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름을 비추는 새벽-18화 (18/25)

18. 꼬리

등촉제작자의 가택 근처에서 작은 엿판을 목에 걸고 엿을 팔고 있던 청은 무엇인가 작은 짐 꾸러미를 들고 대문을 두드리는 낯선 사내를 발견했다. 곧이어 대문이 열리자 사내는 안으로 사라졌다가 금세 빈손으로 다시 나타났다. 대문 밖으로 나온 사내는 괜히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청은 멀리 사라지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본 적이 있는 사내였다. 지난봄부터 익태를 감시하던 청은 익태의 사가를 들락거리는 사내를 본 적이 있었다. 틀림없이 익태의 사가에서 종살이를 하는 자였다. 그가 왜 이 가택에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하께 알려야 하는 일이 생긴 것만은 틀림없었다. 얼마 전까지 익태의 뒤를 쫓던 청은 새로운 명으로 등촉제작자의 가택 근처를 며칠째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내금위장 영감께서 말씀하시길 집안의 남종에게 엿만 주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하루에 한 번 집안의 노비가 밖으로 나와 엿을 가져갔다. 그가 갱엿을 가져가면 청은 다음날도 다시 자리에 나와 엿을 팔았다. 그리고 그가 검은 엿을 들고 가면 지체 없이 내금위장 영감께 알리면 되는 일이었다.

노비가 엿을 사는 척하는 일이 왜 중요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청은 남현이 시키는 일에 의문을 갖지 않고 성심을 다하였다. 내금위장 영감의 명은 곧 전하의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집으로 고기를 사 오신 내금위장 영감 덕분에 친정으로 돌아온 누이의 몸보신을 시켜 줄 수 있었다. 결국, 모시던 영감이 죽고 맨몸으로 쫓겨난 누이는 며칠을 울다 탈진하여 자리보전하고 누웠다. 그런 누이에게 따뜻한 고깃국 한 술이라도 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불쌍한 누이를 생각하니 청은 코끝이 찡하니 아려왔다.

내금위장 영감께서 가져오신 당과에 어린 아우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던 모습도 눈앞에 선했다. 전하께서 간간히 내려 주시는 고기며 쌀로 아픈 누이 몸보신도 시키고, 버짐이 폈었던 어린 아우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이 모든 것은 모다 전하의 성은이었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아무도 사 가지 않는 엿을 팔며 청은 오늘도 엿판을 목에 걸고 가택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이제는 익숙한 사내가 벙실거리며 다가왔다. 노비는 청이 매달고 있는 엿판을 보며 농처럼 물었다.

“뭐, 하나라도 팔리긴 하는 건가?”

“아직 하나도 못 팔았어요, 오늘도 갱엿으로 줄까요?”

“아니, 오늘은 검정 엿으로 주게나.”

노비의 말에 청은 귀를 의심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청은 재차 노비의 말을 확인했다.

“방금 분명 검정 엿이라 말했지요? 확실한 거지요?”

“내 그리 말했지.”

“그래요? 알았수. 나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으니, 어…… 이거 가져가슈.”

허둥지둥 손에 잡히는 대로 엿을 넘겨준 청은 바삐 자리를 떠났다. 바삐 움직이는 청과 달리 공짜로 엿을 한 주먹이나 건네받은 노비는 기분이 좋아 방실거렸다. 요 달콤한 주전부리로 삼월을 꼬여낼 생각에 두 손 가득 받은 엿을 조심스럽게 들고 느긋하게 집 안으로 사라졌다.

“아이쿠!”

바삐 달려가던 청은 다리가 엇갈리며 결국 바닥에 대차게 넘어졌다. ‘아야야.’ 깨진 무릎이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핑 돌았다. 무릎을 꽉 쥐어 싸고 비벼대던 청은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지체할 시각이 없었다. 작은 엿판을 목에 대롱대롱 매단 청은 바지에 묻은 흙을 털 생각도 못 하고 뒤뚱거리며 다시 달려갔다. 겨우 건춘문에 다다른 청은 그곳을 지키고 서 있던 낯이 익은 수문장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검은엿을 가져갔습니다.”

지나가며 흘리는 청의 말에 수문장의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까닥거렸다. 청은 자신을 향한 수문장의 시선과 고갯짓을 확인한 후 뒤를 돌았다. 절뚝거리며 걸어가던 청은 그제야 바지를 툭툭 털었다.

* * *

등촉제작자인 이명은 집안 깊숙한 곳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작업장으로 들어섰다. 둘둘 만 무명천을 콧구멍에 한 치의 틈이 없도록 박아 넣었다. 코를 비롯해 하관을 몽땅 가리기 위해 솜을 누빈 두툼한 면포를 얼굴에 한 겹 둘러썼다. 허나 그것마저 불안한 듯, 그 위에 두툼한 면포를 한 겹 또 둘렀다. 손에는 면포로 토시 같은 것을 만들어 꼈다.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고안하여, 몇 해 전 기적에서 빼 온 계향을 닦달하여 만들게 한 것이다. 손가락이 하나하나 끼워지도록 구상한 이것을 처음 만들라 하였을 때, 그 쓰임과 모양새를 보고 계향이 고년이 어찌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용도인지도 모르는 계집이 뭣 모르는 소리를. 입술을 비죽거리던 이명은 먼저 납덩이를 쇠솥에 넣고, 빨갛게 불길이 치솟을 때까지 아궁이에 장작을 계속 넣었다.

납이 뜨거운 열에 녹아 액체 상태가 되자, 이명은 면을 단단히 꼬아 만든 초의 심지를 담갔다 뺀 후 줄에 걸어 길게 늘어뜨려 놓았다. 이렇게 말린 심지는 매우 단단하게 변해, 다른 심지와는 다르게 초를 태울 때조차 꼿꼿하게 그 형태를 유지했다. 이 비밀을 모르는 이들은 심지가 매우 곧은 것이 신기하다며 자신의 솜씨를 칭찬할 것이다.

이명은 곧이어 크고 단단한 대통들을 골라 반으로 쪼개 놓았다. 반으로 쪼개진 대통의 짝을 맞추어 다시 맞댄 후, 끈으로 둘둘 말아 단단히 고정해 놓았다. 금세 초의 모양을 완성시킬 틀이 만들어졌다.

틀이 만들어지자 그 안에 미리 만들어 놓은 심지를 움직이지 않도록 잘 고정시켜 놓았다. 가마솥이 식으며 안에 든 백랍의 열이 떨어지자, 이명은 주홍안료를 섞어 은은한 주황색이 돌게 만들었다. 그리고 옆 가마솥에서 녹고 있던 납을 조금씩 떠 넣었다. 이 작업은 비율과 온도가 매우 중요했다.

납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도 아니 되었고, 백랍의 온도가 적당하지 않아도 아니 되었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기면 백랍이 제대로 섞이지 않아 군데군데 얼룩이 생길 수 있었고 초가 단단히 굳지 않고 금이 갈 수도 있었다. 그나마 전에는 아주 미량을 섞어 괜찮았으나, 이번에는 넣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이 넣고 이것을 만들어야 했다. 해서 일이 까다롭기도 했지만, 너무도 두려웠다.

이명은 납과 백랍이 잘 섞이도록 한참 동안 살살 저어준 후, 어느 정도 온도가 내려가자 줄지어 서 있는 대통 안에 부어 넣었다. 거기까지 작업을 마치자마자, 이명은 밖으로 뛰쳐나와 입 가리개를 벗어던졌다. ‘커억’, 숨이 확 트이며 맑은 공기를 폐 깊은 곳까지 들이마셨다. 가슴을 들썩대며 맑은 공기를 가득 들이마신 이명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무서운 작업을 또다시 해야 할 줄 몰랐다. 기실 이 모든 작업은 죽은 처의 몫이었다. 자신은 처가 만들어 놓은 초에 용을 양각하기만 했었다. 허나 처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을 본 이명은 초에 양각을 새겨 넣는 일조차 스스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앓던 처가 결국 죽어 버렸으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의원으로 지내다 여섯 해 전 죽은 친우의 말에 의하면 납에서 나오는 독이 호흡을 통하여 오장육부를 침범하고, 살갗으로 흡수된 독이 피를 타고 그 사기가 발끝까지 돈다 하였다. 그가 죽던 그 여름날이 떠올라 이명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처음부터 그자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그때 그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런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 * *

이명은 화성의 토박이였다. 태어나기를 화성에 있는 공예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사는 동리는 각종 장신구를 만드는 공예업자들이 모다 모여 사는 하나의 큰 공방이었다. 대장장이가 각종 금속들을 녹이고 두드리며 담금질을 하면, 세공업자들은 그 금속들을 더욱 세밀하고 정교하게 세공했다. 목공예를 하는 사람들은 세공된 금속을 자신들의 가구에 살살 두드려 붙여넣었다.

