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추국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차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계획한 것인가?”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과인을 산에 보내기 전부터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소신, 전혀 알 수가 없사옵니다.”
“아니면 과인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인가?”
“소신, 분명 알아들을 수 없다 말씀드렸사옵니다.”
“그러면 나를 길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가? 산에 가둬 놓고, 적당히 굶기고 외로움과 추위에 떨면서 살게 하면, 내가 고마워하며 길들여질 줄 알았느냔 말이지.”
“굶기다니요? 소신과 소신의 가문은 왕실에서 버려진 전하를 보필하고자 최선을 다하였사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오직 전하를 위해 산을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사옵니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시옵니까?”
익태의 대답에 혼자 즐거운 듯 미소 짓던 도운은 남은 찻물을 들이켰다.
“차 다 마셨는가?”
익태의 붉은 눈가가 꿈틀거렸다. 무엇 때문에 저리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 왕의 의중을 헤아리기가 힘이 들었다.
“예, 잘 마셨사옵니다.”
“그래? 그럼 이만 가지.”
쾅!
도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큰소리로 문이 열리며 무관들이 밀려 들어와 익태를 둘러쌌다.
“이것이 무슨 일이옵니까.”
“그래도 오랜 친우라 믿었던 그대에게 마지막 예로 차까지 대접하였으니, 이제 죄인으로서 다스려야겠지.”
“죄인이라니요!”
익태가 주먹으로 힘껏 내리친 다과상에서 찻잔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붉게 달아오른 독기 어린 눈빛이 공중에서 맞부딪히고, 거친 숨이 정적을 가득 채웠다.
“끌고 가라!”
“예!”
빙 둘러싼 무관들 사이에서 남현이 걸어 나와 익태의 팔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익태는 도운만을 힘껏 노려봤다.
“이제껏 전하를 보필한 충신을 이리 대하시다니요! 후회하게 되실 것입니다.”
“후회는 너와 네 아비! 그리고 한 내관 그 작자가 해야겠지. 아주 처절하게.”
사방을 밝혀 놓은 횃불에 의금부는 대낮처럼 환했다. 더러운 옥사에 갇힌 익태는 차분히 앉아 도지를 기다렸다. 분명 큰아버지께서 그를 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을 이리 놔두시지 않을 것이다. 밤새 그 믿음으로 버텼지만 결국 날이 밝고 말았다. 불안함과 괘씸함에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나졸이 옥사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것이냐! 내 발로 나갈 것이다.”
자신을 잡으려는 나졸의 손을 쳐내고, 제 발로 당당하게 걸어 나오던 익태는 형틀에 앉아 있는 한 내관의 모습에 잠시 주춤했다.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한 내관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 내관에 이어, 이미 만신창이가 된 도지와 창백한 얼굴로 달달 떨고 있는 아버지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추국장의 중심인 대청 위에 서 있는 도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황금용이 수놓아진 검은 구군복에 검은 흑립을 쓴 엄장한 사내로부터 모두를 집어삼킬 듯 강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익태의 눈빛이 흔들렸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불안했다. 이를 악물고 눈을 부라리는 익태의 모습이 즐거운 듯, 도운의 입가가 빙긋 올라갔다.
“죄인들이 다 모였으니 과인이 직접 친국을 시작하겠다!”
즐거운 듯 죄인들을 내려다보던 도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전하, 소인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를 모시던 한 내관이옵니다. 어찌 소인을 죄인 취급하시어 이리 대하실 수가 있사옵니까? 너무도 억울하옵니다.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도운은 어깨를 축 떨구고, 맥 빠진 순한 노인 흉내를 내는 내시 놈의 모습이 참으로 징그럽고 가소로웠다.
“억울해?”
“예, 진정으로 억울하옵니다. 전하, 소인 이제껏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사옵니다. 헌데 충성의 대가가 이런 것이라니요. 정녕 너무하시옵니다.”
한 내관은 쇳소리를 갈아대는 목소리로 진정 억울한 듯 울먹거렸다.
“충성을 다하여, 의경 세자를 독살하였느냐? 그것이 너의 충성이더냐!”
“독살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억울하옵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시었고, 그 이유는 전하께서…….”
“그 입 닥치거라! 죄인들을 데려와라!”
초로의 여인과 사내가 끌려 들어왔다. 이미 핏물에 절어 버린 그들의 모습을 보는 한 내관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무릎 꿇은 그들의 말라 버린 얼굴에는 이미 많은 체념이 보였다.
“전 소격서 제조 안상록과 전 성수청 국무 희란은 저자를 기억하느냐?”
두 남녀는 도운이 등채로 가리킨 한 내관을 겨우 바라보았다.
“예, 저…… 전하. 저자는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의…….”
“의경 세자께서 세자에 책봉되기 전의 이야기를 묻는 것이다!”
“그…… 그것이…….”
한 내관의 눈치를 보던 상록의 말라 버린 입술이 덜덜 떨렸다.
“저…… 저자는 선왕 전하의 상선 영감이었던 한 내관의 양자로, 대전의 문차비(문을 열고 닫는 내시)였사옵니다. 의경 세자 저하께서 탄신하시고 얼마 후 저자가 소신을 찾아왔사옵니다. 저자가 이르길…….”
말을 하던 상록이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계속하라!”
“그것이…… 선왕 전하께 전하의 탄신에 관한 불길함을 이르라 말하였사옵니다. 그리고 그를 널리 퍼뜨려 공론화하라…… 그리 말하였사옵니다.”
“그래서 자성이 어쩌고 객성이 어쩌고를 떠들어 댔단 말이지.”
“죽여주시옵소서!”
통곡하는 상록을 냉정히 바라보던 도운의 눈빛이 희란을 향했다.
“너는 어떠하냐? 너 역시 저자의 사주를 받고 그 말도 안 되는 운명론을 떠들어댔느냐?”
“사…… 살려만 주시옵소서, 전하…… 쇤네는 시키는 대로만 하였사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였다. 시키는 대로 하여, 감히 그 세 치 혀로 왕실을 농락하고 어린 대군에게 끔찍한 복면을 씌워 산으로 내쫓았느냐!”
“죽을죄를 지었사오나 쇤네도 억울하옵니다!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칼을 들이대고 죽인다 위협하니 어쩔 수 없이 한 짓이옵니다! 믿어 주시옵소서!”
상록과 희란이 울며 사정하는 틈에 한 내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이옵니다! 저들이 어찌하여 소인을 모함하는지 모르겠사오나, 저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나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전하의 탄신을 두고 소인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흥, 과연 이유가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지. 형님을 음독하여 죽이고, 과인을 옭아매려 그런 것이 아니었느냐!”
“하늘에 맹세코 소인은 결백하옵니다! 음독이라니요! 소인이 그리했다는 증좌가 있사옵니까?”
한 내관의 발악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도운은 의금부로 당당히 들어서는 재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증좌보다는 증인들이 도착했군.”
저 멀리 재환이 추레한 사람들을 이끌고 의금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백이 넘치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도운의 앞으로 다가온 재환은 고개를 숙여 읍하고, 뒤를 돌아 죄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재환의 얼굴을 확인한 익태와 한 내관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한 내관의 행적에 대해 알아본 바를 보고하게.”
