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의문
잠시 사정전에 들어 정무를 살피던 도운의 곁으로 남현이 빠르게 다가와 속삭였다.
“전하, 청이 그 아이에게서 연통이 왔사옵니다.”
“청이? 그 아이가 무얼 알아낸 것이 있다 하는가?”
“예, 그자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는 듯합니다. 금일 예의 그 주막에서 기다린다 하니, 소신이 다녀오겠사옵니다.”
다녀오겠다는 내금위장 남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도운은 생각이 바뀐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직접 가겠네. 내 직접 그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을 듯하네. 준비하게.”
“예, 전하. 분부 받잡겠습니다.”
발을 동동거리며 도운을 기다리던 청은 초조함에 공기를 입안 가득 모으고 입술을 비죽거렸다. 요즘 들어 조금씩 살이 오른 두 뺨에 공기가 가득 차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전하께서 어디쯤 오셨을까. 청은 애가 타는 마음에 낮은 담벼락에 달라붙어 고개를 밖으로 쭉 내밀었다. 마침내 저 멀리 도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청은 한걸음에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그래, 어서 들자.”
“예. 전, 아니 나리.”
서둘러 방으로 든 도운이 자리를 잡고 앉자, 청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음이 어찌나 급한지 늘 창백하던 청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전하, 전하, 소인이 보았사옵니다!”
“그의 얼굴을 보았느냐? 네가 아는 이더냐?”
“얼굴은 보지 못하였고 뒷모습만 보았사옵니다.”
“뒷모습만 보고 그자가 누구인지 어찌 아느냐?”
“그것이, 뒷짐을 지고 있는 그자의 손에 들린 합죽선을 보았사옵니다.”
“합죽선?”
“예, 그자가 들고 있던 그 합죽선이 누구의 합죽선인지 소인이 똑똑히 기억하옵니다.”
“누구의 것이었느냐? 내가 아는 인물이더냐?”
“예, 아마 그럴 것이옵니다. 바로 한 상전(尙傳) 나리이십니다.”
“뭐? 한 상전이라면?”
“한 내관 어른 말씀이옵니다. 의경 세자 저하의 내관이었던 분이시옵니다.”
전혀 뜻밖의 인물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도운은 남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남현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도운을 마주 봤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한 내관이라니, 한 내관.
“그자가 확실하냐?”
“예, 상전 나리의 합죽선을 소인이 정확히 기억하옵니다. 검은 옻칠이 된 합죽선이온데, 겉면에 박쥐 자개 무늬가 총 하나, 둘…… 아, 다섯이 새겨져 있사옵니다. 그리고 부채 하단, 은고리에 연결된 대추나무 선추에 푸른 비취를 깎아 만든 박쥐 문양 장식이 달려 있었사옵니다. 소인이 처음 궁에 들어와 그분의 처소를 소제하였사온데, 그때 분명히 보았사옵니다. 늘 아끼시어 서안 위에 두고, 가끔씩 펼치시어 부쳐 보곤 하셨사옵니다.”
청이 묘사하는 합죽선의 모양새가 도운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청조를 데리고 산에 오르던 날, 처음 유곽의 여인을 데리고 산에 오르던 날에도 그의 손에 분명 합죽선이 들려 있었다. 흑칠을 올려 만든 합죽선이 특이한 것도 있지만,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나 들고 다닐 법한 고급 부채를 들고 다니는 내시의 모습이 퍽 볼썽사나웠었다. 의경 세자를 등에 업고 그런 허세를 부리는 것이 매우 방자해 보여, 그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의경 세자가 얼마나 안하무인이면 그 아래 내시 따위가 저리 방자할 수가 있는가. 과연 의경 세자의 인품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싶었었다.
“확실하옵니다. 소인이 그분의 처소를 소제하다 눈에 띄어, 의경 세자 저하의 처소에 용초를 켜는 일을 맡게 되었는걸요.”
“의경 세자의 처소에 용초를 밝히란 지시를 상촉(尙燭: 등촉 담당 내시)이 아닌 그가 너에게 직접 내렸었단 말이냐?”
“예, 전하.”
가려운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딱 지금 도운의 기분이 그랬다. 가려워 미치겠는데, 딱 정확히 어느 부분이 가려운지 몰라 주변 이곳저곳만 긁어대는 기분이었다. 도운은 창백한 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창백한 얼굴, 자주 넘어지는 다리, 가끔 느끼는 어지럼증, 형님과 닮은 일련의 증상들이었다.
“네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리 자주 넘어졌더냐?”
갑작스런 도운의 질문에 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닌 것 같사옵니다. 사가에 있을 적에는 그리 자주 넘어지진 않았던 듯싶사옵니다.”
“그럼 어지럼증은?”
“그도 예전엔 없었사옵니다. 아, 하지만 사가에 있을 적, 배가 고파 눈앞이 어지러운 적은 있었사옵니다. 한데, 궁에 들어온 후론 배가 아니 고파도 어지러웠사옵니다.”
“그럼 언제부터 그리 자주 넘어졌느냐?”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궁에 들어와 두 해, 아니 세 해 정도를 지내고부터 그리된 듯하옵니다. 하지만 요즘은 전처럼 어지럽거나 하지 않사옵니다. 전보다 넘어지는 것도 덜 하고…… 한데 왜 그러시는 것인지…….”
점점 심각해지는 도운의 얼굴에 청은 말끝을 흐렸다. 저의 말이 뭔가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인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이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의관에게는 보였느냐?”
“예?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네 증상들 말이다. 의관들에게 진맥을 받았느냔 말이다.”
“처음 어지럼증을 느끼고 쓰러졌을 적에 한 번 진맥을 받은 적이 있사옵니다.”
“뭐라 하더냐?”
“그때는 소인이 너무 어린지라 잘 모르고, 상전 나리께서 의관과 말을 나누었사옵니다.”
“한 내관이?”
“예, 의관께서 처방전을 내어 주셨으나, 그때 한 번뿐이었습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요? 저희 같은 소환이 감히 궁의 비싼 약재를 어찌 받아먹을 수 있사옵니까? 그것들은 모다 왕실 어른들을 위한 것들인걸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는 청의 말에 도운의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그렇다면 이 어린 것이 아픈 것을 뻔히 알면서 약재를 내어 주지 않았단 말인가? 한숨을 내쉰 도운은 소맷부리에서 주머니를 꺼내 청에게 내주었다.
“의원에게 들리거라.”
“아닙니다, 아닙니다. 소인은 이제 괜찮사옵니다!”
또다시 손사래를 치며 바닥에 넙죽 엎드리는 청에게 도운은 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꼭 들리거라. 그리 많지 않은 전냥이다. 내 다음에 더 큰 금액을 내어 줄 것이니 꼭 의원에게 들러 좋은 약재로 골라 약첩을 받거라. 알았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망극할 것도 많다. 내가 입은 은혜가 더 크니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치워라.”
농을 하며 웃는 도운의 모습에 청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아씨를 만나신 후, 자꾸만 웃으시는 전하의 모습은 남자인 저가 봐도 참으로 늠름하시고 멋지셨다. 헌헌장부란 말이 과연 전하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거기에 저 같은 소환 따위를 이리 생각해 주시는 그 하해와 같은 마음이란. 이런 분이신 것도 모르고 전하에 대해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는 저자의 시정잡배들이 생각나 콧김을 강하게 뿜었다. 기실 청은 그런 인간들에게 분통이 올라 저자에서 드잡이 짓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냥 주머니를 손에 쥐고 헤실헤실 웃던 청과 헤어져 궁으로 돌아오는 길, 도운은 이상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뒤가 가려운 무거운 마음에 도운은 궁으로 들어와 청조가 있는 수련재로 향하였다. 벌써 얼굴을 본 지가 여드레는 되었으니 많이 그리웠다. 으슥한 밤, 수련재에 조용히 빗장 열리는 소리가 끼익 울리더니, 도운이 청조의 방으로 금세 숨어들었다.
이미 어두워진 밤, 곱게 잠이 든 청조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다 뺨을 쓸어 보았다. 얼굴을 보고 있자 지난밤 새벽녘에 홀로 깨어 앉아 있던 청조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그 시각에 왜 일어나 그리 불안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거였는지, 홀로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혹여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사이, 어둠 속에서 저를 바라보는 청조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내가 깨웠느냐?”
도운은 가만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짓는 청조의 모습에 미복을 벗어 버리고 금침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조심조심 들어가 누워 청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제 너 먹어라 얼음이랑 수박을 보냈는데, 수련재 나인이 눈치 있게 수박 화채 한 그릇 가져다주더냐?”
“예,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화채가 달고 시원한 것이, 소첩이 그만 더위를 싹 잊었습니다. 서방님께서도 좀 드셨습니까?”
“그럼, 네 서방이 이리 보여도 이 나라의 왕이다. 시키지 않아도 아랫것들이 잘도 가져오니 걱정 말거라.”
포로롱, 맑은 웃음소리가 울리자 도운은 청조를 품에 안았다.
“한데, 어디 다녀오십니까? 어찌 이 시각에 오셨습니까?”
도운이 내쉬는 한숨이 청조의 머리꼭지에 뜨겁게 닿았다.
“청이 그 아이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그 아이가 중요한 것을 알아내어 그 일을 듣고 오는 길이다. 한데…… 그 이야기를 들은 내 마음이 왜 이리 번다한지 모르겠다. 무엇인가 정리가 안 돼.”
“소첩에게 말씀해 주시면 아니 되십니까? 차근차근 말씀해 주시다 보면 혹, 정리가 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청조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를 밝혔다. 밝은 곳에 앉아 가만 생각에 잠기던 도운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내관, 의경 세자, 그리고 청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이야기하며 제가 빠뜨린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청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청이 그 아이가 자주 넘어지고 어지럼증이 심하다 하였습니까?”
“그래.”
“혹, 청의 안색이 지금보다 훨씬 창백하였다 합니까?”
“응, 지금은 전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다만, 전에는 훨씬 창백하고 눈 밑이 검게 패였다 했지. 마치 얼굴에 백분을 바른 듯 의경 세자 또한 늘 창백하다고 했다.”
