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름을 비추는 새벽-17화 (17/25)

17. 각성

도운은 청조의 손을 꼭 잡고 하얀 달빛을 받으며 뜰을 산책했다. 힘없이 떨어진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한가득 날리고 있었다. 어느새 성큼 와 버린 가을에 밀려 금불초의 일 년이 벌써 끝나고 있었다. 꽃잎이 지는 모습이 아쉬워, 청조는 손으로 꽃들을 어루만졌다.

“내년에는 함께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꽃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내 너의 손을 이리 잡고 매일 함께 나올 것이다.”

“예, 꼭 그러셔야 합니다. 이리 소첩을 데리고 자주 산보 나오셔야 합니다. 내년 여름에 꽃봉오리가 올라오거든, 그때부터 소첩이 서방님을 많이 조를 것입니다. 소첩이랑 산보 나가셔요, 하고 조를 것입니다.”

“아무래도 내가 너를 더 많이 졸라야겠다.”

“예? 어인 말씀이십니까?”

“너는 나와 꽃만 보려 했느냐? 나는 너와 낙엽도 함께 밟고, 눈 덮인 절경도 보려 했다. 또 봄나물이 올라오거든 너랑 산보 나와 함께 뜯어주려 했는데. 너는 나와 여름에만 산보하려 했나 보다.”

도운의 말장난에 배시시 웃는 청조의 뺨에 볼우물이 깊게 패었다.

“또 잡초만 한가득 뽑아 넣으시려고 그러십니까? 소첩이 그것들 골라내느라 어깨가 빠질 뻔하였습니다.”

“그랬느냐? 어깨가 빠질 뻔하였어? 그럼 내가 어깨를 주물러주마.”

갑자기 어깨를 주물러주는 도운의 손길에 깜짝 놀란 청조가 저 멀리 떨어져 서 있는 궁인들의 눈치를 봤다.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사람들이 우세스럽다 할 것입니다.”

“저 멀리 서서 모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누가 본다고 그러느냐?”

“하늘이 보고 계십니다.”

미간을 좁히며 대답하는 청조의 진지한 모습에 산에서의 생활이 생각났다. 지겹고 고되기만 한 산 생활이었는데, 청조와 함께했던 그 시절이 눈물 날 정도로 그리웠다.

“왜? 임금에게 여인의 어깨를 주무르게 했다고 하늘이 벌이라도 내릴까 그러하냐? 걱정 말아라. 하늘도 금실 좋은 부부라 상을 내리실 것이니.”

결국 웃음을 터뜨린 청조의 입술에 도운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참 이상하지. 가끔 산이 무척이나 그립다. 그리도 벗어나고 싶었는데. 지금은 너와 함께 보냈던 설산이 참으로 그립구나.”

“저도 그립습니다. 소첩이 마지막으로 산을 내려올 적, 싸리문을 단단히 닫고 왔습니다. 굳게 닫힌 싸리문에 기대어 꼭 다시 돌아오겠노라, 서방님과 함께 이 문을 다시 열겠노라 굳은 다짐을 하고 내려왔었습니다.”

“그랬더냐?”

“예, 그 문은 아직도 그대로 닫혀 있겠지요? 그 생각을 하면 왠지 서글픕니다.”

“언젠가 함께 열러 가자. 내 꼭 너를 데려갈 것이다.”

“꼭 데려가 주시어요. 약조하셨습니다.”

굳게 약조하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돌아가자. 업혀 보거라. 내가 네 처소까지 업어 줄 것이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말이다. 전에 약조하지 않았느냐. 앞으로 자주 업어주겠다고.”

청조는 자신을 향해 등을 내어 주는 도운을 잡아 일으켰지만, 단단한 사내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서 업히라는 데도 그러는구나. 전에는 잘도 업히더니, 이제 와 겸양을 떠는 것이야?”

“서방님, 사람들의 눈이 있습니다. 그러다 흉잡히십니다. 이만 일어나셔요.”

“내 마누라 내가 업어준다는데 누가 내 흉을 본단 말이냐?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흉보는 것들을 모다 잡아다 볼기를 쳐 줄 테니, 그런 걱정 말고 업혀라.”

주저주저하던 청조가 멀리 줄을 서 있는 궁인들의 눈치를 보다, 주위에 넓게 퍼져 있는 내금위 군관들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저에게 등을 내보이며 굳건히 앉아 있는 도운의 넓은 등에 업히고도 싶었다. 아마 자신들이 있던 산이었다면 이런 눈치 따윈 아니 보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있는 곳은 산이 아니었다.

“어서 업히거라, 내 발이 저려 오는구나.”

청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도운의 어깨를 잡고 등에 기대었다. 등에 청조를 매달고 도운은 가볍게 일어나 걸었다.

“너는 언제나 나의 상전이다.”

“어찌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는 언제나 나의 상전이니, 언제든 업어 달라, 어깨를 주물러 달라 명하거라. 네가 명하면 나는 언제든 네 명을 따를 것이다.”

청조가 도운의 목을 꽉 당겨 안고, 그의 목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이리 다 해 주시는데, 소첩이 명을 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원하는 것이 있거든 언제든 말하거라. 그리고 잊지 말아라. 너는 이 나라의 왕보다도 높은 여인인 것을. 네 뒤에 내가 있으니 기죽지 말고 늘 당당하여야 한다.”

“예.”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청조는 도운의 목을 더욱 끌어당기고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에 닿는 청조의 말랑한 뺨을 느끼며 도운은 천천히 걸었다. 애류당에 들어, 댓돌 바로 앞까지 걸어온 도운은 그제야 청조를 내려줬다.

“내일 다시 들를 것이니, 좋은 꿈 꿔야 한다.”

“서방님도 좋은 꿈 꾸셔요.”

뜰에 남아 떠나는 도운의 뒷모습을 보는 청조의 마음이 복잡했다. 저리 노력하시는데, 누구보다 저를 아껴주시는데. 가례를 치른 날, 또다시 새벽에 깨어 울던 자신을 안고 속삭여 주던 서방님 생각이 났다. 떨고 있던 자신의 귀를 막던 따뜻한 손, 부드럽게 보듬어 주던 서방님의 목소리.

그 손길에 위로받으며 겨우 잠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청조는 몇 번 더 새벽에 깨어났다. 그때마다 도운의 커다란 손은 청조의 귀를 막아 주었다. 그가 귀를 막고 부드럽게 달래주면 그때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도운이 부드럽게 어르고 달래는 소리는 늘 똑같았다.

‘너는 나의 왕, 나의 상전. 너는 참으로 귀하고 높은 사람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누구보다 서방님을 믿고 의지하면서도 왜 자꾸 이러는 것인지, 청조는 자신이 답답하고 미워졌다. 깊은 시름에 잠을 설친 청조의 얼굴은 이튿날이 되어서도 어두웠다.

“마마, 중궁전에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중궁전에서 말입니까?”

“마마.”

지밀상궁인 곽 상궁이 다소 엄한 눈빛으로 ‘마마’라고 부르자 청조의 속이 뜨끔했다. 저보다 훨씬 연배가 들어 보이는 상궁마마님이었다. 게다가 양반 출신인 상궁에게 함부로 말을 낮추는 것이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 그런 이의 수발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송구하고 힘들어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중궁전에서…… 마, 말인가?”

“예, 마마. 어서 채비하시지요.”

중궁전에서 부른다. 가슴에 돌을 얹어 놓은 듯 무거웠다. 몇 해 만에 다시 보는 예화 아가씨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저 아가씨가 아니었다. 하늘 같은 중전마마셨다. 중궁전으로 향하는 걸음이 어찌나 무거운지, 청조는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마, 마음을 단단히 잡수소서.”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중전마마께서 마마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마마께서 가례를 올리신 지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혼례 후, 윗전을 먼저 찾아뵙고 먼저 인사를 여쭙는 것이 도리이나, 이제껏 발걸음을 아니 하셨으니 아마 그에 대한 책을 잡으실 것이옵니다. 허나 이는 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중전마마께서 여태껏 첩지를 내려 주지 않으시니, 품계가 없으신 마마께서 찾아뵙고 싶어도 찾아뵐 수 없는 것은 당연하옵니다. 허니 너무 기죽지 마십시오.”

“알겠습니…… 아니, 알겠소.”

대답을 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산에서의 기억이 청조를 기죽게 했다. 예화가 있는 교태전 전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청조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살갗이 따가웠다.

“중전마마, 애류당 여인 들었습니다.”

교태전 지밀상궁이 청조를 칭하는 말투에 곽 상궁과 막녀의 눈꼬리가 번쩍 올라갔다. 주상전하께서 당신의 은애하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친히 ‘애류당’이라는 당명을 따로 내리신 분이셨다. 하늘 아래 오직 한 분 은애하시는 분이시라, 유(㫿)라는 호(號)를 하사하시었으니 이제는 유빈마마이신 분이시다. 한데 그런 마마를 대하는 중궁전 궁녀들의 태도가 무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시 고해 주시지요.”