“예, 전하. 한 내관의 본관은 화성에 있는 천민이 모여 사는 천비골이라 불리는 동리이옵니다. 그의 본명은 일동으로 성은 없으며, 백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사옵니다. 궁에 들어온 후, 여기 서 있는 신안 주씨의 양반족보를 사 그곳에 남아 있던 식솔을 양반으로 둔갑시킨 후, 도성으로 데려왔사옵니다. 그때 둔갑시킨 한 내관의 동생이 바로 여기 있는 영의정 주이동이옵니다.”
“신안 주씨는 들어라. 네가 저자에게 족보를 판 것이 사실이냐?”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내는 한 내관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후, 그러하다 작게 읍했다. 족보를 팔고서도 궁핍한 생활이 펴지 않았는지, 행색이 형편없었다.
“모함이옵니다! 감히 내관 따위와 우리 가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허고, 저자는 역모의 죄를 지은 죄인이옵니다! 그런 자가 하는 말에 어찌 무게를 두시옵니까! 저자가 우리 가문에 원한을 품고 지껄이는 모함이옵니다!”
익태는 악에 받쳐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고,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부친은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죄를 만든 자가 있으니 죄가 생겼고, 역모의 죄를 네가 씌웠으니 그들이 역당이 된 것이 아니냐! 내 이 자리를 빌려 그의 신분과 가문의 복권을 선포할 것이며, 무고한 이들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을 엄히 징치하여 다시는 이런 폐단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 죄가 하나 더 늘었구나.”
씨익 웃는 도운의 가지런한 치아가 하얗게 반짝였다.
“너희는 감히 신분을 탈바꿈하여 반상의 법도를 어지럽혔으며, 그 얄팍한 간계로 왕실을 농락하고 독이 든 초를 이용하여 일국의 세자를 독살하였다. 독살에 대해 아는 증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방화까지 서슴지 않고 일으켰다. 또한, 그간 백성의 고혈을 빼먹고 핍박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궁의 담을 넘을 지경이다. 뿐만이 아니다! 전 영의정에게 누명을 씌워 일가를 몰락시키고, 감히 신분을 속이고 백정의 딸을 교태전에 들여앉혔다. 또한, 이 나라의 왕인 과인마저도 독살하려 모의를 하였고, 역모까지 일으키려 준비하고 있었던 정황이 드러났다. 너희의 죄를 모다 인정하느냐!”
“절대 그런 적 없사옵니다. 증좌를 대어 보시지요.”
차갑게 뒤받는 익태의 모습에 도운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실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리 나와야지. 네가 너무 쉽게 자백할까 내 슬쩍 걱정이 되었었느니라. 부디 잘 버티거라. 이제부터는 그 누가 자백을 고한다 하더라도 절대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니. 아, 그리고.”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댓돌과 섬돌을 차례로 밟고 내려와 익태의 앞까지 다가왔다. 익태를 똑바로 내려다보던 도운은 팔을 힘껏 휘둘러 손에 든 등채로 익태의 두 뺨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손가락 굵기의 막대가 얼굴에 튕기며 익태의 뺨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 금세 부풀어 오르는 뺨을 보는 도운의 표정이 지옥도에 그려진 야차와 같았다.
“감히 청조를 겁탈하고 죽이려 들어? 더러운 후레자식. 내 절대 네가 쉬이 자백하도록 놔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오래도록 고통을 받는 것을 천천히 즐겨주마. 시작하라!”
‘예!’ 우렁찬 나졸들의 대답과 함께 죄인들의 가랑이 사이로 주릿대가 끼워졌다. 덜덜 떠는 영의정과는 달리 익태와 한 내관은 이를 악물고 다가올 고통에 대비했다.
“으아아아악.”
영의정의 처절한 비명을 시작으로 의금부에 피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다.
* * *
의금부에서부터 날아오는 비명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청조는 괜히 불안한 마음에 밖으로 나와 뜰을 거닐었다.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밝혀질 것인지 궁금했다. 어제저녁 잠시 보았던 아저씨 생각이 났다.
어제저녁 무렵, 청조는 내의원에 마련되어 있는 병사를 찾았다. 그곳에서 간신히 눈을 떴던 이명은 청조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어쩌다 이리되셨습니까? 무엇이 아저씨를 이리 만들었습니까?”
“처…… 처…… 으윽…… 처…… 청조야…….”
이명은 시체마냥 거무스름하게 변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물만 흘렸다. 청조는 그런 그를 측은한 듯 바라보았지만, 결코 동정은 하지 않았다.
“정녕 아저씨께서 그리하셨습니까? 아저씨께서 의경 세자 저하를 해하고자 그런 독이 든 초를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채신 저의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또…… 전하를, 지금의 전하를 해하고자 또다시 그 무서운 것을 만드셨습니까?”
“내가…… 내가 죽일노…… 내가…… 미안하다…… 네 아버지는…… 네 아버지는 일동이…… 일동이 그자가…….”
헉헉대던 이명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정신을 놓았다.
“아저씨, 아저씨! 어찌 된 것인가?”
의관이 급히 달려와 진맥을 하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증인을 꼭 살리라 엄포를 놓던 왕의 추상같은 호령이 생각나 벌렁거리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마, 그저 잠시 혼절을 한 것뿐이옵니다.”
“꼭 살려야 하네, 꼭.”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성심을 다할 것이옵니다.”
의관이 성심을 다하겠다 말하였지만, 청조는 여전히 근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뜰을 거닐다 저를 부르는 청아한 소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유빈마마,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청이구나.”
“예, 마마. 저를 기억하시옵니까?”
“내 어찌 너를 잊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은혜를 많이 입은 것을 안다. 진심으로 고맙구나.”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은혜라니요. 소인이 전하와 마마께 입은 은혜가 하해와 같이 크옵니다.”
손사래를 치는 아이가 귀여워 청조는 웃음이 났다. 자신을 보며 생긋 웃어주는 마마의 모습에 청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는 괜히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그런데 예까지는 웬일이니?”
“아, 전하께서 보내시었습니다. 혹여 마마께서 심란하시어 낮것상 거르실까 심려되어 소인을 보내셨사옵니다. 그리고 이것을…….”
청은 손에 들고 있던 조그만 난합을 청조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야?”
“소인이 만든 것이옵니다. 요것이 거칠어진 살갗에 바르면 보드랍게 해 주는 고약이옵니다. 전하께서 유빈마마를 위해 만들어 보아라 하명하신 물건이옵니다.”
“이것이 그 고약이란 말이니? 내 그 효능에 대해선 전하께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 몸의 손이 참으로 거칠어 부끄러웠는데, 네가 내어 준 고약 덕을 톡톡히 보겠구나. 고맙게 잘 쓰겠네.”
“망극하옵니다, 마마.”