“혹여 그 아이의 손톱이 검거나 잇몸이 자색을 띠고 있지는 않습니까?”
“손톱? 그것은 눈여겨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그리 깨끗한 색을 띠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도운의 대답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청조가 고운 아미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왜 그러느냐?”
“그것이…… 소첩도 확실한 것은 아니옵니다. 그저 의심되는 증상이 있어 그러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소첩이 아버지께 들은 말이 있습니다. 소첩이 살던 화성에 천비골(賤卑㘛)이라 불리는 동리가 있었습니다. 백정이나 재인, 화척 등 그 신분이 다소 천한 이들이 모여 사는 동리라 하여 천비골이라 불리었지요. 그곳에 은을 제련하는 이들이 모여 살았는데, 그들은 제련한 은을 장식품을 세공하는 장인들에게 팔아 생업을 이어가던 이들이었습니다. 천비골은 천민이 집단으로 주거하는 곳이니, 사람들이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아 고립된 동리였습니다. 하여 밖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은을 제련하는 이들이 그런 증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너는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
“은을 제련하는 이들이 고통을 자주 호소하여 아버지께서 한 번씩 왕진을 다녀오시곤 하셨습니다. 그 일을 하는 이들이 자주 어지럼증을 호소하곤 하였는데, 특히 어린아이들일수록 증상은 더욱 심하여 얼굴이 창백하고, 자주 넘어지고, 증상이 심하면 사지에 마비가 오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비가 되었다고?”
“예.”
도운의 머릿속에 대비마마와 나누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때 의경 세자의 몸이 마비된 적이 있다 하였지.
“그 증상과 은이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이냐?”
“그것은 은과의 관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소첩이 당시 나이가 어려, 아버님의 말씀을 다 기억하지 못하오나, 그것은 아마 납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허나, 네 방금 그 동리의 사람들이 은을 제련한다 하지 않았느냐?”
“예, 함경도 단천에서 채광된 납광석을 제련하면 그 어느 곳에서 나온 광석보다 순도 높은 은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순도 높은 은으로 만든 장식품이 타국에서도 고액에 거래된다 하니, 그 사람들이 함경도에서 채취한 납광석을 이용하여 은을 제련하였었습니다. 정확한 제련방법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납광석을 녹여 은을 추출하고 나면 남는 것이 바로 납이지요.”
도운은 청조의 말을 아직 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은을 제련할 시 나오는 납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인 듯하였다.
“또 그 사람들은 얻어낸 납을 다시 주조하여 조총의 탄환으로 만들었다 합니다. 그들을 오래 진료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은을 제련할 시, 또 납을 주조할 시 나오는 독이 사람의 호흡을 통하여 그 사기가 먼저 오장육부에 해를 끼치고, 종래에는 기혈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몸에 어혈이 쌓이고, 그 증상으로 손톱 끝이 검어지고 잇몸이 자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셨습니다.”
“그러하냐?”
“예, 또한 그것들을 자주 만지는 이들은 피부 속으로 사기가 스며들어 혈을 타고 머리끝과 발끝으로 퍼진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위쪽에 사기가 든 자는 눈이 침침하며, 두통이 오고, 혀가 굳어 점점 말을 하는 것이 힘들다 하였고, 아래에 사기가 든 자는 다리가 굳어 자주 넘어지고 마비가 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께옵서는 강건하신 전하와는 다르게 얼굴빛이 늘 창백하시고, 자주 두통을 호소하셨습니다. 걸음걸이도, 가끔 비틀거리시는 것이 호방하신 전하와는 다르시옵니다. 그리고 말투가 딱딱하신 전하와는 달리 늘 다정하게 말씀하셨으나, 가끔 혀가 마비되신 듯 어눌하게 말씀하실 때가 있었사옵니다.’
청이 묘사했던 형님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청조의 아비가 꽤 유능한 의원으로 소문이 났었다 하니, 그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허나, 납과 청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 많은 소환들 중, 청이 혼자만 납 때문에 아프다는 것이 과연 있을 법한 일인가?
“허나, 이 궁에서 청이 그 아이가 은을 제련한 것도 아니고, 하물며 납덩이를 만질 일도 없지 않느냐? 또한 의경 세자 역시 그러하고.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예, 생각해 보니 소첩이 너무 깊게 생각한 듯합니다. 허면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은 것 중, 의경 세자 저하와 청이 그 아이만 행한 것이 있을까요? 두 사람이 공통으로 행한 그 어떤 일이 단초가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고, 둘만이 공통으로 행한 일. 그것이 무엇일까?
“청이는 한 내관으로부터 의경 세자의 용초를 밝히라는 명을 받았다 했지. 용초, 용초.”
도운은 혼자 용초를 중얼거렸다. 청은 용초를 켰고, 청이 켠 용초를 사용한 사람은 의경 세자뿐이다. 무언가 실마리가 잡히는 듯하면서, 도운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혹여 의경 세자의 죽음에 다른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빠르게 스쳤다. 만약 정녕 그러한 것이라면.
“승하하신 아바마마께서도, 대비마마께서도 늘 내가 형님의 목숨을 갉아먹었다 하였지. 내가 그와 같은 시각에 그의 다리를 잡고 태어났다 했어. 관상감과 성수청에서 이르길, 나의 사주와 관상이 형님의 그것과 마치 하나인 듯 똑같으니, 하나의 운명을 반으로 나누어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의경 세자보다 강건한 내가 운명을 하나로 완성시키려 그의 반쪽 운명을 빼앗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 말하였는데…… 아닐 수도 있는 것일까?”
혼잣말을 하듯 멍하니 읊조리는 도운의 뺨에 청조의 거친 손끝이 닿았다. 따뜻하게 미소 짓던 청조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세상에 반쪽짜리 운명은 없습니다. 사람은 모다 태어날 때 하나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은 당연한 하늘의 이치입니다. 하늘이 어찌 사람에게 운명을 반으로 갈라 주는 수고를 하였겠습니까? 사주가 같다 하여 운명이 같다면, 어찌 사람들의 인생이 모다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서방님과 같은 시에 태어난 어떤 이들은 농사를 짓고, 또 어떤 이들은 소, 돼지를 잡고 살지 않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도운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청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참으로 진실하고 선한 여인의 얼굴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아십니까? 민가의 그 어느 점쟁이도 관상이 같다 하여 그 운명이 같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손금보다는 족상이요, 족상보다는 관상이요, 관상보다는 사주라 말합니다, 허나 이 모든 것을 합한 상 중에 가장 위에 있는 상은 바로 심상이라 합니다. 이는 타고난 운명 또한 강하고 곧은 마음가짐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라 하였습니다.”
“바꿀 수 있다?”
“예, 저 옛날, 손금이 중지에 이르렀으면 왕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사를 받은 사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내는 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찢어 손금을 이어 그린 후, 왕위에 올랐다 합니다. 허나 그 사내가 자신의 손바닥에 새긴 것은 손금이 아니라 왕이 되고자 하는 굳은 결심이라고 소첩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심성이,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지요. 허니, 서방님께서 의경 세자 저하의 운명을 훔치셨다는 말은 사특한 말입니다. 그런 사특한 말을 믿는 순간,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듯했다. 청조의 말은 그저 저를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진실이고 깨달음이었다. 이리 단순한 사실을, 어찌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는지. 허허, 헛웃음이 날 정도로 어이없는 사실이었다. 도운은 어이없는 웃음을 짓다 살이 올라 탐스러워진 청조의 뽀얀 뺨을 쓸어 보았다. 촛불에 반사된 복사꽃 같은 뺨이 말랑거리며 부드러웠다.
“내가 과연 성군이 될 수 있을까?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형님을 잡아먹었으니, 나는 패륜이고 반정을 한 꼴이라 하였다. 선왕과 대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이런 나는 폭군의 자질을 타고났으니 늘 경계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말씀하셨다. 너는 과연 내가 성군이 될 수 있다 믿느냐?”
“소첩이 저 멀고 먼 곳, 바다를 배경으로 한 마을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 먼 곳을 다녀왔더냐?”
“예, 그랬지요. 그곳 기방에 잠시 몸을 의탁하였었는데, 그때 소첩이 누굴 만났는지 아시어요?”
“누구를 만났느냐?”
“그곳에서 소문난 박수를 만났습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봉사가 사람의 앞길은 어찌 그리 잘 보는지. 관아의 높은 양반부터 사대부 안채에 들어앉은 마나님들까지, 모다 그이를 찾는다 하였지요.”
청조의 유랑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슬프고 애가 탔지만 늘 도움이 되고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하여 주려 이러나 도운은 손으로 턱을 받치고 조잘거리는 청조를 바라보았다.
“그 무당이 하도 용한지라, 늘 기방으로 불려와 높은 분들 앞에서 점사를 술술 말하곤 하였습니다. 허나 남의 앞길은 그리 술술 말하는 이가, 자신 앞에 놓인 돌부리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대차게 넘어졌지요. 그가 봉사인지라 응당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어요. 하여 절뚝거리는 그자를 소첩이 부축하여 집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자가 소첩에게 고마워하며 소첩의 점사를 봐주었습니다.”
“그래, 뭐라 하더냐?”
“평생 서방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다복하게 살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하다니, 그놈이 참으로 용하긴 용하구나.”
기분이 좋다는 듯 도운은 껄껄대며 웃었다. 그를 따라 청조도 고운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요? 또 그이가 말하길, 소첩의 서방 되시는 사람이 아주 높고 아주 귀한 이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아주, 아주 귀한 이라 하였습니다.”
도운은 무엇이 좋은지 그냥 좋아서 웃음이 나 버렸다. 귀한 사람이라니.
“아십니까? 그런 용한 박수조차도 제 앞에 놓인 돌부리 하나를 보지 못하여 넘어졌습니다. 선대왕마마와 대비마마께서 응당 넓은 혜안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그분들 하시는 말씀이 모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 옳은 것은 모다 서방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소첩은 성군이 되고자 하시는 서방님의 마음을 믿사옵니다.”