“그냥 기다리시게. 중전마마께서 준비가 끝나시면 알아서 부르실 것을, 예가 어디라고 이리 호들갑이신가.”

도착한 지가 벌써 일다경이었다. 하지만 입실을 허하는 중전의 말이 없으니, 청조는 그 자리에 서서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기다리게 한끝에야 입실을 허하는 중전의 말에 드디어 장지문이 열렸다. 화려하단 말로는 부족한 방이 청조의 눈앞에 펼쳐졌다.

호화롭고 아름다운 세간들은 번쩍번쩍 윤이 났다. 그 중심에 예화가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비단 당의에 금실로 수놓아진 봉황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 생생했다. 정수리 한가운데 봉황 모양을 본뜬 화려한 첩지를 중심으로 반짝거리는 머리가 곱게 빗어 넘겨져 있었고, 화려한 뒤꽂이들이 영롱하게 빛나며 용잠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그 품계가 말해 주듯 예화의 모습은 처음 봤을 때보다 한층 성숙하고 위엄 있는 자태를 풍기고 있었다. 화려한 차림새에 거만한 눈빛을 한 예화의 모습에 청조는 허리를 숙이고 읍했다. 아래로 내린 시선 끝에 예화의 고운 손이 보였다. 굳은살 하나 없는 보드라운 흰 손. 가늘고 긴 손가락에 끼워진 아름다운 쌍가락지가 손의 품격을 더욱 높였다.

저 손을 보고 있자니, 청조는 자신의 거친 손이 더욱 부끄러워졌다. 당의 아래 꽉 움켜쥔 딱딱하고 까칠한 손이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가까스로 숙였던 고개를 들자, 예화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예화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언년이가 청조를 향해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자신을 비웃는 언년이의 방자한 태도에도 청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중인이었던 자신이 한낱 여종의 다리를 주무르던 그때처럼, 청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화에게 큰절을 올린 청조는 다시 읍하고 서서 인사를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중전마마.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 올리옵니다.”

“그래, 너도 잘 있었느냐?”

“예, 마마.”

예화의 차가운 눈초리가 청조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었다.

“그래, 너는 여전한 것 같구나. 여전히 비루하고 볼품없는 것이 말이야. 그래도 여종의 다리나 주무르던 것이 예까지 왔으니, 팔자가 아주 많이 펴긴 폈구나. 주제에 감히 하늘 같은 전하를 넘보고, 이곳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참으로 건방지고 뻔뻔했었던 너의 방자함을 내 기억하고 있긴 하다만,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야.”

“……송구하옵니다.”

“내 듣자 하니, 궁에 들어오기 전 막 방사를 치른 창기들의 더러운 아랫도리를 닦아 주며 살았다고? 망측하고도 망측하기가 하 없다. 네가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 뭔 줄도 모르는구나. 그런 더럽고 망측한 일을 하며 구차하게 끼니를 이어가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이 훨씬 명예로운 일이니라. 하긴 너같이 천하고 무식한 것이 그런 고매함과 절개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지. 구차한 생으로 태어난 것이 너의 잘못은 아니다만, 너 같은 물건이 궁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내명부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다. 이 몸이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송구하옵니다.”

“허나 전하의 허물을 중전인 내가 품어야지 누가 하겠느냐. 그것이 이 나라 국모인 나의 도리인 것을.”

“황공하옵니다, 마마.”

“박 나인은 이제 그만 주무르거라.”

“예, 중전마마.”

나긋나긋한 예화의 명에 언년이가 즐거운 듯 예화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박 나인, 네 손은 어찌 이리 여물지가 못하는지. 어찌 된 것이 전혀 시원하지가 않아.”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내 어깨가 이리 결릴 때면 네가 해 주던 쑥 찜질이 간절히 생각나곤 했다.”

“그러셨사옵니까?”

“그래, 온몸이 노곤해지는 것이 매우 시원했었지. 내 그것이 종종 생각나더구나.”

예화가 언년이를 향해 은근히 미소 짓자, 언년이가 신이라도 난 듯 급하게 방을 나섰다.

“내 오랜만에 너를 보았으니, 그토록 기다리던 그때 그 기분 한번 느껴보면 참으로 좋을 것인데.”

“그것이 무슨…….”

청조가 당황하여 잠시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언년이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물과 이것저것을 챙겨 들고 금세 방으로 돌아왔다.

“준비 다 되었사옵니다, 중전마마.”

“이것이 무엇이냐?”

뜨거운 물을 바라보던 예화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며,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언년에게 물었다.

“중전마마께서 원하실 듯하여 이년이 쑥 찜질 준비를 미리 대령해 놓았습니다.”

“박 나인, 네가 손은 여물지 못하여도 윗전 기분은 이리 잘 맞추는 면이 있지. 내 명을 내리지 아니하여도 늘 네가 먼저 알아서 살피는구나.”

입으로는 언년을 칭찬하면서, 예화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청조만을 바라보았다. 비참함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네 주제를 알아라.’ 그리 알려 주기 위함이었고, 진정 교태전의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 주고 싶었다. 허나 청조의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저 비천한 것은 전에도 그랬었다. 산에서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라 명할 때도, 언년이의 다리를 주무르라 명할 때도 그랬었다. 모든 걸 감내한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리 앉아 묵묵히 일만 했었다. 비웃음이 가득하던 예화의 얼굴이 점점 노기로 일그러졌다.

“뭐하고 서 있느냐. 내 몸이 곤하니 어서 발을 주무르라 하지 않느냐.”

“송구하오나 그리는 못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께서 전과 같은 신분이 아니시듯, 소첩 또한 전과 같지가 않사옵니다.”

“소첩? 네까짓 게 감히, 첩지도 못 받은 것이 뭐라? 소첩? 이런 건방진 년을 보았나!”

자신을 소첩이라 지칭하며 차분히 대답하는 청조의 모습에 예화가 언년을 바라봤다. 예화의 눈짓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인 언년이 거만하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게 뭐하고 서 있는 건가! 내 그리 일렀는데도 또 우리 귀한 중전마마를 기다리게 하다니. 엉덩이가 무거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쩜 그리 똑같은가 말이지. 어서 움직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청조가 눈을 부릅뜨고 언년을 노려보았다.

“애류당 여인은 정녕 매질을 당해 봐야 말귀를 알아듣는 겐가? 중전마마 기다리시는 거 안 보이시오? 뭐하고 서 있는 것이오! 냉큼 마마의 버선부터 벗기질 않고!”

발칙한 언년의 언사에 결국 장지문이 열렸다. 처소 안으로 뛰어들어온 곽 상궁과 막녀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읍소하기 시작했다.

“중전마마,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는 부당한 처사이십니다. 이미 전하의 승은을 입으셨고, 가례를 치르신 분이십니다. 전하께서 친히 유(㫿)라는 호(號)까지 내리신 유빈마마이시옵니다. 한데 어찌 나인 따위가 저리 불손한 언사로 마마를 욕보일 수가 있사옵니까?”

“뭐라? 내 교전 나인이 누구를 욕보였단 말인가? 전하께서 호를 내리셨다 하나, 내가 첩지를 내린 적이 없거늘. 누가 감히 마마라는 말이냐! 저것은 일개 중인의 여식일 뿐이나, 내 교전 비인 박 나인은 궁녀로서 이미 정팔품의 품계를 갖춘 엄연한 궁관이다. 품계도 없는 한낱 중인인 저것보다야 더 높은 신분인 것은 자명한 일. 그런 박 나인의 언사를 꼬투리 삼아 곽 상궁이야말로 지금 이 몸을 욕보이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옵니다, 중전마마.”

“아니라면, 아니라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네가 지금 누구에게 대거리를 하는 것이야! 저 천한 것이 시키던가?”

“중전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이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법도? 허! 너야말로 내명부의 법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이 궁에 산 지 몇십 년이나 된 늙은 것이 아직도 법도에 관해 그리 깜깜하니, 무식한 저것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느냐! 그러니 저것의 행실이 저리 방자하고 무례한 것이 아닌가! 감히 법도를 무시하고 윗전이 하는 일을 따지고 나서는 곽 상궁이나, 주제도 모르고 하늘 같은 곤전의 명을 거역하는 네년이나 교육을 엄히 받아야겠구나. 내 오늘 친히 내명부의 법도를 알려 주고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다. 여봐라!”