헤실거리는 청의 얼굴에 청조의 마음이 쓰렸다. 겨우 제 아우만 한 아이가 독이 든 것도 모르고 그것을 몸에 발랐단 말을 전해 들었다. 아이의 푸르듯 허연 얼굴을 보며 마른 웃음을 짓는 순간 갑자기 손에서 난합이 날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난합은 거친 파열음을 내며 깨져 버렸다. 바닥에 뭉개져 버린 고약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청조는 소동의 주인을 확인했다. 청조의 시선이 닿는 곳에 예화가 무서운 얼굴로 서 있었다. 눈에서 불이라도 나올 듯 청조를 노려보던 예화가 숨을 들썩였다.
“중전마마, 중전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이러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이런 건방진! 어린 소환 따위가 어딜 나서는 것이냐!”
“전하께서 아시면 크게 노하실…….”
“비키게!”
‘아이쿠’, 언년이 예화의 앞을 가로막은 청의 몸을 밀치자 다리가 엉킨 청은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청아!”
“어디 감히 중전마마의 앞길을 막는 것이야. 콩알만 한 어린 소환 따위가!”
“박 나인! 네가 뉘 앞에서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청조가 나서 호통을 쳤으나, 언년은 고깝다는 듯이 눈만 아래로 내리깔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모습에 청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예화를 바라보았다.
“마마, 이것이 무슨 무례이시옵니까?”
“무례? 무례라 하였느냐! 천한 것이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 말버릇이더냐!”
“말씀 삼가소서! 도통 예법을 모르는 분처럼, 이 무슨 추태이시옵니까!”
“너냐? 네가 전하의 베갯머리에서 무어라 지껄였기에 내 오라버님과 아버님께서 의금부에 끌려가신 것이냐! 너 때문에 내 오라버니께서 고초를 받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다! 네년이 감히!”
“지금 고초를 받고 계시는 것은 영의정 대감과 도승지 영감만은 아니실 텐데요.”
“뭐라?”
청조는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는 예화를 향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고초를 당하고 계신 큰아버지는 걱정이 아니 되십니까? 한 내관 말이옵니다.”
“뭐…… 뭐?”
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린 난합을 직접 손으로 주운 청조는 안타까운 듯 그것을 손으로 쓸었다. 이 아까운 것을. 더욱 역정이 난 청조는 예화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다시는 소첩에게 천하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아무렴, 탕약 냄새를 맡고 자라온 소첩의 신분이 소가죽 냄새를 맡고 자라오신 중전마마보다야 천하지는 않겠지요.”
“뭐…… 뭐…… 뭐라는…… 네년이 지금!”
“이만 처소로 돌아가 자중하고 계십시오! 곽 상궁, 뭐 하고 있는가. 중전마마 배웅하시게.”
흥분하여 가슴을 들썩대던 예화가 옆으로 비틀거리자, 언년이 곁에서 부액하며 청조를 쏘아보았다.
“박 나인, 감히 그 건방진 눈빛은 무엇이냐? 내 그리 일렀거늘 상전에 대한 예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치도곤을 당하기 전에 어서 물러가거라!”
언년에게 엄포를 내린 청조는 교태전 궁인들을 쭉 둘러보며 목청을 더욱 드높였다.
“교태전 상궁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 아랫것들 교육을 어찌 시켰기에 한낱 나인 따위가 감히 이 몸에게 눈을 치켜 뜰 수가 있는가! 앞으로 교태전 궁인들은 상전에 대한 예가 무엇인지 똑똑히 배우기 전까지 다시는 애류당에 발걸음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를 어기고 함부로 애류당에 발걸음 하는 것들이 있거든, 그 품계를 막론하고 매로 그 죄를 엄히 다스릴 것이니 모다 썩 물러가거라!”
청조의 당당한 명에 애류당 나인들은 교태전 나인들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고소하다는 듯 흘겨보았다. 저마다 얼굴에 가득 담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날 저들이 감히 중전마마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상전과 자신들에게 모욕을 주더니, 이제 진정 내명부의 실세가 누구인지 알 것이다. 어찌나 깨소금 맛인지, 자리에서 어깨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언년과 중궁전 나인들은 속으로 분을 삭이며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예화를 부액하여 애류당을 떠났다. 그제야 한숨을 내쉰 청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청을 돌아보았다. 청은 넘어진 것이 충격인 듯 얼이 빠진 얼굴로 멀어져 가는 중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청아, 청아.”
“예…… 예?”
“괜찮은 것인지 묻지 않느냐? 넘어진 곳이 많이 아픈 것이야?”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마마, 소인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귀신에 홀린 듯 바삐 걸어가던 청은 급히 몸을 돌려 청조에게 다시 다가왔다.
“유빈마마, 고약은 소인이 다시 만들어 올리겠사옵니다.”
“그래, 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야.”
“망극하옵니다. 허면 소인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공손히 허리를 굽힌 청은 몸을 돌려 종종거리며 걸어나갔다. 전하를 뵈어야 할 일이 생겨 버렸다.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청은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애류당을 급히 떠났다.
바삐 근정전으로 뛰어간 청은 대신들이 가득 차 있는 문밖에 서서 발을 동동대며 안을 흘끔 들여다보았다. 오전에 있었던 친국을 마치고 잠시 근정전에 돌아온 도운의 곁에서 여러 대신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전하, 이러실 수는 없사옵니다. 도승지와 영의정은 죄가 없사옵니다. 이는 모함이옵니다!”
“모함이옵니다! 어찌 증좌도 없이 그들을 죄인 취급하시옵니까? 이는 필시 역당의 무리들이 도승지 가문에 앙심을 품고 작정하고 벌인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달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벌써 반 시진째 대신들은 파를 나누어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도운은 한 내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신들이 전 영의정을 들먹이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내 이미 영의정의 무고함을 밝혀내고 복권을 선포하였거늘, 어찌 그를 가리켜 역당이라 말들 하는가! 과인이 그때 사건을 재조사하여 그들이 죄 없음을 다 알고 있다 말하였는데도 경들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오? 지금 통촉하여 달라는 얼굴들을 가만 보니, 영의정이 누명을 쓸 당시 앞장서서 역모라 외치던 자들이 아니요. 역모가 아님이 밝혀졌으면 제일 먼저 사죄를 청해야 할 이들이 이리 뻔뻔하게 나오다니, 영의정이 누명을 벗으면 곤란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오? 왜 이리 핏발들을 세우시나. 설마…….”
마치 지금 깨달았다는 듯 도운은 일부러 ‘아’ 소리를 내더니, 금세 눈을 가늘게 뜨고 통촉을 외치던 대신들을 쭉 훑어보았다.
“한 내관과 무슨 모종의 결탁이라도 있었는가?”
도운은 뜨끔한 표정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패로 똘똘 뭉쳐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심해 보였다. 저들이 저 정도로 핏발을 세우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결탁이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전하. 소신들은 다만 영의정과 도승지의 억울함을 풀고자 할 뿐이옵니다.”
“한 내관의 억울함을 풀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한 내관이라니요, 대체 내관 따위가 무엇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일국의 조정 대신들이 내관 따위와 결탁할 일이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소신들은 어디까지나 충심으로…….”
“그럼 내관 따위의 집은 왜 들락거렸는가? 설명을 해 보시오.”