“너는 요물이다.”
“예? 소첩을 가리켜 요물이라 하셨습니까?”
“그리 말했지, 너는 요물이다.”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도운은 즐거운 듯 웃는 청조의 턱을 잡고는 예쁘게 휜 눈꼬리부터 복스럽고 앙증맞은 입술까지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너는 나를 심히 괴롭게 하지 않았느냐? 괴롭게 하는가 싶으면 즐겁게, 어지럽게 하는가 싶으면 맑게, 슬프게 하는가 싶으면 행복하게 만든다. 사람이 어찌 이리 요망할 수가 있느냐? 그러니 네가 요물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여우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요물이라 하시어요?”
까르르, 도운은 맑게 웃으며 들썩거리는 청조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여인을 품에 안고 등을 쓰다듬던 손이 어느새 앞으로 돌아와 저고리 아래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렸다. 하지만 천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둔탁한 느낌에 곧바로 조바심이 밀려왔다. 도운은 저고리에서 손을 떼고 서둘러 청조의 치마를 들쳤다.
들쳐진 치마 아래로 쏙 들어온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다리를 쓱 훑고 허벅지와 엉덩이를 지나 옆구리에 닿았다. 맨살에 닿는 서늘한 느낌에 청조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허리에서 잠시 멈춘 손이 청조의 잘록한 옆구리를 잡고 비비적거렸다. 투박한 사내의 손가락이 살갗을 쓰다듬는 감촉에 허리가 저릿할 때쯤, 커다란 손이 갈비뼈를 뱀처럼 휘감으며 올라와 치마말기에 눌린 젖가슴을 억지로 잡았다.
도운의 손이 가슴을 감싸고 있던 치마말기 사이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자 치마가 가슴 위로 훌떡 밀려 올라갔다. 도운은 드디어 자유로워진 탄탄한 살덩이를 살짝 쥐고 마음껏 주물렀다. 근자에 살이 올라 그런지, 전보다 더 탱글탱글한 청조의 그것이 한 손에 넘쳐나도록 잡혔다. 손에서 튕겨 나갈 듯 탄탄한 젖가슴을 힘껏 그러잡고 엄지와 검지로 단단해진 젖꼭지를 부드럽게 비틀어대던 도운은 결국 치마 아래로 머리를 불쑥 집어넣었다.
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뽀얀 가슴을 한껏 입으로 한껏 들이켰다. 꼿꼿하게 선 유두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젖가슴의 옆쪽을 물고 힘차게 빨아들이자 탱탱한 살덩이들이 한입 가득 밀려 들어왔다. 젖가슴의 옆을 물고 있던 입이 점차 위쪽으로 옆으로, 또다시 아래로 움직이며, 중앙을 제외한 모든 곳을 타액으로 점철해 갔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중심을 맛볼 차례였다. 도운의 입속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간 젖꼭지가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려지고 깨물리자, 청조는 사내의 머리통을 치마째 꼭 그러안았다. 청조가 숨을 헐떡일 정도로 한참 동안 입안의 그것을 희롱하던 도운의 머리가 다시 치마 밖으로 나왔다. 포만감이 들 정도로 한참이나 게걸스럽게 맛을 본 도운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가심을 한 후, 그제야 치마말기끈을 잡아당겼다.
우선 치마부터 치워 버리고, 속적삼, 속곳을 차례로 훌렁훌렁 벗겨내 어느덧 나신이 된 청조의 몸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발끝부터 잡아먹을 듯 훑어보는 도운의 시선에 청조가 몸을 슬쩍 틀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허나 부끄러운 듯 몸을 틀어 앉은 여인의 모습이 무척이나 요염하고 색정적이라 하초에 열이 더욱 몰렸다. 애써 가린 두 팔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풍만한 가슴이 사내의 음심을 더욱 자극했다.
“너무 밝습니다. 소첩이 부끄러우니 초를 꺼주십시오.”
“내 이때까지 네 안 깊은 곳까지 아니 본 곳이 없거늘, 이제 와 부끄러우냐?”
“기실 늘 부끄러웠습니다.”
진심으로 부끄러운지 백옥 같은 청조의 나신이 저녁노을처럼 곱게 변하고 있었다. 그 어여쁜 모습에 도운의 입술이 크게 호를 그렸다.
“네 안의 요물이 어디 숨어 있나 내 오늘 꼭 찾아볼 참이다. 한데 초를 끄면, 내 그 요물이 어디 숨어 있는지 어찌 알고 찾는단 말이냐?”
“예? 어맛!”
급작스럽게 달려드는 도운에 의해 청조의 몸이 바닥 위로 벌렁 넘어갔다. 기분 좋은 듯 웃음소리를 내던 도운의 입술이 청조의 입술을 부드럽게 감싸자, 청조가 도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제 청조 자신도 진정한 남녀 간의 운우지락을 점점 알아가고 있었다. 제 몸 위에 딱 겹쳐진 서방님의 맨살이 주는 감촉이, 그가 주는 이 무게가 이토록 숨이 막히도록 자신을 자극하였다. 부끄러운 감정은 어느새 다 잊을 정도로, 미칠 것만 같은 갈증에 더욱 안달하고 갈구하게 만들었다.
여인의 달뜬 몸이 열리고, 열락의 밤이 열렸다. 청조는 이 밤이 지나가는 것이 늘 아쉬웠다. 홀로 지냈던 어젯밤을 뚝 떼어다 오늘 밤으로 가져올 수만 있다면. 홀로 지샐 내일 밤을 뚝 떼어다 오늘 밤을 엿가락 늘이듯 늘릴 수만 있다면. ‘하아아’, 열에 들떠 내쉬는 청조의 한숨이 도운의 귓가를 간질였다.
* * *
며칠 뒤, 잠행을 나온 도운은 남현과 함께 주막에 들러 청을 기다렸다. 미리 연통을 주었으니 곧 아이가 올 시각이었다.
“그 아이의 손톱을 유심히 살펴보게. 혹 청조가 말한 대로 검은색을 띠고 있는지.”
“예, 전하. 그리하겠사옵니다.”
“청이옵니다. 안으로 들겠습니다.”
순간 밖에서 청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금세 청이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소인 청이 들었사옵니다.”
“그래, 잘 왔느니라.”
“나리, 오셨습니까?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씩씩하게 안부를 묻는 청에게 남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청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는 청의 모습을 도운과 남현은 재빠르게 훑어보고 서로 눈빛을 마주쳤다.
“내 청이 너에게 물을 것이 있어 불렀다.”
“예, 전하 하문하시옵소서.”
“별것은 아니고, 내 그냥 궁금하여 묻는 것이다. 네가 어지럽고 자주 넘어지던 일 말이다. 혹 다른 소환들 중 너와 같은 증상을 가진 아이가 있었느냐? 가령 너보다 의경 세자의 처소에 먼저 초를 켰던 소환 말이다. 혹 그런 아이가 있다면 과인이 의원에게 보여 주려고 그러는 것이다.”
“정말이시옵니까, 전하? 저희 같은 소환들을 그리 생각해 주시다니요! 너무 황공하옵니다, 전하!”
청은 도운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바닥에 바짝 엎드리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데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소인 이전에 초를 켰던 소환들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아, 저보다 바로 먼저 그 일을 하신 분은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은 상원 나리가 되어 궁의 정원을 관리하옵니다. 한데 그분은 매우 튼튼하십니다.”
“그래?”
“예, 가끔 두통이 있다고는 하시지만, 어지럽다고 하시는 것을 본 적은 없사옵니다. 무거운 물건도 잘 드시고, 힘이 장사이옵니다.”
이상하였다. 분명 초가 문제라면 청이 이전에 불을 켰던 이들도 증상이 나타나야 할 것인데. 그런 이들이 없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초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그 증상이 미미할 수도 있었다. 그저 초에 불을 댕기고, 관리만 하는 단순한 작업으로 사기가 침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허면, 어째서 청에게만 그런 증상들이 발현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말이다, 혼자 네 처소에 있을 적에도 의경 세자의 용초를 사용한 적 있느냐?”
“예에? 아니옵니다. 절대 아니옵니다. 소인이 어찌 귀한 용초를 쓴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일은 결코 없었사옵니다.”
“진정이냐? 네가 그것을 썼다 하여 너를 다그치려 함이 아니다. 그러니 생각나는 것이 있거든 말을 해 보거라.”
청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빠르게 구르더니 자신도 모르게 오므린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본 도운은 ‘피식’하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평생 거짓은 말 못 하고 살 아이였다.
“그것이…… 사실…….”
삐쭉삐쭉 도운을 올려다보며 눈치를 살피던 청이 말을 더듬거렸다.
“어서 말씀을 올리거라. 전하께서 너를 다그치려 함이 아니시라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것이 사실, 용초를 다 쓰고 나면 초가 손톱만큼 남사옵니다. 그것이 아무래도 심지가 다 타고나면 더 이상 불이 붙지 않아 남는 것이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그것들을 모아 돼지기름과 함께 한데 녹인 후, 용기에 넣고 굳히면 약간 질퍽하면서도 기름진 것이 겨우내 튼 얼굴과 손등에 발라주면 좋사옵니다. 튼 살도 매끄럽게 해 주고, 어찌 된 일인지 상처 같은 것도 쉬이 낫사옵니다. 하여 제가 그것을 만들어다…….”
“만들어다, 네가 직접 썼느냐?”
“예에…… 소인이 겨우내 전각들을 소제하다 보면 워낙 손과 얼굴이 많이 트는지라…….”
맹한 줄 알았더니, 보기보다 약삭빠른 데가 있는 놈이었다. 간도 콩알만 한 놈이 다람쥐마냥 그것들을 몰래 날랐을 것을 생각하니 어찌나 우세스러운지 도운은 웃음이 났다. 곁을 보니 남현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청을 보고 웃음을 참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네가 양물 없는 사내인가 보구나.”
“예? 그것이 어인 말씀이신지.”