예화의 고함에 방문이 활짝 열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중궁전 나인들이 달려들어 곽 상궁과 막녀를 끌고 나갔다. 처소에서 끌려 나오는 곽 상궁의 모습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애류당 나인들이 당황하여 작게 비명을 질렀다. 너른 뜰에 패대기쳐진 곽 상궁과 막녀에게 나인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각자 얇은 대나무 가지로 만든 회초리를 들고 두 여인의 몸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청조를 부른 티가 너무나도 역력했다. 얇은 대나무 가지라고는 하나 그 탄성이 어찌나 좋은지, 닿는 곳마다 살이 베이는 것만 같은 고통을 남겼다. 자비 없는 매타작에 신음을 터트리는 여인들을 보자마자 청조는 허리를 굽히고 읍소했다.

“중전마마, 소인이 잘못하였나이다. 부디 저들을 풀어 주시옵소서. 하겠습니다. 하라는 대로 다 할 터이니 부디 저들을 풀어 주시옵소서!”

읍소하는 청조를 향해 거만하게 웃던 예화는 시선을 돌려 회초리를 맞고 있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잔인한 미소가 입술 끝에 걸려 있었다.

“되었다. 내 너의 찜질보다 이 광경이 훨씬 시원하구나.”

“중전마마, 제발 부탁드리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용서해 주시옵소서! 소인이 잘못했나이다!”

청조는 결국 월대 아래로 내려가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땅바닥에 손을 대고 무릎을 꿇은 후, 월대 위에 서서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예화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중전마마, 제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소인이 잘못했사옵니다!”

“네 잘못이 무엇이냐?”

“소인이…… 감히 하늘 같은 곤전의 명에 토를 달았습니다.”

“또?”

“소인이, 소인이 주제를 모르고 건방지게 굴었습니다.”

“내 일찍이 산에 올랐을 적, 너에게 주제를 잘 알고 천명에 따라 살아라 그리 일렀지. 아직도 네 천명이 무엇인지 모르더냐! 모르겠거든 똑똑히 기억하거라. 궁에서나 산에서나 너의 존재는 조금도 다르지 않음이야. 내 아녀자로서 또 이 나라의 지엄한 국모로서, 전하께서 사내의 욕구를 해결하고자 천한 네년의 몸뚱이를 사용하는 것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무엇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실 이 몸이 내훈을 열심히 익히고, 또한 덕을 아는 사람이라 너 같은 것을 포용해 주는 것임을 늘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 은혜를 착각하고 또다시 오늘과 같은 건방을 떨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이런, 그 표정은 무엇이냐? 이런 말을 듣는 것이 고까운 것이냐?”

예화의 으름장에 청조가 더욱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아니옵니다, 절대 아니옵니다. 소인 중전마마의 은혜에 감읍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저들을 풀어 주시옵소서.”

“고깝더라도 어찌하겠느냐, 처음부터 너의 용도가 사내의 욕구 해소용 그것밖에 되질 않는데. 어찌 되었든 이왕 궁에 들어왔으니, 천한 네 본성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 또 조심하거라.”

자신에게 무릎 꿇은 비참한 모습의 청조를 즐기던 예화는 바닥을 짚고 있는 청조의 거친 손을 비웃으며 혀를 찼다.

“쯧, 자고로 여인의 품성과 고귀함이란 손이 말해 주는 것이다. 네 손을 보거라. 여인의 손이 그것이 무엇이냐. 천한 무수리의 손도 네 손보다는 보드랍고 어여쁘겠구나.”

자신의 거친 손을 지적하는 예화의 비아냥거림에 청조는 땅을 짚고 있던 두 손을 겹쳐 잡았다. 두 손을 꽉 그러쥐며 자신의 거친 손을 가리는 청조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런 비루한 외양으로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말고, 네 전각에 꼭 틀어박혀 눈에 띄지 말고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알아듣느냐?”

“……예, 중전마마.”

“모두 매질을 멈추고, 박 나인은 그것을 가져오너라.”

언년이가 새침한 표정으로 예화에게 돌돌 말린 비단 두루마리 족자를 올렸다. 돌돌 말려 있는 그것이 불결하다는 듯, 예화는 손끝으로 족자를 잡았다. 그리고 월대 아래 무릎 꿇고 엎드린 청조의 앞으로 손끝으로 잡은 그것을 휙 던졌다.

“자, 가져가거라. 첩지다.”

청조의 앞으로 뚝 떨어진 첩지가 바닥을 구르며 후루룩 풀려 버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첩지를 바라보던 청조는 눈물을 꾹 참았다.

“박 나인.”

“예, 중전마마.”

“내 첩지를 내렸으니, 이제 빈에게 예를 올리거라.”

“예, 중전마마.”

언년이가 바닥에 엎드린 청조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경하, 크게 경하드리옵니다, 유빈마마.”

허리를 살짝 굽혔다 일어나는 언년이의 얼굴에 비웃음이 한가득 퍼져 있었다. 경하 드린다 허리를 잠시 굽혔지만, 누가 봐도 청조가 언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양새였다.

“너희들은 뭐하느냐? 어서 예를 올리지 않고.”

중궁전 나인들이 차례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청조에게 예를 올렸다.

“경하 드리옵니다, 유빈마마.”

청조는 흙바닥에 풍성하게 퍼진 비단 치맛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비참함에 몸이 떨렸다. 비단옷에 화려한 머리 장식을 걸치고 있지만, 자신의 거친 손은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거친 손은 곧 자신의 모습이고 처지였다. 자신의 초라함과 비루함이 너무나 적나라하여 더욱 비참했다. 키득거리는 중궁전 나인들이 차례로 모다 예를 올릴 때까지 청조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내 모자란 이에게 친히 가르침을 주고자 수고하였더니, 몸이 몹시도 곤하구나. 이만 오수에 들어야겠다.”

이윽고 예화가 안으로 사라지자 발을 동동 구르던 애류당 나인들이 바삐 다가와 상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부액을 받으며 일어나던 청조가 잠시 비틀거렸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너무 억울합니다, 마마. 중전마마께서 어찌 이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억울하다 울먹거리는 궁녀들의 목소리가 청조의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못나서, 저 같은 여인을 모시게 된 죄 없는 나인들이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하였다.

“곽 상궁과 막녀를…… 어서…….”

“예, 마마.”

나인들이 서로 도와가며 막녀와 곽 상궁을 업고 전각을 나섰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청조는 보료에 앉아 눈물을 참았다.

“혹 전하께서 오시거든, 오늘 내 몸이 미령하여 모실 수가 없다 전해 주시오.”

“마마, 그러지 마시고 전하께…….”

“그리 전해 주시오. 오늘은 몸이 곤하여 일찍 침수에 들고 싶습니다.”

“예, 마마.”

나인들이 물러가자 청조는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며 둔탁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전각에 틀어박혀 있던 청조는 다음날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가는 나인들에게 막녀와 곽 상궁의 안부만 겨우 묻고, 그들에게 가보지도 못했다. 마음이 너무 죄스럽고 부끄러워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보료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청조는 하루를 보내고 그저 또 긴 하루를 보냈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전각에 들어앉아 청조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허나 진정 웅크리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어둑해진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청조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나인이 서안 위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서안 위에 놓인 하얀 봉투에 청조가 의문스런 시선을 나인에게 던졌다.

“마마, 전하께서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전하께서요?”

“예.”

대답을 한 나인은 곧이어 서찰 옆에 비단 주머니를 하나 내려놓았다. 꽤 묵직한 주머니였다. 망설이는 손으로 주머니를 열어 보자 안에서 화려한 삼작노리개가 나왔다. 하늘색과 노랑, 붉은 칠보로 정교하게 꾸며진 꽃잎 모양의 띠돈을 중심으로 세 갈래로 나뉜 매듭에 각자 패물들이 달려 있었다.

첫 번째 패물은 향납이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은에 커다란 청강석과 백옥으로 장식된 향납은 화려하고도 호화로웠다. 띠돈 중앙에 연결된 치자색 매듭에는 엄지손톱만 한 진주와 다홍빛 비취옥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나비 한 쌍이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청색 매듭을 따라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술 사이에 달려 있는 패물은 청조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옛날 서방님을 지켜 주셨다던 유모가 남긴 물건이고, 자신을 위험에서 지키라며 서방님께서 정표로 주신 물건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휘둘렀다, 그 끝에 피를 묻힌 물건이었다. 은장도를 보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도 눈물이 흘렀다. 눈을 깜박이며 겨우 눈물을 참아낸 청조는 도운이 보낸 서신을 꺼내 펼쳤다.

눈처럼 하얀 바탕에 점을 찍어 놓은 듯, 새카만 검은 먹물이 한지 중앙에 단 한 글자를 찍어 놓았다.

‘忠(충)’

평소 도운의 성정을 말해 주듯 강하고 거침없는 필체였다. 글씨를 보는 순간 도운의 목소리가 청조의 머리에서 울렸다

‘너는 나의 상전, 나의 왕이다. 잊지 말아라. 나는 너의 충실한 신하이다. 그것을 절대 잊지 말아라.’