공손히 마주 잡고 있던 대신들의 두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왕의 날카로운 시선에 살갗이 베이는 듯했다. 자신들의 거짓이 들킬까 겁이 나 감히 왕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대신들은 돌처럼 서서 땀만 흘렸다.
“그 집에 모여 무엇들을 모의하였나? 내 추문을 만들 것을 작당하였나, 아니면 경들의 여식들을 후궁으로 들여보낼 계획들을 짜고 있었나. 그도 아니면 과인을 이 자리에서 끌어내고자 안계희를 병조판서로 올릴 작당들을 하였나!”
“그, 그것은…… 그저 소신들이 친목을 도모하고자…… 한 내관 그자의 집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니, 그저 함께 풍류를 즐기고자 친목의 자리를 만들었을 뿐이옵니다. 미, 믿어 주시옵소서!”
말을 더듬는 늙은이의 말에 도운은 껄껄대며 웃었다.
“풍류? 친목? 하하, 그래 뭐, 다 같이 모여 시조라도 읊고, 난이라도 쳤소?”
“에? 예…… 예, 그리하였사옵니다. 소신들은…… 그저 함께 시조만 읊었사옵니다.”
“그래? 그럼 그렇다고 해 두지. 허나 차후로 의금부에 있는 죄인을 감싸주려 하는 자는 시조만 읊었다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근정전을 빠져나오는 몇몇 대신들의 다리가 풀렸다. 과연 주상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한 내관을 빼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 내관 그자가 만일 그것을 발설하기라도 한다면, 저희들은. 아, 생각만으로 눈앞이 아찔했다. 도대체 그자가 연판장을 어디에 숨겨 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의경 세자의 죽음에 동조한 자신들의 지장이 찍힌 연판장이었다. 그것을 어서 찾아야만 한다. 대신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근정전의 월대에 서서 멀리 근정문을 빠져나가는 대신들을 바라보던 도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아무래도 저것들의 모양새가 하 수상하였다. 정치하는 약아빠진 늙은이들은 제 소매에 불똥이라도 튀면 소맷부리부터 잘라 낼 인간들이었다. 한데 왜 이리 죽기 살기로 한 내관과 익태를 싸고도는 것인지 수상했다.
“내금위장.”
“예, 전하.”
“저들을 잘 살펴보게. 아무래도 수상해. 한 내관에게 무언가 약점을 잡힌 것이 아니겠는가.”
“예, 전하. 수하들을 보내 그들의 뒤를 밟게 하겠사옵니다.”
대신들이 근정문을 모다 빠져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청은 바삐 도운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어허. 그러다 또 넘어진다. 네 무엇이 그리 바빠 이리 경박스러운 발걸음이냐?”
말은 경박하다 타박을 하였지만, 부드럽게 미소 짓는 도운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그, 그것이…… 전하. 그것이!”
“천천히 말을 하여라. 유빈은 낮것상 들었다더냐?”
“예? 예, 예. 유빈마마께서는 오늘도 어여쁘십니다. 한데!”
뭐라? 쿡. 청의 동문서답에 도운은 혀를 차며 웃었다. 뭐에 저리 흥분하였는지, 늘 창백하기만 하던 아이의 두 뺨이 동그랗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인, 생각이 나 버렸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그, 그, 그 중전마마의 교전 나인 말이옵니다!”
“교전나인? 교전나인이라면…… 언년이 말이냐?”
“예, 그 나인이 어찌나 목소리가 앙칼지고 드세던지 금일 애류당에서 그 교전나인이 소인을 이렇게! 밀쳤사옵니다.”
언년에게 밀린 흉내를 내던 청은 밀린 것이 꽤나 억울한 듯 콧구멍을 벌름대며 씩씩거렸다.
“언년이가 애류당엔 무슨 일이더냐?”
“네? 그것이…… 사실은…….”
역정이 난 듯 물어오는 도운의 모습에 그제야 청은 아차 싶어 자신의 입을 막았다. 결국, 애류당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는 도운의 목소리에 작은 몸을 움츠렸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내 너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니, 계속 말해 보거라.”
“예, 전하! 그것이 소인이 아직 도승지 영감을 따라다닐 적, 교전비가 도승지 영감 댁에 찾아왔사옵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때 머리에 장옷을 두른 교전비와 소인이 이렇게 부딪혔사온데, 그때 교전비가 소인에게 콩알만 한 것이 감히 누구에게 부딪히는 것이냐며 성질을 부렸사옵니다. 그때 소인이 그 여인의 얼굴은 제대로 못 보았지만, 그 앙칼진 목소리는 정확히 기억하옵니다. 소인을 콩알이라 무시한 것도 정확히 기억하옵니다. 그런데 오늘 또다시 콩알이라고, 소인을 콩알이라 불렀사옵니다.”
‘우’, 입을 동그랗게 오물거리며 청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 일이 있었더냐?”
“예, 전하. 내금위장 영감이 갑자기 소인에게 엿을 팔라 하명하시어 소인이 잠시 잊고 있었사온데, 그 교전나인이 다녀간 후 도승지 영감이 바로 그 집을 찾아갔사옵니다. 왜 소인이 엿을 팔던 그 가택 말이옵니다.”
“그것이 사실이냐?”
“예, 전하. 엿을 팔던 가택이 낯이 익다 하였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도승지 영감을 따라갔던 그 가택이었사옵니다. 틀림없사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도운은 청을 향해 근사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래, 잘하였다. 청이, 네가 복덩어리구나. 내 무슨 복으로 궁에 들어와 너를 만났을까? 아마 형님께서 너를 내게 남겨주셨나 보다.”
예에? 보…… 복덩어리. 근사하게 미소 짓는 도운을 바라보는 청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소인이 복덩어리이옵니까? 청은 감히 여쭤보지는 못하고 몸을 배배 꼬아댔다.
“옜다. 이거 가지고 가서 고약 다시 만들어 유빈에게 올리거라. 그리고 전냥이 남거든 너 주전부리 사 먹어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금전을 받아 든 청은 헤실거리며 물러갔다. 요 어린 내시 놈이 이제는 사양하는 척도 아니한다며 도운은 혀를 차며 웃었다.
* * *
의금부의 밤은 여전히 대낮처럼 환했다. 강약을 조절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고신에 피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루 사이 너덜너덜해진 죄인들의 모습은 벌써부터 참혹했다. 저녁 수라까지 거하게 잘 마친 도운은 의금부로 돌아와 죄인들의 얼굴을 거만하게 쳐다보았다.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어 버렸지만, 익태와 한 내관은 아직도 도운을 향해 형형한 안광을 쏘아댔다.
“아직 살 만한가 보구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그것은 내 이미 여러 번 말하였으나, 오늘 밤은 먼저 한 가지 죄에 대해서만 추국을 할 것이다. 과인은 얼마 전 노비법에 관해 새로운 왕명을 형조에 전지하였다. 그 내용인즉슨, 함부로 노비를 구타하거나 살해하지 말 것이고 그를 어긴 자는 국법으로 엄히 다스린다는 것이다. 한데 너는 네 집안의 노비를 독살하려 하였다. 왕명을 내린 지 겨우 반나절 만에 네가 노비를 죽이려 들어? 왕명을 이리 가벼이 여기다니, 네가 진정 왕 위에 서 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빈정거리며 일갈하는 도운의 말에 익태의 입술 끝이 비죽비죽 올라갔다 내려왔다. 흰자에 핏발이 가득 서린 것이 마치 피눈물이 고여 있는 듯했다.