“네가 어여뻐지고 싶어 그것들을 네 얼굴에 바른 것이 아니냐.”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소인이 그런 뜻으로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예전 사가에 있을 적에도 소인, 겨울이면 얼굴과 손이 다 터져 버리곤 하였습니다. 게다가 튼 살이 쉽게 갈라지니 그것이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그때마다 소인의 어미가 해 주었던 것이 생각나서 그랬사옵니다.”
“네 어미가?”
“예, 증상이 심할 때면 소인의 어미가 어디선가 돼지기름을 얻어와 소인의 얼굴과 손에 발라주시곤 하셨습니다. 허나 돼지기름만 바르면 너무 미끈거리고 그 냄새가 고약한지라…… 또한 굳어 버린 기름은 바르기가 쉽지 않으니…… 그것이 싫어 소인이 남은 용초를 넣고…… 만들었사옵니다.”
“네가 어찌 꾀를 내어 그것을 만들었느냐?”
“어느 날 상촉 나리께서 지초(돼지기름과 백랍을 섞어 만든 초)에 관해 말씀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용초란 백랍(白蠟: 표백한 밀랍)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옵니까? 하여 소인이 동궁전에서 쓰고 남은 백랍들을 모아 그것에 돼지기름을 넣고 초를 만들어 보았사옵니다. 혹여 잘되면 사가에 보내 줄까 싶어 그리했사옵니다. 한데 소인이 비율을 잘 모르는지라, 돼지기름을 너무 많이 넣었더니 단단하게 굳지 않고 질퍽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것의 모양이 꼭 투명한 고약 같은 것이 그…… 백랍이라 그런지 꿀 향도 은은하고 달달하여…… 색상도 다홍빛으로 예쁘고 바르기도 편해 보여서…… 터진 얼굴과 입술, 그리고 또 손에 발랐더니 밤새 보드랍게 변하였사옵니다.”
청의 콧잔등에 땀이 송송 차올랐다. 어찌나 긴장하였는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다더니, 우연히 손에 넣은 고약이 좋다고 얼굴이며 손에 바른 것이었다. 그것이 제 명 단축하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그것을 얼굴과 손에 발랐던 것이냐? 얼마나 많이 발랐느냐?”
“일 년 내내 바지런히 모아 이른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발랐사옵니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쉰 도운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행동에 엉덩이 밑으로 빠져나온 청의 발가락이 꾸물거렸다. 도운이 계속 말이 없자, 청의 마음에 불안이 자꾸만 쌓여 갔다.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을 꾸물거리는 청의 양쪽 입술 끝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전하께서 저를 미워하실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고기 사 먹어라.’ 하며 전냥을 아니 내주실지도 몰랐다. 요 어린 소환 놈이 감히 왕세자 저하의 초를 탐했다 노하시어, 이대로 저를 잡아가라 내시부에 명하실지도 몰랐다. 무서운 분이셨지만 그간 저를 참으로 예뻐해 주시고 과분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이신데.
미움받을 것이 어찌나 서럽고 슬픈지. 청의 눈에 눈물이 아롱아롱 차오르고 벌써부터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그때 부드러운 도운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잘하였다.”
“예? 정말이시옵니까?”
“그래, 참으로 잘하였다. 네가 만든 고약이 그리 효험이 좋다니 올겨울에 아씨 쓰실 것도 만들어 보아라. 내 그 값을 후하게 쳐줄 것이다.”
“정말이시옵니까, 전하?”
“그래, 그간 아씨가 이 몸을 찾아 헤매느라 손과 발이 많이 거칠어졌으니, 잘 만들어 보거라. 아씨의 손이 보드라워지면 내 너를 크게 치하할 것이야.”
“예, 전하. 성심을 다하여 만들겠사옵니다!”
청은 손등으로 얼른 눈을 비비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청을 보는 도운의 마음은 착잡했다. 독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몸에 발랐으니, 청조의 말대로 사기가 혈을 타고 아이를 좀먹어 가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좋은 약을 얻었노라 헤실거리며 좋아했을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 * *
한낮에 내리쬐는 태양에 등줄기가 땀으로 범벅되었다. 도성으로 돌아온 재환은 혹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싶어 머리에 쓴 삿갓을 더욱 깊게 눌러쓰고 주막에 들어섰다.
“주모, 여기 시원한 냉수 한 사발부터 가져다주고, 끼니는 알아서 한 상 내오게.”
간단히 요깃거리를 주문한 재환은 주모가 가져다주는 냉수부터 들이켰다. 멀리 전라남도 진도에 들러 아버님과 만나 봐야 할 이들을 만나고 금일 도성으로 돌아왔다. 떠날 때만 해도 청량한 빛을 띠며 야들야들하게 올라왔던 벼들이 지금은 파릇파릇하게 물이 올랐다. 벌써부터 그 끝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가지가, 알알이 달린 쌀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모가 바삐 가져다준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자 시원한 물줄기가 더위에 지친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깨끗하게 비운 빈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 글씨, 야심한 밤마다 주상인지 밥상인지가 수련재에 도둑고양이 맹키로 살금살금 들어간다잖여. 아, 수련재가 어디야? 저어어어 주상이, 지가 잡아먹은 세자 저하의 세자빈이셨던 혜빈마마를 가둬 둔 쬐고만 집이라잖여.”
“아, 뭐야 그럼. 전하가 제 형수랑 밤마다 그 짓이라도 한다는 거여 뭐야?”
“그 짓을 하는지, 저 짓을 하는지 나야 모르지! 아, 지 형수를 그런 별궁도 아닌 쪼매난 초가 같은 곳에 가둬 둔 것도 벌 받을 짓인데, 아니, 그 형수가 기거하는 별당 담을 밤마다 왜 넘어가?”
“왜 넘어가겠어? 엉? 둘이 딱, 엉? 요래, 요래 딱!”
말을 하던 사내가 자신의 두 손바닥을 맞대어 비비며 바람 빠지는 짓궂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거 아니여, 이거.”
“어허, 말세네, 말세야. 아, 그럼 그 소문은 뭐야? 전하가 곧 우리 군역을 감면해 줄 거라는 그 말. 그 뭐야, 호구 조사인지 호랭이 아가리 조사인지 그거 다 끝나면, 틀림없이다가 사람 머릿수대로만 군역을 부담하게 할 거라고, 성군이 될 거라네 뭐라네 하던데.”
“맞네, 나도 들었구만. 섬골에 사는 뭐시기가 궁에 들어갔다 임금님한테 직접 들었다고 하던디. 아주, 풍채가 이리 좋아서는 생김새도 그렇게 잘났을 수가 없댜. 그자가 그렇게 칭송을 하고 다닌다던데.”
“에이, 헛소문이지. 이 사람 순박하기는! 어찌 그런 헛소문을 믿으남? 언제 고양이가 우리 쥐새끼들 생각해 주는 거 봤어? 아, 봤냐고! 지 젊은 형수의 몸뚱어릴 밤마다 그렇게 탐한다자녀. 은제는 요래 어린 소환을 밤마다 처소로 불러다 앉혀놓고 주물떡거린다 하질 않나. 그런 비역질에다가 패륜이나 저지르는 인간이 성군은 무스은! 에이, 퉤! 지나가는 똥개가 웃겄다.”
한 사내가 똥개가 웃겠다고 하며 침을 뱉자, 주위에 모여 있던 사내들 역시 인상을 찌푸리고 각자 쓴소리를 입에 담았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에 재환의 입매가 굳게 다물어졌다. 주모가 국밥이 든 작은 상을 앞에 놓아 주었지만, 입맛이 싹 달아났다. 이런 풍문은 좋지 않았다. 왕에 대한 신임이 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더러운 추문에 제 누이가 언급되는 것조차 불쾌하고 불결했다.
허나, 사실은 그 이면에…… 무지한 백성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와는 다르게, 밤마다 넘는다는 그 담 너머에 누가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왕이 여인을 만나러 밤마다 담을 넘는다는 그 말이 자신의 마음을 아프도록 후벼 팠다. 청조, 이름 그대로 맑은 아침 같은 여인. 그 새벽 같은 여인이 밤마다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다는 사실에 괴롭고 또 괴로웠다.
왜 그리도 어여뻐 저를 이리 힘들게 하는 것인지. 왜 하필 그대인 것인지. 여인의 자그마한 얼굴이 떠올라 아픈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쳐댄 재환은 억지로 숟가락을 들어 국밥을 퍼먹었다. 심중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여인에 대한 미련, 그리움을 뜨거운 국밥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날이 저물자 재환은 주막에 처소를 잡고 도운을 기다렸다.
“이보게. 재환 안에 있는가?”
오늘쯤 도성에 도착한다 미리 내금위장에게 기별을 넣었으니, 조만간 그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밖에서 저를 부르는 내금위장 남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재환이 방문을 열자 도운이 안으로 들어서 바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만나 봐야 할 사람은 무사히 잘 만나 보았는가?”
“예, 전하. 전하께서 내어 주신 새 호패와 자금 덕분에 힘들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사옵니다.”
“잘되었네. 그럼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는가?”
“생각대로 소신이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쪽에서 사람이 왔었사옵니다. 전라 우수영에 계신 안계희 만호께서 선왕께 불만을 가지고 계시다 생각하고, 그를 회유하려 하였사옵니다.”
“그가 선왕께는 반감이 없다 하나, 필시 나에게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테지. 그자의 막역한 친우인 자네 아버지를 그리 만들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께서 전라남도 진도에 계시는 터라 만호 나리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고민하시는 만호 나리를 설득하여 주시니 일이 한결 수월하였습니다.”
물 흐르듯 상황을 전달하는 재환의 보고에 도운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자네가 큰일을 하였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번 일은 만호 나리께서 결정하신 일이옵니다. 선왕 전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전라도로 내려가셨던 나리께서 이번 일로 선왕께 입은 은혜와 불충을 갚겠다 말씀하셨사옵니다. 소신이 한 일이란 그저 제 일가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 길을 다녀온 것뿐이옵니다.”
“아닐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만호를 이용하려는 저들의 계책조차 경계하지 못하였을 것이네.”