그 밖에 자개를 감입하는 사람, 보석을 연마하는 사람 등, 동리에 모여 사는 이들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어 공동 작업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중 이명의 아버지는 은을 세공하여 장신구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명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은덩이를 구입하러 몇 번 천민들이 사는 이웃 동리를 다녀오곤 했다.

그곳 천비골에 사는 천민들은 그 기질이 다소 사납고 거칠어, 이명은 그곳을 찾을 때면 종종 기가 죽곤 했었다. 그곳에서 일동 그자를 만났었다. 그자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먼 조상들은 유목민이었다고 했다. 그 유목민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우마의 도살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이명의 아버지는 그들이 천하다 하여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었지만, 이명은 아버지 몰래 꿀떡 같은 맛있는 주전부리를 주는 일동이 좋았다. 평민인 자신도 한번 먹어 보기가 힘든 귀한 꿀떡을 어찌 천민 아이가 먹을 수 있는지 놀라웠었다. 처음 먹어 본 달콤한 꿀떡의 맛이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유혹적인 맛이었다.

후에 알았지만, 천하다 천대받던 백정은 우마의 도살과 판매로 상업적으로 큰 이윤을 보는 자들이었다. 일반 양인들마저도 생활이 곤궁한 이들은 스스로 백정이 된다고 하니, 그들의 상업적 기질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일동이 던져 주는 맛 난 주전부리를 받아먹으며, 이명은 그에게 중독되고 길들여지고 있었다. 그는 이명을 친우라 불러주었지만, 기실 그는 이명의 우상이었다. 이명은 종종 꿀떡을 던져 주는 그의 말을 맹신하듯 따르곤 했다.

아버지의 눈이 무서워 비록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혼자 몰래 집을 나와 그의 집에 찾아가곤 했었다. 그곳에서 엿가락을 입에 물고 일동의 아우와 함께 비석치기를 하며 순수하게 놀기도 했고, 꿀떡에 홀려 함께 나쁜 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다. 남의 밭작물을 망쳐 놓기도 하고 키우는 암탉을 몰래 괴롭히기도 했지만, 일동은 새총으로 지나가는 행인을 맞추는 놀이를 특히 좋아했었다.

함께 나무 뒤에 숨어, 지나가는 계집이나 작은 사내아이들을 맞추며 놀았었다. 하루는 이마에 심하게 돌을 맞아 피를 흘리던 여자아이를 보고 다소 충격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명의 우상인 일동은 피를 흘리며 우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눈을 빛내며 좋아했었다.

‘오늘의 사냥은 성공이야.’

이명은 그때 그가 했던 말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감싸 쥐고 우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잠시 죄책감을 느끼던 이명은 그의 당당한 말에 무언가 으쓱해졌다. 그 순간 저희는 사냥에 성공한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적군을 정복하고 승리한 강인한 사내였다.

허나, 이제 와 그 시기를 생각하면 소가죽 냄새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의 집은 도살을 하고 난 소를 잘 무두질하여 그 피혁까지 내다 팔았었다. 무두질을 끝내고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소가죽에서는 그 특유의 냄새가 심하게 배어 나왔다. 부드럽고 질기게 말라 가고 있던 수많은 소가죽들이 파란 하늘 아래 펄렁이던 모습이 아직도 이명의 눈에 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동은 말도 없이 사라졌다. 궁에서 나온 신분이 높은 내시의 눈에 들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훗날 그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의 얼굴조차 희미하여 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다시 이명을 찾아왔다.

“잘 있었는가?”

“응? 뉘십니까?”

“날세, 나 몰라보겠는가?”

이명은 그가 누구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툼한 눈꺼풀 사이로 얇게 떠진 눈이 분명 낯이 익었다. 가늘게 떠진 눈 사이로 보이는 작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번쩍하고 이름이 떠올랐다.

“일, 일동? 설마 일동? 혹시 일동 자네인가?”

“일동이라…… 그 이름 참 오랜만에 듣네.”

시원하게 웃는 일동은 값비싸 보이는 도포를 입고 있었다. 번드르르하게 기름이 흐르는 얼굴, 양반만이 쓸 수 있는 챙이 넓은 흑립, 거기에 한 손에는 질이 좋아 보이는 검은 합죽선을 들고 있었다.

“그 이름을 버린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일동으로 부르는가? 이제 한일환일세. 내 양아버지인 상선 영감의 성과 그분 함자의 ‘환’을 돌림자로 받았네.”

“그게 다 무슨…….”

“후, 자네는 여전히 어수룩한 사람이군. 뭐, 다시 말하면 이제 내 이름은 일동이 아니라, 한일환이라는 말이네. 주상전하의 곁을 지키시는 종이품 상선 영감께서 내 아버지이시고, 그분의 아들인 나 또한 이 나라 세자 저하의 곁을 지키는 정사품의 상전일세. 다시 말하면 이제는 자네보다 더 높은 신분이라는 말이지.”

일환의 말에 이명이 눈을 끔벅거리다 머리통을 긁적거렸다.

“그, 그럼, 소인이 나리라고…….”

“하하, 이 사람. 우리 사이에 나리가 다 무엇인가? 그냥 한 내관이라 부르게. 그것이 편하니.”

“그래도…… 이제는 신분이…….”

여전히 머리를 긁적이는 순박한 이명을 보며 일환은 간사하게 웃었다.

“내 자네의 이야기를 들었네. 등촉제작자의 여식과 혼인을 하여 데릴사위가 되었다지? 자네의 아버지를 따라 은세공업자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뭐, 그 일은 일명이 형이 있으니까, 나야 데릴사위로 가는 것도 좋지, 암만.”

“그래, 초를 만드는 것은 어떠한가? 벌이는 좋은가?”

“그냥저냥 하지 뭐. 나라에 조세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뭐 있남? 굶지 않고 사는 것이 달세.”

“흐음, 그러한가?”

두툼한 눈으로 음흉하게 웃는 일동, 아니 일환의 모습에 이명은 사뭇 당황스러웠다. 뭔가를 은밀하게 원하는 듯, 탐욕스러운 빛이 스치듯 흘렀다.

“내 자네의 소문을 듣고 용초 제작을 맡기려고 왔네.”

“용초라면…….”

“세자 저하께서 쓰실 초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세자 저하? 그런 일을 왜 나에게…….”

“오랜 친구가 좋은 게 무언가, 어려울 때는 서로 돕고 사는 것이지. 내 나의 지위를 이용해 순수하게 자네를 돕고자 하는 것이네. 어릴 적 동무이지 않은가.”

놀란 이명의 표정을 보는 일환의 두툼한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나를 도와?”

“그렇다네. 이 나라의 세자 저하이시네. 곧 이 나라의 왕이 되실 분이시고. 그런 분께서 쓰실 초를 만드는 일이야.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게다가 그 보수 또한 섭섭지 않을 것이고. 내 옛 친우인 자네를 생각하여 일부러 일을 맡기는 것일세.”

“그러한가? 이것 참 고맙네그려.”

이제 와 활짝 웃는 이명을 보는 일환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입꼬리가 징그럽게 말려 올라갔다.

“이제야 자네가 내 뜻을 알아들었으니, 이제 본론을 말하겠네. 세자 저하께서 쓰실 특별한 초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네.”

“특별한 초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일환은 도포 아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주머니를 떼어 이명에게 건네주었다.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확인한 이명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것이 무엇인가? 납 아닌가? 이것을 왜…….”

“그것을 넣고 초를 만들어 주게. 아주 미량을 섞어서 만들어 주면 되네.”

“이것을 왜?”

“이 나라의 세자 저하께서 쓰실 물건일세. 특별해야 하지 않겠나. 아니 그런가?”