“그것은 또 무슨 억지이시옵니까? 누가 소신을 모함하는지 모르겠지만, 소신의 결백은 하늘이 알고 계십니다!”
“하늘? 손바닥으로 가린 하늘도 하늘이더냐? 하늘이 아니라 네놈의 더러운 손바닥이겠지.”
흥, 도운은 작게 콧방귀를 뀌고 익태를 지나 도지에게 다가섰다.
“너도 모르느냐? 네 주인이 만석이라는 노비를 독살하려 비상을 준 것 말이다. 의금부가 떠나가라 소동이 일었으니, 네 모르지 않겠지.”
“모, 모르는 일…… 소인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모른다, 모른다 하였느냐.”
도운은 등채 끝으로 도지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그의 눈을 내려다봤다.
“네 눈이 참으로 특이하지 않느냐. 너 같은 눈을 본 자가 내 주위에 셋이다. 얼마 전 내금위장 남현이 보았고, 과인의 반려인 유빈이 두 번을 보았다.”
말과 동시에 도운은 역정을 참지 못하고, 등채로 도지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쳤다. ‘빠각’ 하는 소리를 남기고 단단한 등채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빗장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도지는 바람 빠지는 소리로 꺽꺽거렸다.
“죽이려 했느냐? 네까짓 것이 감히 그 여인을 두 번이나 죽이려 했었어!”
고통에 도지의 눈이 돌아갔다. 흰자만 번뜩대며 돼지 목청 따는 소리로 ‘끄으으으윽’거리던 도지는 겨우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아니…… 아니……옵…….”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만석이라는 노비이다. 증인을 대령하라!”
겨우 터진 숨을 헉헉 내쉬던 도지의 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점점 크게 벌어졌다. 저 멀리 쭈뼛거리며 걸어오는 사내는 만석이 분명했다. 분명 죽었는데,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 놀란 모양이구나. 허면 과인이 네 얕은수에 두 번이나 놀아날 줄 알았더냐? 살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가 두 번, 세 번은 못할까.”
도운은 시시각각 일그러지는 죄인들의 멍청한 얼굴이 측은하다는 듯 혀를 찬 후, 만석을 바라보았다.
“네가 도승지 집안의 노비 만석이냐?”
“예, 예. 전하, 쇤네가 만석이구만요.”
“네가 옥사로 잡혀 오던 날 밤, 너를 찾아온 이가 여기에 있느냐?”
“……예, 전하.”
“누구냐?”
만석은 익태의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으로 도지를 가리켰다.
“저…… 저자입니다요. 저자가 그,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구먼요. 한데 저자의 눈깔이가 저리 독특한지라 쇤네가 누구인지 한 번에 딱 알아보았습니다요.”
“너에게 무어라 하더냐?”
“독을 먹고 조용히 죽으라 했습니다요.”
“왜 너를 보고 죽으라 하였느냐?”
“쇤네가 물건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그리 말했습니다요.”
죄인들은 만석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죽었어야 할 노비 놈이 왜 살아서는! 왜 살아나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단 말인가. 억울하고 분했다. 그런 익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도운은 느긋하게 물었다.
“그 물건이 무엇이더냐?”
“그…… 그것이, 그것까지는 쇤네가 모릅니다요. 참말입니다요. 참말 지는 물건만 받아서 전해 주었습니다요.”
“물건을 어디서 받았느냐?”
“화…… 화성에 있는 한 동리에서 받아왔구먼요.”
“그 동리의 이름이 천비골이더냐?”
“예에. 그러합니다요.”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리는 만석의 대답에 도운은 별 미동 없이 익태를 바라보았다.
“도승지는 이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억울하옵니다. 저 노복이 앙심을 품고 거짓을 말하고 있음이옵니다. 평소에도 그 성질이 고약하고, 상전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던 놈이었사옵니다. 필시 자신에게 벌을 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감히 주인을 물려는 것이옵니다. 저놈이 끌려가던 날, 큰 잘못을 지어 벌로 광에 가둬 놓았사옵니다. 이는 내금위장이 알고 있는 사실이오니 확인해 보시옵소서.”
“예에? 아니구먼요. 그런 것이 아니구먼요!”
“네 이노옴! 네가 감히 주인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멀쩡할 줄 알았느냐! 기르던 개도 주인의 손은 아니 무는 법이다. 이러니 너희 같은 노비 새끼들을 개만도 못한 종자라 하는 것이야!”
모시던 주인의 호통에 만석은 히끅대며 땅에 엎드렸다. 주인의 호통에 덜덜 떠는 노비의 등이 측은해 보여 도운은 조용히 일렀다.
“만석은 일어서거라. 과인이 일어서라 명하였다.”
도운의 채근에 만석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주섬주섬 일어섰다.
“네 잘못이 아니니 겁에 질리거나 엎드릴 이유가 없다. 내 듣자 하니, 네 목숨과 네 식솔의 속량을 두고 거래를 하였다지?”
“히익! 잘못, 잘못했구먼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제발 이놈을 죽이시고 쇤네의 아이들은 살려 주십시오. 이놈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전하, 부디, 쇤네가 이렇게 빕니다요.”
만석은 ‘끅끅’ 우는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마주 대고 싹싹 빌었다. 불쌍한 사내의 얼굴이 한 순간에 눈물로 얼룩져 버렸다.
“네 아비의 아비의 아비 때부터 징그럽게 이어온 노비 생활을 응당 네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았겠지. 네 잘못이 있다면, 하늘에서 주신 귀한 목숨을 사사로이 끊고자 생각한 그것이다. 허나, 자식을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까지 내던지는 너의 마음이 바로 부정이요, 부정이란 무릇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아비의 마음이다. 허니, 어찌 부정을 죄라 말하겠는가. 내 너의 숭고한 아비의 마음을 높이 치하하여 속량시켜 줄 것이니, 앞으로는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자식들과 화목하게 살 궁리나 하거라. 아비가 있어야, 자식들이 올바르게 자랄 것이 아니냐.”
도운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만석은 눈만 끔벅거렸다. 끔벅거리는 눈에서 여전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속, 속량을 시켜 주신다 이 말씀이십니까요?”
“그래, 허니 이제 그만 집으로 물러가 가족들을 만나 보거라.”
“예! 예, 예, 전하! 감사합니다요. 이 은혜 이놈이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구먼요. 암만요, 잊지 않을 것이구먼요. 참말입니다요!”
“그래, 절대 잊지 말거라.”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만석에게 농처럼 말을 던진 후 도운은 호탕하게 웃었다.
“죄인은 듣거라. 증인의 말을 들어 보니, 네가 노비 만석을 죽이려 한 정황이 너무 뚜렷하다. 이래도 아니라 잡아뗄 것이냐?”
