에 목숨을 빼앗는 형벌이 과연 진정한 형벌인 것인지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오.”

도운의 의문 제기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고 허리를 굽혔다. 왕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죽음으로 갚기에는 그 죄가 너무나도 컸다.

“하여 죄인들에게 과인이 생각하는 합당한 형을 내린다. 우선 한일환. 한일환은 이 모든 사건의 숨겨진 주범으로 세 치 혀를 놀려 사람들을 현혹하고 왕실을 능멸하였으니, 다시는 그 혀를 놀릴 수 없도록 단설형(斷舌刑: 혀를 자르는 형벌)을 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허나 이는 그 과정이 매우 잔인하고 윤리적이지 못하니 옳지 않다. 허니, 한일환에게 평생 무언(無言)으로 살아갈 것을 명하고, 함경도 광산의 노비로 명한다. 만일 죄인이 형벌을 어기고 말을 할 시, 형벌을 어길 때마다 장 삼십 대에 처할 것이며 평생 광산에서 직접 채취한 은을 스스로 제련할 것을 명한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다음으로 죄인 주익태의 식솔들은 금전으로 사들인 양반족보를 파기하고, 모다 관노로 명하며 대대손손으로 면천 받을 수 없을 것을 명한다. 또한, 죄인 익태는 한 내관을 도와 그간 왕실의 국고를 축내고,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 먹는 데 가장 앞장선 악질 죄인이다. 허니, 이제 그 죄를 받아 주익태를 나라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자로 명한다. 그 역시 함경도 광산으로 보내되, 죄인은 나라의 가장 비천한 자로서 항상 몸을 낮추어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쳐선 아니 될 것이다. 또한 평생을 홀로 떨어져 죽을 때까지 은을 제련하고 납을 주조하는 일을 도맡아 하게끔 하라!”

가장 큰 죄인 둘에 대한 형벌을 내린 후, 도운은 숭숭 비어 있는 대신들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일곱의 대신이 빠진 자리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휑해 보였다.

“그들에게 동조하여, 조정의 대신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고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한 대신들은 모두 장 일백 대에 처한다. 국법의 지엄함을 지켜 한 번에 장 삼십 대를 넘기지 아니할 것이며, 장을 다 맞은 대신들은 각각 제주와 강화로 유배를 보낸다. 유배지에 가시덤불로 담장을 높게 세워 평생 그곳을 나오지 못하도록 위리안치할 것이며, 그 식솔들은 모다 관노로 명한다. 관에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들을 도맡게 하여 그간 얼마나 많은 이의 피와 땀을 착취하며 살았는지 깊게 반성하게 하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간 죄인들이 축적해 온 재산은 모다 국고로 환수할 것이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경작지는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소작을 내릴 것이다. 소작료는 이 할로 고정될 것이며, 다섯 식솔을 기준으로 한 가구당 논과 밭을 각각 다섯 마지기 이상 소작할 수 없다. 다만 식솔의 수가 다섯 이상을 넘어가면, 늘어난 식솔의 수만큼 한 마지기씩을 더 빌려줄 것이다. 이는 공민전(나라에서 받은 양반들의 땅)으로 받은 양반들의 경작지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공민전 역시 원래의 소유는 왕실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역시 공민전에서 나온 소작료는 이 할 이상 받을 수 없다. 만일 이를 어길 시, 모든 공민전으로 받은 경작지는 국고로 환수할 것이다. 알겠는가!”

“예, 전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제 시작이었다. 앞으로 백성들을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할 것이다. 다시는 어린 백성이 굶지 않도록, 동냥을 하지 않도록, 그들이 빼앗긴 것들을 돌려줄 것이다. 도운은 그간 익태와 한 내관의 수족으로 움직였던 그들의 수하 역시 장 일백 대에 처했다. 그중, 도지는 그 죄질이 더욱 나쁘기에 장 일백 대와 함께 노비 신세로 전락했다.

역당들에 대한 처결을 끝내고 근정전을 나서는 순간 내의원의 의관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쩔쩔매며 등촉제작자인 이명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청조는 잠시 그의 죽음을 동정하였다. 허나 그것은 분에 넘치는 것을 욕심내다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어리석은 생과 죽음에 대한 동정이었다. 청조는 결코 아버지의 옛 친우인 아저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않았다.

이른 저녁, 도운은 청조와 함께 대비전을 방문했다. 며칠 전부터 먹지도 않고 앓아누운 대비의 병문안을 위해서였다.

한 내관의 모든 악행을 알아 버린 대비는 그 충격에 끙끙 앓기 시작했다. 저의 아들이 바로 자신의 곁에서 음독 되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애꿎은 다른 아들만 탓했으니, 그 억울함과 자신의 우둔함에 감히 아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 척박한 산에 보내어 놓고 그래도 살리려 노력했다 변명을 해 대었다.

그 힘든 삶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나의 장자를 죽였노라 책임을 묻고 질타했었다. 바짝 말라 허옇게 갈라진 입술 사이로 꺼져가는 흐느낌만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결국, 곁에서 위로하는 도운과 청조의 노력에도 대비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후로 며칠째 청조는 대비전을 드나들며 손수 약을 떠먹여 주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는 등, 대비를 성심껏 돌봤다. 오늘도 울다 잠이 든 대비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청조는 마침 대비전에 들른 도운과 마주쳤다. 대비가 잠들었다는 말에 도운은 청조와 함께 후원을 거닐었다. 이제 바람이 많이 차가워진 것이, 조만간 입김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중전을 폐서인시키지 않아 섭섭하냐?”