“아버지와 선왕 전하께서는 나이를 초월한 막역한 친우 사이셨사옵니다. 선왕께서 가끔 답답한 속내를 꺼내 보이신 일이 이번 일을 도왔사옵니다. 아버지께 털어놓으신 선왕 전하의 사담이 아니었더라면, 소신도 저들처럼 만호 나리를 오해하고 있었을 것이옵니다.”
“만호의 몸은 어떻던가?”
안계희는 오랑캐와의 싸움 중 입은 내상으로 심각한 지병을 얻은 장군이었으나, 조정의 어느 누구도 그가 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선왕은 병사들의 앞에서 강하여야만 하는 장군의 지병이 알려져 아끼는 장군의 자존심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아 했고, 또한 그를 모시는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하여 이제 그만 험하고 척박한 변방을 떠나 도성의 수비를 맡아 달라 청하였으나, 안계희는 선왕의 청을 마다하고 지방의 만호로 자청해서 내려가겠다고 했다. 오랑캐가 없는 지방으로 가, 그곳의 병사를 훈련시키며 그저 남은 일생을 조용히 지내고 싶어 했다.
“그간 지방에서 몸과 마음을 편히 하고, 꾸준히 약방문을 처방받으시어 무탈하다고 하옵니다. 소신이 뵙기에도 혈색이나 풍채가 좋아 보이셨사옵니다.”
“그래, 다행이군. 내 먼 길을 다녀온 자네를 좀 쉬게 하고 싶으나 자네가 비밀리에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네.”
“무엇이옵니까? 하명만 하여주시옵소서.”
“그것이, 내 근자에 의문이 하나 생기었네.”
“무슨 의문 말씀이십니까?”
“의경 세자의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닌 듯해.”
“그것이 무슨!”
도운은 그간 있었던 이야기부터 청과 의경 세자의 공통점, 그리고 청조가 해 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하여, 얼마 전 남현과 함께 청이 그 아이를 직접 만나 확인을 해 보았어. 확실히 검은색까지는 아니었으나, 손톱의 색이 어두웠네. 아마도…… 형님께서 사용하셨다던 그 용초에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어.”
“소신 먼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전하.”
“뭔가?”
“소신 올해 초, 화성에 간 일이 있었사옵니다. 그곳에서 저를 쫓던 추세꾼들을 만나 물길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은 이미 아시고 계실 것이옵니다. 그때 소신이 화성에 간 이유는 세자 저하의 명 때문이었습니다.”
“명이라니?”
재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세자 저하께서 승하하시기 전, 소신에게 용초에 관해 알아보라 하명하셨사옵니다. 허나 소신, 저하께서 승하하시고 경황이 없던 터라 명에 관해 잠시 접어 두고 있었사옵니다. 그러다 작년에서야 초에 대해 간간히 알아보고 있었사온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 초가 화성에서 만든 것이라는 것만 겨우 알아내었사옵니다.”
“화성에서?”
“예, 소신이 알아본 바로는 오직 저하께서 사용하시는 용초만 화성의 것을 따로 사용하고 있었사옵니다. 그것을 알아내는 데만 오랜 시일이 걸렸사옵니다. 그 점이 하 수상하여 소신이 직접 초를 만든 이를 찾고자 화성을 찾게 되었습니다. 소신이 화성으로 떠난 며칠 뒤,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소신이 누명을 피해 도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이옵니다.”
“허면, 초를 만들던 이는 찾았는가?”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물어물어 그가 사는 마을을 찾아갔으나, 몇 해 전 사채를 쓰고 야반도주를 하였다는 말만 전해 들었사옵니다.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필시 저하께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신 듯하옵니다. 그러니 저에게 그런 하명을 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재환의 말이 옳았다. 필시 형님께서는 무언가 의심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허나, 그 의심을 다 풀기도 전에 허무하게 가 버린 것일 테지. 도운은 재환이 풀어 놓은 정보를 하나하나 반추하였다.
“사채를 쓰고 도주를 하였단 말이지. 몇 해 전인지 확실히 아는 바가 있느냐?”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략 여섯, 일곱 해 전이라 들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청조에게 물어야겠다.”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청조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장인께서는 화성에서 꽤 이름난 의원이라고 하셨다. 집안에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고약이 종기에 그 효험이 좋다 하여 먼 곳에서도 찾아올 정도라 하였네. 그 고약을 판 금액만으로도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하였었지. 거기에 의술이 좋아 약방이 늘 병자로 넘쳐난다 하였어. 한데, 청조의 나이 열여섯에, 그러니까 정확히 여섯 해 전이다. 그때 장인이 물에 빠져 시체로 돌아왔다 하였네. 한데 장인이 익수사한 이유가 갚지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고리대금을 끌어 썼기 때문이라 하였네. 그를 비관한 자살이라 하였다.”
도운의 말에 재환은 혼잣말로 ‘고리대금’을 중얼거렸다.
“병의 원인이 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장인은 여섯 해 전 고리대금 때문에 자살을 하였고, 형님께서 사용하던 용초를 만들던 자는 여섯 해 전 고리대금 때문에 야반도주를 하였다? 이상하지 않느냐.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딱 들어맞는 것이 한둘이 아니야. 당장 청조를 만나야겠다. 따라오너라.”
도운의 갑작스런 명에 재환은 엉거주춤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를 따라 궁으로 향하는 길, 청조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었는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보기가 너무나도 겁이 났다. 상반된 두 마음에 재환은 세차게 뛰어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전하, 소신 전하께 감히 사사롭게 묻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소신의 질문을 허하여 주시겠사옵니까?”
“허한다면?”
“주막에서 세간에 떠도는 추문을 들었사옵니다. 전하께서 밤마다 수련재 담을 넘으신다는, 그 추문 때문에…….”
“그대가 걱정하는 것이 청조냐, 아니면 추문에 휩싸인 그대의 누이냐?”
군더더기 없이 정곡을 찌르는 도운의 질문에 재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것을 느낀 도운이 뒤를 돌아섰다.
“청조는 나만의 여인이다. 과인의 지어미고, 내자고, 은애하는 단 한 명의 여인이다. 그러니 너의 그 마음은 접어라. 평생을, 아니 억겁의 시간을 기다린다 하여도 보답 받을 수 없는 허망한 마음이니라.”
“억겁의 시간을 기다려 다시 태어난다면, 소신 전하보다 먼저 그 여인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불충한 줄 알면서도 재환은 도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눈이 청조를 향한 절실함과 도운에 대한 반항으로 한데 뒤엉켜 날카롭게 빛났다.
“그럴 수도 있을 테지. 허나, 먼저 찾아낸다 하여 그 여인의 마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남녀 간의 은애하는 마음이란 순번을 기다리는 그런 것이 아니야. 그런 것으로 치자면 내 여인은 지금의 중전일 테지.”
“소신, 자신 있사옵니다. 소신을 먼저 만났더라면, 분명 지금쯤 여인이 바라보는 사내는 바로 저였을 것이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청조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게.”
코끝으로 재환을 한껏 내려다보는 도운의 눈썹이 여유를 담고 거만하게 호를 그리고 있었다. 입술 끄트머리는 넘치는 자신감에 위로 한껏 올라가 있었다.
“설령 자네를 먼저 만났다 하더라도, 자네가 일국의 왕이고 내가 한낱 백정이었다 하더라도. 설령 청조가 자네와 혼인을 한 사이였다 하더라도 말이야. 결국, 청조는 나만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야. 나와 청조의 의지가 결국 우리 둘의 운명을 바꿔놨을 것이네.”
재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작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눈빛에는 저와 같은 욕심이나 조바심이 전혀 없었다. 그저 곧고 한없이 깊었다. 여인을 차지한 사내는 이미 온 세상을 다 가지고 있었다. 이미 세상을 다 가진 사내의 넘치는 자신감에, 욕심이라는 작고 하찮은 감정 따위, 더 이상 그의 마음에 들어갈 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더 이상 무엇을 탐내리.
어둠에 싸여 한없이 불안하기만 하던 사내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어둠을 깨고 나온 강한 사내 앞에 결국 재환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추문에 대해서라면 걱정 말라. 조만간 해결할 것이다. 저 꼴 같지 않은 것들의 면상이 곧 엉망으로 구겨질 것이니, 더 이상 청조에 관해 걱정은 하지 말게. 이 이상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강한 경고를 남긴 도운은 궁을 향하여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남현은 패배자의 모습으로 남겨진 재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재환은 고개를 돌려 반듯한 남현을 마주 보았다.
자신을 이해한다는 듯, 자애롭게 웃고 있지만, 그는 모를 것이다. 제 마음속의 어둠을.
권세 높은 사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아끼는 누이가 이 나라의 국모가 될 이였고, 세자시강원에 속해 있던 존경하는 형님은 문학에 제수되어 공적으로는 세자 저하의 스승님이었다. 저 또한 어린 날 세자 저하의 예동으로 간택되어 사사롭게는 세자 저하의 동무이자 매제의 관계였다.
아쉬움이 무엇인지 참으로 알지 못했었다. 무엇이 부럽고, 손에 쥐지 못할 것이 과연 무엇이 있었겠는가. 고고한 선비이자, 강건한 무인으로서 내 자신을 다룰 수 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기에, 의지가 박약하여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왕을 저도 모르게 깔보았다.
허나, 왕의 옆에서 그만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 오직 그만을 향해 쏠려 있는 몸짓을 바라보는 이 순간, 사람들이 왜 어둠에 휘둘리는지 알 것 같았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다고 단 한 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기에 처음 느껴보는 상실감은 더욱 견디기 힘들 만큼 저를 무겁게 짓눌렀다.
사람의 마음에는 모다 틈이 있었다. 그 틈 건너편에서 몸을 웅크리고 시기를 가늠하고 있던 괴물 같은 어둠이, 그 틈을 비집고 언제든 자신을 삼키려 기다리고 있었다.