“모함이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고신을 다시 시작하라. 내 앞으로도 두 번씩 물어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번 물어볼 때 생각을 잘하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왕의 냉정한 말에 영의정은 할 말이 있는 듯 움찔거렸지만, 도운은 들어주지 않고 미련 없이 돌아서 버렸다.
밤새 계속될 것 같은 신음소리, 피비린내, 매 타작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질질 끌려가 옥사에 갇힌 영의정은 벽에 기대 끙끙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형님, 이제 그만 자백을 하는 것이…….”
“무슨 소리! 무조건 참아라, 대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내게 연판장이 있는 이상 그들은 우리 편이다. 분명 무슨 수를 쓰고 있을 것이야.”
“하지만…….”
“닥치고 그만 질질 짜거라. 어릴 적부터 어찌 그리 한결같이 눈치 없고 멍청하기만 한 것이야. 내 너를 그 자리에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였는데!”
갈라지고 쉬어 버린 목소리로 일갈하는 한 내관의 질타에 영의정은 신음도 제대로 못 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고신으로 너덜거리는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익태는 의지박약한 아버지의 모습과 이 모든 순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더러운 옥사에서, 이렇게 있어야 할 자신이 아니었다. 잘못되었다. 모든 게 잘못되었어.
도대체 조정 대신들은 무얼 하느라 아직도 자신들을 이곳에 내버려 두는 것인지, 이곳을 나가자마자 그 늙은이들부터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며 익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쓸모없고 무능한 것들.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한 익태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늦은 밤, 궁으로 돌아온 도운에게 남현이 급히 다가왔다. 오후 내내 대신들의 뒤를 밟았던 내용들을 소상히 보고했다.
“그러니까 대신들이 차례로 한 내관의 가택을 뒤졌다는 말인가?”
“예, 전하.”
“무엇을 뒤지고 있었을까? 분명 저들을 꼼짝 못 하게 옭아맬 수 있는 무언가를 뒤졌을 것인데.”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치부책이나 연판장 같은 것이 아닐까 싶사옵니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저리 쩔쩔맬 이유가 없사옵니다.”
“치부책?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그도 아니면 연판장일 수도 있고……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일을 내관 혼자 해 왔다고 보기 힘든 부분이 있네. 등촉제작자가 저녁 무렵 잠시 의식을 찾았다 하여 그자를 만나 보았는데, 그자의 말이 용초를 제작하는 대가로 한 내관이 금덩이를 건네줬다고 하더군.”
젊디젊은 내관 따위가 어찌 그렇게 재물을 모을 수 있었을지 심히 의심이 갔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옵니다. 분명 뒤에서 재물을 대주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내관과 결탁한 대신들은 대부분 의경 세자 저하께서 승하하신 이후, 다들 높은 자리로 승차를 하지 않았사옵니까?”
남현의 말에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모두 함께 공모를 했을 수도. 아무래도 연판장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군. 그것을 어디에 숨겼을까?”
“한 내관의 가택을 뒤졌던 대신들이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나왔사옵니다. 아마 그들도 찾지 못하는 깊숙한 어딘가에 숨긴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음, 깊숙한 곳이라. 그곳이 어디일까?”
한 내관의 습성과 성격을 보아 늘 그것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에 놔두었을 것이다. 늘이라, 늘. 자신의 눈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면서 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아마 아주 가까운 곳에 놔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안 깊숙한 곳이나, 족자 같은 곳에 숨겼을 수도. 아니야, 그렇다면 대신들이 이미 찾아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일까?
“내금위장은 유빈이 한 말을 기억하나? 등잔 밑이 어둡다 했지. 등잔 밑, 등잔 밑이라. 한 내관 그자가 가장 안심하고 혼자만 아는 장소가 어딜까? 늘 자신의 눈앞에 있어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곳 말일세. 매우 소중한 물건을 어찌 보관할까…… 자네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은 무엇이고 어찌 보관하는가?”
“소신에게 가장 아끼는 물건은 바로 소신의 검이옵니다. 소신의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물려주셨고, 아버지께서 소신에게 물려주신 귀한 물건이옵니다. 물론 소신이 무관이기도 하지만, 집안의 가보와도 같은 너무도 소중한 물건이라 늘 손에서 놓지 않사오니 따로 어찌 보관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렇지. 소중한 것은 늘 품에 보관해야겠지.”
남현의 말에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터였다. 도운은 청조가 ‘愛’ 한 글자를 수놓아 만들어 준 영견을 품에서 꺼내었다. 너무도 소중해 늘 품에 지니는 영견, 그리고 너무도 소중해 늘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남현의 검. 도운의 눈꼬리가 휘었다. 등잔 밑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청조는 참 현명하고 기특한 여인이었다.
“한 내관의 가택으로 가서 그자의 부채를 가져오게.”
“예, 전하.”
이제 모두 끝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일 추국이 진심으로 기대되는 밤이었다.
* * *
어두운 방에 홀로 앉은 예화는 무릎을 세우고 불안함에 손톱을 뜯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아주 오래전에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물어뜯고 있는 엄지손톱에서 딱딱 소리가 울렸다. 소가죽 냄새, 그것이 어찌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불안했다.
문득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에 화들짝 놀란 예화는 입에서 손을 떼고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괜히 호흡이 가빠왔다. 지금 당장에라도 저 문을 박차고 금군들이 들어와 저를 끌고 나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장지문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경직된 어깨를 풀었다.
하지만 예화는 다시 손톱을 입가에 대었다. 꿈에 나올까 두려워하던 옛적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리 밖의 사람들은 저희를 천민이라 부르며 개,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하곤 했었다. 딱 한 번, 오라비의 손을 잡고 사당패를 구경하러 저자에 나갔다 당했던 횡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앞서가던 양반 아가씨의 머리끝에서 나풀대는 붉은 비단 댕기가 어찌나 예쁜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만지고 말았다. 감히 더러운 손으로 고귀한 아가씨의 댕기를 만진 죄로, 자신은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쏟아지는 사나운 발길질을 막느라 자신을 감싼 오라비가 사죄하고 또 사죄해야 했었다. 저를 감싼 오라비의 몸 뒤로 보이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을 더러운 오물 보듯 바라보던 그 눈, 코, 그리고 새침했던 입술까지 흰 종이에 찍어내듯 지금도 그려 낼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의 나이 매우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잊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결국, 다리를 절뚝거리는 오라비를 부축하여 초가로 돌아오는 길, 그 흙길 위로 오라비의 피와 자신의 눈물이 굽이굽이 흘렀었다.
천민이란 그런 것이었다. 천민의 아이는 소중하고 어여쁜 아이가 아니었다. 천민의 아이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천민으로 자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집안이 유복해도, 금전에서 나는 쇠 비린내가 몸에 배인 소가죽 냄새를 벗겨주지 못했다. 그때 이후로 손톱을 무는 버릇이 생겼다.
동리를 벗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한데 어느 날 동리를 벗어나 도성으로 떠나야 한다고 했다. 도성에 도착하기까지의 오랜 시간 동안 어찌나 무서웠는지, 물어뜯은 손톱에서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멀리 궁에서 살고 있다는 큰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벌써 오래전 동리를 떠났던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었다.