청조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었다. ‘암캐, 욕정받이.’ 새벽마다 들었던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제야 진정 알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서방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시작은 서방님의 목소리였을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저의 목소리였다.

저 자신을 스스로 그리 부르고 있었다. 마음은 다 용서했다 하면서도 몸은 자꾸만 옛 상처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궁에 들어와 주눅 든 마음이 산에서 겪었던 옛 상처를 자꾸 상기시켰다. 마음 깊은 곳에 굳은살처럼 박혀 버렸던 아픔과 상처가 자꾸 서러웠다. 누구에게도 서럽다 말하지 못했고, 누구도 괜찮다고 보듬어 주지 않았었다. 굳은살로 깊게 박인 상처가 이제는 뾰족한 가시가 되어 자신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다.

첩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하고선, 마음속 깊이 제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서방님을 누구와도 나누어 갖고 싶지 않았고, 오직 자신만이 그의 한 사람이고 싶었다. 저의 거친 손이 부끄러웠고, 다른 여인과 대등할 수 없는 저의 신분이 한탄스러웠었다.

청조는 도운의 말을 곱씹고, 곱씹으면서 울었다. 전혀 곱지 않고 거칠기만 한 저의 손과 서신에 쓰인 글자를 번갈아 보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스스로를 지키느라 휘둘렀던 은장도를 보듬으며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울음이 멈추어 갈 때쯤, 청조의 얼굴은 변해 있었다. 흐르던 눈물이 다 말라 갈 때쯤, 청조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밖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마마.”

“가서 수틀을 준비해 오너라. 수를 놓고 싶구나.”

“예, 곧 대령하겠습니다.”

방을 나서던 나인의 머리가 갸우뚱거렸다. 늘 미안한 듯, 아무 명령도 하지 못하던 이가 변한 것을 느꼈다. 저희 나인에게조차 하대를 못 하던 자신감 없던 마마였다. 한데 명을 하는 데 있어,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궁의 생활이야 윗전을 잘 만나야 그 팔자가 펴는 법이니, 어쨌든 반갑고 다행스러운 모습이었다.

나인이 냉큼 준비해 온 수틀 앞에 앉아 청조는 정성스럽게 수를 놓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실로 오랜만에 잡아 보는 수틀인지라, 잠시 어려움이 있었지만 곧 수월하게 바느질을 이어갔다.

바늘이 한 번 수틀을 오갈 때마다 자신의 다짐과 눈물을 담아 넣었다. 한 땀을 뜰 때마다, 서방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화려한 모란꽃과 원앙 두 마리가 서로 얽히며 하나의 글자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신분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서방님을 은애하는 저의 마음 하나만을 드릴 것입니다. 오직 서방님만 보고 살 것입니다. 서방님께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왕이셔도 좋고, 가장 천한 백정이어도 좋고, 대풍창 병자여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서방님의 안해로만 살 것입니다. 서방님의 안해로서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살 것입니다.

자신은 이 나라 왕을 신하로 둔 여인, 왕보다 높은 여인, 이 세상 누구보다도 높고 귀한 여인이었다. 이제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것이다. 저 자신에게조차 기죽지 않을 것이다. 굳은 다짐이 바늘을 타고 글에 녹아들었다.

청조는 사흘을 꼬박 걸려 글자를 완성하고는 작은 영견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완성된 영견에 화려하게 피어난 단 한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愛(애).

청조는 완성된 영견을 나인을 통해 도운에게 보냈다. 이 글자의 의미에 기꺼워하실 서방님 생각만으로 행복했다. 그때 입실을 고하고 곽 상궁이 안으로 들었다.

“더 쉬지 않고 어찌하여 벌써 들었는가?”

“우선하옵니다, 마마. 보기보다 심한 것은 아니옵니다.”

“그래도, 좀 더 쉬다 오게. 내 궁에 들어오기 전 의금부에 끌려가 태형을 당해 보아 잘 아네. 그것이 쉬이 참아지는 것도, 쉬이 낫는 것도 아니네.”

“걱정해 주시는 마마의 마음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허나 태형처럼 심한 매질을 당한 것은 아니니 근심을 마옵소서. 그보다 중궁전에서 마마를 찾으신다 하옵니다. 어찌할까요? 차라리 와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중전마마께서 또 무슨 트집을 잡으실지…….”

“괜찮으니 앞장서게.”

청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당당히 나섰다. 밖으로 나선 청조의 당의 위에 드리워진 호화로운 삼작노리개가 화려하게 빛났다. 나인들은 또 무슨 해코지를 당할까 안절부절못하였으나, 자신들의 상전은 되레 평안한 듯 보였다.

청조는 담담한 표정으로 중궁전 나인의 안내를 받아 아름다운 연못이 보이는 부용정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연못 한가운데 만들어진 작은 섬이 보였다. 그 섬 한가운데 심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울긋불긋한 나무들 사이에서도 홀로 푸르름을 뽐내며 물 위에 유유히 떠 있는 듯했다.

아름다운 연못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려한 십자 모양의 누각에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 청조에게까지 들렸다. 나이가 지긋한 여인부터 젊은 여인까지 모다 조신한 척, 음전한 척, 고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청조를 비웃고 있었다.

정자 아래 도착한 청조는 여인들이 저를 조롱하며 웃고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들의 수다를 들으며 삼작노리개에 달린 은장도를 쓰다듬었다.

나의 가치는 나 스스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은장도에서 손을 뗀 청조는 이윽고 돌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청조가 등장하자 열댓 명의 여인들이 입을 다물고 입술 끝을 치켜 올렸다. 묘한 웃음을 입에 걸고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들은 새로운 왕의 여인을 은근히 훑으며 깔보았다.

“중전마마, 문안인사 드리옵니다. 평안하시옵니까?”

“평안하네. 앉으시오.”

“황공하옵니다, 마마.”

청조가 마련된 자리에 다소곳이 앉자마자 언년이 다가와 준비된 다과상을 앞에 놓아 주었다. 다과상을 놓아주던 언년은 청조만 들리도록 작게 ‘쿡’ 비웃는 소리를 내고는 재빨리 일어섰다. 자리에 앉는 청조의 모습을 바라보는 예화와 정경부인들의 얼굴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내 여기 모인 분들에게 그대를 소개시켜 주고자 이 자리에 불렀네.”

“예, 마마. 감읍하옵니다.”

예화가 누각에 둘러앉은 여인들을 한 명씩 소개해 줄 때마다 여인들은 가벼운 묵례로 청조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빈은 그 태생이 미천하여 배움이 짧으니, 그 말과 행동이 가볍기가 일상이다. 하여 이 중전이 그대에게 예와 법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실 정경부인들을 모셔 이 자리를 마련하였다. 모다 내조와 공양으로 바쁘신 분들이나, 금일 모자란 그대를 채워주고자 이리 발걸음을 하신 것이다. 감읍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다해 배워야 할 것이야.”

“예, 중전마마. 명심하겠사옵니다.”

조신하게 대답하는 청조의 모습에 예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호된 맛을 한번 보더니 이제야 주제를 알고 조금은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 다른 여인들까지 불러 놓고, 저것을 망신 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미흡한 소첩에게 가르침을 주신다니, 참으로 영광이고 감읍할 따름입니다. 허나, 기본적인 예법도 모르는 이들에게 무엇부터 배워야 할지 소첩이 참으로 모르겠사옵니다.”

“무어라?”

“소첩, 태생이 여기 계신 분들께 다다르지 못함은 사실이오나, 이제 내명부 정일품의 첩지를 받은 빈이옵고, 왕실의 사람이옵니다. 외명부의 품계가 아무리 높다 한들 어찌 내명부의 위에 있다 하겠사옵니까. 한데 소첩이 이 누각에 올라섰을 때, 이 몸에게 예를 지키신 분이 단 한 분도 아니 계셨습니다. 이는 내명부와 외명부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그 수장이신 중전마마까지 업신여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까? 신첩, 그 태생은 미미할지언정 윗전에 대한 기본적인 예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사옵니다.”

청조의 조용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말에 잠시 정적이 흐르는 사이, 멀리서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말씀 올린 대로 이 몸이 이제 내명부 정일품 빈입니다. 한데 그대들은 어찌 자리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가 이 말이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또한, 아무 사심 없고 자애로운 눈빛이었다. 청조는 말을 마치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자신을 멀끔히 쳐다보는 여인들을 둘러보았다. 청조는 여전히 당황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들에게 뽀얀 웃음을 지었다.

“이 몸이 친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씀을 드렸는데도, 그대들은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오? 아니면 이 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것이오?”

말간 얼굴로 은근히 자신들을 비꼬는 청조의 말에 여인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하였다. 허나 여인의 말에 어긋남이 없으니, 이윽고 이를 악문 여인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청조에게 허리를 조금 굽혔다.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리는 여인들을 바라보는 청조의 미소는 자애로움에 가까웠다.