코끝까지 다가온 어둠을 느낀 재환은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감았다. 꽉 쥔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하여 축축하였다. 휘둘려선 안 된다. 괴물과 눈이 마주쳐선 안 된다. 눈을 꼭 감았던 재환은 눈을 바로 뜨고 청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은 저를 만난 반가움에 미소를 담뿍 짓고 있었다. 오매불망 찾아다니던 서방을 만난 여인의 얼굴에 전과 같은 고단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면의 빛이 흐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자신은 태어나서 이토록 고결하리만치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간 강건하셨습니까? 나리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소인이 한참을 걱정하였습니다.”
“예, 무탈하였습니다. 저 또한 이리 무탈하신 모습을 뵈오니 참으로 기쁘옵니다.”
“어인 존대이십니까?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이제는 전과 같지 않으십니다. 왕의 여인이시니,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받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청조에게 하는 말이었고, 자신을 향해 하는 일침이었다. 왕의 여인, 다른 사내의 여인,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는 여인 그리고 저를 보지 않는 여인. 재환은 청조를 향해 예를 다하여 고개를 숙였다. 아픔을 감내하는 재환의 미간이 보이지 않게 일그러졌다.
“허나…….”
“그만하거라, 청조야. 네가 그럴수록 저이의 입장이 난처할 뿐이다.”
도운의 부드러운 타박에 청조의 마음이 어지러웠다. 요즘 들어 저를 둘러싼 주위가 변해 가고 있음을 점점 느끼고 있었다. 관계의 변화 속에서 작은 혼란을 느낀 청조는 도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모든 혼란 속에서도 자신을 굳건히 지킬 수 있도록, 늘 자신의 지표가 되어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래, 모다 변해도 상관없었다.
서방님만 곁에 계신다면 거지패가 되어 떠돌아다녀도 좋고, 대풍창 병자가 되어 평생을 쫓겨 다녀도 좋았다. 무엇이 되던 그저 서방님의 내자로만 살 수 있으면 되었다. 혼란을 갈무리한 청조는 다시 재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재환에게 예를 다하여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그간 소인이 나리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리가 아니 계셨다면 소인이 어찌 지금까지 살아남아 서방님을 뵈었겠습니까. 진심으로 감읍하옵니다. 허니 이제 고개를 드소서.”
바닥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입을 앙다물었던 재환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청조를 바라봤다.
“앞으로도 충심을 다 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나리.”
앞으로도 지켜 드릴 것입니다.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청조만 알지 못하는 많은 뜻이 담겨 있는 그의 대답에 도운과 재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 너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 들렀다. 장인에 관한 일이다.”
“소첩의 아버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장인께서 고리대금을 쓰셨다 하였지? 왜 썼는지 알고 있느냐? 그리고 그 대금을 누가 내어 주었는지 소상히 알고 있느냐?”
“그것까지는 잘…….”
“허면, 그날 일을 소상히 말해 보거라. 아버님께서 강에 투신하시는 것을 직접 본 자가 있느냐?”
어딘지 모르게 다급함이 서려 있는 도운의 질문에 청조는 그날의 일을 곰곰이 되짚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직접 본 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투신하신 아버지를 발견하신 분이 아버지의 오랜 친우셨습니다. 그분이 아버지를 발견하시어 들쳐 업고 집까지 뛰어오셨는데…… 그때 이미 검붉은 얼굴로 변하신 아버지께 맥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도 정갈하신 분이시라, 주검으로 돌아온 얼굴마저 어찌나 깨끗하고 평화로우신지…… 울긋불긋하니, 검붉게 변한 피부만 아니었더라면 그저 오수를 즐기시는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청조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남현이 홀로 생각에 잠기는 사이 청조가 말을 계속 이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돌아가시고 경황이 없는 사이, 아버지의 수결이 써진 차용증을 든 사내들이 들이닥쳤고 바로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업고 왔다는 오랜 친우에게 도움을 청하여 보았느냐? 그라면 아마 너를 도와주었을 터인데.”
“그러려고 하였는데…… 겨우 식솔들을 추스르고 찾아뵈었을 때는 이미 화성을 떠난 뒤였습니다.”
“갑자기? 그자가 왜 갑자기 화성을 떠났느냐?”
“듣기로는 그분 역시 고리대금을 쓰고 계셨고, 빚을 갚지 못하여 밤새 도망을 쳤다 하였습니다.”
청조의 말에 도운, 재환, 남현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혹, 장인의 그 친우라는 자가 등촉을 만드는 일을 하였더냐?”
“예, 서방님께서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듯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청조에게 도운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 등촉을 만드는 이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바를 말하여 보거라.”
“음…… 소첩의 아버지께서 화성에 정착하시고 몇 년 되지 않아 그 댁 아주머니가 좀 편찮으셨다 합니다. 하여 아버지께 진맥을 받으신 일을 계기로 두 분이 친분을 쌓으셨습니다. 가끔 소첩의 사가에도 들리셨는데, 간혹 엿가락이나 당과를 가져다주시곤 하셨습니다. 변고가 있을 때쯤 아주머니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아버지께서 몇 번 왕진을 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혹여, 사고 날에도 서 의원이 왕진을 갔었습니까?”
“어디를 가신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출타하실 적 왕진에 필요한 도구를 챙기어 나가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늘 소인이 챙겨드리던 것이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런 것을 물어보시는 것입니까?”
심각한 사내들의 표정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청조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질문에 대답을 해 주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청조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쉽지 않은 대답이 되어 버렸다. 등촉제작자와 서 의원이 막역한 친우였다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청조의 아버지가 이 일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매우 불미스럽게. 청조의 불안하고도 간절한 눈빛에 도운은 자신들이 의심하는 바를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청조의 두 손이 덜덜 떨리자, 도운은 청조의 손을 꼭 잡고 어깨를 감싸주었다.
아까부터 청조의 말에 의아한 점을 느끼던 남현은 이 순간 자신이 느끼는 의문점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왕의 여인이 받게 될 충격이 걱정돼 입을 꾹 다물고 진중하게 기다렸다.
“그 말씀은 제 아버지께서…….”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닐 것입니다.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서방님.”
“그래, 안다.”
아니다. 아버지는 절대 아닐 것이다. 세자 저하의 죽음에 관련되실 리가 없다. 서방님의 형님께 위해를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분이 아닌 것을 누구보다 딸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왜인지 손끝이 자꾸만 떨려왔다. 불안하게 떠는 청조의 모습에 결국 남현이 입을 열었다.
“전하, 사실 소신에게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송구하오나, 아씨께 먼저 여쭙겠습니다. 조금 전 돌아가신 서 의원의 얼굴이 깨끗하였다 하셨습니다. 허고 그 얼굴색이 검붉다 하셨습니다. 맞으십니까?”
“예, 그리 말하였습니다.”
“확실한 것입니까?”
“예, 확실합니다. 그것은 제가 정확하게 기억하옵니다. 왜 그러십니까?”
창백하게 대답하는 청조의 말에 남현의 어두운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왜 그러는가?”
“이상한 점이 있사옵니다. 소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아마도 서 의원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일지도 모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대체로 익수사한 주검은 입과 코에서 하얀 물거품이 나오기에 그 얼굴이 그리 깨끗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본능적으로 급히 숨을 들이마시다 물을 함께 들이켜 그런 것이옵니다. 들이켠 물은 사후에 코로 빠져나오는데, 이때 콧속에 남아 있는 점액질과 섞이어 자잘한 흰 거품으로 부푸는 것이 그 이유이옵니다. 허고, 주검의 피부가 검붉었다 하신 것이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대체로 주검의 얼굴이 검붉은 것은 익수사가 아니라…….”
저를 빤히 쳐다보는 청조의 불안한 눈동자에 남현은 말을 흐리곤 잠시 머뭇거렸다.
“바로 교살이옵니다.”
“예?”
청조의 얼굴이 쌀뜨물보다도 하얗게 질리어 갔다.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머릿속이 윙윙거려 비틀거리자 도운은 청조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새하얀 얼굴로 도운의 품에 쓰러지는 청조를 보자 재환은 저도 모르게 들썩이던 엉덩이를 겨우 바닥에 다시 눌러 앉혔다.
“그것이 정말인가?”
“예, 전하. 신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하옵니다. 허나 이는 시신의 얼굴색을 관찰하여 그 사인을 파악하는 검시의 가장 기본이고 일반적인 규명방법에 따른 것이옵니다. 흔히 교살로 죽은 이들의 얼굴은 혈이 머리로 몰리며 면부의 색이 검붉은 색을 띠옵니다.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아마 교살 후 그 죽음을 은닉하려 익수사로 위장한 듯하옵니다. 익수사로 죽음을 위장한 점이나, 서둘러 식솔들에게서 재산을 빼앗고 거리를 내몰았다는 점이 영 수상하옵니다. 필시 무언가 알아선 안 되는 것을 알아낸 서 의원의 입을 막고자 한 정황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확신하는 남현의 말에 청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진정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억울하실까.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를 읊조리는 청조의 꼭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등촉제작자를 찾아야 사건의 단초라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이는 겨우 등촉을 만드는 이가 행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야. 그자가 갑자기 사라진 것도 하 수상하고.”
“예, 소신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모든 정황을 따져봤을 때, 그 배경에 아마도 한 내관이 있지 않겠사옵니까?”
“과인의 생각도 자네와 같네.”
“소신, 사람을 풀어 은밀히 등촉제작자의 행적을 찾아보겠습니다만, 혹 증좌를 지우려는 한 내관이 그를 이미 처리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옵니다.”
도운과 남현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청조가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도운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뭐?”
“소첩이 보았습니다. 분명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아저씨라니? 등촉제작자 말이냐?”
“예, 예. 소첩이 도성에 들어와 옥류관을 찾아가는 길, 분명 저자에서 아저씨를 봤습니다. 질이 좋은 비단 의복에, 그만큼이나 질이 좋은 흑립을 쓰고 소첩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소첩이 아저씨를 불렀으나, 인파에 밀려 잡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보냈습니다!”