일환은 허리춤에 매달린 다른 주머니를 떼어내 이명에게 건넸다. 이번엔 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벌써부터 겁이 났다. 주머니를 열어 본 이명은 너무 놀라 손에서 주머니를 놓쳤다. 바닥에 떨어뜨린 주머니 안에는 금괴 한 덩이가 들어 있었다.

“이것이 무슨.”

“열심히 만들면, 앞으로 더 많이 챙겨 줄 것이네. 세자 저하께서 쓰실 초네. 정성과 성심을 다하여 만든 특별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아니 그런가? 응? 아니 그래?”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환의 작은 눈동자에 홀리는 듯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이명은 그의 의뢰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은을 제련하는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하나같이 몸이 허했다. 자신 또한 아버지가 은을 세공하는 이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데릴사위로 처가에 들어오기 전,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은덩이를 받으러 일환의 동리를 수차례 오갔었다. 납이라는 것이 은을 제련하고 나오는 것이니, 그것이 불안했다. 자신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어딘가 음흉해 보이는 일환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금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꿀떡이었다. 꿀떡이 눈앞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한번 맛보면 평생을 잊지 못할 정도로 달콤하고 쫄깃한 충격적인 그 맛.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응? 아니 그러한가?”

“그…… 그렇지.”

이명은 떨리는 손으로 떨어뜨린 금괴를 주워들었다. 턱을 치켜든 일환은 가늘게 뜬 눈으로 금괴를 집어 드는 이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랗게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즐거움으로 빛났다.

* * *

그때를 생각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어쩌자고 그 금괴를 받아 들었는지. 어쩌자고 그 영롱한 색상에 미혹되었는지 후회가 되었다. 자신이 이제껏 받아먹은 것이 꿀떡이 아니라 미끼인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거친 숨에 섞인 울음 참는 소리가 귀신의 곡소리처럼 메아리쳤다.

머리를 감싸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이명은 ‘아아’ 하는 큰 탄식과 함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축 처져 있던 이명은 다시 코와 입을 단단히 가리고 작업장으로 들어섰다. 대통 안의 백랍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이명은 돌돌 말아 놓았던 끈을 풀고 이미 쪼개져 있던 대나무 사이의 틈을 살살 벌렸다.

단단하고 색이 고운 것이 꽤나 잘 만들어진 초였다. 처의 솜씨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의 솜씨도 과히 나쁘지 않았다. 대통의 쪼개져 있던 틈을 따라 생긴 이음새 부분을 잘 정리한 후, 황칠(황칠나무에서 얻은 금빛 수액)로 용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초에 양각을 하지 않기 위해 생각해낸 잔꾀였다.

초를 양각하기 위해선 저 무서운 것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려대야 했다. 이명은 초를 깎아 내고 나온 부스러기조차 만지기가 겁이 났다. 하나, 둘, 셋…… 스물다섯 번째의 초에 황금용을 그려 넣자마자 이명은 또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무 무서워 손이 덜덜 떨렸다.

초를 만든 지 두 해가 지나고부터, 처는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몇 해가 지나자 손끝은 검어지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어렵게 수태한 아이는 모다 반산(유산)되어 버렸다. 처가 왜 아픈 것인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는 저 독물에 자신의 손을 맘껏 담가가며 일을 했다. 허나 자신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금덩이에 홀려서, 그놈의 꿀떡에 홀려 처를 잃고 제사상 차려줄 자식 하나 없었다.

모다 자신의 업보였으니 할 말은 없었다. 허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현듯 귀신같던 처의 얼굴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겁이 났다. 이명은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명이 사라진 반대편에서 익태가 무사 하나를 대동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누구십니까?”

“주인 안에 있는가?”

문을 여는 집안의 노비를 밀치고 익태가 대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지금 출타 중이십니다요, 나리. 방금 전 나가셨는데 혹 보시지 못하셨습니까요?”

“못 보았다. 어디 멀리 갔느냐?”

“그것은 쇤네도 잘 모르겠는뎁쇼. 어찌, 다음에 다시 들리시렵니까요?”

“아니다. 잠시 기다려 보도록 하지.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네 일 보거라.”

“예, 나리.”

지난번 집에 들렀던 익태의 모습을 기억하는 노비는 곧 제 할 일을 하러 자리를 떴다. 노비가 떠나자 익태는 망설임 없이 이명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소맷부리 안에서 작은 영견을 꺼내 코와 입을 단단히 막은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선반 위에 똑같은 모양의 용초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릇에 담긴 황칠이 아직 굳지 않은 것으로 봐서 방금 전 작업을 마친 듯 보였다. 흥, 못하겠다 벌벌 떨며 사정하더니, 결국 이렇듯 만들어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 놈이 못 만들겠다 버티면 어찌할 것이야. 줄지어 서 있는 용초를 바라보자 입가에 미소가 담뿍 지어졌다.

은혜도 모르는 놈이 감히 나를 능멸하고, 내 누이를 욕보였다 이거지. 자, 보시오, 주상. 당신의 그 입을 닥치게 할 독이요. 이 독이나 자시고 골골 앓고 있으면, 그때 소신이 편히 보내 드리지요.

흐흠, 어서 고년이 수태를 하여야 할 것인데. 즐거운 듯 작업장을 한번 휘 둘러본 익태는 밖으로 나왔다. 초가 어느 정도 만들어져 있으니 굳이 이명을 기다릴 필요가 없을 듯했다. 초를 챙기는 것을 시킬 요량으로 익태는 밖에서 기다리는 수하를 부르러 나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문을 열어 줬던 남종이 여종에게 껄떡거리는 것이 보였다.

손에 하나 가득 엿가락을 들고 종년을 꾀어내는 노비의 모습이 참으로 우스웠다. 겨우 엿가락 따위로 꾀어내는 종놈이나, 겨우 엿가락에 넘어가는 종년이나. 헛웃음을 치고 지나가려는데 이상한 말이 들렸다.

“아 글쎄, 진짜라니까 그러네.”

“핏, 됐네, 됐수. 어디서 거짓이야. 노비 주제에 네가 금전이 어디서 나서 댕기를 사준다는 거야? 새경(머슴이 받는 연봉)을 받을 날이 먼 것을 내가 아는데.”

“참나, 엽전 나무를 찾았대도 그러네.”

“아, 되었다는 데도 그래! 세상에 엽전 나무가 어디 있다고, 칫. 차라리 우물에서 금을 길러 올렸다고 하지!”

“진짜라니까. 네가 요즘 날마다 먹는 그 엿이 어디서 나왔겠냐? 다 그 엽전 나무가 주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유?”

“글쎄. 흐흐흐, 별것도 아닌 것을 말해 주는 대가로 받았지.”

별것 아닌 종놈이 하는 소리에 그곳을 지나가던 익태의 발걸음이 딱 멈추었다. 과연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는 대가로 저놈이 금전을 받았다는 소리인지 참으로 불길했다. 누군가 등촉제작자에 관해 알아보고 있다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노비의 등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갑자기 나타난 익태의 존재에 놀란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리,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요?”

“네가 지금 한 말이 무엇이냐? 누구에게 무얼 이야기해 주었다는 소리냐?”

“아, 그것이…….”

낭패라는 듯 얼굴을 찡그린 노비은 제 입술을 손으로 탁탁 쳐댔다.

“어허! 이놈이, 어서 말을 하거라!”

“그것이…… 한 달포쯤 되었습니다요. 어느 장사치가 찾아와 주인 나리께서 초를 만드시냐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요.”

“뭐…… 뭐라? 그래서 네 뭐라 말을 하였느냐?”

“모른다고 했습니다요.”

“그리고! 그리고 또 무엇을 말하였느냐! 네놈이 무엇인가 말을 해 줬으니 금전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 그것이…….”

흥분한 익태의 모습에 남종이 벌벌 떨었다.

“네가 진정 치도곤을 맞고 싶은 것이냐! 어서 사실을 말하거라!”

“그것이…… 후에 주인 나리께서 혹시라도 초를 만드시거든 알려 달라 하였습니다요. 그 작자의 말이 저자에 큰 객주를 가지고 있다고, 주인 나리께서 만드신 초를 객주에 내다 팔고 싶다고 하였습니다요. 해서…….”