억지로 허리를 굽혀 짧게 예를 올린 여인들이 그만 자리에 앉으려 하자 또다시 청조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 몸이 아직 앉아도 좋다 허하질 않았는데, 그대들은 또 예법을 어기시는 것입니까? 지적을 당한 지가 언제라고 벌써 또 예법을 어기십니까? 그대들에게 내훈을 가르치신 어머니들께서 따님들의 모습을 참으로 부끄러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맑은 종소리처럼 울리는 말에 여인들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허나 당의 아래 감춰진 손들은 치욕감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계속된 청조의 불손한 태도에 예화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 앞에서 네가 지금 뭐하는 짓거리냐! 감히 이분들이 뉘인 줄 알고 그리 건방을 떠는 것이야!”

“신첩은 윗전으로서 내명부와 외명부의 예법에 관해 가르침을 주고자 함이옵니다. 윗사람을 맞이하는 아랫사람의 예에서,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품성과 소양이 나오는 것이 아니옵니까? 중전마마께서도 일전에 웃전에 대한 공경과 기강을 소첩에게 강조하셨으니, 소첩 역시 중전마마의 큰 가르침에 따라 배운 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옵니다.”

“뭐라? 헛, 웃전? 네까짓 게 그깟 첩지 하나 받았다고 뭐라 되는 줄 아느냐? 여기 자리하신 부인들은 모다 정경부인들이시다. 정일품이신 고매한 아버지들의 씨를 받아 정경부인이신 어머니들의 태를 타고 태어나셨다. 부군들 역시 정일품 되시는 이 나라의 조정 신료들이시다. 그런 분들에게 너 같은 비천한 태생이 감히…….”

예화의 호통을 듣던 중, 청조가 거친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청조의 웃음에 예화는 역정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네가 지금 곤전의 말씀에 웃는 것이냐! 이런 발칙한 것을 보았나! 뭣들 하느냐! 이 발칙한 년을 당장 끌어내라! 내 오늘은 기필코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허나 중전마마의 말씀이 소첩을 웃게 하였사옵니다. 생각을 해 보시옵소서. 저들의 어머니가 정경부인이옵고, 아버지와 부군이 정일품 대감들인 것을 소첩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사옵니까? 소첩이 도통 알 수가 없사옵니다.”

“뭐?”

“부군들의 품계가 아무리 높다 한들, 아버지의 품계가 아무리 높다 한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이옵니다. 소첩의 지아비께서 감히 그 품계를 따질 수 없는 무품, 만인지상이신 이 나라의 왕이신데요.”

“뭐…… 뭐라?”

“그대들의 부군이 이 몸의 부군이신 전하보다 높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만 자리에 앉으셔도 좋습니다.”

여유로운 청조의 말에 그 누구도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여인의 말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여인의 신분이야 그 부군을 따라가는 법, 그 누가 정일품의 첩지를 받은 왕의 여인보다 높다 하겠는가. 비천한 출신의 후궁에게 주제를 알려 주고자 만든 자리에서 도리어 자신들의 주제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한미한 출신의 작은 여인이었다. 그런 출신의 여인이 감히 왕실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이 고까웠었다. 그 고까운 여인이 어수룩하고 주눅 들어 중전마마에게 호되게 수모를 당한 지가 바로 며칠 전이라 했다. 혼자 보기 아까웠던 광경이라 떠들던 중전마마의 호언에, 금일 여인이 받을 수모가 은근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여인을 골려 줄 생각으로 일부러 사방이 트인 누각에 모였었다.

저 작은 여인이 받을 수모를 모두에게 보여 주려 함이었다. 주위를 지키는 많은 이에게 모다 보여주려 함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수모가 낱낱이 공개되었다. 가장 비천한 신분인 무수리부터 시작하여 나인, 상궁, 게다가 주위를 지키는 금군들까지. 창피함에 얼굴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흥, 누구보고 감히 부군이라 하느냐. 네 본분이 무엇인지 잊었느냐? 네가 산에 오른 이유를 벌써 잊었느냐! 욕정받이로 산에 오른 더러운 창기년 주제에 어디서…….”

“마마께서 말씀하시는 저의 본분이라는 것이 전하와의 합방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한시도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허나 합방이라는 것이 어찌 사내의 욕정만을 해소하는 일이겠사옵니까. 그것은 서로를 바라보며 은애하는 이들끼리 운우지정을 나누는 일입니다. 구름이 녹아 비를 내릴 정도로 서로를 애모하고 정을 통하는 일이니 응당 서로에게 기쁨이요, 무한한 환희입니다. 또한, 부부의 정을 통하여 은애하는 이의 자손을 생산하고 어머니가 되는 일입니다. 이는 비단 소첩의 본분만이 아니라 모든 아녀자의 도리요, 본분이고 기쁨이지요.”

청조는 조신하게 말을 한 후, 양쪽으로 나뉘어 서 있는 정경부인을 쭉 바라보며 기품 있는 미소를 띄웠다.

“여기 계신 부인들께서는 부군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자신들을 스스로 욕정받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것은…….”

누구도 대답을 못 하는 가운데 오직 한 여인이 겨우 말을 더듬다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맑은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청조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채근했다.

“그렇지 않다면 은애하는 이와의 합방이나 자손을 생산하는 일까지 모두 창기에게 맡기십니까? 가감 없이 대답을 해 보세요. 이 몸이 누각을 오르기 전까지, 그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담장을 넘어갈 정도로 크시던 그대들입니다. 한데 어찌 이리 대답들을 못 하십니까.”

청조의 물음에 누구도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서 있었다. 자손생산이 주는 말에 더욱 충격을 받아 대답할 수 없었다. 정녕 이 여인이 왕자라도 생산한다면…… 다음 보위에 오를 왕의 생모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여인의 말대로 현재 왕은 지아비요, 후세의 왕은 아들이 되는 셈이었다.

“당연히 중전마마께서는 운우지정의 행복과 기쁨을 모르실 것이옵니다. 서로 은애하는 남녀가 몸을 섞는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떨림이요, 또 몸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환희를 느끼는 것이옵니다. 허나, 중전마마께서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알 길이 도통 없으셨겠지요.”

“뭐라! 네년이 지금 그 발칙한 세 치 혀로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국혼을 올리신 지가 두 해가 넘었음에도, 중전마마께선 아직 제대로 된 동뢰를 치르시지 못하셨다지요? 그러니 아직 남녀 간의 진정한 합방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뭐…… 뭐?”

“허나 동뢰를 치르지 못한 것이 어찌 중전마마의 잘못이겠사옵니까. 중전마마의 잘못이 결코 아님을 소첩, 물론 잘 알고 있사옵니다. 모다 이해하옵니다.”

허리를 숙이고 서 있던 정경부인들의 당의 아래 손들이 이제는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흥분하여 부르르 떠는 중전마마 앞에서 너무나 고고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작은 여인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오직 유(㫿), 세상에 오직 단 하나의 정인이고 은애하는 지어미라 전하께서 직접 내려 주신 이 사람의 호입니다. 지난 두 해 동안, 전하께서는 순정을 모다 바친 이 사람을 기다리시며 몸과 마음의 지조를 지켜 오신 분이십니다. 마마께서 중전의 자리에는 있으시나 전하께서 은애하시는 지어미는 오직 유빈인 이 사람뿐이란 말씀이옵니다. 그러니 어찌하겠사옵니까? 마마께서는 중전의 자리만 굳건히 지키고 계시옵소서. 덕이 높은 백성들의 국모로 사시며 걱정을 내려놓으시옵소서. 중전마마께서 그리 천하다 하시는 지어미의 도리는 이 사람이 다 알아서 하겠사옵니다.”

“이년이…… 이년이 진정 실성을 하였구나! 감히! 뭣들 하는 것이냐! 이년을 당장 끌어내라!”

얼굴에 피가 몰릴 정도로 소리를 치는 중전의 명에도 청조는 유유자적 차를 들어 입에 댔다. 청조의 당당함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청조의 고운 아미가 살짝 일그러졌다.

“차가 식었구나. 언년이, 아니 이제 박 나인이라 했던가? 게서 무얼 하고 서 있느냐. 어서 새 차를 내어 오지 않고.”

“예? 예, 마마.”

엄한 청조의 명에 당황한 언년은 말을 더듬었다. 얼결에 식은 차를 물리고, 따뜻한 차를 청조의 다과상에 올려 주었다.

“어찌 그리 엉덩이가 무거우냐. 내 일찍이 산에서 조기를 찾아대는 너의 눈치 없음을 알아보았다만, 윗전의 심기를 잘 살피어 모자람이 없도록 먼저 신경 쓰는 것이 아랫사람의 도리가 아니더냐. 중궁전 아랫것들이 이래서, 어디 중전마마의 심기가 하루라도 편안하시겠느냐? 앞으로는 윗전을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알아서 행해야 할 것이다.”