비단 도포를 빼어 입고 챙이 넓은 갓을 쓴 모습이 어찌나 무서운지, 바들바들 떨며 손톱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아버지는 저자에서 자신과 오라비를 패던 양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양반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무서워 오라비의 등 뒤에 숨어 훌쩍였었다. 처음 보는 큰아버지라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아예 오라비의 등에 찰싹 붙어 울어 버렸다.
“왜 우느냐?”
“무서워요.”
“뭐가?”
“아버지는 양반이고, 저는 천민 아이이니 무서워요. 저를 때릴 거여요?”
“너의 아비가 너를 왜 때린단 말이냐?”
“하지만…… 히잉…… 저는 천한 아이니까…… 더러운 아이는 맞아야 한대요, 저자에서 만난 양반 나리가 그랬어요. 히잉.”
작게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더러운 아이가 아니면 되지 않느냐? 네 아비가 양반이니, 네 이제 응당 양반의 딸이지.”
알 수 없는 말에 겨우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툼한 눈꺼풀을 가진 사내가 얇은 눈을 크게 휘며 웃고 있었다.
“그럼…… 저는 천하지 않아요?”
“천하긴, 감히 누가 너를 천하다 하느냐! 너는 앞으로 저 궁궐의 안주인이 될 것이다. 여인들 중에 가장 높고 고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차, 참말로요?”
“참말이고말고. 자, 선물이다.”
큰아버지가 흔드는 손짓을 따라 비단 댕기가 눈앞에서 나풀거렸다. 저자에서 봤던 양반댁 아가씨의 붉은 댕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여쁜 댕기였다.
“요것이 제 거여요?”
“암만, 다 네 것이다. 금박 박은 것도, 은박 박은 것도, 요 화려하게 수놓은 것도 다 네 것이니라. 만져 보거라.”
“하지만…… 더러워지면 어째요?”
“더러워지면 그냥 버리면 되는 것이지.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더 좋고 귀한 것을 맘껏 누리고 살 터인데.”
어찌나 화려하고 또 화려한지 그것들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던 예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 내 것이라고 했다. 저자에서 보았던 고 양반 계집년의 댕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요것이 저의 것이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은 더러운 아이가 아니었다. 감히 더러운 아이들이 손도 댈 수 없는 그런 아이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몹시 격앙되는 나날이었다.
화려한 꽃수 놓인 운혜 신고, 화려한 치맛자락 나부끼면서 콧대를 높이고 다닌 지 며칠이 지났다. 저보다 나이 많은 여인들도 저를 아가씨라 부르며 굽실거렸고, 덩치가 커다란 장정들도 오라비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비위를 맞추었다. 어머니의 머리에 꽂힌 비녀와 손가락에 낀 옥반지는 화려하였고, 아버지는 뒷짐을 쥐고 팔자로 걸음을 걸으셨다.
자신은 고귀하고 지체 높은 여자아이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궁에서 쫓겨난 도운 오라버니가 자신의 사가로 왔었다. 그를 보자마자, 그간 자신의 우쭐거림이 다소 부끄러워 얼굴에 열이 올랐었다. 그가 입고 있는 의복이며, 하물며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의 의복까지 모다 비단이었다. 이제 양반이신 아버지마저 도운 오라버니에게 굽실거리고 허리를 바짝 숙였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진짜였다.
아무리 값비싼 의복을 입고 있어도 감출 수 없는 촌티라는 것이 저와 저의 식솔들에게서 흐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품위와 위엄이라는 것이 흘렀다. 그를 보는 순간 다시금 엄지손톱을 물었다. 그 후로 며칠간 그의 뒤를 몰래 따라 다니며 엄지를 물어뜯었다.
“왜 손톱을 무는 것이냐?”
“깜짝이야.”
몰래 지켜보고 있었는데, 잠시 몸을 숨긴 사이 어느새 도운 오라버니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마치 울었던 것처럼 눈이 조금 빨갛긴 했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정말 달랐었다. 저의 오라비보다도 어리다 들었는데, 덩치가 훨씬 크고 위압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직 어리다고는 하나, 여염집 소녀가 그리 손톱을 물다니. 내 유모에게 듣기로 그리 손톱을 물면, 입 모양이 삐뚤어진다 하였다. 어여쁜 얼굴을 하고 입술이 삐뚤어지면 어쩌려고 하느냐?”
“이제 안 물 거예요.”
얼른 손을 빼고 그리 대답하자, 도운 오라버니는 거만하게 턱을 올리며 저를 내려 보다 뒤를 돌아 걸어갔었다. 어린 그의 거만함이란. 너무 닮고 싶었다. 뒤돌아 가 버리는 그의 쌀쌀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를 멀끔히 바라보는 마음이 몹시 동당거렸었다.
그가 어여쁜 여인이라 했다. 아무렴,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어여쁜 아이였다. 감히 더러운 천민 아이 따위가 바라볼 수도 없는 그런 아이였다. 언젠가 궁궐의 안주인이 될 어여쁜 여인. 큰아버지의 말씀대로 이 세상 제일 높은 곳에 앉을 최고의 여인이 될 것이었다. 그때는 궁궐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 생각만 했었다.
그때 이후로 자신은 더 이상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었다. 한데 이 밤, 자신은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제 저에게서 소가죽 냄새 따위 아니 나는데, 자신은 가장 어여쁘고 귀한 여인인데. 도대체 내가 왜 불안해야 해!
예화는 괴로움에 흐느끼며 울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문득 눈을 떠보니 이미 사위가 밝은 것이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너무 울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머리가 띵하고, 갈증이 심하게 일었다. 준비된 자리끼를 급히 마셨지만, 갈증은 조금도 해갈되지 않았다.
“박 나인, 박 나인! 장 상궁!”
평소였으면 안의 상황을 잘 살피다 달려왔을 언년이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박 나인, 장 상궁! 어디 있느냐!”
도대체 이것들이 뭐 하는 것이야. 상전이 부르는 소리에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예화는 장지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늘 대기하고 서 있어야 할 문차비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갑작스런 상황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소란을 따라 예화는 야장의 차림인 것도 잊고 홀린 듯이 대청으로 나왔다.
“마마, 중전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이것이…… 이것이 무슨 일이냐?”
교태전의 너른 뜰을 금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던 궁인들은 모습을 드러낸 상전의 모습에 중전마마만 불러댔다. 내금위장 남현이 다가와 얼이 빠진 예화에게 고개 숙여 읍하고는 왕명을 전달했다.
“어명으로 중전마마의 교전나인인 박 나인을 추포하러 왔사옵니다.”
“어명? 어명으로 왜 박 나인을 추포한단 말인가?”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사옵니다. 어명이다! 박 나인은 앞으로 나오거라!”
언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른 나인의 등 뒤로 숨어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곧 남현의 눈에 띄어 금군들의 손에 의해 끌려 나왔다.
“아악! 마마, 중전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소인을 살려 주시옵소서! 중전마마! 중전마마!”
“언년, 박 나인, 박 나인! 내금위장!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네가 감히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날뛰느냐!”
예법에 어긋나는 중전의 악다구니에 남현의 미간이 잠시 일그러졌다. 외간 남자 앞에서 야장의만 걸치고 호통을 치는 여인의 모습에서 중전다운 품위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어명을 마저 전해 드리오니 부디 받잡으소서.”