“해서 벌써 알려 주었느냐!”

“예에…… 한 시진 쯤 전에 알려 주었습니다.”

낭패였다. 분명 주상이 손을 쓴 것이다. 혹 등촉제작자를 벌써 주상이 데려간 것일지도 몰랐다. 큰일이었다. 한 시진 전쯤이었다면 곧 주상의 사람들이 들이닥칠 터였다. 한시가 급했다. 당장에라도 저 문을 박차고 그들이 몰려올지도 몰랐다. 한순간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도지야! 도지야! 어디 있느냐!”

“예, 주인어른.”

“어서 작업장으로 가서 초를 모다 담아 오너라.”

“예, 주인어른.”

“잠깐. 아니다, 그럴 것이 아니다.”

그래, 그럴 것이 아니다. 증좌를 하나라도 남겨선 아니 되겠지. 노비들을 바라보는 익태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수하들을 이끈 남현이 이명의 기와집에 도착하였을 때, 집은 이미 활활 치솟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럴 수가. 남현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졌다. 바삐 수하 하나를 궁으로 보내 사건을 보고하게 하고 남현은 현장을 지켰다. 불을 끄는 이들을 도와 겨우 불길을 잡았을 때, 이미 대문 옆 작은 행랑채를 제외한 안채가 모다 전소되어 버렸다.

“내금위장 영감, 내금위장 영감! 저쪽 헛간 같은 곳에서 시신이 나왔습니다.”

안에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남현에게 수하 하나가 달려와 고하자, 남현은 집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헛간을 살폈다. 불에 타 버린 시신은 총 세 구였는데, 둘은 여성이고 한 명은 남성이었다.

“하, 이런.”

남현은 수하 두 명을 현장에 남겨두고 서둘러 입궐했다. 도운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온 남현의 얼굴이 어두웠다.

“전하.”

“화재가 일어났다고?”

“예, 아무래도 방화로 보이옵니다. 기와의 가장 안쪽에 작업장으로 보이는 헛간이 하나 있었사옵니다. 그 안에서 시체 세 구가 나왔는데 그중 둘은 여성이었습니다. 둘 중 하나는 집안의 여종인 듯 보였고, 하나는 타고 남은 머리 장식으로 볼 때 후처로 들였다는 퇴기인 듯하였사옵니다.”

“그럼 사내는? 혹 등촉제작자였는가?”

“그것은 아닌 듯하옵니다. 이야기로 듣던 등촉제작자와는 덩치부터가 달랐사옵니다. 등촉제작자의 행방을 본 자들이 있는지 알아보라, 수하들을 남겨두고 왔사옵니다.”

“방화가 확실한가?”

“예, 도승지 쪽에서 선수를 친 듯하옵니다. 헛간에 놓여 있던 시신들에게 묶은 흔적이 없었고, 또한 머리가 문을 향해 있지 않았사옵니다. 이미 죽임을 당한 후, 헛간과 함께 불에 태운 듯하옵니다. 증좌와 증인을 없애려 그리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겠지. 한데 그자가 우리의 움직임을 어찌 눈치챘을까?”

“혹, 노비가 발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을 저리 급하게 처리한 것으로 봐선, 그곳에 들렀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그대의 말이 일리가 있네. 우선 등촉제작자의 신변이 가장 중요해. 그가 그들에게 끌려갔을 가능성도 있으니 주위를 탐문하게. 그리고 청이 그 아이를 궁으로 부르게. 혹, 그 아이가 말을 전한 것을 알게 된다면, 아이의 신변이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예, 전하.”

잠시 생각에 잠긴 도운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다.

“재환, 그자는?”

“닷새 뒤면 도성에 도착한다는 서신을 받았사옵니다.”

“알겠네. 닷새 전에 꼭 등촉제작자를 찾아오게. 반드시 그자를 살려야 하네. 그가 얼마나 중요한 증인인지 자네가 더 잘 알 거야.”

“예, 소신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의 명을 받자와, 그자를 꼭 데려오겠사옵니다.”

믿음직스럽게 읍하고 방을 나서는 남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운은 생각을 정리했다. 남현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대책은 필요했다. 도대체 그들을 어찌 옭아매야 할지. 반반한 이마에 짙은 그림자가 서렸다.

* * *

이튿날 근정전에 모인 대신들 사이로 뻔뻔하고 악랄한 익태의 얼굴이 보였다. 잔인하고 영악한 줄은 알았지만, 살생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는 강수를 둘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긴, 일국의 세자까지 죽인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에게 일개 노비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무에 어려운 일이었을까. 저의 형님을 죽이고, 이제는 저의 백성들까지 죽이는 천하의 후레자식.

가늘게 뜬 눈으로 대놓고 쳐다보는 도운의 시선에도 익태는 꼿꼿이 서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썹 한 올 흔들림이 없었다. 벌써 등촉제작자를 처리했기에 저리 여유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허나, 하루 사이에 그를 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등촉제작자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포기하긴 아직 일렀다.

“우상, 어제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방화사건이 있었다지요?”

“신 우의정 아뢰옵니다. 구가 이명 되는 자의 가옥이 행랑채를 제외하고 전소되는 일이 있었사오나, 그것이 방화인지는 아직 모르옵니다.”

“그렇다면 수사는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 단초가 나온 것이 있는가?”

“아직 조사 중이옵니다, 전하. 하지만 아무래도 단순 화재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 하는 우의정의 말에 도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방화와 살인이라는 흉악한 범죄가 일어날 경우 도성 안 치안을 담당하는 자로서 받게 될 문책이 두려워, 어물쩍 넘어가려는 모양새가 눈에 선했다.

“기와 한 채가 방화로 전소되고, 그 안에서 세 구의 시체가 나왔소. 살해 후 증좌를 없애기 위해 방화를 한 정황이 보인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찌 단순 화재요! 나도 아는 사실을 의금부 제조인 우상이 모르고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은…….”

“도성에서 이리 흉흉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의금부 제조를 맡고 있는 우상이 어찌 이리 무심할 수가 있는가. 살해의 흔적이 적나라한 사건을 두고 단순 화재! 그러고도 의금부 제조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말할 수 있겠소! 도성의 치안이 이리 어지러워서야 백성들이 어찌 안심을 하고 생활을 하겠는가! 도성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자가 이리 아둔해서야, 과인이 어찌 백성의 안위를 그대에게 맡길 수가 있겠소!”

방화사건에 대한 내용을 왕이 어찌 저리 상세히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또다시 시작이었다. 요즘 근정전에 드는 젊은 왕의 혈기가 사나운 호랑이와 같으니 조금의 책이라도 잡히면 그대로 잡아먹을 듯 그 위세가 대단했다. 지난 몇 달 사이에, 처음 유배를 떠난 호판을 시작으로 몇몇 대신들이 이미 유배를 떠났다.

유배를 떠난 자리엔 어느새 왕의 사람들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도운의 호통을 듣는 우의정의 마음이 불안했다. 이번 일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떠날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실을 말하면 좋았을 것을. 문책당할 것이 두려워 어물쩍 넘어가려다 아예 추국을 받게 생겼다.

“신 우의정, 다시 아뢰옵니다. 세 구의 시체가 나오기는 하였으나, 집안의 노비들과 집주인의 첩으로 보였사옵니다. 집주인의 첩 역시 그 출신이 기생으로, 몇 해 전 집주인 되는 자가 기적에서 빼 온 퇴기라 하옵니다. 시체 중에 집주인 되는 자는 보이지 아니하고 또 그 행방이 아직까지 묘연한 것으로 보아, 노비들을 죽인 자가 집주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사옵니다.”

“노비들을 죽인 자에 의해 끌려간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단초가…….”

말끝을 흐리는 우의정의 말이 끝나기 전에 도운은 턱을 치켜들고 익태를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에 대해 도승지는 어찌 생각하는가?”