청조의 부드러운 질타에 언년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중전마마의 시비인 저에게 윗전 흉내를 내는 청조가 참으로 고까웠다.

“왜 대답이 없느냐?”

“……예, 유빈마마. 명심하겠사옵니다.”

예화가 눈이 빠질 듯이 청조를 노려보고 있어도, 정경부인들이 일식경째 자리에 서 있어도 청조는 홀로 차를 음미하며 부용전의 경치를 즐겼다. 이윽고 차를 다 비운 청조가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이만 물러가야겠습니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니 정경부인들의 가르침은 다음에 받는 것으로 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 말씀 올리기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이 몸을 기다리고 계실 터입니다. 하여 더 이상 지체하기에 어려움이 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청조는 저를 노려보기만 하는 예화를 향해 곱게 미소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를 다하며 허리를 굽히는 청조의 화사한 당의 위에서 삼작노리개가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누각을 나서던 청조는 시선을 돌려 아직도 자리에 서 있는 여인들을 둘러봤다.

“다음에는 제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이 부용전만큼 넓지는 않지만 이 사람의 전각 뒤뜰에도 꽤 아름다운 연못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 사람을 기다리시며 두 해 전부터 특별히 준비해 두신 아름다운 정원이 보시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가을 정원의 향취를 함께 즐기고 싶으니 거절하지 마시고 꼭 들러 주세요. 전하께서도 크게 기꺼워하시어 다과를 내어 주실 것입니다. 대전 생과방 나인들의 솜씨가 즐기기에 그만하니 입에 맞으실 것입니다. 그때 오시거든, 이 사람에게 예법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주세요.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예…… 예, 불러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유빈마마.”

“가, 감읍하옵니다, 유빈마마. 살펴 가시옵소서.”

억지로 웃으며 한껏 허리를 굽히는 여인들을 뒤로하고 청조는 댓돌에 놓인 운혜를 신고 돌계단을 사뿐히 내려왔다. 한 무리의 궁인들을 당당히 이끌고 걸어가는 청조의 모습이 저 멀리로 멀어져 갔다. 그제야 정경부인들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넋이 빠진 얼굴들로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중전의 눈치를 봤다. 파르르 떨리는 숨을 내쉬는 중전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요동치고 있었다.

중전의 두 눈 가득 담긴 독기에 눈치를 보던 여인들이 하나둘 부용전을 빠져나와 자택으로 돌아갔다. 진정한 내명부의 실세가 누구인지, 가마를 타고 자택으로 향하는 여인들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궁인들을 이끌고 꼿꼿한 걸음으로 앞장서던 청조는 처소로 돌아오자 쓰러지듯 보료에 앉았다. 내심 담담한 척했지만, 치마 속 두 다리가 어찌나 떨렸는지, 당의 아래 놓인 제 거친 손이 얼마나 축축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청조는 곽 상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잘하시었습니다, 유빈마마.”

“제가 정녕 잘한 것입니까?”

“예, 잘하셨습니다. 이제 저들이 더 이상 마마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전하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더욱 모질게 다잡으셔야 하옵니다.”

곽 상궁의 말에도 청조의 마음은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말에는 독이 있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말에는 독이 있어 사람을 병들고 아프게 한다던 말씀. 말이 담고 있는 독에 중독된 이들에게는 아무 약방문도 내릴 수 없다던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며 청조는 눈을 감았다.

예, 압니다, 아버지. 말에는 흉악한 독이 있습니다. 그 독에 못난 여식이 많이 아팠습니다. 또한 오늘 저의 독이 다른 이들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독이 이번에는 아픈 저를 고쳐 주었습니다. 아버지, 못난 이 여식이 나아야 저의 서방님께서 웃으십니다.

괴로운 듯 잠시 눈을 감은 청조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청조는 곧 세웠던 무릎을 내리고 어깨를 당당히 폈다. 맑게 떠진 눈동자가 곽 상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랏간에 일러 낮것상을 준비하지 말라 이르게. 전하께서 필시 나를 찾아 애류당에 발걸음하실 것이네.”

“알겠사옵니다, 마마.”

조용하면서도 힘이 들어간 청조의 명에 곽 상궁은 기쁜 듯 고개를 숙여 대답하고 처소를 나섰다.

* * *

전각에 들어서던 도운은 너른 마당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청조의 모습을 발견하곤 미소 지었다. 금박이 화려하게 박힌 우아한 당의 위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삼작노리개가 눈을 즐겁게 했다. 청조의 코앞까지 다가온 도운은 자신이 선물한 삼작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나와 기다리고 있었느냐?”

“예, 지금쯤 오실 줄 알고 소첩이 얼른 나와 있었지요.”

“그랬느냐?”

“예, 서방님과 함께 소풍 나가고 싶어 소첩이 직접 도시락을 준비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풍을 가고 싶다는 말에 도운은 아무 말 없이 청조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가자.”

함께 거니는 두 연인의 뒤로 궁인 무리가 줄을 길게 이어 따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 두 마마의 모습은 서로가 너무나 정다웠다.

“중전마마께서 산에 오르셨을 적, 서방님과 함께 단풍을 보러 소풍을 가셨지요. 그때 초가를 나서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잘 다녀오시라 인사하는 저를 한 번만 뒤돌아봐 주기를 간절히 바랐었습니다.”

“그때는 너를 돌아보기가 겁이 났다. 뒤돌아보는 순간, 나를 잃을 것 같았거든. 그때 뒤돌아보지 않은 것이 너에게 많이 미안하다.”

도운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당의 아래 감춰진 청조의 손을 빼내어 자신의 손에 꼭 쥐었다. 여전히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이었다.

“앞으로 당의를 없애 버려야겠다.”

“예? 당의를요?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네가 자꾸 당의 아래로 손을 감추니, 이리 손 한번 잡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냐. 앞으로 여인들은 궁에서도 저고리만 입도록 내가 법도를 바꾸어야겠다.”

“예?”

청조가 웃음을 터트리자 도운도 따라 미소 지었다. 둘은 정답게 손을 꼭 쥐고 다시 길을 걸었다.

“소첩은 손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산에 오르신 중전마마의 고운 손을 본 순간부터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아니라 투기인 듯합니다. 중전마마의 곱고 아리따운 모습과 고귀한 신분을 부러워한 것 같습니다.”

잠시 멈춰선 도운은 청조의 두 손을 들어 손바닥에 차례로 입을 맞추어 주었다.

“기실, 그보다는 서방님의 옆자리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중전마마를 부러워하였습니다. 주제를 알고 순응하며 살겠다 하면서도, 아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곁자리가 너무도 탐이 났었습니다. 오직 저만이 서방님의 여인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서방님께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간절히 원할 때마다 네 주제를 알아라, 서방님께서 소첩의 몸에 남긴 상처가 호통을 치는 듯했습니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아프고, 또 비참한 날들이었습니다. 너무 듣기가 괴로운 말들이었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잘못했다. 너에게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어.”

“이제는 진정 괜찮습니다.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나, 절대 잊지는 말아 주십시오.”

“물론 잊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잊지 않고 너에게 사죄할 것이다. 너만을 바라보며 잘하여 줄 것이다. 다시는 너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맹세하마.”

도운은 또다시 청조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맹세를 남겼다.

“이 거친 손이 값진 손이라는 것을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고, 진실한 백성의 손이었다는 걸 내가 몰랐었다. 고귀함이 무엇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중전의 화려했던 머리 장식과 너의 목비녀를 보고 나 또한 많이 생각했었다.”

“그러셨습니까?”

“그러했지. 그리하여 너를 산에서 내려보내려 했었지. 너는 행복하게 살아야만 하는 귀한 여인이었으니까. 감히 나 같은 놈이 탐내기엔 너무나 과분한 여인이었으니까. 머리 장식 따위, 혈통 따위는 그저 허울일 뿐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너의 신분이 어떠하든 너는 나의 하나뿐인 여인이고, 나의 상전이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도운의 목소리에 청조는 눈물을 참았다.

“어찌 아셨습니까? 소첩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저의 목소리라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어찌 아시고 소첩을 상전이라 말씀해 주시고, 서신을 보내고 노리개를 보내셨습니까?”

“나 스스로도 나의 존재를 불길함의 상징이라 여기고 어둠 속에 갇혀 있기만 했다. 그런 나의 어둠을 깨우치고 빛을 준 것이 바로 청조 너다. 너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지혜롭고 심지가 굳은 여인이다. 그런 너를 질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 자신뿐이지 않겠느냐.”

도운은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조의 뺨을 보듬었다.