말을 마친 청조가 눈물을 쏟아냈다. 어쩌면, 어쩌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일지도 모르는 이를. 아버지께서 왜 돌아가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눈앞에서 그렇게 놓치다니. 그런 것도 모르고, 좋은 옷을 입고 신수가 훤해 보인다며 다행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느냐. 이 어리석은 청조야. 억울하고 원통하여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그자가 도성에 있다면 소신이 알아보겠습니다. 혹시라도 아직 등촉을 만들어 팔고 있을 수도 있사옵니다. 소신이 도성에 들어올 적 도움을 받은 상단이 있사옵니다. 그 상단 행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자네의 뜻대로 하게. 이른 시일 내에 꼭 찾아내야 하네, 꼭.”
“예, 전하.”
“내금위장은 믿을 만한 수하를 시켜 한 내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보게. 그자가 어찌 궁으로 들어왔는지, 궁에 들어오기 전 행적과 식솔은 누가 있는지 소상히 알아보게.”
“예, 전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명을 마친 도운은 품에 안겨 우는 청조를 보듬으며 눈짓으로 사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 우는 청조를 아픈 듯 바라보던 재환은 가까스로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런 눈으로 그분을 보지 말게. 그래선 아니 돼!”
“예, 압니다.”
“후우, 마음을 비우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야. 마음을 비우고 집안을 생각하게. 멀리 유배를 떠나신 아버님, 혜빈마마, 형님들, 관의 노비가 된 식솔들!”
“예, 압니다!”
입술을 짓이기며 대꾸하는 재환의 모습에 남현은 또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하께 유감이 있다는 거, 내 잘 알고 있네. 자네의 집안이 그리 풍비박산 났으니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코 주군을 원망하거나, 주군의 여인을 마음에 품어서는 아니 돼. 지금까지 자네의 불손함을 봐주신 그분의 아량과 은혜에 감사해야 할 걸세.”
“아량이라 하셨습니까? 제 집안을 그리 만드신 분의 은혜라고 하셨습니까?”
“이것만은 알아두게. 그것은 역모였네. 실제 역모가 아니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자네의 집안은 권력 다툼에서 진 것이야! 역모에 연루된 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자네도 잘 알 거야. 그나마 사약을 받는 것이 편안한 죽음이지, 목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망나니의 무딘 칼이 자네 식솔의 목을 썰어 댈 수도 있었어. 자네 집안이 비록 풍비박산이 나긴 하였으나, 멸문지화를 당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당장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여러 대신의 주청에도 뜻을 꺾지 않으시고 유배를 보내셨네. 결국, 권력 다툼에서 진 자네의 가문을 지켜 준 것은 전하셨어!”
“예, 알고 있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재환이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목소리가 담장을 넘길 수 없기에 억누른 목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그것을 아니 더 미칠 노릇이 아닙니까? 저도 미칠 것 같습니다. 허나 어찌할 수 없는 이 마음을 어찌 자꾸 비우라고만 하십니까?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을.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막을 틈도 없이 순간이더니, 아무리 노력해도 비우는 것은 그렇게 아니 되더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재환의 주먹을 본 남현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 힘든 것이었다. 어릴 적엔 몰랐다. 그저 손에서 피가 나도록 목검을 휘두르고 몸을 단련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었다. 잠시 농땡이를 치다 걸렸을 때, 회초리를 치시던 아버님께서 저를 향해 못난 놈이라 꾸중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에 제일 쉬운 일도 못 하는 못난 놈이라고, 그리 말씀하시는 아버님이 야속하였었다. 한데 살아보니 아버님의 말씀은 모다 사실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훈련하는 일만큼 단순한 일이 없었다. 몸을 혹사하는 것은 그저 고단함이었지만, 정신을 혹사하는 것은 피폐함이었다.
축 처진 젊은 사내의 뒷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섬돌 아래에서 제 주인의 밤을 지키는 남현은 끊임없이 한숨을 쉬었다.
* * *
근정전에 쭉 줄지어 서서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통촉을 외치는 조정 신료들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턱주가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여러 대신이 외치는 소리가 근정전에 가득 울렸다. 하지만 대신들의 호소에도 도운의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이대로는 아니 되십니다, 전하. 나라 안팎으로 추문이 가득한 이때에, 어찌 행동에 무게를 두지 않으시옵니까?”
“무엇을 말이오?”
“새벽달이 물러가자마자 수련재에서 나오시는 전하를 본 눈들이 한둘이 아니옵니다. 궁궐의 나인들과 내관들이 모다 보았다 하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사옵니까! 이는 나라의 종묘사직이 흔들리고 국본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옵니다.”
“과인이 수련재에서 나오는 일이 어찌 국본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인가?”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입에 담으시옵니까? 수련재가 어디이옵니까? 사사롭게는 전하의 형수님 되시는 분이시고, 역적의 딸로서 그 죄를 받아 감금된 죄인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런 분께서 머무르는 수련재를 밤마다 찾으시다니요! 너무나도 망극한 일이옵니다!”
“국혼을 올리신 지 벌써 두 해가 지났사옵니다. 아직까지도 후사를 생산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이미 사직에 큰 우환을 끼치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때에 수련재에 발걸음을 하시다니요. 백성들의 눈이 왕실을 지켜보고 있사옵니다. 백성들에게 본을 보여야 할 왕실이 나서서 패륜을 조장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하하하, 늙은 대신의 말에 갑자기 도운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도운의 뻔뻔한 모습에 조정 신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패륜이라 했소?”
“예, 전하. 아무리 천자는 무치라고 하나, 형수를 탐하는 일은 패륜이옵니다.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를 생각하시옵소서. 수련재에는 발걸음을 일체 끊으시고 후궁을 들이심이 마땅히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후궁이라.”
“예, 전하. 후궁 간택령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하루라도 빨리 후사를 생산하시어 종묘사직을 굳건히 하셔야 할 때이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저마다 통촉하여 달라 입을 모으는 대신들 사이에 익태가 꼿꼿이 서 있었다. 얼마 전부터 등청하기 시작한 익태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 있었다.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익태의 표정을 보는 도운의 눈빛은 차가웠으나 입은 즐거움으로 웃고 있었다.
“후궁을 들이라? 그럼 삼간택에서 탈락했던 여인들을 들이면 되지 않겠는가? 굳이 후궁 간택령까지야 내릴 필요가 있겠는가?”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여인들 중 하나는 얼마 전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떠난 전 우의정 강상식의 여식으로 지금은 관비의 신분이옵니다. 하여 이조참판의 여식 한 명이 남아 있을 뿐이옵니다. 한 분의 마마로는 절대 부족하다 사료되는 바입니다. 두 해간 후사가 없으셨으니, 가능성을 많이 열어 두어야 하옵니다. 그러니 후궁 간택령을 내리시어 몇 분의 후궁 마마를 들이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흥, 욕심만 많은 것들. 암, 각자 다른 꿍꿍이가 있으니 하나로는 부족하겠지. 앞다투어 자신들의 여식을 궁에 들여보내려는 모양새가 참으로 우스웠다. 헛물켜고 있는 모양새를 바라보는 도운의 눈이 즐거움으로 빛났다. 즐거움이 가득한 도운의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근정전에 가득 울렸다.
“그래, 경들 중 누가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고 싶소? 다를 가감 없이 말해 보시오. 평생 동안 여식을 처녀로 늙어 죽일 후궁 자리가 탐나는 이가 누구요? 딸자식을 이용하여 혹시라도 세를 얻고 싶은 자가 누구냔 말이요?”
“그것이 무슨…….”
“내 침소에 베갯머리송사를 하라며 제 딸을 밀어 넣고 싶은 대신이 누구누구냐 물었습니다. 가감 없이 말을 하라는데 왜 대답들을 못 하시오.”
이죽거리는 왕의 말에 여식을 가진 늙은 대신들의 얼굴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진 자들이 있는 모양인데, 아직 소문들 못 들었소? 저 교태전의 주인인 중전이 아직 처녀라는 소문. 그것 참 이상하군. 내 어젯밤을 수련재에서 보낸 사실은 모르는 자가 없는데, 두 해 동안이나 중전의 머리를 올려 주지 않은 사실은 어찌 아무도 모르고 있었소? 이 몸이 밤마다 소환을 불러 앉혀놓고 밤새 주물럭거리더라 하는 소문도 다 알고 있는 경들이 말이오. 이건 뭐, 누군가가 과인의 추문만 따로 골라 퍼뜨리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비릿한 웃음을 가득 지은 도운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부산거리는 대신들을 쭉 바라보다 익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 아끼는 누이를 대신들 앞에서 욕보이는 왕의 언사에 익태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도운은 익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한데, 경들의 말이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중전의 몸이 아직 처녀인데 후사를 어찌 생산하겠소. 당연한 것을 두고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는 것은 무슨 논리인지 과인은 정녕 모르겠단 말이지. 쯧쯧.”
“전하, 중전마마와의 합방이 기껍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더욱이…….”
“글쎄요, 평생을 독수공방하게 될 경들의 여식들 역시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인데 중전과의 합방이 기껍고 아니고가 무슨 문제이겠소. 과연 여식들이 후사 하나 없이 처녀 귀신마냥 늙어 갈 때에도 이리 걱정하며 또 다른 후궁을 들이자 말을 할 것인지, 과인이 참으로 궁금하오. 뭐, 과인은 상관없으니 얼마든지 천거를 해 보시오. 궁에 들어온 이상 과인이 굶겨 죽이진 않겠소.”
“전하, 그 무슨 무책임한 말씀이시옵니까? 혹여 성후에 문제가 있으신 것이라면…….”
“문제? 무슨 문제 말인가? 사내로서의 구실을 걱정하는 거요? 아, 맞소. 추문에 관해선 모르는 것이 없는 경들이었지. 과인이 저 내관 놈들처럼 양물이 없다고 떠들어대는 소리나, 또 사내로서 불구라던가 하는 추문을 경들이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그런 걱정이라면 이제 접어두시오. 경들도 알다시피, 근자에 수련재를 날마다 찾아 힘이 닿는 대로 노력하고 있으니.”
이야기가 돌고 돌아 수련재로 돌아가자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수련재를 찾아 힘이 닿는 대로 노력을 하고 있다니, 이는 무슨 뜻이겠는가. 정녕 임금이 스스로의 패륜을 시인하고 있음이 아닌가.