“그 집주인 되는 자가, 누군가에게 끌려갔을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허나, 만약 그러하다면 노비까지 그리 살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끌고 간 자가 집주인에게 원한이 있다면 굳이 노비들까지 죽이고 방화로 위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옵니다. 만약 원한이 아닌 금품을 노린 것이라면 노비들을 하나라도 남겨두어 인질의 목숨값을 받으려 했을 것이 두 번째 이유이옵니다. 허니, 이번 방화는 집주인이 노비들을 죽였다는 가정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함이 옳을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어떡해서든 등촉제작자가 노비들을 죽인 걸로 꾸미고, 그쪽으로 몰아가려는 익태의 잔꾀가 보였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고하는 그의 모습에 도운은 빙긋 웃었다. 예상한 말을 그대로 전하는 악인의 모습에 실소가 터졌다.

“도승지의 말대로라면 구가 이명이라는 자가 집안의 노비를 죽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노비를 죽인 주인에 대한 처결은 어찌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강상(綱常)의 법도에 따라, 죄가 있는 노비를 그 주인이 단죄함은 옳은 일이옵니다. 노비는 주인의 재산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잃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비를 기꺼이 손수 처벌하여 강상의 법도를 바르게 세우고, 지엄한 국법을 지킨 주인 된 자의 행실을 치하하는 것이 관례이옵니다.”

“사람 죽인 놈을 치하하라?”

“황공하오나, 죄 있는 노비에 관한 처사는 이미 국법과 관례로 정해져 그 시행됨이 오래이옵니다.”

“노비에게 죄가 없다면?”

“노비의 생사여탈권은 그 주인 된 자에게 있사옵니다. 이는 주인 된 자의 고유 권한으로 누구의 참견을 받을 일이 아니옵니다.”

익태의 대답에 도운은 근정전 안의 대신들을 쭉 둘러보았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도승지의 말에 그릇됨이 없사옵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지켜온 관례이자 지엄한 국법이옵니다.”

“국법에 의하여 죄가 있는 노비는 당연히 그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하옵고, 노비에 대한 생사여탈권 역시 주인의 고유 권한으로 이 역시 합당한 일이옵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그 목숨을 사사로이 앗아가는 것은 없어져야 할 폐단이라 사료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한 내관을 따르는 무리들은 익태의 발언을 옹호하며 뭉쳤고, 일부 새로운 왕의 신하들이 그들의 의견에 반박하며 근정전 안이 다소 소란스러웠다.

“다들 들으라!”

우렁찬 도운의 목소리에 시끄럽던 좌중이 일순 고요해졌다.

“노비 역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이는 하늘이 과인에게 주신 귀한 백성이고 목숨이라는 뜻이오. 하늘이 내려 주신 귀한 목숨을 위해 세워진 왕으로서, 무릇 백성을 감싸고 보호하는 것은 임금된 자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허니 아무리 죄가 있다 하나, 백성이 함부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어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는가. 또한,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의 대권이니 치하할 사람에게 상 주는 일은 분명 과인의 일이오. 허나 이것이 어찌 상 받을 일이어 치하를 할 수 있는가. 생명을 경시하고, 백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자를 어찌 치하할 수 있는가 이 말이오!”

도운의 외침에 조정 신료들은 침묵했다. 도운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는 조정 신료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남의 귀한 목숨을 사사로이 취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다. 만약 백성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또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인 자를 치하한다면 이것이 폭군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옳지 않은 일이다! 모두 들어라!”

“예, 전하.”

쩌렁쩌렁한 왕의 호통에 근정전에 서 있던 모두가 허리를 숙이고 왕의 명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아무리 작은 죄라 해도 노비의 죄를 관에 고발하지 않고 함부로 벌을 내린 자는 그에 따른 형벌을 엄히 내릴 것이다! 벌로써 노비를 구타하거나 잔인하게 죽인 자는 장 일백 대의 형에 처할 것이며, 죄 없는 노비를 함부로 죽인 자는 장 이 백 대 형에 처할 것이다. 또한, 주인의 횡포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노비의 식솔들이 다시금 그 주인을 모시고 받드는 일은 너무나도 잔인한 처사이다. 하여 주인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노비의 식솔들은 차후에 모두 양민으로 속량할 것이니 형조는 이를 숙지하고 시행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단단히 명을 내린 젊은 왕은 불안감으로 입안이 바짝 마른 우의정을 불렀다.

“우상은 들으시오!”

“예, 전하.”

“지금부터 의금부,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 모든 병력들은 동원하여, 노비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방화를 일삼은 죄인 구가 이명을 찾으시오. 내 그자를 찾아 일벌백계(一罰百戒)하여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뿌리째 뽑을 것이니, 일의 막중함을 알고 행해야 할 것이오. 또한 죄인인 구가 이명을 숨겨주거나 도와주는 이들 역시 형벌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우상에게 도성 안의 모든 가택들을 검문할 것을 허할 것이니, 이는 사대부의 집안이라 하여 예외는 없을 것이며, 우상의 자택 역시 검문에서 빠져선 아니 될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예, 전하. 신 우의정 명 받잡겠사옵니다.”

도운은 또다시 턱을 치켜세우고 거만하게 익태를 바라봤다. 아마 지금쯤 속된 말로 똥줄이 타고 있을 것이다. 이 기회에 아예 집안을 탈탈 털어 댈 것이다. 어좌의 왼편에 서 있던 남현은 도운의 눈짓을 받고는 바로 근정전을 나섰다.

남현과 함께 그간 새로 정비된 왕의 내금위가 나섰다. 으리으리한 익태의 사가 앞에서 대문을 쾅쾅 두드리자 이내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는 엄장한 풍채의 무관들이 청지기를 밀쳐 버리고는 대문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기운에 겁을 먹은 청지기가 입만 벙긋거리다 남현의 뒤를 쫓았다.

“저…… 나리, 나리. 무슨 일이시옵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은 영의정 대감 댁이옵니다. 대감께서 아시면…….”

“비키거라, 어명을 수행 중이다!”

“예에? 나리, 나으리.”

집안에 머무르던 무사들이 뛰쳐나왔으나, 어명을 받든 무관들에게 함부로 대적하지 못하였다. 집으로 쳐들어온 무관들로 인해 집안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대궐 같은 집의 방들과 대청마루에 흙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히고, 세간들이 뒤집어졌다. 손에 든 용모파기를 하인들의 얼굴과 일일이 대조하고, 본 자가 없는지 심문이 이어졌다.

“이것이 지금 무슨 짓인가!”

난장판이 된 집으로 익태와 영의정이 들어섰다. 그들을 본 남현이 다가와 이명의 얼굴이 그려진 용모파기를 들이대었다.

“이런 자를 본 적이 있으시오?”

“내가 그자를 어찌 알겠습니까. 나는 모르는 얼굴이니 이만 내 집에서 물러들 가시지요! 감히 예가 어디라고 이리 무례할 수가 있습니까!”

“왕명을 수행 중이니 도승지는 물러서시오. 더 이상 수사를 방해한다면 어명에 따라 당장 추포할 것이오.”

“이보게, 내금위장. 못 봤다 하지 않는가! 내가 누구인지 정녕 모르는가? 어찌 이리 함부로…….”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영의정을 흘끗 바라본 남현이 영의정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엄장한 풍채의 무관에게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에 영의정이 슬금슬금 뒷걸음질했다.

“못 봤다 하시니 집안을 더 뒤져 봐야겠지요. 근정전에서 도승지가 말했듯이 노비 셋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방화까지 저지른 흉악한 놈입니다. 대감과 도승지가 못 보셨다니, 집안을 좀 더 둘러보겠습니다. 그런 흉악한 자가 집안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한다면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가 대감께 무슨 해를 끼칠지 알 수 없습니다.”

애써 화를 억누르며 자신을 죽을 듯 노려보는 익태를 바라보며, 남현은 보란 듯이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여봐라, 좀 더 샅샅이 뒤지거라! 영의정 대감의 집이다. 혹시라도 놓치는 것이 있어 불상사가 일어나거든 네놈들이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예, 내금위장 영감!’ 여기저기서 우렁차게 대답한 무관들이 집안을 더욱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익태는 부르르 떨며 남현을 노려보았다. 피식, 남현의 입가에 비웃음이 나타났다 금세 사라졌다.

“그리 부르르 떨 거였으면, 차라리 전하의 하문에 등촉제작자가 누군가에게 끌려갔다 대답하지 그랬나. 괜히 노비들을 죽인 것이라 대답했다 이게 무슨 사단이냔 말일세. 하긴 어떤 대답을 올렸어도 가택 수사를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야.”