“교태전에서의 일을 들었다. 네가 그 못된 것들에게 당한 수치를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교태전에 걸린 편액을 부숴 버리고, 몽땅 주리를 틀어 버리고 싶었으나, 내 그리하지 않았다. 나에게 섭섭하냐?”

청조는 머리를 가로젓고는 당의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노리개를 쓰다듬었다. 세심하게 쓰다듬는 손끝에 소중한 은장도가 걸렸다.

“조금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청조는 꾸밈없는 미소를 도운에게 보냈다. 정말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서방님께서는 자신이 서방님의 어둠을 깨우치셨다 하지만, 실로 저의 어둠을 깨우쳐 주신 분은 서방님이셨다. 저에게 심지가 강하다 하셨지만, 심지를 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서방님이셨다.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궁 깊숙한 곳에 있는 연못가에 도착했다. 커다란 돌덩이를 네모지게 깎고 다듬어 쌓아 놓은 장대석 아래로 푸른 물결이 잔잔하게 고여 있었다. 저 멀리 연못 건너편에 길게 늘어선 버드나무들이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한 버드나무의 길쯤한 이파리들이 펄렁거리며 아름다운 운율을 만들어냈다.

“궁 깊은 곳에 이런 아름다운 못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평온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리 와 보거라.”

연못 근처까지 온 도운이 청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뒤에서 바라보던 궁인들이 망극함에 어찌할 줄 모르고 고개를 조아렸다. 허나 그들이 망극하든 말든 청조는 이제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서방님께서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도운은 청조의 작은 발을 제 무릎 위에 올리고 운혜를 벗겨주었다. 이어 버선마저 벗기고 청조를 올려다보니, 선선한 바람에 발가락이 간지러운 듯 청조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쪽 발의 운혜와 버선까지 모다 벗겨준 후, 도운은 임금으로서의 위엄이나 체면을 버리고 자신 역시 맨발로 땅에 섰다.

맨발로 바닥에 선 도운은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 보이곤 청조의 몸을 갑자기 안아 들었다. ‘꺄아!’ 즐거운 듯 작은 비명이 울리고, 곧 맑은 여인의 웃음소리와 사내의 웃음소리가 한데 뭉쳐 울렸다. 도운은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품에 편히 기댄 청조를 안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 연못 가장자리까지 걸어갔다.

장대석 가장자리에 다가선 도운은 청조를 내려 주고 함께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연못가에 걸터앉았다. 청조의 발끝에 가을바람에 차가워진 수면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자신과 도운의 발을 향해 모여든 잉어들의 움직임에 청조가 맑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도운을 바라봤다.

도운은 행복에 반짝이는 청조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솜털 같은 눈썹도 한번 쓸어 주고, 앙증맞은 코끝도 한번 건드려 보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자, 청조가 도운의 손을 감싸고 그의 손에 뺨을 비벼댔다.

“유빈마마 시장하시겠구나. 어서 도시락을 가져오너라.”

“예, 전하.”

곽 상궁이 청조와 도운의 사이에 찬합을 놓아 주고는 뚜껑을 열었다. 찬합 안에 나물을 섞은 주먹밥이 향을 그윽하게 뿜어대며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었다.

“이것은…….”

“서방님과 함께 소풍 나와 이것 한번 꼭 먹어 보고 싶어, 소첩이 직접 소주방에 들어 만들었습니다. 드셔 보셔요.”

진심으로 그리워하던 청조의 음식이었다. 목이 메어와 도운은 침을 한번 꾹 삼키고, 청조가 집어주는 대로 하나씩 맛을 보았다. 말린 취나물에서는 쌉쌀한 맛이, 고사리에서는 고사리 특유의 향이 참기름에 섞여 고소하게 났다. 지난 두 해 만에 음식의 맛을 느꼈다. 음식의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향을 맡을 수 있는 것이 이렇듯 행복한 일이었다. 다시 목이 메어왔다.

“맛이 참으로 좋다.”

자신이 이렇듯 맛이 좋다 하면 청조는 볼우물이 패도록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

“입에 맞으시니 참 다행입니다.”

저리 말을 한다. 지금 이 순간, 도운은 청조와 함께 산으로 돌아간 듯 행복했다. 청조가 먹여 주는 주먹밥을 받아먹은 도운은 이번엔 자신이 직접 청조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 주었다. 그렇게 함께 주먹밥을 나누어 먹던 도운은 문득 수면 위에서 웃고 있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은애하는 여인과 앉아 있는 붉은 용포를 입은 사내가 환히 웃고 있었다. 비로소 얼굴을 찾은 사내의 미소가 자신이 보기에도 꽤 근사했다.

* * *

낮것상을 물리고 밖으로 나와 청조에게 향하는 길, 도운은 자신의 두 손을 살짝 마주 잡고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걷던 도운은 남현이 보고하는 이야기에 미간을 구겼다.

“그러니까, 그 집에서 백랍과 주홍안료를 구해다 달라 했다는 말인가?”

“예, 전하. 행수의 말이 백랍과 주홍안료는 용초를 제작하는 주재료라 하옵니다. 전하도 아시다시피 용초란 궐내의 왕실가족만 쓸 수 있는 초입니다. 한데 등촉제작자가 이제 와 용초를 만들 일이 무엇이겠사옵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초를 켤 자가 있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아마 이번에 그 초를 사용할 자는 나이겠지.”

“소신의 생각도 같사옵니다, 전하. 어찌할까요?”

남현의 말에 도운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지금 당장 잡아들일 수는 없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납은 들여갔다 하는가?”

“그것은 아직이옵니다. 아무래도 그것만큼은 직접 구해다 쓰는 모양이옵니다. 아무리 상인들을 탐문해 보아도 납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사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기다려 보게. 어떤 식으로든 구해서 들여가겠지. 현장을 잡아야 하네. 초를 만드는데 납을 쓰는 현장 말일세. 저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증좌를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해.”

“예, 알겠사옵니다.”

“청이 그 아이는 어떠한가?”

“한 내관의 집을 나와 도승지의 뒤를 밟고 있습니다.”

도운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청이 그 어린아이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안 그래도 비틀대는 아이를 저리 매일 밖에서 고생하게 만드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허나 어린아이이다 보니 이런 일에 가장 의심을 덜 받을 인물이 청이었다.

“그대가 퇴궐하며 그 아이 집에 좀 들러 주게. 고기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당과라도 좀 사다 주게.”

“예, 전하. 소신이 그리하겠나이다.”

명령보다는 부탁에 가까운 말이었다. 남현은 왕의 부탁이 매우 기꺼웠다. 유빈마마와 해후하신 후, 인간적인 면을 보여 주는 왕에게서는 어질고 선한 성군의 자질이 보였다. 누구보다 백성을 위해 줄 성군이 되시리라, 남현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재환 그자에게서는 소식이 있는가?”

“예, 유빈마마께서 말씀하셨던 천비골에 당도하였다는 연통을 받았사옵니다. 그곳에서 지금 한참 납의 출처를 조사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또한, 서 의원에 관한 죽음을 재조사할 것이옵니다.”

“한 내관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좀 있는가?”

“아직 많은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사옵니다. 다만, 전하께서 혹 승하하신 선왕전하의 상선 영감을 기억하시옵니까?”

남현의 질문에 도운이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얼굴이 기억나는 듯싶네. 산에 오르기 전, 익태 그자의 집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었지. 그자가 왜?”

“한 내관이 그자의 양자였다 하옵니다.”

“그래? 그자의 성이 한 씨였던가? 그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선왕전하께서 승하하시기 몇 해 전 병을 얻어 출궁을 했었사옵니다. 그 이듬해 명을 달리한 것으로 아옵니다.”

남현의 설명을 듣던 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내관에 관해 더욱 알아보고, 모두에게 안전에 안전을 기하라고 전하게. 저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예, 전하.”

“내금위장 그대도 조심하고.”

“예,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안전을 말하며 도운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몇 걸음 뒤에서 남현과 자신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는 상선을 보곤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내시 놈.

비웃음을 거두는 순간, 저 앞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청조가 보였다. 연꽃처럼 우아하게 부푼 연분홍 치마 위에 치자색 당의를 입은 청조의 얼굴이 복사꽃마냥 화사해 보였다. 주위에 서 있는 궁인들을 본 청조는 도운을 향해 부르는 호칭을 달리했다.

“전하.”

달콤하게 자신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는 청조에게 도운은 손을 내밀었다. 여기까지 오며 조심스럽게 마주 잡고 있었던 두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자 청조는 무엇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대며 웃었다.

“무엇이옵니까? 신첩을 주시는 것이옵니까?”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도운의 모습에 청조가 즐거운 듯 두 손을 내밀었다.

“어맛!”