도운의 물음에 청조는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조금도 섭섭지 않습니다. 중전마마께 그보다 더한 벌은 없을 것입니다.”

도운은 예화를 폐서인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죄와 예화의 신분을 보면 폐서인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기록에서 지워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예화에게 가장 합당한 벌을 내렸다.

‘중전 주가 예화는 중전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다. 허나 신분만 유지할 뿐, 모든 중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한다. 중전은 교태전을 떠나 함경남도의 광산으로 가 그곳 노비들의 수발을 들어라. 나라의 국모로 사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으니 이제 참된 백성의 지어미가 무엇인지 그곳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진정 백성을 위한 어미의 삶이 무엇인지 그들의 수발을 들며 배우거라. 노비들은 중전을 중전으로서 예우는 하되, 결코 중전이 나태해지거나 꾀부리지 않도록 서로 경계하며 중전을 감시하고 중전을 부리는 데 있어 결코 인정을 베풀지 말라!’

“내 그곳에 가거들랑 남의 누룽지를 탐내지 말거라, 중전과 언년이 고것에게 충고도 하였다.”

누룽지 이야기에 청조는 도운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산에서 누룽지 한 덩이가 없어 배를 곯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어느덧 이리 흘렀나. 차가워진 바람에 청조가 어깨를 떨자 도운이 팔을 둘러 감싸 주었다.

“날이 꽤나 쌀쌀한 것이 내 오랜만에 네가 만들어 주는 따뜻한 만둣국을 먹고 싶구나. 네가 만들어 준 만두를 먹을 적, 궁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이 잠시 생각났었지. 그래, 그 시절 내가 만두를 좋아했었어. 형님께서 이 못난 아우를 그리 위해 주는 줄도 모르고 내 오랫동안 형님을 곡해하고 원망하였으니, 그것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 어린 시절 만두를 좋아했던 것을 나도 잊고 있었거늘, 그걸 기억하고 계실 줄…… 참으로 몰랐다.”

도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곧 눈물이 흐를 듯, 이지러진 도운의 눈동자가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조는 도운의 손을 꽉 쥐고 손으로 슬슬 보듬어 주었다.

“조금만 기다리셔요. 소첩이 얼른 소주방 들어 뚝딱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허나 서방님께서 살이 오른 토끼를 아니 잡아다 주셨으니, 금일 저가 튼실한 돼지고기 넣고 속을 하여 빚어 드릴 것입니다. 그것 먹고 기운 차리셔요.”

“그래, 내 너의 처소에서 기다릴 것이니 뚝딱 만들어 주거라.”

“예, 소첩이 맛있게 만들어 드릴 터이니, 그것 잡숫고 기운 내셔야 합니다.”

결국 도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조용히 뚝 떨어지는 굵은 눈물을 닦아 준 청조가 도운의 손을 꼭 잡았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애류당으로 향했다. 정다운 두 분 마마의 뒤로 상선이 따라갔다. 새로 제수된 상선은 서로를 위해 주는 두 분 마마의 모습에 감읍한 듯 그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달포 뒤, 저자는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희대의 악인들이 죄인이 되어 떠나는 모습을 보러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나왔다. 맨 앞쪽에는 한때 조정의 대신들이었던 이들이 수레 안에 갇혀 있었다. 장 일백 대를 다 맞은 대신들은 그야말로 피떡이 되어 죽은 듯 늘어져 있었다. 참혹하고도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성난 백성들 중 아무도 그들을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그 뒤로 대신들의 식솔들이 거친 무명옷을 걸치고 짚신을 질질 끌며 허탈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허나 그들에게 관심 없는 백성들은 고개를 쭉 빼고 진짜 대역 죄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드디어 한 내관과 익태, 그리고 전 영의정의 모습이 보였다. 핏물이 말라 검게 변해 버린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그들은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익태는 자신들을 향해 침을 뱉으며 욕하는 백성들을 힐끗 쳐다봤다. 멍청한 것들. 지들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이제 와 저리 나서서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익태는 더욱 고개를 쳐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앞으로 걸어가는 도중,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붉은 나비가 그려진 화려한 전모를 살짝 쳐든 매화가 익태를 향해 측은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대역 죄인이라지만 그래도 한때 살을 섞고 서방님으로 모신 사내였다. 마음에 품은 연정은 없어도, 속살 품은 살정에 대한 의리가 있었다. 이 남자 저 남자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 같은 인생이 기생이라지만, 꺾이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남자로 예와 마음을 다하는 것도 기생이었다. 살을 섞는 순간이나마 자신의 남자였던 익태에 대한 의리로 매화는 마지막 예를 드리러 나왔다. 바로 앞을 지나가는 익태와 눈이 마주친 매화는 눈꺼풀을 살짝 내렸다 올리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크, 큭큭. 결국 저에게 마지막 의리를 지킨 것은 천하다 무시하고 능멸하던 기생년 하나뿐이었다. 인생무상이라, 실로 초라하고 허탈한 인생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허나…… 마지막 떠나는 길, 아름다운 여인의 배웅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익태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저 멀리 매화가 요염하게 고개를 빼 들고 아직도 자신을 배웅하고 있었다.

잘 있어라, 매화야. 생각해 보니 도성에 올라와 살면서 내 너를 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였구나.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익태는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끝. 외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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