남현이 대놓고 도발하자 익태가 징그럽게 웃었다.

“흥, 이곳을 뒤진다 해서 무엇이 나올 거라 생각하십니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안 나온대도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을.”

남현의 한마디에 징그럽게 웃던 익태의 얼굴이 돌연 사납게 변했다. 그때 무관이 노비 한 명을 끌고 왔다.

“영감. 방화사건의 가택을 들락거렸다던 이를 찾았습니다.”

“그래?”

무관이 끌고 온 노비의 얼굴을 확인한 익태가 남현을 무섭도록 쏘아보았다. 이명에게 납을 전해 주라 심부름을 시켰던 노비였다. 빨리 처리했어야 하는데, 시기를 보느라 어쩔 수 없이 우선 광에 숨겨 놓았던 놈이었다.

도성 안에 쫙 깔린 군관들만 아니었다면 진작 밖으로 끌어내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을.

시시각각 변하는 익태의 모습을 흘끗 바라본 남현은 피식거리며 손에 든 용모파기와 겁에 질려 달달 떨고 있는 노비의 얼굴을 확인했다. 며칠 전, 등촉제작자의 집 앞에서 청이 봤다고 한 꾸러미를 든 사내가 틀림없었다.

“그자를 어찌 데려가는 것입니까?”

“이자가 왜 광에 갇혀 있었는가?”

“그것은 집안의 일입니다. 잘못한 일이 있어 벌을 주고자 잠시 가둬 둔 것뿐입니다.”

“자네의 노비가 방화가 일어난 집에 들락거리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었네.”

“들락거린 것만으로 어찌 그를 잡아가십니까. 그 댁 노비와 친분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그러니 더욱 데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죽은 노비에게 사건에 대한 무슨 단초라도 들었을 수 있으니.”

입술 끝이 실룩거릴 정도로 흥분했지만, 익태는 턱주가리를 꽉 물고 감정을 눌렀다. 괜히 반발을 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지금은 보내 주고, 후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었다.

“아니, 이 사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 그럼 내 노비가 살인사건에 연관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무엇인가!”

“그만하시지요, 아버님. 내금위장 영감께서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실 것입니다. 이미 이 일은 전하께서 도성에 일어난 흉악한 살인, 방화사건으로 구분하시어 철저한 조사를 명 내리셨으니 신하 된 자로서 응당 협조를 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데려가시지요. 제 가문의 노비가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요.”

“이해해 주니 고맙네. 그리고 혹시라도 등촉제작자를 본다면 꼭 알려 주십시오. 도성의 치안과 백성들의 안녕을 위하여 꼭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근심이 저리 크시니 속히 잡아 해결을 해야지요. 그럼 이 사람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대감.”

남현은 일부러 등촉제작자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빈정대는 말을 남기고 집을 빠져나가는 남현과 그 무리들을 가늘게 노려보던 익태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전쟁이라도 난 듯 완전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또다시 분노가 솟아올랐다.

“어떡할 것이냐, 등촉제작자라니! 내금위장이 어찌 그이가 등촉제작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냐! 주상이 뭔가 눈치를 챈 것이 틀림이 없다. 이제 어찌할 것이냐? 응? 어떡할 것이야. 뭐라고 말을 좀 해 봐라, 어찌 그리 태평할 수가 있느냐. 우선 등촉제작자를 어서 빨리 처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응?”

“기다리십시오. 할 것입니다. 지금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행방을 찾고 있다니! 그럼 아직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냐. 이것 참! 그러다 주상이 먼저 찾아내면 어쩔 것이냐? 만석이 저놈이 잡혀가다니. 주상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아낸 것이 아니겠느냐. 너는 도대체 그동안 무얼 한 것이야. 이제 어쩌면 좋겠느냐, 대책이 있는 것이야?”

부글부글. 한숨을 삼킨 익태는 아랫입술을 물고는 자신의 아버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어수룩한 아버지의 다급한 질문에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뒤에 앉아 떠먹여 주는 밥만 먹을 줄 아시는 분이, 이런 일이 생기면 제일 안절부절못하여 저를 닦달해댔다. 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역정이 올라왔다.

“찾아낼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익태는 이를 악물며 짓이기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명의 행방을 모르니 속이 타는 것은 익태도 마찬가지였다. 우선은 만석부터 해결하자. 처소로 들어가던 익태는 곁에 서 있던 수하를 불렀다.

“도지야.”

“예, 주인어른.”

“비상을 준비해라. 그리고 이명 그자를 빨리 찾아라. 무조건 주상보다 먼저 찾아야 해. 잘 알고 있겠지?”

“예, 주인어른. 걱정하지 마십시오.”

깊은 밤이 내려온 어둠 속, 날렵한 몸놀림으로 의금부 담을 넘은 사내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그 몸놀림이 얼마나 재빠르고 날랜지,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옥사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옥사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나졸의 등 뒤로 어느새 다가선 사내가 그들을 단숨에 제압하고는 재빨리 옥사 안으로 들어섰다.

불안함에 몸을 떨다 겨우 선잠이 들었던 만석은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자신이 갇혀 있는 옥사 앞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복장을 두른 사내가 서 있었다. 저승사자 같은 모습에 놀란 만석은 벌떡 일어나 뒤로 기어갔다.

“뉘시오?”

“주인어른이 보내서 왔네. 이거 받으시게.”

“이것이 무엇인데 내게…….”

꼬깃꼬깃하게 접힌 흰 종이를 받아 든 만석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종이를 펼쳐보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정확히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어찌나 무서운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자네가 해 줄 일이 있네.”

“뭐…… 뭡니까요?”

“그 안에 든 것을 먹고 조용히 죽어주면 되는 일이네.”

손에 든 종이가 툭 떨어졌다. 달달 떨리는 손을 시작으로 만석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바들바들 떨렸다. 곧이어 달달 떨던 두 손을 서로 맞대고, 만석은 어느새 무릎을 꿇고 목숨을 빌고 있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쇼. 제발 살려 주쇼. 쇤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요. 쇤네의 진심이요. 진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할 만큼 무언가 아는 것이 있는가 보지?”

제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할 듯 지그시 바라보는 사내의 가느다란 눈이 소름 끼치게 두려웠다. 딱, 딱, 겁먹은 노비의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 아무것도 모르는구만요. 지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만요. 지는 물건만 전해 주었습니다요. 그저 심부름만 한 것뿐입니다요.”

“그러니 문제가 아닌가.”

“예…… 예?”

“자네가 물건을 전한 것이 문제라 이거네. 그러니 그것 먹고 편히 가게. 잠깐은 괴롭겠지만 금방이야. 의금부가 어디인지 알고 있겠지. 죄 없는 자도 죄를 얻고, 성한 사람도 반병신이 되어 나간다는 곳이네. 살이 타고, 뼈가 박살이 나는 고신을 견디기보다 그게 편하지 않겠나.”

“버틸 수 있습니다요! 쇤네 아무리 고신을 받아도 절대 말하지 않을 거구만요!”

“이 사람, 왜 이리 아둔한가! 자네 식솔을 생각해야지. 어린 아들들이 걱정되지 않는가? 자네가 끝내 버틴다면, 자네의 식솔들이 버틸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이야.”

“그…… 그것이 무슨 말씀…….”

“생각하는 그대로네.”

머릿속을 아득하게 만드는 두려움에 더 이상 이가 부딪히는 소리 따윈 울리지 않았다. 만석은 말 그대로 완전히 얼어 버렸다.

“허나, 이대로 그것을 먹는다면 남은 자네의 식솔을 속량시켜 줄 것이네.”

“속, 속량을…….”

복면 사이로 보이는 사시안의 눈꼬리가 둥그렇게 휘었다.

“듣자 하니, 자네의 첫째가 그리 똑똑하다며? 속량이 되면 글공부도 할 수 있겠지.”

“글공부…….”

“글공부 열심히 하여 과거라도 보면, 말단이긴 해도 관직에 오를 수도 있겠고.”

만석의 눈이 아련해졌다. 속량과 글공부. 양인도 과거를 보면 그 자리가 말단이라 하나, 관직에도 오를 수 있다. 지긋지긋한 노비 신세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 벌거벗은 마냥 맨 상투만 드러내지 않고, 머리에 작은 감투 하나라도 써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내를 바라보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더러운 옥사 바닥에 떨어져 있던 두툼한 종이를 바라보던 만석은 달달 떨리는 두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고 꽉 움켜쥐었다.