경고를 하듯 딱딱하게 말을 마친 남현은 교지를 펼치고 어명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어명이오. 금일부로 교태전은 금군의 감시 하에 있을 것이며, 수발 나인 하나를 제외한 모든 궁인들은 바로 교태전을 떠날 것을 명한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교태전에 속해 있는 모든 상궁의 품계는 나인으로 강등될 것이며, 모든 나인들은 그 품계를 박탈하여 무수리나, 각심이로 균등하게 재분배하여 각 처소에 배치한다. 수발 나인 역시 그 역할이 끝나는 날, 바로 품계를 박탈할 것을 명한다.”
“뭐라! 이것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역할이 끝나는 날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전하께서 어찌 나에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이오!”
남현이 교지에 쓰인 어명을 읽자마자 궁녀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 나이에 나인이 되라니, 상궁으로서 수치 중의 수치였다. 궁 안의 노비인 무수리, 각심이가 되라는 어명에 그간 그들을 무시하고 부려먹었던 나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껏 자신들이 괴롭히던 그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벌써부터 무서웠다. 이제 와 나인이 되는 일도, 무수리가 되는 일도 모다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인들은 울먹이며 억울하다 소리쳤다.
“내금위장 영감! 너무 억울하옵니다. 도대체 소인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정말 너무 억울하옵니다. 무수리나 각심이가 되라니요! 소인들이 무슨 죄가 있어 노비가 되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옵니까? 차라리 죽으라고 하십시오!”
“시끄럽다! 너희들이 유빈마마께 어떤 불경을 저질렀는지 전하께서 모르시는 줄 알았더냐! 당시 첩지를 받지 못하였으나, 전하께서 입궐하기 전까지 그 옆을 지키며 성심으로 내조한 지어미이셨고 이미 가례를 치르고 궁에 들어오신 분이셨다. 또한, 전하께서 하늘 아래 단 하나의 정인이요, 조강지처라 지칭하신 분이시다. 한데 감히 상전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마마께 그런 불경을 저지르다니! 이는 비단 유빈마마뿐이 아니라 전하까지 능멸한 것이다!”
남현의 호통에 나인들은 바닥에 무릎 꿇고 더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잘못했나이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자, 남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감히 전하와 유빈마마를 욕보이고 능멸한 너희의 죄는 참형으로 다스림이 응당 마땅하나, 유빈마마께서 너희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 전하께 친히 청을 올리신 것이다. 이에 전하께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목숨만은 살려 주는 것이니, 너희 죄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다시는 이런 방자하고 교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말거라.”
“내금위장! 전하께서 어찌 이러실 수가 있는가! 내 전하를 직접 뵙겠네!”
“중전마마, 송구하오나 어명이옵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짐들을 꾸려 교태전을 나설 준비를 하거라. 아니면 맨몸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꺄아앗! 금군들이 훌쩍이고 있는 궁녀들의 팔을 잡아채 억세게 끌어당기자,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그 사이로 중전마마를 부르며 금군들에게 끌려나가는 언년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궁인들이 빠져나간 적막한 교태전에 예화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시끄럽다, 그만 울거라!”
곁에 하나 남은 나인의 훌쩍거리는 소리에 예화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댔다. 머리가 어지러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어찌해야 하지, 어찌해야 하나. 오라버니, 소녀는 너무 무섭습니다. 어서 오셔서 이 누이를 도와주셔요. 구해 주셔요. 비틀거리며 처소로 들어선 예화는 금침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있던 예화는 서둘러 의복을 챙겨 입었다. 당장 주상전하를 뵈어야만 했다. 자신의 집안에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산에 버려진 그를 위해 자신의 집안이 어찌하였는데,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강녕전으로 향하던 예화는 멀리서 한 무리의 궁인들이 줄지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긴 무리를 이끌고 팔랑거리듯 걸어오는 여인의 모습에 예화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일그러졌다.
“중전마마, 소첩 인사 올리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강녕? 네가 그것을 말이라고 묻느냐!”
소리치는 예화의 머리가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 옆에서 머리 만져 줄 이 하나 없으니 늘 화려하던 예화의 머리가 초라해져 버렸다. 나인 하나에 감시하는 금군 두 명만 대동한 중전의 행렬이 참으로 볼품없었다. 측은한 듯, 예화의 모습을 훑던 청조가 입을 열었다.
“전하를 뵈러 가시는 참이시옵니까?”
“그래, 내 따지러 가는 길이다. 감히 전하께서 내게 이러실 수는 없으시지, 암. 산에 버려진 전하를 보필하고, 왕위에 앉게 해 준 우리 집안이다. 은혜를 갚지는 못할지언정,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네년이 그 세 치 혀로 무어라 전하께 속살거렸는지 모르겠다만,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처벌하는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언제 왕위를 탐하셨다고 그분을 왕위에 올렸다 공치사를 하십니까? 중전마마의 가문만 아니었으면, 그분께서는 대군으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호방하게 사셨을 분이셨습니다. 전하가 아니라 마마의 집안에서 중전의 자리를 탐하신 것이 아니시옵니까.”
중전의 자리를 탐한 것이 아니냐는 청조의 말에 당의 아래 마주 잡은 예화의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녕 무엇을 아는 것은 아닌지, 몹시 불안했다. 허나,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해야 했다.
“네가 언제까지 이리 건방을 떨 수 있을지 두고 볼 것이다. 대신들이 가만있을 것 같으냐! 그들이 곧 내 오라버니와 아버지를 구명할 것이다. 오라버니가 구명되시거든 네년부터 궁에서 내칠 것이다.”
청조는 예화의 억지스러운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미 상황이 기울어져 있음을 알고 있을 터인데,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송구하오나, 중전마마. 대신들은 의금부에 있는 죄인들을 구명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곧 그들에게 추포령이 떨어질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마마께선 이만 처소로 돌아가시는 것이 옳은 듯하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추포령이라니!”
“마마, 어서 처소로 돌아가시라 말씀 올렸습니다! 처소에서 자중하고 계시옵소서. 이리 교태전을 벗어난 것을 아시면, 전하께서 크게 역정을 내실 것이옵니다. 금군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가! 어찌하여 교태전에서 감시를 받고 있어야 할 마마께서 이리 궁을 활보하고 계시는 것인가? 어서 마마를 뫼시고 돌아가게! 추후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네!”
“송구하옵니다, 유빈마마.”
청조의 엄한 질책에 금군들이 나서서 예화의 팔을 잡았다.
“뭐, 뭐냐! 이것들이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야! 놔라, 이것들아! 놔!”
“마마! 중전마마!”
하나 남은 예화의 나인이 두려움에 울부짖었다. 예화는 잡힌 팔을 빼려 낑낑거렸으나 금군들의 손에 잡혀 그대로 교태전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패악을 부리며 멀어져 가는 예화의 모습에 청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저녁 잠시 정신을 차렸던 이명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병사로 향하던 길이었다. 또다시 한숨을 내쉰 청조는 발걸음을 옮겨 이명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