청조의 눈앞에 잠자리 한 마리가 붕 날아올랐다. 빨간 꼬리 끝에 실을 매달은 잠자리는 힘껏 도망가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도운은 꼬리에 매달린 실 끝을 청조의 새끼손가락에 묶어 주고는, 반대편 손을 꼭 그러잡고 앞을 향해 걸었다.

“너 주려고 잡아 왔다. 심심할 때 보거라.”

“예, 신첩이 먹이도 주고 잠도 재워 줄 것입니다.”

“잘 살아 있나 내 이따 밤에 들러보마.”

“예, 그럼 신첩이 전하께도 맛난 것 먹여 드리고, 잠도 재워 드릴 것입니다.”

도운의 호탕한 웃음이 크게 울리자마자, 갑자기 불어온 가을 돌풍에 청조의 연분홍 치마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모습이 즐거워 더욱 커진 도운의 웃음소리가 멀리멀리 퍼졌다.

저 멀리 행복한 듯 웃고 있는 도운과 청조를 바라보던 예화가 치마를 움켜쥐었다. 방금 전, 대비전에서 받은 치욕이 되살아났다. 어쩐 일로 자신을 부르나 했더니 저를 불러다 앉혀놓고 대비는 일전에 부용정에서의 일을 들추어댔다. 뻔히 알면서도 정경부인들과의 다과는 즐거웠느냐 물어오는 대비의 얄팍한 속내가 예화의 눈엔 다 보였다.

예화의 굳어진 얼굴을 즐기며 대비는 여유롭게 차의 향을 음미했다. 여우 같은 얼굴로 자신을 비웃던 대비가 청조의 이야기를 꺼내자, 예화는 화를 참지 못하고 대비를 노려보았다. 감히 왕실의 가장 웃어른을 노려보는 두 눈이 불충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장 불호령을 내려야 마땅하지만, 대비는 자신을 노려보는 예화의 독기 어린 눈초리마저도 즐거워 죽을 것만 같았다.

쿡, 차를 입에 대던 대비는 저도 모르게 속에서 웃음이 올라왔다. 바삐 웃음을 갈무리한 대비는 국화 향이 그윽한 찻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 유빈이 궁에 들어온 후, 왕실 분위기가 어찌나 따뜻하고 훈훈한지. 유빈과 주상, 두 사람의 금슬이 저리 좋으니 이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간 주상께서 여인을 멀리하시니, 이 사람의 근심이 어찌나 깊었는지 모릅니다. 혹여 주상의 성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추문대로 남색을 하시는 건 아니신지. 주상과 후세에 대한 걱정으로 이 속이 얼마나 탔는지 모릅니다. 그에 대해 필시 중전께서도 근심이 많았을 거라 믿습니다.”

“……예, 마마.”

“하지만 이제 근심을 내려놓아도 될 듯싶어요. 주상께서 하루도 빠짐없이 애류당에서 침수 드신다니, 곧 이 궁에도 아이 울음소리가 들릴 듯싶습니다. 그런 주상을 두고 남색이라는 말도 안 되는 추문이 다 어디서 나왔는지. 내 그 추문을 만들어 낸 자를 기필코 색출하여 합당한 벌을 내리고 말 것입니다. 감히 그런 세 치 혀로 왕실의 권위를 바닥에 떨어트리다니, 삼족이 멸하여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저속한 것들 같으니라고. 아니 그렇습니까, 중전.”

저속하다며 일갈을 하던 대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중전을 바라보았다. 싸한 얼굴로 그렇다, 억지로 대답하는 중전의 모습에 대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추문이 어디에서 시작하였는지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궁은 넓은 곳이면서도 좁고, 한적하다 싶다가도 늘 소란스런 곳이었다.

저속한 것. 오라비나 그 누이나 한없이 저속하고 못된 것들이었다. 감히 내 아들을 굶겨? 믿고 맡기어 놓았더니, 그 많은 내탕금은 어디로 빼돌리고 그리 허접하게 먹고살게 하다니. 왕실에서 직접 돌볼 수 없는 점을 이용하여, 뒤에서 그리 파렴치한 짓을 벌이다니! 그러고도 산에 계시던 대군을 보살폈다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어? 게다가 저 못된 것들의 세 치 혀에 혜빈과 자신의 일가가 몰락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상스럽고 저속한 것들이 아닐 수가 없소.”

혼잣말을 하듯 예화를 향해 질타하는 대비의 입꼬리가 은근히 떨리다 갑자기 완만한 호를 그렸다.

“처음에는 유빈의 출신이 다소 한미하여 이 사람의 근심이 참으로 컸으나, 세상에 그런 여인이 없습니다.”

목을 축인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비가 부들거리는 예화에게 상큼한 미소를 보냈다.

“어찌 저리 참하고, 어여쁘고, 정갈한지. 거기에 생각은 또 얼마나 깊고 어진지. 사람을 보지 않고 타고난 신분만으로 미리 재단하고 선입견을 가졌으니, 내가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웠소. 누군가의 농간에 의해 주상과 헤어져 그 긴 시간 동안 발톱이 빠져 피가 날 정도로 온 나라를 걸었다니. 그 절개와 지조가 어찌나 드높고, 그 연모의 마음은 또 어찌나 깊고 아름다운지. 이 사람이 유빈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애절함에 가슴이 떨려 밤새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런 춘정을 품을 수 있다니, 너무나 부러운 나이이지요. 둘의 모습을 보면 승하하신 선왕전하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흥, 늙어빠졌던 지아비가 참으로 그리웠겠구나. 속으로 이를 갈던 예화가 퉁명하게 대답했다.

“그러시옵니까?”

“예, 그리고 요즘 유빈이 해 주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푹 빠져 삽니다. 전국을 돌며 그이가 보고 들은 세상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고, 또 슬픈지. 중전도 시간을 내서 꼭 한번 들어 보세요. 유빈의 이야기가 곧 우리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제대로 굽어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글쎄요, 소첩이 꼭 들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백성의 사정이야 전하께서 치세를 잘하시면 아무 문제 없는 것들이 아니옵니까? 또한 백성을 굽어살피는 일은 조정에서 논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은 신료들에게 맡기시면 될 일이옵니다.”

냉랭하게 말을 끝내고 시선을 돌려 버리는 예화에게 대비는 잠시 눈을 흘겼다.

“가정이란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지요, 허나 자식을 기르는 일은 어머니의 몫입니다. 부국강병하도록 치세하는 것은 응당 백성의 아버지인 주상의 책무이지만, 어려운 백성들을 굽어살피고 위로하는 일은 어머니인 중전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내명부가 해야 할 일이지요. 이 몸도 한때는 국모의 자리에 있었고, 이제는 왕실의 가장 웃어른으로 백성들의 할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하여 이 몸은 손주를 아끼고 귀애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한데 한나라의 국모라는 이의 견식이 어찌 그리 얕고, 도량이 어찌 그리 좁습니까? 중전께서는 유빈을 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뒷방 늙은이 주제에 주저리주저리, 전각을 나서는 예화의 심기가 몹시 불쾌했다. 감히 중전인 저에게 천한 계집을 본받으라고 하는 대비의 정신상태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전각으로 돌아가는 길, 저 멀리 잠자리를 청조의 손에 묶어 주는 도운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왕의 환한 얼굴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가 좋다고 껄껄거리다, 이제는 청조에게 등까지 내어 주는 왕이 보였다. 저 천한 것이, 궁의 예법도 모르는 것이. 궁인들이 다 보고 있는 이 넓은 곳에서 부끄러움도, 망극함도 모른 채 감히 왕의 등에 스스럼없이 올라타고 있었다. 왕의 목을 꼭 그러안은 손에 잠자리를 매단 채 둘은 저 멀리로 멀어지고 있었다.

오라버님의 말씀이 옳았다. 예화는 저 웃음이 자신을 향할 일은 평생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천한 것의 말대로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내며 남은 평생을 중전으로만 살아야 할 것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입매가 부들거렸다.

만약 그렇다면 완벽한 중전으로 살 것이다. 왕의 여인이 되지 못하면 왕의 어머니가 되면 되는 일이었다. 오라버니의 말씀이 옳고 또 옳았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지아비, 오라버니께서 없는 편이 더 수월하다면 없는 것이 좋겠지.

“박 나인.”

“예, 마마.”

“사가에 다녀오너라. 네가 직접 오라버니를 만나 보거라.”

“예, 마마. 도승지 영감께 전해 드릴 것이 있사옵니까?”

저 멀리 정답게 사라지는 남녀의 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노려보기만 하던 예화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초를 들이라 해라.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알겠느냐?”

“그리만 전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그래, 그렇게만 이르면 된다. 지금 당장 다녀오너라.”

“예, 알겠사옵니다. 중전마마.”

언년은 예화와 함께 점처럼 사라지는 도운과 청조의 뒷모습을 한껏 노려보다 명을 수행하러 곧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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