“정말 약조하는 거지라?”

“뿐이랴, 주인나리께서 말씀하시길 네 식솔에게 얼마간의 전답과 가옥도 내려 주신다고 했다.”

깜빡이는 만석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자식들을 위해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비록 저는 개만도 못한 노비 따위로 살다 노비로서 개죽음당하지만, 자신의 아이들만큼은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게 할 것이다. 눈물이 뚝뚝 흐르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만석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예, 암만요. 먹고말고요. 이놈이 요것 먹고 이 자리에서 딱 뒈지고 말거구만요!

이튿날, 증인에 대한 추국이 시작되기도 전에 싸늘한 주검이 옥사에서 발견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의금부 밖에서 안의 상황을 주시하던 도지는 빙긋 웃음을 머금고 바로 사라졌다.

* * *

애류당에서 청조와 함께 낮것상을 든 도운은 의금부에서 있었던 일로 남현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랬단 말이지.”

“예, 전하.”

“등촉제작자의 행적은 아직 못 찾았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백방으로 찾아보고 있지만 어디로 숨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사옵니다. 도승지 쪽에서도 사람을 풀어 그를 찾고 있는 듯하옵니다. 이리 많은 이들이 찾는데도 안 나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미 도성을 빠져나간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사옵니다.”

흠, 고민을 하던 도운은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조를 바라보았다.

“어찌 생각하느냐? 그가 도성을 빠져나갔을 거라 생각하느냐?”

“아녀자의 좁은 소견으로 무엇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녀자의 좁은 소견이 아니라, 청조 너의 생각을 묻는 것이다.”

당당하게 묻는 도운의 질문에 청조가 고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도성을 빠져나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화재가 난 후, 내금위장 영감의 지휘 하에 사대문의 검문을 보다 강화하셨다 하셨습니다. 도성에 깔린 군관들을 따돌리고 그리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신첩의 기억으로 아저씨는 꽤나 소심하였고 우유부단한 성미였습니다. 아마, 자신의 집에 불이 나고 노비들이 살해당한 것을 보자 겁이 나 숨은 것이겠지요.”

“숨었다면 대체 어디로 숨었을까. 도성을 이 잡듯 뒤지는데도 안 나오다니. 익태 그자의 수하들이 도성을 뒤지는 것이 무서워, 어디 먼 곳으로 피신한 것이 아니겠느냐.”

혼잣말을 하듯 읊조리는 도운을 보던 청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첩이 산에서 도승지 영감의 무사들로부터 도망을 하였을 때, 신첩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곳에 숨었었습니다. 신첩의 뒤를 바짝 쫓던 사내들을 피해 송이버섯을 캐곤 했던 절벽까지 뛰어갔지요. 절벽 가장자리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 있는 신기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이라면 나도 알고 있다. 절벽 끝 소나무가 자라 있는 곳.”

“하지만 전하께서도 그 나무 아래 몸을 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는 것을 모르셨을 것입니다. 소나무를 타고 그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숨겨 신첩이 살 수 있었습니다. 신첩의 바로 뒤까지 쫓아왔던 사내들이 신첩이 절벽 아래로 뛰어든 것이 아닐까 이야기하던 소리가 그 밑에서 다 들렸었습니다.”

어찌나 아찔했을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도운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소나무를 타고 절벽을 내려가다 까딱했으면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허나, 그를 감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긴박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시금 역정이 올라 머리로 피가 몰렸다.

“내 이놈들을…….”

“고정하십시오. 신첩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품 안에 있지 않습니까.”

곁에서 자신을 다독이는 청조의 모습에 겨우 화를 참은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 하였습니다. 저를 쫓던 사내들이 바로 자신들의 발아래에 숨어 있던 저를 보지 못했듯이 말이지요. 아저씨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곳에 숨어 있지 않겠습니까?”

“가장 잘 아는 곳? 내금위장, 그자가 자주 가던 곳이 있는가?”

“친분이 별로 없던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이웃과의 교류도 별로 없이 자택에 칩거하듯 살았다고 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등잔 밑은 그곳이겠구나.”

도운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청조를 바라보았다. 새침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복스러운 뺨이 어여뻐 죽겠다는 듯 부드럽게 쓸다 한번 튕겨주었다.

“그자의 가택으로 가보게.”

“에, 전하. 명 받잡겠사옵니다.”

남현이 힘차게 읍하고 처소를 나서자 도운은 벽에 걸린 족자를 바라봤다. 자신이 ‘忠’이라 써서 보낸 서신에 비단을 발라 표구한 족자였다. 그 족자에 쓰인 글을 바라보다 청조를 지그시 바라봤다.

“너는 도대체 무얼 먹고 그리 똘똘한 것이냐?”

“음, 서방님의 가르침을 삼켰습니다.”

“그럼 무얼 먹고 그리 기특한 것이냐?”

“서방님께서 주시는 충심을 받아먹었지요.”

파랑새처럼 조잘거리는 청조의 대답에 키득대던 도운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너는 무얼 먹고 이리 어여쁜 것이냐?”

“그거야 서방님의 애정을 먹은 것이 아니옵니까.”

“그럼 네가 더 어여뻐져라 내가 애정을 더욱 많이 주어야겠다.”

청조의 허리에 감긴 도운의 팔이 여인의 몸을 앞으로 쭉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품으로 들어온 여인의 낭창한 몸을 안은 도운의 몸이 뒤로 휙 넘어갔다.

“이제부터 내가 애정을 더욱 많이 줄 것이다.”

“예, 많이많이 주셔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소첩의 배가 부르지 않으니 소첩, 서방님이 주시는 애정을 모다 받아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입술을 맞대고 조잘대던 청조의 입술이 도운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도운은 앞으로 있을 큰일에 대비하는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속이 타는 상황을 잊게 해 줄 정다운 시간이라 더욱 간절하고 소중했다.

“네가 갈수록 여우 짓이 늘어만 가니, 내가 겨울 여우를 아니 잡아 주어도 되겠다. 그럼 내 무엇을 잡아 줄까?”

“아무것도 아니 잡아 주셔도 됩니다. 그래도 사냥 나가셨다, 길바닥에 누워 있는 귀먹은 토끼 보시걸랑 소첩에게 꼭 주워다 주시어요. 소첩이 그것으로 서방님 남바위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내가 두 마리 주워 올 것이다. 하나는 눈처럼 하얀 토끼를 주워 올 터이니, 그것으로 너 조바위 만들어 쓰거라. 하나는 새벽처럼 뿌연 회색 토끼 주워올 터이니, 내 남바위 꼭 만들어 주고. 내 겨우내 익선관 대신 그것을 쓰고 벗지 않을 것이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청조가 도운이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산이 그립습니다. 서방님과 세답을 하고 돌아오던 길도 그립고, 소첩을 위해 남겨주셨던 반쪽짜리 군밤 맛도 그립습니다.”

“나도 그렇다. 네가 말려 주었던 국화차의 향이 그립고, 장떡의 애초롬한 맛이 그립다. 세답을 하고 돌아오던 네가 금불초를 쓰다듬고 서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그때 너의 모습을 바라보던 내 마음이 무척이나 괴란하였지만, 오래도록 남을 만큼 시리고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눈이 날리기 전에 함께 가자. 네가 닫아 놓았던 문을 함께 열고 들어가자.”

“예, 서방님.”

품에 폭 안긴 여인을 소중히 보듬으며 도운은 곧 있을 결전의 날을 위해 마음을 다독였다.

애류당을 떠난 남현은 수하 두 명을 끌고 이명의 집으로 향했다. 거침없는 기세로 빠르게 움직이는 무관들의 모습에 저자의 사람들이 바삐 길을 터주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익태의 수하 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본 도지는 수하들과 함께 그들의 뒤를 남몰래 밟았다. 다급한 모습으로 보아 등촉제작자의 소재를 파악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명의 집에 도착한 남현은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주저앉아 버린 기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행랑 앞까지 다가간 남현은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는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준비가 끝나자 문을 벌컥 열고 남현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이명은 남현의 등장에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대가 가택의 주인인 등촉제작자인가?”