“전하! 어찌 그런! 패륜이시옵니다! 하늘이 보고 계시옵니다! 제발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패륜?”
“예, 전하.”
참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다는 듯 소리 높여 웃는 도운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울리자, 대신들의 이마에 보이지 않는 줄이 갔다. 미치광이 같은 왕의 모습이 참으로 불쾌했다. 대신들의 기분 따윈 아랑곳없이 어깨를 들썩대며 한참을 웃던 도운이 갑자기 무섭도록 정색을 하였다.
“이것들 보시오. 수련재에 여인이 혜빈마마 하나뿐이오? 쯧, 사대부라 하는 이들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찌 이리 천박하고 음탕할 수가 있는가! 정신들을 차리시오! 감히 과인을 능멸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찌 함부로 패륜을 입에 담는가! 한 나라의 대신들이란 사람들이, 성리학을 숭상한다는 이들이 추문 따위에나 휘둘리는 추잡한 꼴이라니, 쯧. 경들의 생각이 이리 가벼워서야, 과인이 과연 누굴 믿고 사직을 논하고 바른 치세를 펼친단 말인가! 모다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간다 해도 감히 과인을 우롱한 그대들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근정전이 떠나가라 쩌렁거리는 도운의 호통에 대신들은 한순간에 얼어 버렸다. 충격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소, 소신들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오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흥, 과인을 일러 형수를 탐하는 패륜아라 부르짖으면서, 그런 패륜아에게 여식을 받아 달라 주청을 올리는 경들은 과연 스스로를 아버지라 할 수 있는가? 대체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패륜이나 일삼는 미치광이에게 여식을 못 주어 이리 안절부절못하는가 말이다! 음흉한 속셈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그…… 그것이.”
“양심들이 있다면 더 이상 경들의 여식을 후궁 삼아 달라 주청을 올리지 못할 것이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전하, 부디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경멸하는 듯 자신들을 바라보며 던진 왕의 일갈에, 대신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허를 찔린 기분에 말을 잃었다. 반면, 도운은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서 있는 익태를 보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다.
연한 살을 가진 작은 동물을 희롱하며 사냥하듯, 도운은 능글맞게 웃어대며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조만간 내 그이를 정식으로 맞이하려 하였거늘, 경들이 후궁을 맞이하라 그리 간절히 주청을 하니 내일 당장에라도 그이를 맞이해야겠소.”
“전하, 혹 궁녀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왜? 이번에는 또 뭐가 아니 된단 말인가?”
“그것이…….”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궁의 여인은 모다 주상의 여인. 그중 한 궁녀를 취하였다면 흠이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주상은 천자이고, 천자는 무치가 아니던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며 우물거리는 대신들 사이에서 익태가 목소리를 높였다.
“송구하오나, 전하. 마음에 두신 궁녀라면 승은을 내리시어 궁관 후궁 정도의 작호인 숙원이나 소원의 품계를 내리시면 되는 일이옵고, 후궁 간택령은 빈의 품계에 걸맞은…….”
“궁녀가 아니라, 내 조강지처요.”
말허리를 자른 도운이 조강지처라는 말을 입에 올리자, 이제껏 분을 참으면서도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익태가 도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과인의 조강지처란 말이오. 과인이 아직 산에서 생활할 적 배필 삼았던 이요.”
“산에서 생활하실 적,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신 적이 없사온데 어찌 그 여인을 가리켜 조강지처라 칭하시옵니까? 조강지처는 응당 지금의 중전마마이지요. 품계가 그러하고 신분이 그러하옵니다. 반상의 법도가 그러하옵고, 처첩의 구분이 분명하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여인은 중인의 신분으로 예나 지금이나 그저 첩실밖에 될 수 없사옵니다.”
타오르는 듯 붉은 눈을 한 익태는 도운을 향해 단호히 소리쳤다. 감히 불경스러울 정도로 부릅뜬 눈빛이었다. 허나 맞받아치는 도운의 눈빛은 더욱 매섭고 더욱 날카로웠다.
“중인의 신분이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인가? 일찍이 원경왕후 역시 역관 출신인 중인 가문에서 나오셨고, 선대왕이셨던 명종을 낳으신 경빈께서는 무수리 출신이 아니시던가. 또한, 외적인 신분이 그러한들, 과인이 몸과 마음을 내준 단 하나뿐인 여인이니 조강지처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정식 혼례가 문제라면, 그거야 이제 치르면 되는 문제 아닌가.”
부들거리는 익태가 거친 숨을 내쉬는 것이 어좌에 앉아서도 다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통쾌한지 도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다들 들으라! 과인이 궁에 들어올 적, 누군가의 간계로 내 그이와 헤어졌었다. 그 후, 과인의 처가 과인을 찾아 지난 두 해 동안 온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겨우내 북풍한설을 뚫고 걸어 다닌 발톱이 몇 번이나 빠져 피가 날 정도로 온 나라를 헤집고 다녔다. 그런 여인을 발정 난 개새끼마냥 그 누군가가 겁탈하려 하였다지?”
겁탈이라는 단어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내 일찍이 내 처에게 은애의 정표로 준 은장도가 있었다. 그 은장도로 너를 해코지하려는 종자 새끼가 있거든 눈을 찔러라 단단히 일러 주었더니, 기특한 이가 내 일러준 대로 은장도를 휘둘러 눈을 찔렀다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빗나가 그 후레자식 놈의 관자놀이를 길게 찢어놨다지. 이제 보니 그 모양새가 꼭 지금의 도승지, 자네가 가지고 있는 상흔과 비슷하구나.”
도운의 도발적인 말에, 대신들이 너도나도 익태의 관자놀이에 길게 난 상흔을 훔쳐보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놈이 내 처를 죽기 직전까지 고신하였다! 경들은 말해 보라! 행방불명 된 지아비를 찾아 두 해라는 긴 시간 동안 전국을 걸어 다니고, 죽기 직전까지 맞아가면서도 정절을 지킨 과인의 여인을 겁간하려 한 파렴치한을, 과연 과인이 어찌하면 좋겠는가!”
아무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둘의 대화를 미루어 볼 때 사건의 진의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자라 해도 왕과 도승지, 둘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모를 정도로 둔감한 이는 없을 것이다.
“정식 혼례가 문제라 하니 닷새 후, 가례(嘉禮)를 갖추어 과인의 조강지처를 제대로 맞이할 것이다. 과인의 은애하는 하나뿐인 지어미이자 앞으로 생산될 세자의 모후가 될 것이니 품계는 마땅히 중전이어야 한다. 허나 엉뚱한 이가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내명부 정일품인 빈에 봉한다. 서쪽의 별궁인 낙성당을 그이의 처소로 지정하며 그 궁호를 새로 내리니, 과인의 은애하는 마음을 오롯이 담아 애류당(愛留堂: 사랑이 머무르는 집)이라 할 것이다. 만인의 귀감이 될 곧은 절개를 지닌 여인이자 왕의 단 하나뿐인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최고로 준비해야 할 것이니, 가례색(嘉禮色: 가례에 임하여 두는 임시 관아)에서는 이를 똑똑히 유념하고 진행케 하라!”
엉뚱한 이가 중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너무나도 모욕적인 언사에 부들부들거리면서도 익태는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저놈이…… 다 알면서 그년을 이제껏 제 지붕 아래 감추고 있었단 말이지. 다 알면서.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도 익태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도 넘은 임금의 도발적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익태뿐만이 아니었다.
겨우 중인의 신분으로 왕실 행사인 가례까지 치르다니. 그저 하룻밤 승은으로 작호만 내리면 될 것을, 빈이라니. 궁관 후궁이나 될 수 있는 중인의 신분에, 정식 후궁에게나 내려질 수 있는 빈의 품계라니. 후궁의 첩지를 내리는 일은 엄연히 내명부의 소관인데 왕께서 직접 명을 내리시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심중에 불만이 쌓이고 있었지만, 왕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험한 산에서 지아비를 물심양면 봉양한 여인, 행방불명된 지아비를 찾아 전국을 떠돈 여인, 맞아 죽을 위기에서도 절개를 지킨 여인이었다. 열녀문을 세워줘도 모자랄 것이 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한낱 범부의 여인이 아닌 왕의 여인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진 않았으나, 그런 여인을 겁간하려던 자가 도승지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괜히 이의를 제기했다 도승지의 추행까지 드러난다면.
다 같이 뜻을 모아 제 여식들을 후궁으로 만들려던 자리가, 자신들의 뜻을 위해 겨우 잡은 꼬투리로 추문까지 퍼뜨렸는데,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더니. 괜히 후손 생산을 빌미로 후궁 간택령을 거론했다 일개 중인의 여식을 빈으로 봉하게 할 빌미까지 만들어 주었다. 으흠흠, 불만 섞인 헛기침을 내뱉으면서도, 한 내관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2권 끝. 다음권에 계속>
구름을 비추는 새벽 2권
ⓒ 2017, 5月 돼지
이 책은 (주)북팔이 작가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의 서면 허가 없이는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발행일 2017년 12월 22일
지은이 5月 돼지
펴낸이 박대령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년 3월 25일
홈페이지 novel.bookpal.co.kr
블로그 blog.naver.com/bookpalbooks
작가 소개
필명 5月 돼지
봄부터 여름, 특히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빠져나가는 순간이 제일 좋은 작가. 그런 계절 아래, 아이스 커피 한 잔이면 하루가 행복합니다.
책 소개
구름을 비추는 새벽
나의 어둠을 밝히는 너,
“청조야, 나를 이리 홀로 두고 도대체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연이은 흉년, 하루 끼니조차 해결하기 쉽지 않은 청조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의 사내가 찾아와 첩의 자리를 주선한다. 어머니의 약값과 아우들의 생계를 위해 결심을 한 청조는 낯선 사내를 따라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앞으로 함께 할 서방님을 만나지만... 온통 비밀투성이에 검은 복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내, 도운은 청조를 욕정받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능욕한다.
목차
3권