이명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바들거리고만 있었다. 그의 바짝 웅크린 등을 바라보던 남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심한 놈, 한숨이 나왔다.

“데리고 나오거라.”

“예, 영감.”

수하들은 엎드린 이명의 팔을 각각 잡고 일으켜 세웠다. 몸이 얼마나 굳었는지 이명은 억지로 일어나서도 허리를 펴질 못했다. 그의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다 먼저 방을 나서던 남현은 무사로서의 감이 전신에 찌릿하며 경고를 울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검을 반사적으로 피한 남현은 바로 발검을 하고 상대를 마주 봤다.

“누구냐.”

남현의 질문에 상대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챙, 챙,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금속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도지의 뒤를 따르던 수하들이 남현을 빙 둘러싸고 압박을 해 왔다. 남현의 뒤에서 무관의 보호를 받던 이명은 두려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이명의 존재를 두고 치열한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숫자로 밀어붙이니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남현이라도 하나둘 자상을 입기 시작했다. 남현은 이명을 죽이려 달려드는 사내들을 막아내며, 가까스로 이명의 팔을 잡고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도승지가 보내서 왔느냐?”

여전히 대답 없는 사내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사내의 살짝 틀어진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적시는 피를 닦아낸 도지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실력에서 밀린 도지의 수하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도지 역시 자상을 입은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도지의 검을 막는 찰나의 순간, 남현의 옆구리로 칼이 스쳐 가며 틈이 생겼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도지의 수하 하나가 남현의 뒤에 있던 이명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찔렀다. 바로 남현의 검이 도지의 수하를 베었으나, 이미 이명의 배에 검이 깊게 꽂혀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배에서 흘러넘치는 피를 바라보던 이명은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소리치는 남현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던 이명은 곧 털썩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도지와 겨우 살아남은 수하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도망쳤다. 도망가는 그들의 뒤에다 욕설을 내뱉은 남현은 서둘러 이명의 배를 눌렀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런 자들이 뒤를 쫓고 있던 것을 눈치 못 채다니!

“어서 의원을 데려와라!”

팔에서 피를 흘리던 무관 하나가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갔다.

서로에게 피가 마르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피를 흘리며 돌아와 보고를 하는 도지에게 익태는 길길이 날뛰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래서, 그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을 못 했다는 말이냐!”

“송구합니다.”

“이것이 송구로 끝날 문제이더냐! 그놈이 살아 있으면 어찌할 것이야!”

“회복하기 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인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배때기를 꿰뚫었습니다.”

헉헉대며 겨우 화를 참은 익태가 손으로 턱을 비벼댔다. 이렇게 된 이상, 먼저 선수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익태는 무서운 얼굴로 자택을 나와 빠르게 한 내관의 집으로 향했다.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선 이명 그자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보거라. 어느 정도 다친 것인지. 그리고 틈을 봐서 그자의 목숨을 확실히 끊어 놓아라. 그자의 집에 있던 초들은 확실히 다 제거한 것이냐?”

“네, 큰아버님. 확실합니다.”

“화성에 사람을 보내거라.”

“화성 말씀이십니까?”

“그래, 심부름을 했다던 노비의 용모를 아는 자가 그곳에도 있지 않느냐. 이명, 그자를 기억하는 자도 있고. 혹시 모르니, 그들도 다 처리를 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하여, 만석의 얼굴을 아는 이들을 미리 처리함이 옳았다. 익태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이 일은 절대 드러나선 안 되는 것이야. 후에라도 우리 집안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예, 무슨 말이지 알고 있습니다. 큰아버님.”

“내일 저녁 병판을 만나거라. 거사에 대해 의논하고 빠른 시일 내에 날짜를 잡아. 이명 그자가 이대로 죽어도, 무사히 일어나도 문제야. 어차피 주상이 다 알고 있다면 먼저 선수를 쳐야겠지. 내가 왕위에 올려 주었으니, 이제 내가 내려 주는 것이 맞을 테지.”

“예, 큰아버님.”

“이왕 이렇게 된 것, 다음 왕으로는 좀 더 주무르기 쉬운 아주 어린 놈을 앉혀야겠어. 수원군의 장자가 올해 몇이었지?”

“내년에 지학(志學: 15세)이 됩니다.”

한 내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한데 아무래도 대신들의 반발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들도 저들이지만, 우리 쪽 대감들의 반발도 걱정입니다. 누구보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이들입니다. 정통성을 가진 후사도 없는 상태에서, 수원군의 장자를 왕위에 올리겠다고 하면, 그들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수원군의 장자보다는…….”

피식, 거만한 비웃음이 한 내관에게서 흘러나왔다.

“괜히 우리 쪽인 것이 아니다. 한편일 수밖에 없기에 한편인 것이지. 그들에게 애초에 선택권은 없느니라. 나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이제껏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올라앉은 것인데. 그자들은 내가 설득할 테니, 넌 병판을 만나 일을 마무리 지어라.”

한 내관은 합죽선의 겉대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명했다. 검은 옻칠이 된 대나무 겉대에 자개로 감입된 박쥐무늬가 화려하게 빛났다. 그것을 소중히 쓰다듬는 한 내관의 모습을 익태의 눈동자가 은근히 좇으며 관찰했다.

“예, 알겠습니다. 큰아버님.”

다음날 익태는 이명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궁에 심어 둔 끄나풀이 전해 온 소식에 함박웃음이 나왔다. 역시 하늘은 자신의 편이었다. 오전에 들었던 편전에서 자신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던 도운의 얼굴에 익태는 줄곧 여유로운 미소로 대응했다. 이명 그자가 당장에 일어나지 않는 이상, 죽은 만석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당신께서 무슨 빌미로 나를 잡아가실 것이오.

익태는 저도 모르게 비죽 올라갔던 입술 끝을 바로 내렸지만,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노랫가락이 올라왔다. 어좌에 앉아 저리 건방지게 내려다보는 도운의 모습을 참는 것도 멀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궐한 익태는 저녁 무렵 자택을 나서 병판의 집으로 향했다. 기별을 미리 해 놓았으니, 지금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자 금세 청지기가 나왔다.

“병판께서는 안에 계시느냐?”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요.”

안채로 들어서 대청마루로 오르려던 익태는 섬돌 위에 다른 이의 것으로 보이는 태사혜를 발견했다.

“누구 다른 손님께서 와 계시는가?”

“예, 갑자기 찾아오신 손님이 계셔서, 대감마님과 담소 중이십니다.”

“그래?”

이런 중요한 시기에 누가 이리 눈치 없이 찾아왔단 말인가. 익태는 짜증이 일었다. 자신이 방문할 것이다 미리 기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손님을 내치지 않은 병판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대감마님, 도승지 영감 오셨습니다.”

곁에 선 청지기가 문을 활짝 열어 주었지만, 익태의 발은 그 자리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초로의 사내는 고개만 힐끔 돌려 익태를 맞이했다. 은은한 불빛을 내뿜는 초를 등진 병판, 안계희의 묵묵한 옆모습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왔는가?”

익태는 병판의 맞은편 상석에 앉아 유유히 차를 마시고 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숨소리에 공기마저 이지러지는 느낌이었다.

“전하께서, 이 시각에 이곳에 계실 줄 몰랐사옵니다.”

“자네야말로 이 시각에 병판 댁엔 무슨 볼일인가?”

“사적으로 병조판서대감을 뵙고자 온 것입니다.”

“사적이라…… 과인이 모르게 사적으로 병판과 은밀하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인가?”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으며 도운은 익태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올라가는 입술 끄트머리와 함께 도운의 턱도 천천히 치켜 올라갔다. 가늘게 뜬 두 눈동자에 비웃음이 한껏 매달려 있었다.

“가령, 역모 같은 것 말일세.”

비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도운의 모습에 익태는 이가 갈렸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파르르 몸을 떨던 익태는 곧 담담히 대답했다.

“역모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저 차나 한잔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래? 그럼 자리에 앉게. 병판 댁의 차가 향이 꽤 좋군.”

한 발짝 내딛기가 힘들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했다. 익태는 숨이 막힐 듯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긴장감을 물리치며 도운의 앞까지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곧 익태의 앞으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찻잔이 오른 다과상이 놓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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